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이코패스 카라마츠를 오랜만에 쓰고 싶어서 써봤습니다ㅎ

* 오소마츠가 발랄하지 않습니다. 오소마츠가 해적입니다.

* 모브시점. '오소←모브'가 있습니다.

* 공미포 11,953자.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좌우로 크게 흔들리던 어둠이 잠잠해졌다. 숨소리를 죽인 우리들 위로 둔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창에 옹기종기 모인 어른들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불안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까끌까끌한 목으로 침을 넘기며 귀를 기울이자 어렴풋하게 사람들의 함성과 비명이 들렸다.

“해적인가?”

“서, 설마⋯.”

수군대기 시작한 어른들의 말에 몸에 걸친 누더기를 움켜쥐고 숨을 삼켰다. 조금 전, 이곳에 내려왔던 선원의 외침이 귓가에서 되풀이됐다.

“레드다! 레드 브레이드(Red Braid)다!!”

항구에서 일했던 나는 알고 있다. ‘레드 브레이드’가 누구인지. 항구에 정박한 상선의 선원들이 반드시 한 번 이상은 입에 담는 해적. 대륙과 대륙을 잇는 대양의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대해적. 레드 브레이드의 습격을 받은 상선은 한 번도 멀쩡히 돌아온 적 없었다. 최악 일로를 달리는 생각을 간신히 억누르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칼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우리는 어, 어떻게 되는 거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덜덜 떠는 어린아이의 질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항해 중간에 해적을 만나 운반하던 노예 모두를 잃었다며 한탄하던 선원을 본 적이 있었다. 간신히 목숨만을 구할 수 있었다던 그 선원의 말에 나와 동료들은 덜덜 떨었다. 금이나 식량, 럼주같이 물건을 우선하는 해적에게 노예는 별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뱃속이 울렁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삼키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으면 이 상선에 남겨지겠지만, 운이 나쁘면 우리는⋯.


축축한 바다 공기에 절여진 녹슨 철창살을 쥐고 한 번도 믿은 적 없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자 마치 구원처럼 빛이 내려왔다. 열린 갑판 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등진 채 계단을 내려온 남자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혀를 찼다.

“선장~, 여기 노예들이 있는뎁쇼?”

남자의 껄렁한 외침에 검은 코트를 입고 머리 한 가닥을 길게 땋은 남자가 내려왔다.

해적, 그것도 악명 높은 대해적 레드 브레이드의 선장. ‘레드’라 불리며 많은 선원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는 의외로 단정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예는 놔둬. 처리가 귀찮으니까.”

“넵!”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손을 흔든 ‘레드’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붉은빛이 도는 짙은 눈동자가 닿는 순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세이렌에 홀린 것처럼 1초라도 더 그의 시선을 받고 싶었다.

“저거.”

“예?”

레드의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저 꼬마, 잡일꾼으로 쓸 거니까 빼놔.”

“예⋯? 저 꼬마요?”

“응.”

“아, 알겠습니다.”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얼굴로 말을 끝낸 레드는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레드의 명령을 받은 남자가 “후―.” 하고 한숨을 쉬고 상선의 주인을 끌고 왔다. 해적에게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은 상인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철창을 열었다.


부러움과 동정이 섞인 눈빛이 등에 꽂혔다. 남자를 따라 철창을 나와 갑판에 오르자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널려 있었다. 상인이 호위로 고용한 용병들은 갑판을 붉게 적시며 쓰러져 있었고, 상인과 그의 수족들은 두꺼운 밧줄에 묶여 갑판 한가운데에 모여 있었다.

레드 브레이드의 해적선과 상선 사이에 걸쳐진 나무판을 건너 해적선에 발을 올린 순간, 내 인생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2.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가던 해적선이 속도를 늦췄다. 대걸레질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자 정착할 곳 하나 없는 망망대해가 사방에 펼쳐졌다. 갑판에 오른 해적들은 분주히 움직여 돛을 접고 닻을 내리기 시작했다. ‘쿵’하고 해저에 닻이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 왜 닻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해적들은 익숙하게 작은 배를 해적선 아래로 내리고 사다리를 걸었다.

“어이, 꼬마! 이리 와서 도와라.”

