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입니다!

 이제 슬슬 오소마츠와 카라마츠 사이가 진전되고 있네요ㅎㅎ


* 중간에 조금 잔인한 표현이 나옵니다.


* 푸른 왕국은 동양(일본), 붉은 왕국은 서양(프랑스?)로 설정한 나라입니다.


* 공미포 14,379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귀족들과 관료들 전원이 모인 커다란 홀

귀족과 관료들의 의견을 모아 왕과 함께 회의하는 어전회의

왕의 부름에 어전회의에 참석한 오소마츠가 말없이 왕의 옆에 섰다

엄숙한 분위기와 함께 그 위엄을 한껏 내뿜으며 왕좌에 앉은 레온 3세는 날카롭고 또렷한 눈으로 귀족과 관료들을 내려다보았다

왕의 무거운 침묵에 홀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마른침을 삼켰을 무렵, 굳게 닫혀있던 왕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경들을 모이게 한 것은 오늘 왕세자를 알리기 위함이오.”

왕의 말에 귀족들은 아연실색하고 관료들은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모두가설마하는 얼굴로 왕을 올려다보았고, 오소마츠 역시 사전에 듣지 못한 왕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수근거리며 동요하는 귀족들을 향해 소리없는 비웃음을 날린 왕이 말을 이었다.


왕세자는, 에드윈 왕자를 세우지.”

충격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왕의 말에 모두가 숨을 들어삼켰다

대대로 붉은 왕국의 왕좌에는 제 1왕비에서 난 왕자가 앉았다

1왕비와 제 2왕비 간에 신분의 높낮이는 없다해도 일반적으로 제 1왕비의 가문이 더 신분이 높았으며, 1왕비가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나 연례를 맡았다

지금의 제 1왕비 그레이스 또한 왕비로서 나가야 할 일에 활발히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1왕비가 아닌 제 2왕비의 왕자, 게다가 푸른 왕국의 피가 섞인 혼혈

지금까지의 선례를 완전히 깨부수는 파격적인 왕세자 책봉에 귀족들은 물론 관료들도 놀라 감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 폐하! 한 번 더 고려하여 주시옵소서! , 쥬드 공작이 감히 청하옵니다.”

“…뭐지?”

귀족들의 침묵을 깨고 나선 쥬드 공작이 앞으로 나오며 힐끗 오소마츠를 차갑게 응시했다.


나도 싫거든…?’

1왕비 그레이스의 아버지 쥬드 공작에게 있어서 오소마츠가 왕세자가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터

일순간이었지만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쥬드 공작에게 가벼게 콧웃음을 내친 오소마츠가 시선을 돌렸다.


휴전이라곤 하나 왕국은 아직 전쟁 중에 있습니다. 전장은 물론 왕국 곳곳이 미처 안정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왕세자를 결정하는 것은 이르다 생각합니다. 또한 제 1왕비의 왕자들이 어리니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심이 어떠신지요.”

전쟁 중이니 그만큼 빨리 왕세자를 결정하는 것이 옳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또한 왕국의 곳곳이 불안한 바로 지금! 빨리 왕세자를 정해 교육을 마치고 왕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다른 왕자들은 어리고 지혜롭지 않으나, 에드윈 왕자는 이미 성인의 나이가 되었을 뿐아니라 전장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렇기에 짐은 에드윈 왕자가 왕세자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쥬드 공작, 짐의 말이 틀린가?”

, 그것이….”

허면 짐의 판단이 못 미덥다는 것인가?

, 그럴 리 있겠습니까! 폐하의 현안에 그저 감탄했을 뿐입니다!”

왕의 싸늘한 음성과 날카롭게 꽂히는 눈빛에 쥬드 공작은 곧장 꼬리를 내렸다

영웅왕 시절부터 이어진 절대 왕권. 그 정점에 서 있는 레온 3세의 말을 거역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귀족들의 리더이자 제 1왕비의 아버지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쥬드 공작일지라도 왕의 말에 공개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알아서 물러나는 쥬드 공작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피운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펼쳐, 커다란 홀이 울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에드윈 왕자를 왕세자로 임명하겠다!”

-, 폐하!”

왕의 명령에 귀족과 관료가 일제히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왕좌 뒤에 있는 커다란 햇빛이 마치 후광처럼 왕과 오소마츠를 비추고 있었다.

밝은 빛에 비친 귀족들과 관료들을 보며 오소마츠는 원치 않는왕세자라는 직명에 작게 혀를 찼다.

 

 

 

 

 

2.

