* 자기 전 단편 하나 더 올립니다.
* 카라마츠가 아픈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오소마츠가 좀 바보에 약합니다.
* 이렇게 길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ㅠㅠ
* 공미포 18,639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아-, 심심해~
읽고 있던 만화책을 던지고 기지개를 폈다.
매정한 녀석들은 이미 다 외출했고, 집에 남은 건 나 혼자.
게다가 어제 파칭코에서 다 날린 덕분에 돈도 없다.
시간은 넘쳐나는데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가 왔나? 왔으면 횽아랑 좀 놀아줭~
얼굴을 활짝 피고 벌떡 일어나 거실 문을 열자 구두를 벗으려 발을 들어올린 카라마츠와 마주쳤다.
“카라마츄~! 놀아줭~!”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아직 볼일이 끝나지도 않았고. 그저 지갑을 가지러 온 것 뿐이니까.”
“에~?! 조금은 횽아랑 놀아줘도 좋지 않아!?”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가는 카라마츠의 뒤에서 외쳤지만, 카라마츠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분명 놀아달라고 보챈 사람이 내가 아니라 동생들이었다면 카라마츠는 볼일도 미루고 놀아줬겠지.
유일한 형아한테 쌀쌀맞은 카라마츠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주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던져두었던 만화책을 집어 들고 읽으려고 상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라마츠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오소마츠!!”
벌컥 문을 연 카라마츠가 화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아?” 하고 대답하자, 성큼성큼 걸어온 카라마츠가 다짜고짜 내 정수리에 주먹을 날렸다.
“아파!!!”
절대로 머리에 혹 났을 거야, 이거!!
강하게 얻어맞아 딩- 하고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외치자 카라마츠가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자신의 지갑을 눈 앞에 내밀었다.
“내 지갑에서 돈 꺼내간 거 너지!!”
“아.”
어제 남은 용돈이 부족해 카라마츠의 지갑에 있던 돈 전부를 빼내간 것을 기억해내고 눈을 돌렸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나를 보는 카라마츠의 얼굴이 더 험상궂게 구겨졌다.
“오소마~츠?”
“아니~, 내가 어제 쪼~끔 돈이 부족해서! 이거에서 이겨서 배로 갚아주려고 했는데 말이지!”
손을 돌려 공중에서 가볍게 돌리며 말하자, 카라마츠의 이가 뿌득- 하고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히익―, 무셔어~
“갚아라. 오소마츠.”
“에!? 어제 다 털려서 돈 없어!!”
“그래? 그럼 마미에게 말해 다음달 네 용돈에서 빼가지.”
“하아?!?!”
“그런 줄 알아라.”
“잠!! 그럼 내 다음달 용돈 거의 0 입니다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군.”
“하아?!!?”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지만 카라마츠는 콧방귀를 끼고 다시 현관을 나섰다.
돈도 없으면서! 왜 나가는데!?
횽아랑 좀 놀아달라고!
특히 나에게만 차가운 카라마츠를 원망하며 나도 엉덩이를 들어올리고 운동화에 발을 끼었다.
이대로 집에 있어도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돈이 안 드는 재미있는 곳으로 발을 돌렸다.
“이리 오너라~”
불투명한 유리문 앞에서 크게 외치자 자동문이 열리고 메이드 복을 입은 다용이 나왔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의 메이드 복에 순간 토가 나올 뻔 했지만, 어떻게든 참아내고 다용의 안내를 따라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유리잔이 테이블 위에 얹혔다.
데카판 박사는 아직 실험이 끝나지 않아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긴 다용이 실험실로 들어갔다.
다용이 가져온 유리잔 안에는 정체불명의 초록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거, 정말로 마실 수 있는 건가?
수상한 액체를 이리저리 흔들어보았지만, 딱히 뭐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뭐, 마시라고 내왔으니 마실 수 있는 거겠지.
가볍게 생각하며 유리잔의 액체를 입에 머금었다.
“보웨에-!!!”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맛에 바로 바닥에 액체를 뱉어냈지만, 한 모금 정도가 목구멍 아래로 넘어갔다.
“우엑…. 이거 뭐야!?”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유리잔을 저 멀리로 치웠다.
꼭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료수를 짬뽕한 맛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뱃속에 넘어간 한 모금 때문에 배가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에호에, 오소마츠 군.”
돌아갈까, 생각하던 와중에 파란색 줄무늬 팬티만을 입은 대머리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돈 들이지 않고도 시간을 때울 수 있다는 생각에 씩 웃으며 데카판에게 물었다.
“데카판, 뭐 재미있는 거 없어?”
“호에호에, 아직 완성된 발명품은 없다요…. 호, 호에!? 오소마츠 군?!”
“응?”
“이, 이걸 마셨다스까!?”
“응. 다용이 가져다 줘서.”
“호에….”
“어? 왜?”
내가 마셨던 녹색 액체가 든 유리잔을 든 데카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박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오소마츠 군. 이, 이건…”
2.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째 무겁다.
결국 데카판의 연구소에서도 재미있는 건 없었고, 심한 꼴을 당하기만 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데카판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건 아직 실험 중인 약이다요! 아무래도 다용이 잘못 가져다 준 것 같다요.
아직 무슨 효과가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되었으니, 혹시나 무슨 변화가 있으면 연락해야 한다요!”
조금 찜찜한 감은 있지만, 지금까지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남자를 여자의 몸으로 만들어버리는 약까지 만들어내는 괴짜 박사지만, 이번만큼은 실패한 것 같다.
응, 응. 고개를 끄덕이고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눈을 뜨고 양쪽을 번갈아 보아도 인기척은 없었다.
“으음….” 하고 신음하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후암- 하고 하품을 하며 텅 빈 이불을 나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거실을 향해 뻗은 복도를 중간에 있는 주방에 발을 들였다.
“엄마.”
“이제야 일어났니? 백수 1호.”
“…어, 엄마? 머리 위에 그거 뭐야?”
“응? 머리 위? 뭐 묻었어?”
“묻었, 달까…”
엄마의 머리 위를 본 나는 그대로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
평소와 다름 없는 엄마의 머리 위에는 「1122」라는 네 자리 숫자가 떠 있었다.
에―?!
뭐, 뭐야?? 웬 숫자!?
눈을 끔뻑이는 나를 보며 엄마는 “얘가 잠이 덜 깼네. 가서 씻고 오렴.” 하고 내 등을 떠밀었다.
엄마에 밀려 주방을 나온 나는 정말로 잠이 떨 깼나 싶어 재빨리 세면대로 향했다.
“잠이 덜 깼다는 수준이 아니잖아….”
찬 물로 얼굴을 벅벅 씻고 나와도 나를 위한 아침상을 차려주는 엄마의 머리 위엔 여전히 「1122」가 떠 있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벼보아도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뭐야!?
