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때문에 밤새는 김에 마무리한 카라오소입니다!
* 오랜만에 쓰는 카라오소인데 미적지근합니다...
* "카라→←오소"가 "카라→오소"가 되었습니다ㅎ
* 카라마츠가 아프지 않아요..
* 공미포 17,107자.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합겠습니다^^
오소른 50제
18. 미안해 (카라오소) 물밭 님 신청 키워드.
1.
“그럼 아저씨, 내일 봐~!”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손을 흔들어 아저씨에게 인사를 마치고 집을 향해 뛰었다.
평일의 유일한 낙, 내가 요즘 빠져있는 예능이 시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걸어서 15분 거리를 달음박질로 7분으로 줄였다.
헉헉대는 숨을 몰아쉬며 낡은 3층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했다.
캉캉 둔탁한 소리를 내며 녹슨 계단을 올라 201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방송이 시작하기 전에 도착한 것에 안도하며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TV 앞에 앉았다.
버려진 TV를 주워 아저씨와 함께 고물상에서 부품을 구해 고친 TV는 20년도 전에 나온 모델이었다.
이젠 보기 힘든 둥근 화면, 그래도 디지털 뭐시기?를 설치한 덕분에 공중파는 잘 나온다.
진행자인 유명 개그맨이 화면에 나와 인사하는 것에 맞춰 맥주캔을 땄다.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엉망으로 망가지는 개그맨들의 모습에 박장대소했다.
기억상실이라는 건 꽤 다양한 원인으로 일어나고, 그 정도도 각양각색이라고 한다.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는 사람도 있고, 특정한 기억을 잃는 사람도 있다.
정말 심하면 장기 기억이 손상되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나, 일상 생활 속 도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잊어버린다.
그렇게 다양한 기억상실 중에서 나는 대체 어디에 속하는 걸까?
처음 눈을 뜬 건 이 낡은 아파트 안이었다.
접이식 간이 식탁과 침대가 전부인 아파트. 얇은 벽 너머에서 이웃의 발소리가 전부 들렸다.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을 때, 문득 깨달았다.
어라? 나…, 는 누구지?
순식간에 밀려온 패닉에 제대로 숨 쉬고 있는지도 불확실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자신에 대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가족, 성격, 취향, 그리고 심지어 이름까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이 리셋된 것처럼 새하얬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자신의 상태에 혼란이 더 심해졌을 때, 식탁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엔 ‘눈을 뜬 나에게’라고 적혀있었다. 설마…? 의구심을 안고 편지를 열었다.
편지엔 왜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지 그 이유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더불어 기본적인 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은 마츠노 오소마츠.
믿기 힘들지만 육둥이의 장남이라고 한다.
부모님의 이름은 마츠노 마츠조와 마츠노 마츠요.
부모님의 이름과 함께 본가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동생들의 이름과 간단한 특징도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왜 내가 기억을 전부 잃었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마츠노 오소마츠는, 자신의 친동생을 사랑했다고 한다.
바로 아래의 동생, 마츠노 카라마츠를.
언제부터,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상냥한 동생에게 형제 이상의 애정을 바라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괴상해서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자신을 버리기로 했다고.
아파트는 도박으로 돈을 모아 2년 계약했고, 근처 ‘바다의 집’(바닷가 음식점 겸 숙박시설)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다고 쓰여 있었다.
더불어 절대 집에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자신의 마음과 함께 모든 것을 버리기로 각오했기에, 카라마츠뿐 아니라 다른 동생들과도 연락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인데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상식적으로 자신의 친동생을 좋아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육둥이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가족이다.
어떻게 그런 녀석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
피가 이어진 동생, 게다가 같은 얼굴인데.
기억을 잃기 전의 마츠노 오소마츠는 어지간히도 미친 녀석이었던 것 같다고 독백하며 남은 편지를 읽어나갔다.
남은 편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어릴 땐 누구와 어떻게 놀았고,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가장 최근까지 백수로 지냈고, 파칭코와 경마가 취미, 초 귀여운 소꿉친구가 있고….
뭐 그런 자잘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편지를 다 읽고 주방으로 걸어가 주머니에 들어있는 라이터로 편지를 불태웠다.
싱크대에서 활활 타오른 편지는 곧 까만 재가 되었다.
주머니에 라이터와 함께 들어있던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편지 옆에 놓여 있던 약병을 집어 들었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소마츠의 지인인 데카판 박사라는 사람이 만든 약이라고 한다.
이 약을 먹으면 기억을 잃을 수 있다는 듯하다.
그런 약이 세상에 발표된다면 엄청난 일이 될 것으로 생각하며 남은 약을 전부 변기에 흘려보내고, 빈 병은 쓰레기통에 넣었다.
편지를 불태우는 것도, 약을 버리는 것도,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것도 전부 편지에 적혀 있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진 ‘마츠노 오소마츠’의 바람이었다.
친동생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지만, 그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이해되었다.
같은 집에서 시종일관 좋아하는 녀석이 함께 있다. 좋아해선 안 되는 녀석을 좋아해 버린 그 마음을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분명 괴로웠을 것이다.
담배와 라이터, 빈 약병이 든 쓰레기봉투를 묶어 밖에 내놓았다.
손을 탁탁 털면서 아파트에 다시 돌아오니 ‘마츠노 오소마츠’가 남긴 것들은 전부 사라져 버렸다..
― 마츠노가 육둥이의 장남 ‘마츠노 오소마츠’는 이날 죽었다.
2.
두둑해진 지갑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체국을 향했다.
이번 달에 딱 일한 지 3년이 되었다고 아저씨가 월급을 올려주었다.
그렇게 많이 늘어나진 않았지만, 통장에 박힌 돈이 늘어난 게 기뻤다.
우체국에서 산 편지봉투에 부모님의 이름과 주소를 써서 지갑에 넣어둔 돈을 꺼내 넣었다.
매달 월급이 나오면 부모님께 돈을 송금했다.