 

오소마츠가 왕세자가 된 이후로 별궁에서 오소마츠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기사들과의 훈련도 주 1회로 줄어들었고, 매일 별궁과 본궁을 오가며 온갖 교육과 일을 떠맡은 오소마츠는 별궁에 올 때마다 굉장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세자라는 것이 그만큼 무거운 직책이라는 것을, 오소마츠를 보며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침실에서도 책상에 올려진 많은 서류들은 지방 영주의 보고서나 혹은 국민들이 올린 항소문들이 태반. 머리를 싸매고 서류를 하나씩 해결해가는 오소마츠의 눈밑에는 짙은 그늘이 떠날 날이 없었다

남은 서류를 모두 처리하거나 본궁에서 늦은 시간까지 교육을 받고 오는 오소마츠는 내가 잠든 뒤에나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오소마츠를 기다리다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면 한밤중 침대가 흔들리는 감각에 깊은 잠에서 빠져나왔다

얕은 잠에서 유영하며 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온몸의 감각의 옆자리에 집중했다

침대가 출렁이며 끼익-, 하고 매트리스를 지지하고 있는 나무가 비명을 지른다

사각사각, 뻗뻗하고 두꺼운 이불이 들리는 소리와 함께 곧 지친 오소마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살며시 눈을 뜨고 오소마츠에게서 등 돌리고 있던 몸을 똑바로 돌렸다.


“…고생했다. 오소마츠.”

-, 고마워. 잘 자.”

잘 자, 오소마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돌아온 오소마츠에게 짧은 위로 한마디를 던지는 것 뿐

지쳤을텐데도 오소마츠는 내 인삿말에 항상 미소로 답해주었다

이불에 지친 몸을 파묻고 금새 잠든 오소마츠를 보며 적잖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려간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주고 다시 꿈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내 일상이 되었다.

 

 

몇 날이 지나도 오소마츠는 여전히 바빴다

하루에 딱 두 번, 잠 잘 때와 일어날 때를 제외하면 오소마츠를 별궁에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기사들과의 훈련도 임시 중단.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도 오소마츠를 도와 별궁과 본궁을 오가느라 바빠진 것은 마찬가지였고, 별궁엔 하루의 대부분 우리들만 있게 되었다.


카라마츠 형. 좋은 아침.”

나를 흔들어 깨우는 토도마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저절로 눈이 향한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하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왕자?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일이 있다고 먼저 나갔어.”

, 런가….”

아침, 잘 잤냐는 인사를 해주지 못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옆자리에 손을 뻗어도 차가운 아침 공기에 닿은 이불은 체온 하나 없이 식어있었다

어젯밤은 유난히 추워서 이불 속에서도 몸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잘게 떠는 내게 오소마츠가 이불을 하나 더 덮어주고 가까이 붙어 체온을 나누어 주었던 것을 잠결에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망연히 빈자리를 보고 있다가 나를 응시하는 토도마츠의 눈길에 고개를 돌렸다.


“…토도마츠.”

? 뭐야?”

우린, …이대로 괜찮은 건가…?

“….”

이렇게 모든 것을 숨기고 있어도 돼는 건가…?”

카라마츠 형.”

오소마츠가 왕이 된다면, …나는, 우리는…?”

카라마츠 형, 아직 왕자가 왕이 된 건 아니잖아.”

하지만 오소마츠는 왕세자가 되었다. 오소마츠는 왕이 되는 거야….”

불안함에, 두려움에, 형인데도 불구하고 한심하게 매달리는 듯이 토도마츠를 응시했다


왕이, 왕이 되는 것이다

오소마츠는…. 

한 나라의 왕이

대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붉은 왕국의 왕

귀족들과 국민들에게 절대 권력으로서 군림하는 절대 군주


새삼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동생들까지 끌고 온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지 깨달았다

모래 위에 세워진 다리처럼 강한 파도가 한 번 휩쓸고 가면 무너져버릴 우리의 처지가, 코앞에 사신이 낫을 들고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나 하나 뿐이라면 괜찮겠지만, 내겐 토도마츠와 쥬시마츠가 있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되는 건가

시미치 뚝 떼고 지금처럼만

그러다 만약, 만약 오소마츠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물론이고 토도마츠와 쥬시마츠까지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만이라도 푸른 왕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토도마츠.”

카라마츠 형. 우리는 카라마츠 형 옆에서 안 떠날 꺼니까.”

하지만!”

진정해. 아직, 왕자가 왕이 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같이 생각해보자. 어떻게 할지.”