맹렬히 머리를 굴려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 그건가! 데카판의 약인가!!
겨우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벌떡 몸을 일으키자마자, 뱃속에서 “꼬르륵~” 하고 만화 효과음 같은 소리가 울렸다.
일단 밥을 먹자. 다시 상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과 진한 미소시루를 한 모금 먹자마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엄마가 없을 때는 제일 마지막에 일어나는 나에게 남아있는 건 식빵 몇 조각이나 이미 차갑게 식은 찬밥이 다였다.
이렇게 일어나자마자 따끈~한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큰 감동이었다.
“엄마! 역시 엄마 밥이 최고야!!”
본심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엄마에게 전하자, 엄마가 후후- 하고 살가운 웃음을 흘리며 “그래, 많이 먹으렴~” 하고 말했다.
“응!”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고 밥을 크게 떠 입으로 옮기려는 순간,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엄마 머리 위에 떠있던 숫자「1122」가 「1132」로 올라갔다.
에?! 저 숫자 변하는 거야?!
보면 볼수록 도저히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멈췄던 손을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며 빨리 식사를 마치고 데카판에게 가자고 홀로 다짐했다.
밥을 먹자마자 옷을 갈아입은 나는 그대로 데카판의 연구소를 향해 뛰었다.
놀랍게도 엄마 뿐만 아니라 거리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일정 숫자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의 대부분은 「0」이었다.
데카판의 연구소에 도착하자 데카판의 머리 위에도 숫자가 떠 있었다.
데카판과 다용의 머리 위의 숫자는 「15」.
지금까지 오면서 만난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숫자가 떠 있었으며, 변화하기도 한다는 것을 설명하자 “호에-” 하고 내 설명을 듣던 데카판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흐음~.”
“데카판? 이게 뭔지 알겠어?”
“알 것 같다요. 그건 바로 호감도다요!”
“호감도?”
데카판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고 묻자, 데카판이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실은 그 약은 사람의 마음을 알게 해주는 약의 미완성작이었다요. 미완성작이었기에 의도했던 효과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숫자는 그 사람의 오소마츠를 향한 호감도다요.”
말을 마친 박사는 그렇게 위험한 효과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로 설명을 마쳤다.
3.
박사의 추측대로 내게 보이는 숫자는 나를 향한 호감도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인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에는 「0」이 떠 있었다.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결과, 얼굴도 모르는 타인은 「0」, 경마장에서 만났던 친한 아저씨는 「30」, 치비타는 「150」, 토토코는 「35」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었다.
토토코의 호감도가 치비타보다 낮은 거엔 절망했지만, 대체로 친한 친구가 「100~200」정도의 호감도를 가지는 것 같다.
엄마의 호감도가 「1132」이니까, 형제는 그 절반인 「500」정도이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나는 녀석들을 기다리고 있다.
양반다리를 한 다리를 덜덜 떨면서,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들의 호감도가 「500」이 안되면 어쩌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사라지지 않는다.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 않은 이상한 마음이다.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깊은 심호흡을 하고 있는 귀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걸렸다.
타박타박- 복도를 울리는 힘없는 발소리는 분명 이치마츠의 것이었다.
두근대는 심장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거실 문을 응시했다.
“다녀왔습니다.”
“어, 어서 와….”
“오소마츠 형?”
이치마츠가 거실 문을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반대로 돌렸다.
고개를 돌리고 어서 오라는 인사를 하자, 이치마츠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래?”
“뭐, 뭐가….”
“…뭐, 나 같은 쓰레기랑은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겠지만,”
“그런, 거 아냐!”
이치마츠의 말에 재빨리 반격하며 두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돌렸다.
이치마츠를 향해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아직 감은 눈을 뜰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작은 한숨과 함께 이치마츠의 맥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됐어….”
으아~, 이치마츄~~!
정말로 그런 거 아니라고~~
지금 당장 이치마츠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고 싶다.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욕구와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두려움에 갈등하는 동안 또 현관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다녀왔습니머슬~!!”
“쿠헉!?”
이치마츠에 이어 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쥬시마츠는 다짜고짜 나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쥬시마츠의 단단한 머리가 명치에 직격해 비명을 지르며 쥬시마츠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쥬시마츠! 위험하니까 갑자기 달려드는 거 금지!!”
“아이아이!!”
제법 아픈 가슴을 문지르며 주의를 주자 쥬시마츠가 배시시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여간 대답은 잘 해….
그리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 눈 뜨고 봐버렸다, 고.
내 가슴 위에 있는 쥬시마츠와 이치마츠의 머리 위에는 나란히 「550」이라는 숫자가 떠있었다.
500이 넘는 수치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쥬시마츠으~, 역시 횽아는 널 믿고 있었어!!”
“에! 뭠까, 뭠까아~?”
“이치마츄도~!!”
“엣, 아니 별로. 한 것도 없고….”
쥬시마츠와 쥬시마츠의 옆에 앉아있는 이치마츠의 머리를 엉망으로 쓰다듬었다.
쥬시마츠는 활짝 웃으며 내 손길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고, 이치마츠도 얼굴을 살며시 붉히고 내 손을 쳐내지 않았다.
귀~여운 두 동생의 모습에 더 감격하며 “으응~!!” 하고 신음하며 쥬시마츠와 이치마츠를 꽉~ 껴안았다.
“우왓, 기분 나빠. 뭐하고 있는 거야?”
이치마츠와 쥬시마츠와 함께 비비적대고 있는데 토도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언제 돌아왔는지 토도마츠와 쵸로마츠가 거실로 들어오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치마츠와 쥬시마츠에게 용기를 얻은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토도마츠와 쵸로마츠의 머리 위를 살폈다.
토도마츠는 「546」, 쵸로마츠는 「650」의 숫자가 떠 있었다.
드라이 몬스터인 토도마츠도, 항상 내게 짜증만 내는 쵸로마츠도 500을 넘은 숫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늘 위로 솟아날 것 같은 입꼬리를 자중하며 만면에 미소를 피우고 토도마츠에게 다가가 이치마츠와 똑같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잠깐, 머리 스타일 망가져!” 하고 화내면서도 쓰다듬을 거부하지 않는 토도마츠의 모습에 가슴 깊이 감격하고, 녀석들 중에서 가장 숫자가 높은 쵸로마츠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팔을 활짝 벌려 슬슬 뒷걸음치는 쵸로마츠에게 달려가 안겼다.
“우왁!! 뭐, 하는 거야! 망할 장남!!”
“쵸로마츠으~~, 싸랑해!!”
“하아?!”
새빨간 얼굴로 버럭 외치는 쵸로마츠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얇은 쵸로마츠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자 ‘달깍-’ 소리와 함께 쵸로마츠 머리 위의 숫자가 변했다.