‘마츠노 오소마츠’는 딱히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내놈 6명을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운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6명 전원 백수라는 얼척없는 상황에서도 아들들을 구박하지 않은 것은 정말 존경스럽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는 공란으로 비워두고 창고에 가서 편지를 보냈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를 비워도 우표나 편지 봉투에 찍힌 우체국 날인을 조사하면 곧 여기서 보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것이다. ‘마츠노 오소마츠’는 기억을 잃기 전 부모에게 미리 말을 해 두었다.
긴 여행을 떠났다 오겠다는 말에 부모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다. 집을 떠나 3년.
지금까지 ‘마츠노 오소마츠’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걸 보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체국을 나와 지갑에 남은 돈을 확인했다.
그렇게 많이 남진 않았지만, 오늘은 그렇게 기다렸던 월급날이다.
오늘 하루쯤 호사를 부려도 큰 타격은 없겠지.
제 생각에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시장가로 발을 옮겼다.
이런 날은 고기를 좀 뜯어줘야 한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전골 재료를 샀다.
고기는 기본, 통통한 새우와 각종 채소를 사 장바구니에 담고 콧노래를 부르며 시장 골목을 걸었다.
이제 재료는 다 갖췄고 집에 가서 요리만 하면 끝난다.
단골 정육점에서 특별히 받은 육수도 있으니 오늘 전골은 맛있을 게 분명하다.
혀끝에 맴도는 감칠맛에 입맛을 쩝쩝 다시며 시장가를 막 벗어났을 때였다.
“오소마츳!!!”
강한 힘으로 팔을 붙잡혀 뒤로 당겨졌다.
고개를 돌리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눈과 마주쳤다.
나와 똑같은 얼굴.
아, 이 녀석…. ‘마츠노 오소마츠’의 동생이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건가!! 왜 연락도 안 하고!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고 있나!?”
시장 골목이 다 울리도록 외치는 남자의 목소리엔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있었다.
멍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내 팔을 붙들고 있는 남자의 손을 응시하고 눈을 올렸다.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뗐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내가 도망치려는 것으로 이해했는지 팔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솔직하게 “아파!” 하고 짜증을 내고 남자를 끌고 집으로 향했다.
당황한 듯한 남자는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물론 걷는 내내 내 팔은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진짜 멍들 것 같은데.
아프고.
푹-, 하고 새어 나온 한숨과 함께 아파트 문을 열었다.
형광등을 켜고 주방에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뭐해? 들어와.”
우두커니 현관에 서 있는 남자에게 손짓했다.
“아, 아아….” 하고 말을 흐린 남자가 운동화를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기와 새우를 냉장고에 넣고 방안에 정좌해 있는 남자 앞에 앉았다.
“….”
“….”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짓누른다.
일단 동생이고, 그 자리에서 계속 소동을 피우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으로 데려오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 저기….”
“계속, 여기서 머물렀던 건가?”
“아, 응….”
“왜 집에 돌아오지 않았나.”
“어…, 여기서 취직했으니까…?”
“취직? 오소마츠가 취직을 했다고…?!”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묻는다.
뭐야, 내가 취직한 게 그렇게 신기한가?
남자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기울이고 “응….” 하고 대답했다.
짙은 눈썹을 찌푸린 남자가 “말도 안 돼….” 하고 중얼거렸지만, 일단 거긴 넘어가기로 한다.
남자는 찡그린 눈썹을 풀기는커녕 더 짙은 주름을 만들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왜, 우리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나.”
“…어, 귀찮아서…?”
“…나, 때문인가?”
“응?”
되묻자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아무것도….” 하고 말을 흐렸다.
입을 다문 남자를 보며 작게 혀를 차고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설마 동생을 만나게 될 줄 몰랐고, 만났을 때 어떻게 할지 대처법도 생각하지 않았다.
괜히 집에 들였나?, 하는 후회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여기서 함께 돌아가자고 말한다면 나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전부 다 털어놔?
“동생을 좋아해서 기억을 잃었습니다~!” 하고?
우와-, 뭐야 그거. 최―악.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남자가 먼저 말을 하길 기다렸다.
되도록 빨리 뭐라도 말해주기를 바라며 양반다리를 한 채 덜덜 떨었다.
슬슬 한계다. 내 위장이.
휴일이라 늦잠 잤고, 점심은 근처 편의점에서 산 빵으로 때웠다.
지금 당장 꼬르륵- 소리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배가 고팠다.
“…또, 와도 되겠나?”
“…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 모습에 문득 이 녀석이 ‘오소마츠’가 좋아하던 동생이라고 깨달았다.
그런가, 이 녀석이 ‘마츠노 카라마츠’.
여기서 두 번 다시 오지 말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동생에게 너무 매몰차고.
그렇게 차갑게 잘라내면 오히려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카라마츠’에게 들켜서 다른 동생들도 여기로 찾아온다면, 그것도 좀 곤란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대답을 고르다가 카라마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녀석에게 여기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또 와도 괜찮아.”
“알겠다.”
좀 더 망설일 거로 생각했는데, 카라마츠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뭐 아무렴 됐나?
카라마츠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배고프다.
주방으로 들어가 채소를 다듬으려다가 아직 방에 남아있는 카라마츠에게 눈길이 갔다.
“저기…, 저녁 먹고 가.”
“에? 저녁?”
“응. 마침 오늘 월급날이라 고기 많이 샀고. 저녁 아직이지?”
“아, 아아…. 그렇지만.”
“괜찮아-, 괜찮아~. 사양하지 말고 먹고 가~! 오늘 저녁은 무려 전골이니까!”
씩- 웃으며 말하고 장바구니에서 채소를 꺼내 다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채소가 잘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주방에 울렸다.
싱크대 밑에서 전골용 냄비를 꺼내는 나를 보며 카라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오, 오소마츠가 요리하는 건가?”
“응-? 그럼 누가 하는데?”
“어? 아니, 오소마츠는 요리 못하지 않나? 예전에도 녹색 카레를 만들어서 쵸로마츠가 식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갔었잖아….”
“어, 어어…. 그, 랬었지…. 지금은 괜찮아! 연습했으니까!”
기억에도 없는 일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도 나는 모른다고.
쓴웃음과 함께 적당히 얼버무리며 식탁 위에 가스버너를 올렸다.