“…….”

설마 왕자가 그렇게 모질게 굴겠어? 같이 살았던 사람들인데 말이야.”

“…, 럴지도 모르지만….”

, -. 일단 일어나자. 언제까지 침대 속에 있을 거야? 빨리 씻고 옷 갈아입어. 오늘 제 2왕비님이 들린다고 하셨으니까.”

, 아아-….”

토도마츠의 재촉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쥬시마츠가 준비된 드레스를 가지고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불안한 마음은 여전히 소용돌이치고, 금방이라도 진실을 고백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렸다


숨길 수 밖에 없다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에 오소마츠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내게 실망하게 된다면…. 


항상 내게 보여주었던 장난스러운 표정, 상냥한 얼굴이 아닌, 사람을 지독히도 경멸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제대로 호흡할 수 있을까…. 

나를 증오하게 된 오소마츠에게 토도마츠와 쥬시마츠 만큼은 용서해달라는 내 말이 닿을 수 있을까…. 


끔찍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는 파도처럼 나를 수없이 덮쳤다.

 

 

 

 

 

3.

 

처리하고 처리해도 도저히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서류의 산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먼저 끝낸 서류 더미를 들고 방을 나간 쵸로마츠가 돌아오기까지 앞으로 10.

이 서류들을 끝내고 나면 바로 제왕학과 역사학 수업이 시작된다

끝없이 몰아치는 수업과 서류들, 어전회의에는 반드시 참석해야하고, 앞으로 왕실에 있을 행사들도 내가 맡아야 한다

바라지도 않았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직책과 일에 스트레스가 쌓인다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계의 분침이 틱-, 소리를 내며 앞으로 한 칸 전진했다.


좋아-. 도망치자.

수업? 서류? 알게 뭐야. 원하지 않았다구.

쵸로마츠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바로 찬스!


발소리를 죽이고 본성을 나오자마자 냅다 달려 별궁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분명 들킬테니까 주방과 통한 쪽문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1층 구석에 있는 창고로 기어 들어갔다

아주 작은 창문 하나로 들어오는 햇빛에 어렴풋이 물건의 실루엣이 보였다

잔뜩 쌓여있는 상자들 사이로 기어 들어가 쭈그려 앉았다

적당히 어둡고 아무도 없는 이 공간은 묘하게 안정감을 준다

계속 목을 조르고 있던 넥타이를 벗어던진 듯한 해방감에 겨우 편히 숨을 내쉬고 멍청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이나 옷, 일기 같은 것들이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곳에 놓인 목검을 집어 들었다

어릴 적 유모가 들려준 영웅왕 전설에 푹 빠진 내가 직접 만들어 한동안 휘두르고 다녔던 것이다


수많은 기사들과 보병들을 이끌고 넓은 영토를 정복해 붉은 왕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영웅왕

어린 내게 영웅왕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고, 나도 영웅왕처럼 되고 싶다는 헛된 꿈을 꾸게 만들었다

영웅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택도 없는 바람이었지만…. 

내게 그런 자격도 없고, 생각도 없다. 영웅왕처럼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겠다는 야욕도, 애국심도 없다

그냥 이대로왕자로서 살다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나는왕세자따위가 되어 버렸는지…. 

완전히 세상의 무서움을 알아버린 지금과 달리 이 목검을 가지고 놀았던 그 시절엔 나름 순수했었는데…. 

그리움에 잠겨 목검은 손으로 쓸어 올렸다.


“…?”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목검에는 먼지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내가 다칠 것을 걱정해 엄마가 다듬어 준 그 모양 그대로

손에 걸리는 먼지조차 없다

내심 놀라 다시 한 번 목검을 매만져도 먼지는 없다

혹시, 하고 주변에 쌓인 상자나 장난감들을 만져보아도 먼지는 없었다

바닥도 티끌 하나 쌓이지 않은 채 깔끔하다

시녀들도 이 창고까지 청소를 하진 않는다

애초에 시녀들이 눈에 띄지 않게 하도록 말했기 때문에 이 별궁에서 시녀들이나 하인들의 손이 닿는 곳은 많지 않다

대체 누가 이 창고까지 이렇게 꼼꼼하게 청소한 것일까…, 자문하자 떠오른 얼굴은 단 하나였다.


어이! 망할 장남! 어디 갔어, 이 자식!!”