“아, 네!!”

남자의 외침에 대걸레를 돛대에 걸고 뛰어갔다. 사다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배 옆면에 단단히 묶고 숨을 돌리자 ‘레드’가 선장실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는 끝났나?”

“네, 캡틴!”

뻣뻣하게 허리를 굽힌 선원들 사이로 걸어온 레드가 말없이 사다리를 내려가 바다 위에 띄운 작은 배에 올랐다. 작은 배에 혼자 오른 레드는 그대로 노를 저어 바다 저쪽으로 나아갔다. 수면에 이는 작은 파도를 따라 넘실대는 작은 배 너머로 작은 점이 하나 보였다.

“서, 선장님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자 난간에 기대 수평선을 응시하던 남자가 작은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저~기 보이는 무인도에 가는 거야.”

“무인도⋯.”

망원경의 둥근 렌즈에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섬이 담겼다. 망원경을 넘겨준 남자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도 잘은 모르지만, 선장님이 정기적으로 들리는 섬이야. 아마 약탈한 보물 중에서 제일 값비싼 걸 보관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보물 지도를 숨겨놨거나!”

“나도 한번 가보고 싶은데 말이야~. 저 무인도.”

선장을 배웅한 해적이 모여 여러 추측을 쏟아냈다. 한참 동안 말이 오갔지만, 그 누구도 레드가 들리는 섬의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다.


작은 점이 되었다 이윽고 사라져버린 작은 배는 다음 날 아침 해적선으로 돌아왔다. 어제와 변함없는 얼굴로 배에 오른 레드가 항해사를 불렀다.

“해골섬으로 간다.”

“네!!”

‘해골섬’이라 불리는 그곳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해류에 둘러싸인 돌섬이었다. 해적이 모이는 곳, 약탈물을 거래하고 다음 항해를 준비하는 곳으로 해군의 손이 닿지 않는 무법지였다. 레드의 한 마디에 수십 명의 해적이 배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접었던 돛을 펼치고 닻을 올려 항해를 시작한 배가 해적들만이 이용하는 거친 항로에 올랐다.


“포도주 가져왔습니다.”

“응, 거기 둬.”

책상에 포도주병과 와인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은 의자를 기울인 레드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느리게 깜빡이던 눈이 얇은 눈꺼풀 아래에 묻혔다.

대양의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그 일대를 종횡하는 대해적. 해군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지고, 상선이 이용하기 좋은 안전한 항로가 있는 바다를 차지한 ‘레드’는 가장 유명하고 가장 부유한 해적이었다. 게다가 선장인 레드는 해군 사이에서 ‘불사신’이라 불렸다.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화살을 쏘아도, 대포를 퍼부어 배를 침몰시켜도 ‘레드’는 다시 나타났다. ‘지긋지긋한 녀석’이라고 해군 장교가 이를 갈던 것을 봤었기에 강철 같은 몸을 지닌 우락부락한 사내라고 멋대로 상상했었다.

“응⋯? 더 시킬 일 없으니까 나가.”

“아⋯, 네.”

짙은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나른하게 젖은 눈동자에 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흉터투성이에 근육이 가득한 험상궂은 남자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저렇게 가련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뜨거워진 얼굴을 숨기고 선장실을 나왔다.




3.


우둘투둘한 부두가 정박하는 배를 맞이했다. 높이 솟아오른 뾰족한 산봉우리가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해적들의 섬, 해골섬에 도착했다. 항구에서 말로만 듣던 해골섬을 처음 보니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부두 옆에 있는 술집에서 나오는 이도, 배를 점검하는 이도, 저 멀리서 물물교환을 하는 이도 모두 해적이었다.

이렇게 많은 해적으로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꼬마! 어서 이거 날라!”

“아, 네, 넵!!”

거칠게 어깨를 두드리는 두꺼운 손에 고개를 주억였다. 나와 다른 노예들이 있던 상선에서 빼앗은 물건들을 골라 배 아래로 내렸다. 여기 해골섬에서 이 물건들을 팔고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사는 거겠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물건들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자 레드가 배에서 내려와 내 옆을 지나쳤다.

“가자.”

“네!”