녹색 카레는 대체 뭐야?
나 그렇게 요리 못했어!?
용케 지금까지 살아있네!?
새우를 손질하며 자신에게 태클을 걸고 이마에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아냈다.
별생각 없이 데려왔는데, 혹시 이거 내 무덤 판 건 아니겠지?
바짝 긴장하자는 생각으로 마른침을 삼키고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전골을 주방 가스레인지에서 식탁 위 가스버너로 옮겼다.
붉게 익은 새우와 각종 채소, 버섯이 끓어오르는 육수를 따라 위아래로 들썩였다.
방안에 퍼지는 맛있는 냄새를 잔뜩 들어 마시고 입에 돌기 시작한 군침을 삼켰다.
어정쩡하게 앉아있는 카라마츠에게 젓가락과 앞접시를 내주고 국자를 들어 고기와 새우를 떠냈다.
“맛있게 먹어!”
“아, 잘 먹겠다….”
국자를 건네주며 말하자 카라마츠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움찔대며 국자를 뜨는 모습을 보니 또 맛이 없을 거라 걱정하는 것 같았다.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과장되게 새우를 입으로 옮겼다.
통통한 새우가 적당히 육수를 머금어 입안에서 톡- 터졌다.
“음~~!! 맛있어!!”
이건 감격의 눈물을 흘려도 될 정도다.
땡큐! 정육점 아저씨!!
아저씨의 특별 육수가 아니었다면 이런 감칠맛은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새우를 꼭꼭 씹어 넘기고 이번엔 고기를 집어 들었다.
야들야들한 고기는 곧 입안에서 육즙을 쏟아내며 녹아내렸다.
나도 모르게 “으아-, 맛있어~~!” 하고 감탄사를 흘리며 연달아 고기를 입으로 옮겼다.
카라마츠는 눈을 깜빡이며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곧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덥석 물었다.
“…마, 맛있다?!”
“그치-?”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카라마츠의 접시에 고기와 새우를 떠 주었다.
고맙다고 작게 인사한 카라마츠가 식사에 집중했다.
나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린 결과, 30분도 지나지 않아 전골냄비는 바닥을 보이며 텅 비어버렸다.
“자, 갈아입을 옷.”
“아…. 고맙, 다.”
저녁 식사 후, 애매한 시간이라 차라리 자고 가라고 제안했다.
카라마츠는 놀라 입을 벙긋거리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낡은 아파트였지만 그대로 제대로 욕실은 갖추고 있었다.
욕조에 적당히 물을 받고 카라마츠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어제 빨아놓은 새 옷을 꺼내 수건과 함께 건네주고 카라마츠가 벗은 옷을 정리했다.
바다처럼 푸른색의 후드와 스키니진을 옷걸이에 걸고 간이 식탁을 접었다.
걸레를 살짝 적셔 바닥을 닦고 손님용 이불을 깔았다.
베개와 이불까지 세팅이 끝났을 때, 카라마츠가 욕실에서 나왔다.
진회색 츄리닝 바지와 흰 반팔티를 입고 나온 카라마츠가 어색한 움직임으로 내 옆에 다가왔다.
“먼저 자도 괜찮으니까.”
“아…, 같은 이불에서 자는 게 아닌 건가….”
“하? 무슨 소리? 사내놈 2명이 한 이불!? 징그러!”
“엩, 그치만…. 집에서는 항상 여섯이서 같은 이불에서 잤잖아.”
“….”
뭐야, 그거!! 호러!?
안 그래도 얼굴이 똑같아서 무서운데, 사내놈 여섯이 한 이불~?!
나도 모르게 상상하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스륵- 팔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진저리치고 나서야 나를 빤히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눈치챘다.
앗차-….
숨을 들이마시고 “그랬지만, 이젠 징그러우니까!! 난 그럼 씻으러 들어갈게!” 하고 괜히 언성을 높이고 욕실로 도망쳤다.
제발 내가 욕실에서 나갔을 때 카라마츠가 잠들어있기를 기도하며 평소보다 더 느긋하게 몸을 씻었다.
다행히 내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카라마츠가 들어간 이불은 조용했다.
슬쩍 고개를 숙여 카라마츠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젖은 수건 2장을 세탁기에 넣고 형광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알람 소리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 몸에서 나는 소리에 신음하며 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시야에 하얀 이불이 들어왔다.
아, 어제 카라마츠 만났지….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빨리 준비하면 출근 전에 카라마츠를 배웅할 시간이 생긴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카라마츠를 슬쩍 피해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원래 아침은 잘 먹지 않으니까 건너뛰고, 옷을 갈아입고 카라마츠에게 다가갔다.
“어~이! 일어나! 나 출근해야 해. 너도 오늘은 돌아가.”
“으, 으응…. 오, 소마츠?”
“오-.”
“읏, 오소마츠!!!”
“우왓! 깜짝이야! 왜 그래?”
가늘게 뜬 눈으로 묻는 말에 대답하자 카라마츠가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놀라 몸을 움찔거리며 카라마츠와 거리를 띄웠다.
악몽이라도 꿨는지 숨을 들썩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카라마츠를 다시 불렀다.
뭘 떨쳐내려는 건지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든 카라마츠가 얼굴을 쓸어 올리며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옷걸이에 걸어둔 옷을 건네주고 먼저 현관을 나왔다.
10분 정도 지나서 카라마츠도 옷을 갈아입고 현관으로 나왔다.
열쇠를 잠그고 계단을 내려가는 내 뒤로 카라마츠가 따라왔다.
근처 역까지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카라마츠를 데려갔다.
몇 번 버스를 타면 되는지 알려준 후, 차비는 있냐고 묻자 지갑을 확인한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역으로 가는 버스가 언덕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 저 버스 타면 돼. 그럼 조심히 가-.”
버스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카라마츠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슬슬 나도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고.
카라마츠는 멍청히 버스를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고 내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오소마츠.”
“오, 오오-. 왜?”
“반드시 또 오겠다.”
“아, 네.”
양손으로 내 손을 잡아 소중하게 감싼 카라마츠가 의미 모를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곧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카라마츠는 버스에 올라 버스가 정류장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내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3.