문 너머에서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순 숨을 삼키고 창고 깊숙이 몸을 숨겼다

창고 앞에서 멈춘 발소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저 멀리로 사라졌다

아무리 나라도 먼지가 가득할 창고에는 숨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안, 쵸로마츠. 창고에 숨었어. 먼지는 없지만…. 

앞으로도 한동안 나를 열심히 찾아다닐 쵸로마츠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상자들 사이에서 기어나와 조심히 창고문을 열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복도로 나와 끼이익-, 하고 삐걱거리는 창고문을 닫았다.


어머, 여기 있었니?”

-!!”

후후후, 쵸로마츠가 계속 찾았단다.”

, 엄마….”

문을 닫자마자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라 엉성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놀란 나를 보고 즐겁게 웃은 엄마가 내 뒤에 있는 창고를 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피웠다.


창고, 깨끗하지?”

…? , 응.

매일매일 카라 공주랑 토도마츠랑 쥬시마츠가 열심히 청소하고 있어서 그래.”

….”

그 아이들에게 꼭 고맙다고 인사하렴.”

.”

그리고 도망치는 것도 적당히 하고.”

아하하하….”

손가락을 세워 살포시 인상을 쓰고 말하는 엄마에게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 하고 웃은 엄마는 한차례 내 머리를 쓰다듬곤 별궁을 떠났다

쵸로마츠를 부르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슬쩍 창고를 다시 살폈다

역시 먼지 하나 없다

매일 청소라…. 

창고뿐 아니라 바닥도 번쩍번쩍 광이 나고 있고, 복도에 전시된 도자기도 먼지 없이 깔끔하다

지금보다 시녀들이 더 많이 있을 때도 이렇게까지 깨끗했던 적은 없었는데…. 

대리석 바닥은 왁스라도 발랐는지 매끄럽고, 카펫은 빨았는지 화려한 무늬와 색이 선명하다

그동안 전장에 있었던데다가 왕세자가 되고 별궁에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이렇게 완벽하게 별궁을 관리해준 것인가…. 

조용히 감탄하고 있을 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 오소마츠? 지금은 본궁에 있을 시간 아닌가?”

짙은 푸른색의 드레스를 살짝 들어올리고 계단을 내려온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 근래 낮엔 항상 별궁에 없었으니까, 내가 이 시간에 있는 것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적당히 얼버무리며 별일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또 하나의 발소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탁탁탁 빠른 속도로 울리는 게 딱 쵸로마츠다. 틀키면 적어도 1시간은 잔소리를 퍼부울 게 분명했다.


이쪽으로!”

, !?”

나도 모르게 공주 손을 잡고 서둘러 별궁을 나왔다

주방 쪽문을 통과해 성문 밖에 있는 커다란 산 아래로 향했다

뛰는 도중에 구두를 신은 공주가 휘청거리며 넘어지려고 해, 중간 부터는 내가 안아서 옮기는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 , ….”

, 미안하다!! 괜찮나!?”

, 대체 몸무게 얼마나 되는 거야…. 다 근육이지, 이거!? 이 고릴라 공주!”

갑자기 안고 뛴 건 오소마츠다!!”

너가 넘어지려고 하니까 그렇지!”

애초에 왜 이렇게 뛴 건가!!”

그야…!”

? 잠깐

나 왜 이 녀석 데리고 나온 거야

신묘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녀석에게 적당히그냥?” 하고 대답하고 산등성이를 따라 올랐다

뒤에서 타박타박 울리는 발소리로 녀석도 뒤따라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에서 조금 올라오면 있는 작은 평지

무성한 숲 앞으로 풀이 솟아난 좁은 평지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뒤따라 올라오는 녀석들 기다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구두 신고 있다구!”

, 그랬지.”

눈썹을 팍 찌푸리고 항의하는 녀석을 뒤로하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렀다

곧이어 숲 속에서 녀석들이 나왔다

순록, 토끼, 여우, 비버랑 다람쥐에 회색늑대와 올빼미

오랜만에 올라와 녀석들도 반가운지 내게 뛰어와 얼굴을 비벼댄다.

나도 적당히 녀석들을 쓰다듬어 주고, 어깨에 앉은 올빼미 녀석도 어루만져주자 내 곁으로 다가온 공주가 놀란 얼굴을 했다.


, 동물들은…?”

-, 내 애완동물…, 비슷한 거?”

비슷한 거?”

내가 따로 밥을 챙겨주진 않지만, 가끔 이렇게 상태 보러 오거든.”

, 헤에-….”