「675」로 숫자가 높아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쵸로마츠를 꽉 안았다.
“진~~짜 싸룽해!! 쵸로마츠!!”
“아니, 뭔데!? 왜 이러는 건데!!”
목소리를 격앙되어 있어도 새빨개진 얼굴을 한 쵸로마츠가 당황해 외쳤다.
그 모습도 귀여워 머리를 바사삭- 쓰다듬자, 뒤에서 뻗어온 손에 옷자락을 쭉- 잡아당겨졌다.
“응?”
“왜 쵸로마츠 형만!!”
“…오소마츠 형, 나, 나도….”
“오소마츠 형아!! 나도! 나도 꼬옥~ 해주십쇼!!”
“으아~~, 진짜!! 너네도 전~부 싸랑해!!”
가뭄에 콩 나듯 솔직하게 질투하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꼭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웃으며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한바탕 껴안기가 끝나고 녀석들은 전부 2층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까 카라마츠도 돌아올 것이다.
카라마츠는 몇일까?
일단 500은 넘을 테고, 나한테만 쌀쌀맞지만 그래도 나한테만 고민상담도 하고 의지하고 있으니까 좀 더 높지 않을까 예상한다.
고등학교 때는 쵸로마츠보다 더 오래 붙어있었고.
어쩌면 쵸로마츠처럼 600 넘을지도!
희망적인 예상에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하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1초라도 빨리 카라마츠의 호감도를 확인하고 싶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실 문을 열어 젖혔다.
“어~서 와~! 카라마츠우~!”
“아아…, 다녀왔다.”
현관까지 나온 나를 보며 멍청히 눈을 깜빡이는 카라마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숫자를 확인한 순간, 나는 호흡도 잊고 그대로 망부석이 되었다.
― 카라마츠의 머리 위에는 「0000」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4.
어떻게 저녁 식사를 하고, 목욕탕에 갔다가, 이부자리에 누웠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핫!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방 안은 이미 어두컴컴하고 조용했다.
시계의 초침소리와 쥬시마츠의 코고는 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망연히 눈을 깜빡였다.
몰랐다.
카라마츠가 그렇게 날 싫어할 줄은….
맨날 나한테만 쌀쌀맞던 건 내가 ‘형’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싫어서였구나….
쌀쌀맞은 것도, 맨날 나한테만 화내고 냉정한 것도 다 진심이었구나….
그래, 그랬구나…. 횽아는 몰랐지….
뜨거워지는 눈시울과 더불어 천장의 얼룩이 흐려졌다.
육분의 일, 내가 우리고 우리가 나였던 존재 하나가 나를 미워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쵸로마츠나 토도마츠에게 보이지 않게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흘러 나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얼굴에 “우와….” 하고 한숨을 흘렸다.
퉁퉁 부은 눈두덩이에 눈썹을 늘어뜨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거의 자지 못한 덕분에 눈이 뻑뻑하다.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시간이 6시 였으니, 지금은 6시 반 정도인가….
방을 나오기 전 한번 더 확인한 카라마츠의 머리 위 숫자는 「0000」이었다.
계단을 내려와 복도에 서자 통통통- 하고 잘은 칼질 소리가 주방에서 울려 퍼졌다.
터벅터벅 발소리를 울리며 주방에 들어서자, 엄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빙긋이 미소 지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
나를 향한 자상한 미소와 엄마의 머리 위에 떠있는 「1135」라는 수치에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얼굴 근육을 찡그리고 엄마에게 다가가 어깨에 매달렸다.
나보다 낮은 엄마의 어깨에 허리를 굽히고 매달리자, 엄마도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슨 일 있니?”
“엄마~, 카라마츠가…, 나를 미워해.”
“카라마츠가?”
“…응.”
절로 나오는 코를 훌쩍- 들이마시자, 엄마의 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카라마츠가 왜 너를 미워하니~. 또 싸워서 그런 말 하는 거야?”
뺨에 닿은 엄마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자, 엄마는 쿡쿡- 자애로운 미소로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얼른 카라마츠랑 화해하렴. 카라마츠는 절대 오소마츠를 미워하지 않으니까.” 하고 달래는 엄마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진심 어린 말에도 슬픔이 희석되는 일은 없었다.
형제라도 서로를 전부 알 수 없듯이, 부모도 자식의 전부를 알 수 없으니까.
엄마는 모르겠지만, 카라마츠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나로서는 엄마의 말을 순수하게 믿을 수 없었다.
오늘 하루는 카라마츠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이 깨어나기 전에 서둘러 아침을 먹고 집을 나왔다.
적잖이 풀 죽은 내가 걱정되었는지 엄마는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아빠 몰래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어주었다.
손에 쥐어진 엄마의 사랑에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왔다.
엄마가 준 돈으로 24시간 파칭코에 갔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통했는지 오늘은 유난히 파칭코가 잘 터졌고, 덕분에 밤 늦게까지 파칭코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자정을 지나 아침에 가까운 새벽 시간이 되어서야 파칭코를 나왔다.
보랏빛으로 물들어 밝아지려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쌀쌀한 공기에 몸을 떨었다.
“오소마츠, 너무 늦는다.”
“미안.”
“…모두 걱정했다! 마미도!”
현관문을 열자마자 현관에 서 있던 카라마츠가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화난 얼굴로 외쳤다.
여전히 카라마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0000」라는 수치에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고 복도에 올랐다.
“…너도 걱정했어?”
“물론 나도 걱정했다, 오소마츠. 앞으로 늦을 때는 그렇다고 집에 연락이라도 줘. 너무 늦어진다면 내가 마중 나가겠다.”
“…그래.”
전혀 변화 없는 카라마츠의 호감도를 올려다보며 작게 대답했다.
카라마츠, 너는 거짓말이 서툰 줄 알았는데 말이야….
완전 능숙하구나?
마음에도 없는 말도 술술 잘하고. 자조하며 또 뭔가 말하려는 카라마츠의 말을 ‘졸리다’는 말로 가로막고 계단을 올랐다.
잠든 녀석들의 머리 위에 있는 수치를 보고 다시 한숨을 쉬며 비어있는 내 자리에 슬금슬금 들어가 눈을 감았다.
5.
다음 날, 눈을 뜨니 사람들 머리 위에 보이던 수치가 사라져있었다.
약의 효과가 얼마나 가는지 모른다더니 겨우 이틀 만에 효과가 떨어진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카라마츠의 머리 위에 뜬 「0000」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모두 외출한 집은 조용했다.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직 개지 않은 이불에 누웠다.
어제 파칭코에서 돈을 많이 땄지만, 밖에 나갈 생각은 없다. 나갈 기운도 없다.
“카라마츠가 날 싫어하는 거, 알고 싶지 않았다고~.”
소매를 들어 눈물을 가렸다.