처음 만난 이후로 카라마츠는 매주 주말 이곳에 왔다.
내 집에서 머물며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카츠카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까지 매주 오면 차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카라마츠는 정말 한 번도 쉬지 않고 매주 왔다.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니냐고 가볍게 구박하며 차비는 괜찮으냐 묻자, 주중에 알바를 하고 있으니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소마츠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하고 슬쩍 시선을 피하는 카라마츠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처음 한두 번 왔을 때는 나도 나름 신경 써서 관광지를 함께 돌아다닌다든가 했지만, 매주 오면 말이 달라진다.
솔직히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고.
‘오소마츠’는 형제가 많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자각한 뒤로 줄곧 혼자 지내왔다.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그 감각을 잘 모르겠다.
대체 뭐가 재미있는지 카라마츠는 매주 왔고, 나는 나대로 카라마츠를 신경 쓰지 않고 생활했다.
물론 밥은 같이 먹는다던가 함께 할 수 있는 건 같이 했지만.
대체로 외출하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휴일엔 집에서 빌려온 DVD를 본다던가 게임을 했다.
두 달간 돈을 모아 산 플레이○테이션으로 능숙하게 적을 총으로 쏴대는 나를 카라마츠는 신기하단 눈으로 응시했다.
집이 아닌 타지이고, 우리 동네는 관광지가 많으니까 돌아다닐 데도 제법 있는데도 카라마츠는 집에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집에 머물면 함께 집에 있었고, 내가 외출하면 카라마츠도 함께 외출했다.
솔직히 좀 고역이었다. ‘오소마츠’의 동생이지만, 내겐 그냥 타인에 불과하다.
같은 얼굴이고 분명히 피가 이어져 있는데도 어쩐지 카라마츠는 좀 대하기 어려웠다.
동생이란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분명 20년 넘게 함께 지낸 동생인데도 친숙함보다 낯섦이 먼저 다가왔다.
꼭 마음이 잘 맞지 않는 친구와 있는 것 같은…, 아니면 불편한 상사와 있는 것 같은 까끌까끌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오소마츠’ 시절의 기억을 잃었다지만, 정도가 너무 심했다.
대체 왜?
자신에게 물어봐도 ‘오소마츠’가 답을 주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동생이지만 ‘오소마츠’가 좋아했던 녀석이라서?
그래서 불편한가 생각해도, 좋아했던 녀석이라면 오히려 함께 있고 싶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늘도 내 곁에서 멍청한 얼굴로 함께 빌려온 영화를 보고 있는 카라마츠를 쳐다보았다.
딱히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대화가 잘 통하는 것도 아니다.
카라마츠는 이상한 단어와 영어를 써가며 대화를 산으로 날려버리기 일쑤였으니까.
자신의 집인데도 불편한 느낌이 들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 던져놓은 스마트폰이 울리는 것을 눈치채고 들어 올리자, 아저씨의 이름이 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바다의 집’ 사장님인 아저씨는 가끔 좋은 술을 입수하면 내게 나눠주곤 했다.
주말인 오늘 연락하는 이유도 분명 좋은 술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 분명했다.
맛난 술을 얻어먹을 수 있겠단 생각에 들뜨는 기분을 가라앉히고 아저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카라마츠는 영화에 집중해있으니 괜찮겠지.
침대에 던져 놓았던 노란색 집업을 걸치고 카라마츠를 불렀다.
“카라마츠. 나 약속이 있어서 좀 나갔다 올게. 너는 영화 계속 보고 있어.”
“엩!? 아니, 그럼 나도 가겠다. 같이 가면 안 되는 건가?”
“어…. 직장에서 알게 된 사람이라서. 무슨 고민 상담할 것 같고. 네가 가면 그 사람도 곤란할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은 좀….”
나를 따라 일어서려는 카라마츠를 제지하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좀 아깝지만 유키치(1만엔 지폐에 그려진 인물) 3장을 꺼내 카라마츠에게 쥐여주었다.
“그 돈으로 이 근처 관광지 돌아보고 있어!”
“오, 오소마츠!!”
“그럼 갔다 올게-!”
나를 멈춰 세우려는 카라마츠의 부름을 귓등으로 흘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탕탕 계단을 울리며 내려가 전력으로 아저씨 집을 향해 뛰었다.
후하~, 하고 술 냄새가 나는 날숨을 토해냈다.
가볍게 휘청거리는 다리로 도착한 아파트를 보자, 내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슬금슬금 올라오는 졸음에 눈을 비비고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가지런히 깔아놓은 이불에 앉아있던 카라마츠가 “어서 와, 오소마츠.” 하고 나는 맞이했다.
“다녀왔어어~.” 하고 대답하며 현관에 발을 올린 순간, 현기증이 몰려와 눈앞이 빙글 돌았다.
“우왓!” 하고 비명 지르며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괘, 괜찮나!?”
“응-.”
걱정하며 다가오려는 카라마츠에게 손짓하고 어깨를 문지르며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컵에 따랐다.
컵에 차오르는 보리차를 보니 괜히 더 갈증이 일었다.
벌컥벌컥 보리차를 들이켜고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폭신폭신한 이불에 감싸여 뜨거운 숨을 내뱉고, 아직도 나를 응시하고 있는 카라마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광지는 돌아봤어~?”
“아아.”
“어때? 괜찮지?”
“아-, 좋았다.”
“후햣-, 그렇지이~?”
시원스럽게 좋았다고 대답하는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좋아서 즐겁게 웃었다.
지금까지 몰랐는데 이 녀석 목소리 좋네-.
적당히 낮고, 남자다워서.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다.
눈을 깜빡여 흐려진 시야를 다시 되돌리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응시하던 카라마츠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보였다.
응? 뭐에 놀란 거야?
눈을 굴려도 평범한 내 방이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돌려 내 눈을 피하곤 “늦었으니 얼른 자라.” 하고 내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오-, 상냥해~! 인기 많겠네-, 카라마츠~.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응-. 잘 자, 카라마츠.” 하고 인사를 던지고 내 의식은 끊겨버렸다.