레드의 말에 대답하는 해적들은 모두 레드보다 몸집이 컸다. 자신보다 왜소한 레드에게 저렇게 충성을 바칠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나름 노예를 잘 대해준다는 내 전주인에게도 충성을 바칠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레드의 부하들은 레드의 명령이면 죽는시늉이라도 낼 것처럼 굴었다.

“꼬마, 너는 이걸 들고 따라와.”

“네.”

앞서 걸어가는 레드를 보다 건네진 상자를 받아 들었다. 제일 선두에서 검붉은 코트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레드를 짐을 하나씩 든 해적이 뒤따랐다.

우리는 해군의 습격을 대비한 것인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길을 한참 걸어 해골섬 안쪽에 있는 시장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호객 행위에 꼭 일반 시장 거리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좁은 길목에 늘어선 천막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고 파는 물건을 늘어놓지도 않았지만, 해적들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망설임이 없었다.

“꼬마, 그거 여기에 내려놔라.”

어린애처럼 사방을 둘러보다 급히 상자를 내려놓았다. 레드의 해적들은 나를 노예라고 무시하거나 괴롭히진 않았지만, 성질이 급했다. 또 버럭 화를 내기 전에 빈 천막에 상자를 내려놓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빌, 켓, 딘. 이번엔 너희가 남아.”

“네, 캡틴. 다녀오십쇼!”

레드는 어딘지 몽롱한 얼굴로 세 명의 부하를 호명했다. 무슨 중대한 임무라도 받은 것처럼 차렷 자세를 하고 고개를 끄덕인 세 해적이 상자를 지키고 섰다.

“나머지는 따라와라.”

기세등등하게 상자 앞에 선 부하들의 모습에 피식- 헛웃음을 흘린 레드가 천막을 나섰다. 나는 저 세 해적과 함께 천막에 남아야 하는지, 레드가 말한 ‘나머지’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 고민하다 억센 팔에 질질 끌려갔다.


레드는 시장 거리에 세워진 천막들을 누볐다. 해적들 사이에 암묵적인 규칙이라도 있는 건지 레드가 먼저 천막을 지키고 있는 이와 말을 트고 나서야 물건을 볼 수 있었다. 레드의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은 레드가 손짓하고 나서야 필요한 물품을 받아 나올 수 있었다. 다음 항해에 필요한 물품이 하나씩 레드의 부하들 손에 올려졌다. 서서히 양손에 짐을 든 부하들이 늘어났고, 곧 내게도 커다란 상자 하나가 떠넘겨졌다.

레드는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자 걸음을 멈췄다. 홱 뒤돈 레드 뒤에 서 있는 우리들은 모두 짐을 한가득 안고 있었다.

“짐은 전부 배에 가져다 놓고 남은 시간은 자유다. 단, 내일 아침까진 배로 돌아와.”

“네!”

레드의 말에 해적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자유 시간이라는 것에 들뜬 해적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가 짐을 실었다. 해적들의 지시에 따라 짐을 배에 옮기고 나니 윗도리가 흠뻑 땀으로 젖어 있었다.

“꼬마, 너는 어쩔래?”

“네?”

옷을 들어 이마를 닦아낸 내게 해적이 팔을 걸치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어⋯.” 하고 말을 흐리자 해적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도 우리랑 술집에 갈래? 아님 빌 녀석들 따라 시장 구경?”

“아⋯, 아뇨. 저는⋯.”

해적은 뭐든 말하라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짐을 옮기는 사이 주변이 깜깜해져 있었다. 해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술집에서는 노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저는 배에 남아있을게요.”

“응? 자유 시간인데도 말이냐?”

“네.”

해적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팔을 내렸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아마 곧 캡틴이 오실 테니 캡틴 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라구.”

기분이 상했는지 싸늘하게 내뱉은 해적이 배에서 내려갔다. 해적 무리가 배를 떠나자마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싣고 넘어오는 바닷바람에 눈을 감았다.


나는 이대로 해적이 되는 건가?

감았던 눈을 뜨고 눈가를 문질렀다. 레드는 왜 나를 데려왔을까. 상선에서 마주친 눈동자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눈동자가 순간 이채를 띠었다. 그래서 나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레드는 그 이후 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해적선에 오른 뒤로 가끔 마주친 레드의 눈은 항상 메말라 있었다.