차라리 몰랐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평범한 ‘형제’로 지낼 수 있었는데….
괜히 데카판의 연구소에 놀러 가서 아무 의심 없이 다용이 내온 초록색 음료를 마신 것을 후회하며 천장을 응시했다.
대체 카라마츠는 왜 나를 싫어할까…?
함께 자란 형제인데 호감도가 0인게 말이 돼?
문득 떠오른 생각에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천천히 하나하나 되짚어갔다.
어릴 적엔 항상 쵸로마츠와 붙어 다녀 카라마츠와는 그닥 접점이 없었다.
생각나는 추억도 없고.
카라마츠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추억이 많은 시절은 고등학교 때이다.
착실해지겠다는 쵸로마츠가 반장도 맡고 재미없어진 뒤로 나는 카라마츠와 함께 다녔다.
같이 싸움도 하고, 땡땡이도 치고, 혼날 때도 같이 혼나고….
아, 그래서인가?
고등학교 시절, 시비를 거는 놈이 있으면 ‘카라마츠’라고 대고 싸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덕분에 카라마츠는 주변 고등학교의 불량배들에게 항상 시비를 받았고, 선생님에게도 항상 혼났다.
내가 카라마츠를 싸움에 끌어들이고 나만 쏙- 빠졌던 적은 제법 많았다.
성인이 된 뒤로는 카라마츠의 지갑에서 돈을 빼내가기 일쑤.
덕분에 카라마츠가 사고 싶어했던 선글라스나 가죽 재킷을 못 산 적도 있었다.
그리고 카라마츠가 있는 다리에 가 카라마츠를 겁줘서 강에 빠뜨렸던 적도 있다.
혹시, 혹시 말야….
나, 완전 최악의 형 아냐?
이건 싫어할 수 밖에 없는데?
기억 하나를 떠올리면 줄줄 이어진 열차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녀석들에게도 장난은 많이 쳤지만, 유독 카라마츠에게만 지독한 짓을 많이 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싸악- 하고 피가 가라앉았다.
“좋아!!”
다리를 들어 다시 내리면서 반동을 이용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호감도가 0라면 지금부터 올리면 된다!
쵸로마츠도 ‘사랑한다’는 한 마디에 호감도가 15나 올랐으니까!!
카라마츠도 지금부터 잘 해주면 충분히 호감도를 올릴 수 있겠지!
주먹을 꽉 쥐고 홀로 파이팅을 하며 다짐했다.
다짐을 했으면 바로 행동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그대로 지갑을 들고 집을 나왔다.
어제 잔뜩 따서 빵빵해진 지갑을 들고 카라마츠가 자주 이용하는 브랜드의 옷가게를 들어갔다.
예전에 카라마츠가 갖고 싶다는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던 선글라스를 계산대에 올렸다.
겨우 검은 칠한 안경인 주제에 더럽게 비싼 가격에 이를 악물고 계산을 마치고 포장을 부탁했다.
푸른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된 선글라스를 소중히 품에 안고 지갑에 남은 금액을 확인했다.
아직 돈이 충분히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후 동네에서 가장 큰 할인 마트로 발을 돌렸다.
마트에서 고급 가라아게와 햄버그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에겐 미리 말을 해두고 냉장고 한 켠에 햄버그와 가라아게를 숨겼다.
준비를 전부 마치고 한숨 돌리자 타이밍 좋게 카라마츠가 집에 돌아왔다.
“카라마츠! 어서 와.”
“아, 다녀왔다.”
“잠깐, 이리로 와봐!!”
“응!?”
현관에서 구두를 벗은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2층으로 끌고 갔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한 카라마츠는 순순히 나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자. 저번에 내가 빼간 돈.”
“엩!? 오소마츠가 돈을 돌려준다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건가…?”
“하!? 내가 배로 돌려준다고 했잖아!! 그리고 이것도!”
“이게 뭔가?”
“저번에 네가 갖고 싶어 했던 선글라스.”
“에엣?!”
내 말에 카라마츠가 놀라 서둘러 포장을 풀었다.
찍, 찍- 소리를 내며 찢긴 포장지 사이로 브랜드 이름이 적힌 상자가 나오자 카라마츠가 멍청히 입을 벌리고 나를 응시했다.
“오소마츠, 드디어 죽을 때가 된 건가?”
“아니거든!! 그냥, 너 주고 싶어서…. 마, 마음에 들어?”
브랜드 상자를 열고 반짝이는 선글라스를 확인한 카라마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아, 마음에 든다. 고맙다…. 오소마츠.”
“…후―, 그래? 다행이다.”
“소중히 쓰겠다.”
“오우!”
기뻐하는 카라마츠의 얼굴이 진심이기를 바라며 코 밑을 문지르며 억지로 입가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녀석들이 깨지 않도록 몰래 이불에서 빠져 나와 주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 옆자리를 비켜주었다.
엄마의 말대로 식탁에 놓인 붉은 앞지마를 단단히 매고 엄마의 설명에 따라 어제 산 햄버그와 가라아게를 요리했다.
햄버그는 적당히 먹음직스럽게 노릇노릇 익히고, 가라아게는 온도를 맞춘 기름에서 바삭바삭하게 튀겨 키친타월을 깐 접시에 놓았다.
햄버그는 넓은 접시에 올리고 엄마가 준비해준 소스를 뿌린 후, 접시 한 쪽에 밥 한 공기 정도의 밥을 올려놓았다.
처음 하는 요리라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어도 나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요리가 나왔다.
한숨을 내쉬며 앞치마를 풀고 시각을 확인했다.
딱 녀석들이 일어날 시간임을 확인하고 엄마가 건네는 행주를 손에 들고 나와 거실에 있는 원형 식탁을 닦고 사람 수에 맞춰 식기를 놓았다.
주방과 거실을 왔다갔다하며 식기를 옮기는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 계단을 내려온 카라마츠와 마주쳤다.
“…오소마츠? 이렇게 일찍 뭐하고 있는 건가?”
“엄마 도와드리는 중.”
“엩!?”
짧게 대답하고 주방으로 들어가 내가 요리한 햄버그와 가라아게를 들고 나왔다.
“오늘은 아침부터 햄버그인가!?”
거실에 들어가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은 카라마츠가 놀라 물었다.
“아니.” 하고 고개를 젓고 카라마츠 앞에 햄버그 접시를 내려놓았다.
자신 앞에 놓인 햄버그와 가라아게에 카라마츠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만든 거야. 재료가 얼마 없어서, 1인분 밖에 못 만들었으니까…. 카라마츠 너 줄게.”
“엩, 저, 정말인가?”
“응. 그러니까, 다른 녀석들 나오기 전에 빨리 먹는 게 좋을걸?”
“아…, 응. 고맙다. 오소마츠.”
“응.”