다음 날,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끌고 카라마츠를 배웅했다.
정류장에서 손을 흔드는 내게, 버스에 오르던 것을 멈춘 카라마츠가 물었다.
“오소마츠, 내게…. 할 말 없나?”
“할 말…?”
너무나 뜬금없는 질문에 눈썹을 찌푸리자, 카라마츠가 쓴웃음을 떨어뜨리고 “아니다.” 하더니 버스에 올랐다.
멀어지는 버스를 배웅하면서 어젠 너무 심했다고 반성했다.
이 먼 곳까지 제 형을 보러 온 기특한 동생인데 너무 혼자 방치했다.
다음에 왔을 땐 좀 더 잘해주자, 혼자 다짐하며 일터를 향해 발을 옮겼다.
역에 도착했다는 카라마츠의 연락에 신발을 구겨 신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항상 카라마츠가 내 집까지 왔었지만, 오늘은 특별 서비스!
내가 정류장까지 마중 나가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린 카라마츠는 정류장에서 내가 손을 흔들고 있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걸어왔다.
“오소마츠?”
“오-! 어서 와!”
“아, 다녀왔다.”
“그럼 가자!”
“에? 어디를?”
“장 보러!”
어리둥절한 카라마츠를 끌고 시장가로 향했다.
살갑게 인사하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에게 적당히 재롱부리고 덤을 받았다.
채소와 밀가루를 사고, 마지막으로 정육점에서 닭가슴살을 사서 시장을 나왔다.
오늘 내일은 카라마츠에게 잘 해주자고 다짐했으니까.
오늘 저녁은 가라아게다.
이전에 저녁으로 먹다 남은 가라아게를 줬을 때 좋아하는 눈치였고.
장바구니를 가볍게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옆에서 나란히 걷던 카라마츠도 나를 보며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하고 물었다.
적당히 “응-.” 하고 대답하고 집을 향해 걷던 와중에 시야에 새로 개장한 파칭코가 들어왔다.
“아-, 여기 공사하더니 파칭코가 들어왔구나. 아저씨가 좋아하겠네.”
흘리듯 내뱉은 말을 카라마츠가 주워 되물었다.
“오소마츠도 좋아하잖아?”
“응? 난 별로.”
그렇게 대답하자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하나가 멈췄다.
아차, 하고 생각했다.
나는 도박을 좋아하지 않지만 ‘오소마츠’의 취미는 파칭코와 경마.
편지에 적혀 있던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초고속으로 잔머리를 굴리며 몸을 비틀었다.
“요즘엔 별로 안 땡겨서~!”
변명하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사고 싶은 게임이 있어 돈을 아끼다 보니 파칭코도 끊게 되었다고 상세히 설명하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카라마츠가 멈췄던 발걸음을 이었다.
“그런가….” 하고 내게 걸어오는 카라마츠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카라마츠와 함께 있으면 불편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내가 ‘오소마츠’가 아니란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 언동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것도 하나하나 전부. 푹- 지친 한숨을 내뱉고 카라마츠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어색한 침묵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일단 지금은 요리가 먼저다.
원래 가라아게는 닭다리살로 하지만, 나는 가슴살을 좋아하니까 가슴살을 한입 크기로 자른다.
적당히 밑간을 하고 전분과 달걀로 튀김옷을 입혀 그대로 튀겨냈다.
겉은 바삭바삭 속은 촉촉한 가라아게 완성! 가슴살이라 조금 퍽퍽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씹는 맛이 있어 좋아한다.
식탁에 내려놓은 가라아게를 먹으며 카라마츠에게 내일 열리는 축제 이야기를 했다.
우물우물 가라아게를 잔뜩 입에 집어넣고 먹는 카라마츠는 꼭 햄스터 같았다.
“그러니까-, 내일 같이 축제, 갈래?”
“…아, 아아!!”
입안 가득하던 가라아게를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긴 카라마츠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괜찮은 건가?
아무튼 기쁘게 헤실 웃는 카라마츠를 보며 같이 가자고 해서 다행이라고 혼자 속삭였다.
4.
제법 크게 열린 축제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미리 아저씨에게 받아둔 유카타를 입고 나막신을 끌며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거라 좀 낡은 느낌이 들긴 해도 진회색 민무늬 유카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카라마츠가 입은 군청색 민무늬 유카타도 어울렸고.
오비에 부채를 끼우고 이리저리 축제를 돌아봤다. 돌아보는 중간에 배가 고파 두리번거리자 카라마츠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야키소바?”
“응. 자.”
“오-, 땡큐. 잠깐만 돈….”
“내가 사주는 거다.”
카라마츠가 건넨 야키소바는 뜨끈뜨끈했다.
카라마츠에게서 젓가락을 받아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후루룩- 소바를 빨아들였다.
“맛있나?”
“응! 최고 맛있어!”
“그래….”
카라마츠도 먹을 거로 생각했는데 카라마츠는 사과 사탕을 하나 사서 베어 먹었다.
내가 먹던 야키소바를 권해도 카라마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야키소바로 배를 채우고 다시 돌아다니면서 이번엔 여러 점포에 들렸다.
금붕어 건지기, 사격에 도전했지만 호탕하게 실패해버렸다.
사격은 전부 엉뚱한 곳을 맞췄고 금붕어 건지기는 말하기가 처참할 수준이다.
옆에서 내가 하는 모습을 지켜본 카라마츠가 한숨을 내쉬는 내 어깨에 툭- 손을 올려 위로하며 말했다.
“오늘따라 운이 따라주지 않는구나, 오소마츠. 항상 성공했었잖아.”
“아-, 응…. 좀 더운데 빙수 먹으러 갈까?!”
항상 성공했다고 말해도 말이지…. 나는 축제가 처음이라고. 사람 많은 것도, 시끄러운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동네 축제인데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다. 여기서 더 추궁해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판단에 서둘러 말을 돌려 빙수 가게로 발을 재촉했다.
“딸기, 블루 하와이, 오렌지, 멜론, 바나나 맛인가-…. 카라마츠, 넌 무슨 맛?”
“블루 하와이.”