“어머니랑 닮은 눈.”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평생 노예로 살다가 죽어버린 어머니와 똑같은 눈이었다. 바라는 것도 없이 공허하게 삶을 이어갈 뿐인, 내가 제일 싫어하는 눈.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해적의 선장인 레드가 왜 그런 눈을 하는 걸까. 그리고 그 눈에 왜 나를 담았을까.

레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늘어간다.


“아무도 없나?”

눈동자 뒤가 뜨거워 눈을 비비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난간을 잡고 배 아래를 보자 레드가 처연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 선장님?”

“배에 오를 거니까 사다리 내려.”

“아, 네!”

부두에 홀로 서 있는 레드에게 끄덕인 후, 난간에 묶여 있던 매듭을 풀었다. 촤르륵 늘어진 사다리를 타고 레드가 배에 올랐다.

“다른 녀석들은?”

“자, 자유 시간이라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드가 지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에 입을 다물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레드에게 마실 거라도 가져다줘야 하나 고민할 무렵 건너편 부두에 선 배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은근히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다.

‘뭐지?’하고 일어난 호기심에 아래를 응시하자 해적으로 보이는 험악한 남자가 뭔가를 질질 끌고 갔다. 해적이 손에 쥔 굵은 그물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그만 숨을 삼켰다.

인어다!

해적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것은 인어였다. 우리들과는 다른 귀와 허리 아래로 펄떡이는 비늘에 감싸인 꼬리. 생전 처음 보는 인어에 절로 감탄했다. 인어는 모두 생김새가 아름답다더니 정말이었다. 훤히 드러난 상반신으로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위에 달린 얼굴은 도저히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묘하게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인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어는 높으신 분들의 애완동물로 팔리기도 한다더니⋯. 저런 생김새라면 탐낼 만했다. 노예 중에서도 얼굴이 반반한 이는 귀족에게 잘 팔렸으니까.

인어는 말없이 비참한 얼굴로 해적에게 끌려갔다. 물 밖에 있는 게 힘든지 숨을 헉헉거리며 꼬리를 파닥이는 게 전부였다. 해적들도 인어는 쉽게 볼 수 없는지 사람들이 점점 몰리고 있었다.

가장 넓은 바다를 차지하고 있는 대해적인 ‘레드’는 인어를 본 적 있을까? 그런 궁금증에 인어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돌렸다.


“⋯.”

“서,”

“오늘 더 할 일 없으니 들어가 봐.”

얼음 같은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레드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선장실에 들어갔다. 레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멈췄던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서웠다.

인어를 응시하는 레드의 눈빛이,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그가 내뿜는 기운에 다리가 풀릴 정도로.


대해적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레드는 부하들과 사이가 좋아 보였다. 부하들이 그에게 보여주는 신뢰를 보면 그가 얼마나 부하들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해적답지 않게 가혹한 모습을 보인 적 없었기에 나도 모르게 그를 편하게 생각했던 걸까.

잘게 떨리는 손을 맞잡아 진정시켰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풀린 다리를 주물렀다.



다음 날 아침, 배로 돌아온 해적들에게 은근슬쩍 어젯밤의 일을 말했다. 해적들은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서 그렇게 꼬리 말고 숨으려는 개새끼가 된 거냐? 우리 캡틴이 좀 노려봤다고~?”

큰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팡팡 내려찍는 해적에게서 떨어지자 다른 해적이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하고 실실댔다.

“야~, 놀랐겠네. 꼬마-. 우리 캡틴이 여리여리해 보여도 화내면 무섭거든!”

“처음 봤으니 놀랄 만하지~.”

“우리도 처음 봤을 때는 오줌 지릴 뻔했다니까?”

“크허헣!” 하고 돼지 울음소리 같은 웃음을 멈춘 해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캡틴은 인어 싫어하시거든.”

“그럼 전에도 인어를 보신 적 있으신 거예요?”

해적의 말에 놀라 묻자 해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캡틴하고 항해하다 보면 묘하게 인어를 많이 보는 것 같단 말이야―. 3년 동안 그 보기 힘든 인어를 2번이나 봤으니.”