말을 끝내고 카라마츠 옆에 앉았다.
카라마츠는 모처럼의 고기 반찬을 뺏기는 것이 싫은지 순순히 내 말을 따라 준비한 나이프를 들어 햄버그를 잘라 입에 넣었다.
“어때? 맛있어?”
“응! 맛있다!”
눈을 빛내며 엄지를 드는 카라마츠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짓고, “그럼 많이 먹어.” 하고 가라아게 접시를 내밀었다.
“아아!” 하고 힘차게 대답한 카라마츠는 다른 녀석들이 깨기도 전에 햄버그와 가라아게를 전부 먹어 치웠다.
가득 찬 배를 문지르며 숨을 내쉬는 카라마츠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자, 차도 마셔.”
“아, 고맙다…. 오소마츠.”
멋쩍게 웃으며 찻잔을 받아 든 카라마츠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진심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부드러운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쩐지 창피해져서 고개를 숙이고 “별로….” 하고 대답했다.
카라마츠가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녀석들과 함께 나도 아침을 먹었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미소시루와 흰 쌀밥이었다.
카라마츠 혼자 고기 반찬을 먹은 것을 모르는 녀석들은 깨작깨작 밥을 먹는 카라마츠에게 어디 아프냐 물었고 카라마츠는 조금 배가 아프다며 밥을 남기고 먼저 일어났다.
“카라마츠, 나가?”
“아아…. 무슨 볼일 있나?”
“아니, 볼일은 없는데…. 오늘 멋지네-, 하고 생각해서.”
“엩!?”
“그 가죽 재킷. 너한테 진짜 잘 어울려. 스키니 진도.”
“에, 엩!? 고, 고맙다….”
항상 아프다고, 안쓰럽다고 말했지만…,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늘만큼은 진심을 담아 칭찬하자 카라마츠도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미소로 답했다.
가늘게 휜 눈과 행복하게 얼굴 가득 넘실대는 미소에 카라마츠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카라마츠를 비롯해 다른 녀석들도 저마다 외출하고 혼자 남아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카라마츠를 위해 쓰고도 남은 돈을 들고 데카판의 연구소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 약을 또 달라는 말이다요?”
“응.”
“…알겠다요.”
데카판은 곧 내가 마셨던 녹색의 약을 가져왔다.
지난번엔 주스와 착각해 커다란 물잔에 담겨 있던 것과 달리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인지 약은 작은 약병에 담겨 있었다.
“1회 분이니까 한 번에 마시면 된다요.”
“응.”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지고 단번에 약을 들이켰다.
여전히 더럽게 맛없는 약에 온 얼굴 근육을 찡그리고 “크으-” 하고 치를 떨며 빈 약병을 데카판에게 돌려주었다.
약은 하루가 지나야 효과가 나오니까 데카판의 연구소를 나와 파칭코에서 시간을 때우고 집에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카라마츠의 호감도가 올라갔기를 빌며 이불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6.
“…츠, …마츠”
“응….”
흔들리는 몸에 눈썹을 찡그리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더 크게 몸이 흔들리며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오소마츠.”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카라마츠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카라마츠가 놀라 몸을 작게 흠칫거렸다.
“…카라마츠.”
“일어났나, 브라더-. 오늘 함께 피시에게 사랑을 고백하러 가지 않겠나?”
“…아니, 횽아 오늘 몸이 찌뿌둥해서 나가기 싫어~”
“어디 아픈가?”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런가. 알겠다. 마미가 준비한 밥이 식으니 어서 내려와.”
“응….”
고개를 돌리고 카라마츠의 말에 대답했다.
이윽고 카라마츠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 카라마츠의 머리 위엔 여전히 「0000」이 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좋은 형이 되려고 해도 카라마츠에겐 소용없다는 사실이 아프다.
천 개의 바늘을 삼킨 것처럼 침을 넘기는 목이 따갑다.
공기가 지나가는 기도도 욱신거리는 착각이 일었다.
제대로 호흡도 할 수 없는 가슴을 부여잡고, 조금 울었다.
흐느낌을 멈추고 겨우 진정된 마음을 질질 끌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들어가자, 쵸로마츠를 제외한 다른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1인분의 밥이 차려진 상에서 구인 잡지를 읽고 있는 쵸로마츠의 머리 위에 뜬 「675」이라는 숫자를 본 순간, 겨우 가라앉았던 울음이 다시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쵸, 쵸로마츠으~.”
“응? …헤?! 오, 오소마츠 형, 울어!?!?”
“우우우―”
참았던 눈물이 뚝뚝 볼을 타고 흘렀다.
당황 반, 걱정 반으로 나를 응시하는 쵸로마츠에게 다가가자, 쵸로마츠가 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쵸로마츠우~~” 하고 부르자, “응, 왜…. 무슨 일인진 모르겠는데 울지 마….” 하고 쵸로마츠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쵸로마츠의 위로에 눈물은 더 펑펑 쏟아졌다.
아예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기 시작한 내 머리를 쵸로마츠가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 소마츠?”
화장실에 있었는지, 물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잔뜩 가라앉은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리고, 눈물을 삼켰다.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그치려 노력하는 내 어깨를 쵸로마츠가 잡아 홱 일으켰다.
“쵸로?”
“…미안, 오소마츠 형…. 나는 카라마츠 형한테 죽고 싶지 않아.”
“응?”
눈물로 젖어 흐려진 시야에 쵸로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쵸로마츠도 내가 싫어진 건가 하는 불안에 재빨리 쵸로마츠 머리 위 숫자를 확인했다.
여전히 「675」을 유지하고 있는 숫자에 작게 안도하며 다시 쵸로마츠를 부르려는 내게 카라마츠가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형님, 무슨 일인가. 어디 아픈가?”
꽉- 붙잡힌 어깨가 아팠다.
카라마츠의 걱정스런 얼굴과 머리 위에 뜬 「0000」이라는 숫자가 주는 괴리에 고개를 저었다.
소매로 눈물을 닦고 “별일 아냐…” 하고 대답한 뒤, 몸을 일으켰다.
운 탓에 일어선 순간 느껴지는 현기증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고 거실을 나왔다.
“혀, 형님!”
“다시 잘래….”
카라마츠의 부름에도 뒤돌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 카라마츠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 거다.
7.
그 이후로 나는 카라마츠를 피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밖을 나가서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갔다.
혹여 카라마츠와 마주치더라도 빠르게 대화를 끊고 자리를 피했다.
카라마츠와 함께 있을 수록 카라마츠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각인되어 가슴이 아팠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시각을 확인했다.
아침 6시. 이렇게 일찍 일어날 거라면 차라리 알바라도 할까.
알바하면 집에 오래 안 있을 거고.
솔직히 슬슬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작게 한숨을 쉬며 방을 나와 엄마가 주는 식빵으로 간단한 아침을 때웠다.