“흠―, 아저씨! 블루 하와이 하나랑 멜론 하나요!”
“넵! 블루 하와이 하나랑 멜론 하나요~!”
카라마츠에게 블루 하와이 시럽이 뿌려진 빙수를 건넸다.
눈을 깜빡이며 빙수를 응시하던 카라마츠가 빙수를 받아 들며 나를 보고 물었다.
“오소마츠.”
“응~?”
“왜 멜론 맛으로 산 건가?”
“어?”
카라마츠의 말에 심장이 쫄깃해졌다.
에? 뭐야? 빙수 맛 고르는 것도 ‘오소마츠’만의 규칙이 있어?
대답을 기다리는 카라마츠의 시선이 따갑다.
머리를 굴리며 일단 빙수를 한가득 입안에 집어넣었다.
찡-, 하고 머리가 아파졌지만 일단 대답을 궁리할 시간은 번 셈이다.
입안에서 시럽과 함께 녹아가는 얼음을 삼키며 혀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 뜻밖의 구원자가 등장했다.
“마츠노 씨~!!”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소녀. 우리 가게 사장님인 아저씨의 손녀였다.
앳된 얼굴에 미소를 활짝 피우고 내 앞에서 멈춰 선 나츠가 내 옆을 보고 놀라 “어?” 하고 실없는 신음을 흘렸다.
“아, 나츠. 이쪽은 내 쌍둥이 동생, 카라마츠. 카라마츠, 이쪽은 내가 일하고 있는 가게 사장님 손녀야. ‘나츠’라고 해.”
“안녕하세요! 나츠입니다!”
“아…, 마츠노 카라마츠입니다.”
이걸로 대답은 어영부영 흐려지고 카라마츠는 나츠의 질문에 솔직히 하나하나 대답하고 있었다.
“얀마, 그렇게 개인적인 걸 물어보는 거 아냐!”
여자친구 있냐는 질문을 던지는 나츠의 머리를 가볍게 때리자 나츠가 혀를 빼꼼 내밀고 “에헤헤-.” 하고 웃었다.
“마츠노 씨, 내일 근무 몇 시부터 몇 시까지야?”
“9시부터 저녁 6시. 왜?”
“그럼 내일 내 숙제 좀 도와줘~!”
“무슨 과목?”
“수학.”
“무리.”
“왜에~~!!”
내 팔을 잡고 흔들며 칭얼대는 나츠의 코를 가볍게 꼬집고 이쪽으로 몰려오는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을 가리켰다.
“자, 네 친구들 왔네. 얼른 가 놀아~!”
“체! 그럼 내일 저녁 같이 먹어!”
“알겠어-.”
“그럼 내일 봐! 아, 카라마츠 씨도 재미있게 놀다 가세요.”
“아아….”
누가 시골 아이 아니랄까 봐 유쾌하게 웃으며 저 멀리 달려가는 나츠의 뒷모습에 쓴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돌려 카라마츠를 바라보자 아까보다 더 심각해진 분위기를 풍겨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음습한 오라를 풀풀 흘려대고 있는 모습에 슬그머니 반걸음 더 거리를 둔다.
대체 왜 저러는 건데?
집을 향해 걸으며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도 둘이서 제법 즐겁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문제지? 나츠를 만나기 전까진 괜찮았는데….
문득, 뒤통수를 때리는 사실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혹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가 자기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는 거 아냐?
그래서 이런 이상한 분위기가 된 건가 하는 생각에 고개만 돌려 뒤따라오는 카라마츠를 슬쩍 봤다.
아직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게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여기선 오해를 풀어둘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해는 아니지만….
“있잖아-.”
“…뭔가?”
“아까 본 나츠 말이야~. 얼마 전에 나한테 고백했었어. 아까 봤듯이 나츠가 좀 귀염상이잖아~? 그래서 굳이 거절할 필요 없겠더라고. 사귀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데….”
나츠가 나한테 고백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여기선 내가 평범하게 여성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나츠를 빌렸다.
미안, 나츠! 다음에 맛난 거 사줄 테니까!
마음속으로 나츠에게 사과하며 배시시 웃자, 카라마츠를 둘러싼 공기가 찌릿찌릿 날카롭게 피부를 찔렀다.
어? 왜 더 악화됐어!?
굳은 얼굴로 내게 걸어오는 카라마츠를 가만히 응시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내 손을 거칠게 움켜잡은 카라마츠가 나를 지나쳐 앞서 걷기 시작했다.
흥분했는지 빠른 발걸음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끌려갔다.
먹다 남은 다 녹은 빙수가 손에서 미끄러져 땅에 굴렀으나 멈춰 주울 수도 없었다.
앞서 걷는 카라마츠의 어깨너머에 낡은 아파트가 걸렸다.
거의 뛰다시피 해 도착한 집 앞에서 거칠어진 숨을 삼킨 카라마츠가 말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지갑에 넣어둔 현관 열쇠를 건네주자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간 카라마츠가 홱- 내 손을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발에서 떠난 나막신이 딸깍- 소리를 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쿵! 하고 등이 바닥에 부딪혔다.
아프다고 외치기도 전에 카라마츠가 내 위에 올라탔다.
뜨거운 손이 어깨를 강하게 누르고 푸른빛이 일렁이는 눈빛이 나를 옭아맸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힘과 달리 카라마츠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카라,”
“왜…, 왜 그러는 건가!!”
“….”
툭, 툭, 카라마츠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뺨에 닿았다.
내 어깨를 흔들며 흐느끼는 카라마츠를 가만히 응시했다.
바들바들 물에 젖은 고양이마냥 몸을 떨며 카라마츠가 비통하게 외쳤다.
“왜 오소마츠가 아닌 것처럼! 왜 낯선 사람처럼 그러는 건가!!”
정곡을 찌르는 외침에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흔들었다.
“내, 내가 언제,”
“오소마츠는 항상 딸기 맛 빙수를 먹었다! 야키소바를 좋아했고, 파칭코에 가길 좋아하는 바보였어! 항상 빨간색 옷을 입고, 어린애처럼 웃으면서도 믿음직한 형의 얼굴을 보여줬었다!!”