해적의 말에 주변 해적이 맞장구를 쳤다. 일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인어를 2번이나 봤다니. 그런데 왜 레드는 인어를 싫어하는 거지? 어제 본 그 얼굴을 떠올리면 싫어한다 수준이 아니라 깊이 증오하는 것 같았다. 바다의 생물인 인어는 특별히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인어를 잡아 팔 생각을 하는 상인이 아니라면 인어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할 텐데, 왜⋯.

“왜⋯, 싫어하시는 거예요?”

“글쎄? 우리도 몰라.”

돌아오는 대답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레드의 부하들은 그를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레드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면 먼저 부하들 사이에 선을 그은 것은 레드 같았다. 동료이지만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레드는 홀로 고고히 서 있는 꽃 같았다.



아침에 돌아온 해적들은 오늘도 시장 거리로 떠났다. 어제 다 구하지 못한 물품을 사 오겠다며 배를 내려가는 해적들을 배웅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적들은 배에 남겠다는 나를 더 꾀지 않고 레드의 시중이나 잘 들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거친 손짓을 따라 들썩이는 어깨에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하아⋯.”

혼자 남은 배 위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어제 시장 거리에서 본 노예들이 떠올랐다. 해적들의 시장에는 노예들도 있었다. 발목에 녹슨 쇠고랑을 차고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삐쩍 마른 노예들의 푹 파인 눈동자가 내 뒤를 따라왔다. 레드 뒤를 따르며 짐을 옮기다 우연히 본 그 노예들의 모습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일하자.”

몸이라도 바쁘게 움직이면 지울 수 있겠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을 깨문 채 양동이와 대걸레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남은 건 선장실뿐인가.”

갑판과 해적들의 방을 모두 걸레질하고 남은 방 하나를 앞에 두고 허리를 두드렸다. 배 전체를 혼자 청소하니 꽤 시간이 걸렸다. 슬슬 해적이 돌아올 것 같으니 선장실까지 얼른 끝내고 쉴까. 아무 생각 없이 선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걸레질을 시작했을 때였다.

달칵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몸이 크게 튀었다. 배에 남아있는 건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

선장실 뒤쪽에 있는 샤워실에서 나온 레드와 시선이 맞았다. 레드의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에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새겨진 표시.

노예 증표.

대해적인 그가 왜⋯?

“나가. 당장.”

레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정신없이 레드의 가슴을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안 계신 줄 알고⋯”

“‘이걸’ 본 사람이 네가 아니었다면 죽였을 텐데.”

키득, 멀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 레드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레드의 말은 내 혼란에 답을 주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숨을 삼키고 레드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선장실을 뛰어나왔다.

닫힌 문을 등지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웅크렸다. 내게 새겨진 것과 같은 증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노예였다.

“하하.” 하고 마른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슴에 움트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노예였던 그가 대해적인 된 것처럼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인지,

그의 비밀을 알게 되어 찾아온 우월감인지,

그가 나를 죽이지 않고 보내준 것에 대한 기쁨인지.

이게 무엇이든 잃고 싶지 않았다. 절대, 그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홀로 다짐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4.


항해 준비를 마친 해적선이 해골섬을 떠났다. 바다를 가르고 나아가는 배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부푼 하얀 돛이 하늘에 구름처럼 떠 있었다.

“로니, 어제 말했던 경로를 바꿔야겠다.”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레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틀었다.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제대로 배가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던 항해사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예? 경로를요?”

“응.”

“목적지를 바꾸실 건가요?”

“아니.”

“그럼 왜⋯. 이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인데요.”

항해사의 물음에 레드가 지도 한쪽을 끌어당겼다. “지금 이 길 말고, 여기를 통과해서 갈 거야. 그렇게 알아둬.” 하고 이유를 말하지 않고 명령을 내린 레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항해사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드의 등을 바라보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를 돌려 방향을 바꾸라는 항해사의 말에 해적이 돛 줄을 당겼다. 마주하고 있던 바람을 살짝 비키도록 돛을 돌리고 배를 회전시킨 해적이 땀을 닦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 길은 잘 안 가는데 말이야.”