다른 녀석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 앉아 운동화 끈을 묶고 있는데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오소마츠 형.”
“아, 토도마츠구나.”
카라마츠일까, 걱정했던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작게 웃었다.
토도마츠는 잠옷 차림으로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걱정스런 얼굴로 응시했다.
“저기, 카라마츠 형이랑 뭐 때문에 싸웠는지는 모르겠는데. 빨리 화해해줄 수 없어? 집 안 분위기 장난 아니라고?? 카라마츠 형, 매일 일어나서 오소마츠 형이 없는 거 알고 얼마나 저기압이 되는지 알아? 무섭다고!! 눈빛으로 사람 하나 죽일 것 같다고!!”
가볍게 쥔 손을 방방 흔들며 울상이 된 얼굴로 호소하는 토도마츠의 머리를 쓴웃음과 함께 쓰다듬었다.
“카라마츠랑 안 싸웠어.”
“그럼 왜 피하는 건데!!”
“…카라마츠가 날 싫어하니까.”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 리 없잖아.”
“아냐, 싫어해.”
“무슨 소리야! 차라리 세상이 멸망한다는 말을 더 믿겠다!! 카라마츠 형이 얼마나 오소마츠 형을 챙기는데! 오소마츠 형이 카라마츠 형 피하게 되고 카라마츠 형 기분 장난 아니라니깐!? 무섭다고!! 카라마츠 형이 항상 먼저 나가자고 권유하는 것도 오소마츠 형이 유일하잖아!”
“…그건, 내가 카라마츠의 유일한 ‘형’이니까 신경 써주는 것 뿐이야.”
“하아!?”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외치는 토도마츠의 머리를 한 번 더 부드럽게 쓰다듬고 허리를 들었다.
벙찐 얼굴로 나를 따라 시선을 올리는 토도마츠에게 미소 짓고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현관을 나섰다.
“오소마츠 형아!!”
이웃마을의 강둑에서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는 내게 바다닥- 하고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쥬시마츠가 달려들었다.
쥬시마츠의 무게가 더해져 기운 몸은 하마터면 그대로 강에 굴러 떨어질 뻔 했다.
“쥬시마츠! 갑자기 달려드는 건 위험하니까 금지랬지!!”
“아!!”
“‘아!’ 가 아냣!”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하며 야단 치자, 쥬시마츠가 고양이 눈을 하고 주먹을 손바닥에 내리쳤다.
위험하니까 정말로 그만두라는 당부를 한 번 더 하자, 쥬시마츠도 씩씩하게 “넵!” 하고 대답했다.
“근데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일부러 카라마츠와 마주치지 않도록 이웃마을에 온 건데….
“오소마츠 형아의 냄새를 쫓아왔슴닷!!”
“냄새?”
“응!!”
나 그렇게 냄새 나나?
킁킁 하고 자신의 소매나 옷자락을 들어 코에 갖다 대도 딱히 냄새는 나지 않았다.
굳이 난다고 하면 가족이 함께 쓰는 섬유유연제 냄새인가….
“오소마츠 형아!”
“응?”
후드의 이곳저곳을 맡기 바쁜 나를 쥬시마츠가 불러 고개를 들었다.
쥬시마츠는 항상 벌리고 있던 입고 꾹- 다물고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소마츠 형아는 카라마츠 형아가 싫슴까?”
“응? 아니?”
“그럼 왜 카라마츠 형아랑 같이 안 놀아줌까?”
“…그건, 카라마츠가 날 싫어하니까야.”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을 말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사실에 또 가슴이 꽉 조였다.
내 대답을 들은 쥬시마츠는 잠시 조용히 앉아있더니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외쳤다.
“…카라마츠 형아는 오소마츠 형아 싫어하지 않아요!! 카라마츠 형아는 항상 오소마츠 형아한테 제일 먼저 노래를 들려줌닷!! ‘육둥이의 노래’도 오소마츠 형아한테 제일 먼저 들려줬슴다!! 그리고, 그리고- 카라마츠 형아가 오소마츠 형아한테 노래해줄 때 굉~장히 행복해 보였슴다!!! 그러니까 카라마츠 형아는 오소마츠 형아를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좋아함다!!”
쥬시마츠가 활발하게 팔을 흔들며 말했다.
커다란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내게 전하려고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쥬시마츠의 말에 허탈한 웃음을 피우며 말했다.
“쥬시마츠, 그건 착각이야. 카라마츠는 그저 노래 부르는 게 즐거웠을 뿐이고, 내게 먼저 노래를 들려준 건 우연이야. 내가 제일 집에 오래 붙어있으니까.”
“그, 그런 게 아니라…”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미안해….”
제대로 웃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어색한 미소를 띄우고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을 잃은 쥬시마츠는 긴 소매로 입을 가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 멀리에 솟아있는 산 너머로 해가 지며 하늘 가득 펼쳐진 노을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저녁 6시가 지난 공원엔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공원의 구석에 놓인 벤치에 앉아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숨을 쉬었다.
“…오소마츠 형.”
“이, 치마츠.”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야에 그림자가 걸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치마츠가 마스크를 쓰고 구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오소마츠 형이야말로, 이 시간까지 여기서 뭐해.”
“…음, 산책?”
“…그래.”
이치마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곤 내 옆에 앉았다.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고 내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이치마츠가 입을 열었다.
“…그, 개똥마츠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고…. 오소마츠 형의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
“….”
“그 녀석이 오소마츠 형을 싫어할 리 없고. 오소마츠 형이 늦게 들어오면 제일 불안해하는 건 개똥마츠니까. 계속 엄마한테 오소마츠 형한테 무슨 연락 없었냐고 묻고, 안절부절 못해서 거실이랑 현관 왔다갔다하고….”
“…그건, 다른 녀석들이 걱정하니까 차남으로서 그러는 거야.”
“아니…”
“괜찮아~ 이치마츄~. 그냥,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 이 아픔에 익숙해질 시간이….
입술을 깨물고 슬픈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이치마츠에게 미소 지었다.
다시 한 번 “괜찮아.” 하고 달래며 이치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치마츠의 눈이 눈물에 젖어 아름답게 빛났다.
8.
드물게 경마에서 따서 아저씨들과 늦게까지 마신 날.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며 다른 녀석들은 이미 잠들었을 시각임을 확신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오소마츠 형.”
“힉?!”
분명히 불이 꺼져 있던 현관엔 쵸로마츠가 팔짱을 끼고 귀신 같을 얼굴로 서 있었다.
단번에 팟! 하고 켜진 불에 놀라 몸을 움츠리자, 쵸로마츠가 큰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에, 에!? 쵸로마츠??”
“좀 와 봐.”