“….”
“왜 오소마츠가 아닌 것처럼 빨간 옷도 입지 않고, 파칭코도 싫어하고, 우리를 싫어하는 건가!! 왜 동생인 나를 그렇게 낯선 사람 보듯 보는 건가!!!”
“….”
“한 번도, 내가 아닌 다른 동생들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나름대로 ‘오소마츠’인척 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오소마츠’가 아닌 것을 들키고 말았다.
숨을 들이마시고 괴롭게 흐느끼는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나 때문인 건가…? 이렇게 먼 곳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도, 자신을 바꾸려는 것도, 전부 나 때문인 건가…? 내, 내가 오소마츠에게 고백했기 때문에?! 이게 그 대답인 건가, 오소마츠!!!”
어깨를 잡혀 흔들리면서 흐려진 시야에 카라마츠가 맺혔다.
하? 고백? 뭐야 그거.
그런 말 편지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았다고….
내 위에 올라탄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카라마츠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 속였구나, ‘오소마츠’.
눈썹을 찌푸리고 상체를 일으켜 눈물을 멈추지 않는 카라마츠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5.
정신을 차리고 보니 좋아하고 있었다, 는 말만큼 바보 같은 말이 또 있을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뭔가가 원인이 되어 타인을 좋아하게 되는 거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그렇게 무시한 말에 되레 내가 당하고 말았다.
친동생, 같은 얼굴, 동성. 단점밖에 없는 이런 녀석을 나는 왜 좋아하게 되어버린 걸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담배 냄새 때문이라고 속이며 눈앞에서 굴러다니는 쇠구슬에 시선을 고정했다.
카라마츠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 꽤 오래 방황했다.
그야, 평범하게 있을 수 없고?
호모 + 근친상간이고?
이유 모르겠고?
짜증도 내고, 카라마츠에게서 거리도 둬 보고, 다른 여자를 좋아해보려고도 했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꽤 오래 삽질을 한 후에야 내 마음을 인정했다.
그래, 나는 카라마츠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 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주변에서 기적의 바보라고 불리는 나도 뭐가 옳고 그른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귀찮아서 신경 쓰지 않을 뿐이지.
내 마음은 정말 최악에 최악이라고 일컬어도 부족할 정도로 나쁜 것이다.
왜 이런 귀찮은 마음을 가지게 된 걸까, 텅 빈 지갑을 주머니에 꽂고 한숨을 내쉬었다.
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가 하늘을 불게 물들였다.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을 등지고 몸을 돌리면 흐릿하게 보이는 달과 함께 짙은 청색의 하늘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숨겨야겠지, 이 마음은.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파칭코 경품으로 탄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깊이, 아주 깊-이 연기를 빨아들였다.
하-, 하고 내뱉는 뽀얀 연기가 곧 공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마음도 이렇게 사라져 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자조하면서 카라마츠가 있을 집으로 발을 옮겼다. 옳지 않은 마음이다.
숨기는 게 당연한 마음. 게다가 사랑이 이뤄질 가망도 전혀 없는 그런 마음.
기껏 태어났는데 밖으로 나오긴커녕 꽁꽁 밧줄로 묶여 어두운 지하실에 처박힐 운명의 마음이다.
― 아, 그건 너무 불쌍한데….
고개를 들어 붉게, 푸르게, 그러데이션이 피어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스한 느낌을 주는 노을과 은밀한 느낌의 검은 하늘을,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지하실에 가둬질 마음이 불쌍하다.
외톨이가 되어버릴 마음이 불쌍하다.
그래선 안 된다고 해도 이미 좋아져 버렸다.
드러내지만 않으면 만사 OK.
담배를 문 입술을 살짝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그래, 드러내지 못해도, 세상에 내놓지 못해도, 내가 사랑해주면 된다.
어쩔 수 없이 불쑥 솟아난 이 불쌍하고 가여운 마음을, 내가 소중히 끌어안아 주면 될 일이다.
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을 열자 안쓰러운 탱크톱을 입은 카라마츠가 나를 반겼다.
여섯이 함께 대화하다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짓궂은 장난을 교환하고,
목욕탕 가는 길에 어깨가 살짝 부딪치고,
TV를 보며 웃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고,
안쓰러운 카라마츠의 발언에 웃고,
고기만두를 반 나누어 먹는다.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에 마음이 은근슬쩍 웃었다.
작고 가녀린 이 마음은 겨우 이 정도에도 충분히 만족해준다.
별다른 문제 없이 이대로 카라마츠와 함께 ‘형제’로서 살아갈 수 있다.
시간이 지나 카라마츠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때에도 태연히 있을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그건 지금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다.
카라마츠가 나와 같이 부모님 등골이나 빼먹으며 사는 백수 쓰레기인 이상, 연애나 결혼은 먼일이다.
아직 조금 더 이 작은 행복을 먹으며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좋은 아침이다, 형님!” 하고 아침에 나눈 평범한 인사에 마음이 들썩였다.
아아, 그래. 기쁘네-.
아침에 약한 카라마츠는 항상 엄청난 얼굴하고 있지만, 오늘은 상쾌한 미소로 인사해줬다.
동생들에겐 물러도 형인 나한텐 가차 없으니까, 카라마츠의 미소는 꽤 귀하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들떠 발을 구르는 마음을 평온히 바라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좋은 날 파칭코에 갔다가 돈을 털리고 싶지 않으니까 오늘은 집에 얌전히 있자.
푸른 하늘을 보며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오소마츠, 잠깐 괜찮은가?”
깜빡 졸았는지 카라마츠의 부름에 눈을 떴다.
시계를 확인하고 15분 정도 졸았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중요한 할 말이 있다.”
“오-.”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돌려 카라마츠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또 쓸데없는 고민 상담인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카라마츠가 내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정좌했다.
평소엔 형 대우도 안 해주지만, 이렇게 고민이 있을 때 카라마츠가 찾는 사람은 ‘유일한 형’인 나다.
내겐 쌀쌀맞아도 고민이 있을 때 카라마츠가 찾는 사람이 ‘형’인 나라는 것이 기뻤다.