“해류를 타고 가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데, 이번에도 캡틴의 감인가?”

“뭐, 캡틴 말을 따라서 큰일 난 적은 없으니까.”

무심한 해적들의 말에 슬쩍 끼어들어 항해사의 굳은 얼굴을 보며 물었다.

“왜 방향을 바꾸신 건가요⋯?”

“글쎄. 우리는 잘 모르지만, 캡틴은 바다에 사랑받는 남자니까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느끼신 거겠지.”

항해사의 말에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바다의 사랑을 받는 남자’라니, 처음 듣는 호칭에 고개를 기울이자 해적이 호탕하게 웃으며 자랑하기 시작했다.

“우리 캡틴은 저 로니놈 보다 더 바다를 잘 아신다고! 태풍이나 큰 파도가 올 거라고 미리 알아채신다니까~! 게다가 잘 안 가는 곳이라도 캡틴이 가자고 하면 항상 바다가 조용해진다고!”

‘크하하핫’ 하고 걸걸한 웃음소리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해적들의 말은 믿기 어려웠지만, 레드에겐 뭔가 신비한 분위기가 있어 나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 근처에서 상선을 습격할 준비를 끝낸 해적들은 체력을 아끼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층층이 쌓인 해먹에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해적들 사이를 조용히 빠져나와 갑판에 올랐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돛대에 단단히 묶어 놓은 돛을 잠시 보다가 갑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까만 밤하늘에 가득한 별과 둥근 달 덕분에 갑판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돈하며 앞으로 걸어가다 낯선 인영에 걸음이 멈췄다.

긴 코트와 커다란 모자를 보아 레드와 누군가가 함께 있었다. 키가 크지만, 해적들처럼 몸집이 크지는 않았다. 배 위에서는 본 적 없는 모습에 숨을 멈추고 발소리를 죽여 레드에게 다가갔다.

뭔가 위험한 상황인 걸까. 만약을 대비해 레드에게 금방 뛰어갈 수 있도록 다리근육을 잔뜩 긴장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숨을 작게 내쉬며 머릿속에 울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 발을 옮겼다. 레드 옆의 검은 인영은 친밀감을 과시하듯 레드와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손으로 보이는 것이 레드의 얼굴로 다가간 순간, 나도 모르게 갑판을 강하게 차고 말았다.

‘첨벙’

나를 발견한 검은 인영이 순식간에 바다로 뛰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자살행위에 놀라 난간으로 뛰어가 그 아래를 응시했다. 검은 바다는 배에 부딪쳐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내고 있었다. 바다에 떨어지자마자 배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건가? 아니면 어딘가로 헤엄쳐간 건가?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며 그를 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레드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선, 장님.”

레드는 내 쪽을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말없이 선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시린 눈을 깜빡였다.

왜 또 그런 얼굴을 한 걸까.

레드의 얼굴은 해골섬에서 인어를 봤을 때 지었던 것과 똑같았다. 짙은 증오와 무기력함, 거기에 슬픔이 버무린 내 부모님과 자주 보였던 얼굴.


바다로 뛰어내린 이는 누구였을까. 레드는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일까. 그가 가진 비밀은 밤하늘처럼 짙고 어두웠다.




5.


해골섬에서 얻었다는 정보에 따라 잠복해 있던 우리 앞에 상선이 나타났다. 레드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해적들은 곧 상선 가까이에 배를 대고 나무판을 난간에 걸쳐 상선으로 넘어갔다. 몇 번이고 반복해온 행위에 누구도 실패를 예상하지 않았다.


챙챙챙, 울리는 칼 소리를 등지고 들고 있던 나무 막대로 나를 향해 뛰어오는 해군의 칼부림을 간신히 막아냈다. 해골섬의 정보는 가짜였다. 상선으로 위장한 해군을 습격한 해적들은 잘 훈련된 해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미 많은 수의 해적이 갑판에 쓰러져 있었다.

해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해군들은 해적에 붙잡힌 노예라고 해도 처형할 것이 뻔했다.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해군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작은 몸집을 이용해 내려오는 칼을 피하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고위 해군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선장실로 들어갔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해적의 칼을 들고 해군을 밀치고 달려갔다.

“선장님!!”