쵸로마츠를 따라 거실에 들어가자 바닥에 깔린 방석에 카라마츠가 정좌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카라마츠 얼굴에 반가움도 잠시, 바로 카라마츠가 날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쵸로마츠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쵸로마츠가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손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기 앉아.”
카라마츠의 맞은편에 놓인 방석을 가리킨 쵸로마츠에게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앉아. 이 망할 장남.”
“히-!!”
과거, 양아치 시절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나온 쵸로마츠에게 더는 반항하지 못했다.
얌전히 쵸로마츠에게 손목을 잡힌 채 방석에 앉자 쵸로마츠가 내 옆에 앉아 목을 다듬었다.
“대체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좀 해! 보고 있는 우리가 힘들어!!”
“….”
“….”
“오소마츠 형!”
“응….”
“카라마츠가 오소마츠 형을 미워할 리 없다는 거 알잖아! 왜 그러는 거야!!”
“…아니라구…, 진짜로 카라마츠는, 나를, 미, 미워한단 마랴….”
쵸로마츠의 호통에 괜히 억울함이 벅차 눈가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다.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눈물에 함께 목소리도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쵸로마츠는 한숨을 쉬고 준비해둔 티슈를 꺼내 내 눈물을 정성스레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오소마츠 형, 예~전에 형이 아팠을 때 기억나? 형 혼자 독감 걸렸을 때, 카라마츠가 얼마나 극진히 간호했는지 오소마츠 형도 잘 알잖아? 게다가 평소에 오소마츠 형이 귀찮게 매달릴 때도 카라마츠 형만은 오소마츠 형을 받아주고, 술 주정 심한 오소마츠 형하고 단 둘이 술 마시러 가주고 하잖아. 오소마츠 형이 싫으면 술 주정하면서 남 패기 일쑤인 오소마츠 형하고 같이 나가겠어?”
“…우우―, 그, 치만….”
“그렇다. 오소마츠! 나는 단 한 순간도 오소마츠를 미워한 적 없다!!”
태연하게 억울하단 얼굴을 하고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카라마츠를 본 순간, 참고 참았던, 가슴 깊이에 누르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눈물을 닦아주는 쵸로마츠의 손길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카라마츠를 노려보며 외쳤다.
“거짓말 하지 마!!”
내 외침에 카라마츠도 얼굴을 구기고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거짓말 아니다!!”
“차남이니까, 내가 ‘형’ 이니까 챙겨준 것뿐이잖아!! 진짜는 내가 싫잖아!! 가족이라고도 생각 안 하잖아!! 나한테 먼지 한 톨의 관심도 없으면서 신경 쓰는 척 하지 말라고!!!”
외치면서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가슴을 후벼 파는 말에 카라마츠에게 울분을 퍼부었다.
굵은 눈물은 끊임없이 볼을 타고 흘러 다다미를 적셨다.
쵸로마츠도, 카라마츠도 넋을 잃고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입술을 꽉 다물고 흐느끼며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자, 거실 문 뒤에서 시작된 후다닥- 하는 발소리가 층계까지 이어졌다.
분명 나와 카라마츠를 숨어서 지켜보던 녀석들이 당황해 2층으로 도망친 거겠지.
온몸을 휩쓴 울분에, 분노에 몸을 떨며 숨을 삼켰다.
“오소마츠 ㅎ…”
“…읏! 형님은 왜 내 말은 듣지 않는 건가!! 나는 형님을 싫어하거나 하지 않아!!”
쵸로마츠의 침착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기도 전에 카라마츠의 노성이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쾅! 하고 발로 바닥을 구르며 분노하는 카라마츠 모습에 나도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거짓말 하지 마!! 나는 다 안다고!!”
“뭘 안다는 건가!! 오소마츠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
“봤으니까!!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거 전부, 전~~부 다! 봤으니까!!”
“웃기지마!! 개소리하지 마!! 오소마츠!!’
“개소리 아냐!! 진짜라고!!!”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오소마츠!!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아!! 미워하지 않아!! 오히려 좋아하고 있다고!!!”
“웃기시네!! 누가 그딴 거짓말 믿을 줄 알아!? 너야 말로 날 싫어한다고 인정해!!”
“…호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못 믿겠다 이건가?”
“그래!!”
“그래…, 그럼 몸으로 알게 해주지.”
“하!?”
카라마츠는 영문 모를 말을 내던지고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뭐야, 해보잔 거냐!!
이를 갈며 카라마츠를 노려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제 주먹을 날려도 대응할 수 있도록 긴장하고 있는 내 앞에 선 카라마츠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감싸고 그대로 입술을 박았다.
“…!?!?!?!?”
바로 눈앞에 놓인 카라마츠 얼굴에 머리가 멈췄다.
눈썹을 찌푸리고 눈을 감은 카라마츠는 패닉에 빠진 내 허리에 제 팔을 감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자연히 내 입술을 누르고 있는 카라마츠의 입술도 더 강해졌다.
뜨겁고 마른 입술이 닿는 감촉에 허리가 떨렸다.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라마츠가 입 맞춘 순간 멈춘 숨이 입 맞춤이 길어질수록 힘들어졌다.
이제 한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라마츠의 가슴을 밀쳤다.
“너, 대체 무슨!? …으응!?!?”
푸핫-, 하고 숨을 몰아 쉬며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카라마츠가 키스했다.
말하던 중간에 막힌 입술의 작은 틈으로 카라마츠의 혀가 기어들어왔다.
“!??!?!?!?!”
물컹거리는 살덩어리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카라마츠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해도 망할 고릴라 힘을 가진 카라마츠는 꿈쩍도 안 했다.
입 안으로 들어온 카라마츠의 혀는 종횡무진하며 온 입안을 헤치고 돌아다녔다.
치열을 훑고, 어금니 안쪽을 간질이더니 입 속 깊은 곳에 움츠러든 내 혀를 잡아 옭아매고 빨아들였다.
“…응!”
살과 살이 만나 점막을 쓸어 올리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콧소리가 났다.
카라마츠 어깨를 붙잡은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허리에 감긴 카라마츠의 단단한 팔도 어쩐지 아까보다 더 강하게 느껴져서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카라마츠의 혀에 번민하는 사이, 거실 안에 쪽, 쪽- 하고 야한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동에서나 들었던 키스 소리에 완전히 패닉에 빠진 나는 아직 방 안에 남아 있을 쵸로마츠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와줘!! 쵸로마츠으으으으!!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지만, 눈앞에 펼쳐진 형제의 키스신에 쵸로마츠는 완전히 넋이 나가있었다.
“응, 으읏!! 효, 로…, 마흐…!”
키스를 반복하며 살짝살짝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쵸로마츠를 부르자, 핫! 하고 정신을 차린 쵸로마츠가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곧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빠르게 거실을 나갔다.