꿀꺽-, 초조하게 침을 삼키는 카라마츠를 보며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카라마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휴-, 하고 크게 심호흡해 긴장을 조금 덜어낸 카라마츠가 똑바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오소마츠가 좋다. 쭉-, 좋아했다.”
“….”
호흡을 잊었다, 라고 해야 할까.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말을 내뱉는 카라마츠를 보며 살짝 손등을 꼬집었다.
얼얼하게 퍼지는 아픔이 지금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뭐야…, 우리, 쭉- 같은 마음이었어?
놀람과 동시에 행복이 뭉클 피어올랐다. 심장이 시끄럽다.
고막에서 두근대는 심장 소리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바라지 않았던 행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삼켰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폭발할 것 같은 행복을 전하려고 한 그 순간,
“미안해.”
펑!, 하고 폭탄이 터지듯 떠오른 마음이 곤두박질쳤다.
이를 앙다물고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카라마츠가 깊이 고개 숙였다.
“미안하다, 오소마츠.”
확실하게 확인사살까지. 형이기 이전에 카라마츠를 좋아하니까 알 수 있다.
카라마츠가 말한 ‘미안해’의 의미를.
나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카라마츠는 나와 달랐나 보다.
애처롭고 불쌍하고 애달픈 이 마음을, 카라마츠는 외면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선 안 된다는 죄악감에 먹혀버린 거다.
‘(좋아해서) 미안해.’ 라고 사과할 거라면 차라리 고백하지 않는 편이 나았어.
공허한 눈으로 카라마츠를 시야에 담았다.
입을 굳게 다문 카라마츠가 “대답, 기다리겠다.” 고 짧은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대답, 들을 생각 없는 주제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고백한 주제에.
카라마츠는 버리고 싶었던 거다, 이 마음을. 옳지 못한 마음이 가져다주는 죄악감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내 손에 단검을 쥐여주었다.
찔러달라고, 죽여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면서.
아아―, 정말 왜 고백한 거야, 너.
나는 너와 ‘형제’로서 있는 행복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는데….
어리석게도 한순간 꿈꾼 ‘둘의 미래’에 마음을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가족도, 동생들도, 친구들도, 이 마을도 모두 버릴 수 있었는데.
너만 곁에 있어 준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었는데….
― 카라마츠는, 내가 있으면 행복해지지 않는다. ‘오소마츠’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새벽, 모두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지갑만 들고 집을 나왔다.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짧은 쪽지를 부모님 방에 놔두고 데카판 박사의 연구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른 새벽인데도 연구소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상반신 누드에 커다란 파란 줄무늬 팬티만 입은 변태 박사가 나와 나를 반겼다.
“기억을 지우는 약이 필요하다요?”
“응. 있어?”
“물론 있다요.”
데카판이 말을 마치자마자 메이드복을 입은 다용이 알약이 가득 든 병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꼭 비타민제처럼 생긴 둥그렇고 하얀 알약이 투병한 병에 담겨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병을 내려다보며 “이거야?” 하고 물었다.
“그렇다요. 1알을 먹으면 특정 기억을, 2알을 먹으면 한 시기의 기억을 잊을 수 있다요.”
“헤-.”
마른 감탄사를 흘리며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병에 닿기도 전에 데카판의 커다란 손이 내 앞을 막았다.
“복용 시에는 반드시 3알 이상 먹으면 안 된다요! 3알을 먹으면 자기 자신까지도 잊을 수 있다요.”
“…알겠어. 제대로 지켜 먹으면 돼지?”
데카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데카판,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데카판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푹- 한숨을 내쉰 데카판이 먼저 눈을 돌리고 테이블에 약병을 내려놓았다.
“꼭! 용량을 지켜서 먹어야 한다요.”
“알겠다니깐~?”
몇 번이고 주의하는 데카판의 목소리를 흘리며 병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손에 올려놓고 으깼다.
손님에게 내준 오렌지 주스 속에 몰래 으깬 약을 털어 넣고, 데카판의 장황한 주의 사항 사이에 끼어들어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이 주스, 뭔가 이상한 맛이 나는데? 연구 중이던 약이 들어간 거 아냐?”
“그, 그럴 리가 없다요….”
내 말에 당황한 데카판이 주스를 가져가 자세히 살폈다.
태연한 얼굴로 빙긋- 웃으며 “정말이야. 한 번 마셔봐.” 하고 손짓했다.
데카판은 눈썹을 찌푸리며 한 모금 남은 주스를 들이켰다.
“…? 오소마츠 군?”
“응.”
“왜 여기 있다요?”
“응-, 나 오늘부터 여행 갈 건데, 가기 전에 인사라도 해둘까-, 해서.”
“여행이라니 부럽다요! 좋은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거다요.”
“응~!”
활짝 웃으며 데카판의 말에 끄덕였다.
미안, 데카판.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약병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지갑에 든 돈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가자.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노란빛에 둘러싸인 정든 마을을 쓱- 둘러본 후, 가는 미소와 함께 기차에 올랐다.
6.
울음을 멈출 기미가 없는 카라마츠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카라마츠에게 고백받은 것을 내게 숨겼는지, 서로 좋아하는데도 왜 스스로 기억을 지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추상적인 추리를 하며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흐느끼는 카라마츠를 응시했다.
‘오소마츠’가 남긴 편지엔 카라마츠를 향한 애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친동생인데도 좋아했었다고, 그렇게 쓰인 편지에서 ‘오소마츠’가 얼마나 카라마츠를 사랑하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가족을 향한 애정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이를 향한 연정이기도 했다.
편지를 읽고 있던 내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열렬하고 차분한,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소중히 간직했던 사랑을 버릴 정도의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건 ‘오소마츠’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오소마츠’였다면, 이렇게 울고 있는 동생을 가만히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잘게 떨리는 둥근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다.
작게 웅크린 카라마츠에게 맞추어 허리를 굽혀 고개를 낮췄다.
“미안해.”
사과의 한 마디에 카라마츠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아무것도 없는 집 안을 울음소리가 채운다.
― 네가 사랑했던 ‘오소마츠’가 아니라서 미안해.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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