‘쾅’ 하고 선장실 문을 거칠게 열자 해군과 대치하고 있는 레드가 보였다. 날카로운 칼끝이 서로를 향하고 천천히 옆으로 발을 옮겨 거리를 재던 레드와 해군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칼 소리가 어지럽게 얽혔다. 찌르고, 베고, 피하면서 몇 번이고 레드와 해군의 칼이 맞부딪쳤다. 격렬한 칼싸움에 책상도 책장도 엉망이 되었다.

손을 적신 땀을 거칠게 옷에 닦아내고 칼을 단단히 쥐었다. 내가 방패가 되어 저 사이에 끼어든다면 조금은 레드의 도움이 될까. 파르르 흔들리는 숨을 내쉬고 레드와 해군 사이로 큰 함성을 내지르며 뛰어들었다.

해군의 칼을 내가 한 번이라도 막아낸다면 레드가 살 수 있다. 그렇게 가로막은 순간, 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이 바보가!!”

처음 듣는 레드의 격한 목소리와 동시에 몸이 옆으로 밀쳐졌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책장에 부딪힌 등에 뜨거운 통증이 일었다.

레드는?!

고통도 잊고 눈을 올린 순간 해군의 칼이 레드의 가슴에 박혔다.

“안 돼!!!”

내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새된 비명이 울렸다. 해군은 그 얼굴에 비열한 미소를 피우고 더 더 깊숙이 레드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다. 절망에 풀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책장 아래 주저앉은 채 레드를 응시하던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도 쉴 수 없었다.

왈칵 쏟아질 핏물을 예상하며 칼을 돌린 해군이 눈을 크게 떴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낼 것이 분명했던 레드는 비웃음을 흘리며 해군을 발로 찼다.

“어, 떻게⋯. 왜 죽지 않는 거야!!”

해군의 갈라진 비명에 레드의 비웃음이 깊어졌다. 놓쳤던 칼을 고쳐 쥔 레드가 당황한 해군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다.

“이 정도로는 나를 죽일 수 없어.”

웃음과 슬픔이 섞인 자조적인 목소리가 이미 숨이 멎은 해군에게 내려앉았다.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피를 내려다보던 레드가 한숨과 함께 칼을 빼냈다.

“선장, 님⋯.”

뚝, 뚝. 푸른 칼끝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레드를 따라 내게 다가왔다. 주저앉은 내 목에 칼을 들이댄 레드가 가슴 시리도록 슬픈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내 비밀을 본 녀석이 있으면 안 돼. 널 살려주면 그 자식이 화내거든. 그러니까⋯, 미안해.”

나지막이 죄를 고백하듯 속삭인 레드가 칼을 높이 들었다. 빛 하나 없는 밤하늘이 내게 내려왔다.




6.


잠잠하던 바다가 별안간 거칠어졌다. 5m가 넘는 커다란 해일이 배를 흔들더니 전투가 한창이던 갑판을 덮쳤다. 갑판에 있던 해군도, 해적도, 산 자도, 죽은 자도 모두 해일에 휩쓸려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어진 더 큰 파도가 해적선 옆에 있던 해군의 배를 박살 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의 비명이 가라앉는 배 위로 울려 퍼졌다.


오직 선장만이 살아남은 해적선은 바다가 이끄는 대로 먼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무인도에 배가 멈췄다. 레드는 무기력하게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던지고 사다리를 타고 섬으로 내려갔다.

“오소마츠.”

모래밭에 발을 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눈앞에 있는 자를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아래로 떨군 레드의 귓가에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디 다치진 않았나?”

퍽 자상한 말투에 레드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얼굴을 쓰다듬는 차가운 손을 쳐낸 레드가 고개를 들어 정면에 있는 인물과 눈을 마주했다.

“⋯.”

“이런. 그렇게 화내지 마. 내가 말했잖아? 내 영역을 벗어나지 말라고. 그리고 선원은 또 사면 되잖아? 자, 여기 인어의 눈물이다.”

남자가 레드의 손에 억지로 하얀 진주를 쥐여 주었다. 손 위에 얹어진 진주는 그 어떤 보석보다 귀한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든 레드의 눈가가 붉은 것을 본 남자가 애처롭게 눈썹을 찡그렸다.