도와달라고 망할 라이징휴지스키이이이이이이이―
형제 키스신에 얼굴 붉히지 말라고 망할 동저어어어어어어엉!!!
도움을 요청하는 내 간절한 눈빛도 무시하고 나간 쵸로마츠를 저주하며 입 안에 있는 카라마츠의 혀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쵸로마츠를 부른 순간 더 강해진 포옹과 격렬해진 혀의 움직임에 나는 정말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응, 후응―. 햐읏!!”
카라마츠의 혀가 입천장을 간질인 순간 야동에 나오는 누나들이나 내뱉는 가느다란 신음이 목에서 울렸다.
아~!!! 도와줘요, 아카츠카 선생님!!!
창피해 죽을 것 같아아아아아아아!!
키스가 이어지는 와중에 제대로 호흡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슬슬 괴로워졌다.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카라마츠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푸핫!!!”
“오소마츠, 딴 생각하지 말고 나만 봐라.”
“무, 슨 말으…, 응!!!”
다시 겹쳐진 입술에 항의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카라마츠의 혀가 들어온 덕분에 완전히 뭉개진 외침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아까 내 입안을 사정없이 누빈 혀는 내 성감대를 기억한 건지 입 안에서도 기분 좋은 곳만 골라 핥아댔다.
입천장, 혀의 옆면, 어금니의 잇몸을 핥고, 혀를 옭아매 빨아들이고….
살덩어리와 점막에서 느껴지는 쾌락에 나는 거의 울고 있었다.
코로 신음을 반복하며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고 카라마츠의 혀에 어울렸다.
입이 막혔으니 조금씩 코로 숨을 내쉬며 질식사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자, 카라마츠의 목에서 “쿡-”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웃긴데!! 나는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라고!!
바로 지척에 놓인 카라마츠를 흘겨보자 카라마츠의 감긴 눈이 얇게 뜨였다.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응시하는 카라마츠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스쳤다.
아예 손을 들어 내 뒤통수를 잡고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안은 카라마츠가 다시 혀를 움직였다.
생전 처음 입으로 느끼는 쾌감과 카라마츠의 심장 박동 소리와 강인한 팔의 힘에 다시 눈 앞이 팽팽 돌았다.
이미 패닉에 빠진 뇌가 기어이 모든 기능을 정지했다.
차오르는 숨에 답답함을 느끼면서 카라마츠의 옷자락을 꽉 붙잡은 채,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9.
“으음….”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떠 습관적으로 옆으로 눈을 돌린 순간, 카라마츠의 얼굴이 보였다.
“!?!?!?”
놀라 재빨리 몸을 일으키자 내 옆에 누워있던 카라마츠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 에!? 뭐, 뭐…. 왜 네가 내 옆에 누워 있어!?”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하는 내 손을 꽉 붙잡은 카라마츠가 맹수처럼 매섭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꼭 눈앞에 놓인 먹잇감에게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은 눈빛 같았다.
“…오소마츠.”
“히-?!”
내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온 카라마츠의 얼굴을 밀며 허리를 뒤로 굽혔다.
도망치는 내 모습이 불쾌한지 카라마츠는 눈썹을 찌푸리고 내 허리에 팔을 감아 나를 제 품에 가두었다.
“뭐, 뭔데!? 이거!!”
누가 좀 도와줘!!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지만, 육인용의 이불에 남아있는 것은 나와 카라마츠뿐이었다.
“오소마츠, 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한 건가.”
“…무, 무슨 오해….”
완전히 울상이 된 내가 반쯤 울먹이며 물었다.
“내가 오소마츠를 싫어한다는 오해 말이다.”
카라마츠의 물음에 모든 걸 체념한 나는 데카판 연구소에서 약을 잘못 마신 일부터 시작해 어제까지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진지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들은 카라마츠는 내 말이 끝나자 어이없단 한숨을 흘리며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하아~”
“왜 한숨 쉬는데!!”
“오소마츠.”
“뭐!!”
“오소마츠 말대로라면 오소마츠와 아무런 안면도 없는 타인은 「0」으로 표시 되었다고 했지?”
“…응.”
“그리고 마미는 「1122」로 네 자리 숫자였고.”
“…응.”
“그리고 나 역시 마미처럼 「0000」으로 네 자리 숫자였지 않나?”
“…응? 그러게?? 왜 네 자리로 표시되었지?”
“…그건 표시 범위를 넘겨서 그런 게 아닌가?”
“…표, 시 범위?”
“즉, 오소마츠가 보았던 호감도 수치는 딱 네 자리만 표시되는 거다. 그 이상의 수, 예를 들면 ‘10000 (일만)’ 같은 수는 전부 표시할 수 없는 거지. 그럼 「0000」으로 표시 될 거라 생각되지 않나?”
“…그러니까, 카라마츠 네 말은…, 네 호감도는 표시될 수 있는 수치를 넘어서서 그렇게 나온 거라고?”
“아. 오소마츠가 볼 수 있는 호감도는 최대 「9999」이고, 그 이상은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럼 카라마츠가 「0000」이라고 표시된 건, 「9999」를 넘어서 그렇다는 거야?”
“아.”
“…헤에~”
“이제 좀 오해가 풀렸나?”
“…응,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가.”
내 중얼거림에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쉰 카라마츠가 다시 눈빛을 바꾸고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오소마~츠.”
“응!? 응!? 왜 가까이 와!?!? 좀 떨어져 줄래?!”
“오해도 풀렸고,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제 오소마츠에게 고백도 했다. 대답은 언제 해 줄 거지?”
“헤?”
카라마츠의 말에 잠시 이성이 가출했다.
고개를 기울이고 ‘무슨 소리?’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푹- 한숨을 내쉰 카라마츠가 “역시 기억 못하고 있군.” 하고 혼잣말을 흘렸다.
“나는 오소마츠를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물론 형제로서가 아니라 오소마츠라는 한 사람으로서.”
“헤?”
“어릴 적부터, 쭉- 사랑했다. 오소마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 카라마츠가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들어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멍청히 눈을 깜빡이는 나를 보며 피식- 장난스런 웃음을 흘린 카라마츠가 허공에 떠 있는 내 손에 깍지를 끼고 꽉 잡았다.
“에, 에!?”
“그러니까, 지금 대답해줘. 오소마츠.”
슬슬 가까이 다가오는 카라마츠의 얼굴에 또다시 뇌가 혼란에 빠졌다.
열기를 품고 나를 쳐다보는 카라마츠의 눈빛에 몸이 얼어붙었다.
얼굴을 비롯해 온몸의 체온이 순식간에 확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 번도 카라마츠를 그런 식으로 본 적 없으니 대답을 해 줄 수 없다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대답을 위해 연 입술은 그대로 카라마츠에게 막혀 나는 이후로 한참 동안 신음이 아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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