“⋯.”

“오소마츠, 설마 겨우 몇 년 함께한 그놈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아니겠지?”

순식간에 차가워진 남자의 목소리에 레드가 그럴 줄 알았다며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레드를 ‘오소마츠’라 부르는 남자. 그는 인어이자 바다신의 아들이었다. 보통의 인어는 물 밖으로 나올 수 없지만, 바다신의 아들인 그는 지느러미를 인간의 다리로 바꿀 수 있었다. 다만 인어의 특징인 인간과 다른 귀와 목과 어깨에 걸쳐 난 아가미는 인간의 모습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그시 레드를 응시하는 인어, 카라마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소마츠, 나의 사랑. 네 심장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알고 있겠지? 네가 누구의 것인지 잊지 마라.”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처럼 귓가에 비수를 꽂은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말을 내는 입술을 레드가 말없이 받아들였다. 해수에 젖은 촉촉한 입술이 부드럽게 레드의 입술을 감쌌다.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한 손으로 레드의 허리를 감싼 카라마츠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입술에 닿는 미끄러운 살덩이에 레드가 한탄을 삼키고 기계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열린 치아 사이로 불쑥 들어온 혀가 레드의 입안을 훑었다. 치열을 따라 입안으로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간질이더니 뻗어온 레드의 혀와 얽혔다. 혀의 옆면을 핥고 가장 약한 곳을 집요하게 핥는 혀에 레드가 참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하, 읏.”

타액으로 젖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가녀린 신음에 카라마츠가 빙긋 웃으며 입술을 뗐다.



레드는, 오소마츠는 노예였다. 아직 어려 노예의 증표도 새겨지지 않은 오소마츠는 그의 형제들과 상선에 태워져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운이 나빴는지 오소마츠를 태운 상선은 커다란 폭풍을 만났고, 배는 엉망진창으로 찢어졌다. 배의 파편과 함께 오소마츠의 형제들은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오소마츠 역시 형제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 터였다. 그의 인어,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무인도에서 오소마츠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에 오소마츠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형제를 모두 잃었다는 슬픔보다 놀라움이 더 켰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놀라고, 눈앞에 인어가 있는 것에 놀랐다. 카라마츠는 자신을 바다신의 아들이라 간단히 소개하며 오소마츠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노예의 증표를 새겼다.


무인도에서 나와 배를 타고 해골섬을 향해 조타를 돌린 오소마츠가 자신의 가슴께를 강하게 쥐었다. 노예의 증표, 카라마츠의 것이라는 증거. 손바닥 아래 가슴에서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구한 이유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소마츠는 그 무인도에서 몇 년 동안 카라마츠의 애완인간으로 살았다. 카라마츠는 끊임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오소마츠를 속박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곁에서 미지근하고 달달한 설탕물에 익사해가는 것 같았다. 점점 그의 손길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싫어 몇 번이고 무인도를 탈출하려 했지만, 카라마츠는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탈출 시도가 스무 번을 넘기자 오소마츠가 망가지는 것을 걱정한 카라마츠가 제한된 자유를 허락했다. 무인도에서 나가 인간들 사이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다만 정기적으로 이 무인도에 돌아와 카라마츠와 만나야 했다.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가슴에 새긴 증표로는 부족했는지 무인도를 떠나는 오소마츠의 심장을 빼앗았다.

오소마츠의 목숨과 더불어 그의 모든 것은 카라마츠의 것임을 잊지 못하도록.



지평선 너머로 보이기 시작한 해골섬에 오소마츠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망할 새끼.”

자신 외의 다른 이가 오소마츠의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을 카라마츠는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정기적으로 오소마츠의 부하들을 죽였다. 그것을 알기에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으려 선을 그었지만, 가슴을 아리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 오소마츠의 동생을 떠올리게 하던 작은 아이조차.

철창에 갇혀 고요하게 자신과 눈을 맞추던 작은 아이를 떠올린 오소마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증오를 짓씹으며 이를 갈았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주인을 향해 세상의 모든 욕을 퍼붓는 오소마츠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 하나가 떨어졌다.





* 카라마츠는 인어였습니다~

* 여기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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