녀석들은 공주가 신기한지 금새 공주를 둘러싸고 킁킁 거리기 시작했다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공주도 움찔대긴 해도 가만히 녀석들이 냄새를 맡도록 기다렸다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순록을 보며 조심조심 손을 뻗어 긴 목을 어루만진 공주의 얼굴이 단숨에 활짝 밝아졌다

녀석들에게 맞춰 몸을 낮춘 공주의 무릎에 토끼가 올라가고 여우와 늑대도 공주의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냄새를 맡고 손에 얼굴을 비벼대며 꼬리를 흔드는 녀석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훗-, 하고 웃는 공주의 옆에 앉았다.


“…이 녀석들도 잘 부탁해.”

?”

별궁, 엄청 잘 관리해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 녀석들도, 내가 바빠서 올라오지 못할 때 가끔 상태보러 와 줘.”

아아, 알겠다.”

땡큐.”

….”

말을 흐리며 슬쩍 내 눈을 피해 시선을 돌린 공주가 무릎에 앉은 토끼를 쓰다듬었다

내 옆에 앉은 올빼미와 순록을 쓰다듬으며 갑갑했던 숨을 돌렸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별궁으로 도착하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쵸로마츠에게 귀를 잡혔다.


, 잠깐잠깐잠깐! 아팟!! 쵸로링~!!”

누가 쵸로링이냐!! 수업도 땡땡이 치고, 여태 어디 있다 기어나왔어!!”

잠깐 산책한 것 뿐이라구~! 뒷산에 갔다 왔어~.”

뒷산…?”

….”

내 대답에 놀란 쵸로마츠의 손에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귀를 빼냈다

얼얼한 귀를 문지르고 있자 쵸로마츠가 공주에게 눈짓하며 물었다.


카라 공주랑 같이?”

….”

…?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묻는 쵸로마츠가 공주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쵸로마츠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쵸로마츠를 질질 끌고-, 그럼 땡땡이 친 보충하러 가자~.” 하며 본궁으로 향했다

공주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했다.

 

 

 

 

 

4.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고 하얀 눈이 폭풍과 함께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에 휘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 거실 소파에 기대 앉자마자에췻!” 하고 전형적인 기침 소리가 거실 안에 울렸다.


그렇게 추워?”

와들와들 떨며 담요를 두르고 벽난로에 딱 달라붙어 있는 공주와 토도마츠, 쥬시마츠에게 물었다

쵸로마츠가 타준 따뜻한 차를 손에 쥐고 후륵 마시면서도 달달 떨리는 몸을 멈출 수 없는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나랑 쵸로마츠, 이치마츠는 멀쩡한데 말이지….


푸른 왕국은 남쪽 지방에 있다구요! 거긴 겨울이 이렇게까지 춥지 않습니다! 왕자님!!”

공주와 함께 담요를 돌돌 말고 있는 토도마츠가 찌릿-,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 확실히 붉은 왕국의 겨울이 춥긴 하지만 말이지…. 

우린 그렇게 춥지 않은데 말이야

벽난로에 몸을 녹이며 코를 훌쩍이는 공주를 보며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거기갈까?”

…, 그거 좋네.”

작게 중얼거린 내 말에 쵸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한 10일 정도는 더 추울 예정이다

매섭고 혹독한 붉은 왕국의 겨울을, 벌써부터 이 모양이면 제대로 견딜 수 없겠지

이치마츠도 눈을 빛내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이네.”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너무 추워서 왕세자 교육도, 일도 동결될테니까

이 틈을 타서 다녀오지 않으면 영영 시간 없고 말이지

내 말에 수긍하는 쵸로마츠에게 여행 준비를 부탁하고, 본궁으로 가기 전 붉은 코트를 걸쳤다.

 

 

 

본궁에 있는 엄마에게그곳에 가지 않겠냐는 말을 꺼내자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머? 웬일로 네가 거기 가자는 말을 하니?”

공주 일행이 꽤 추운 것 같아서요.”

어머나-, 그렇겠구나…. 푸른 왕국은 이렇게 춥지 않으니까. 나도 처음에 왔을 때는 고생했어~. 후후,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그래, 다녀오렴. 어미는 안 가도 괜찮으니까.”

-.”

, 오소마츠?”

꾸벅 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는 나를 엄마가 불러 세웠다

뒤돌자 엄마가 방긋- 웃으며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제대로 폐하께도 인사드리고 다녀오렴~.”

“….”

 

 

솔직히 일 외엔 왕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왕세자가 된 이상은 자신의 일거일동을 왕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래도 이번엔 가는 곳이그곳인만큼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한테 보고하면 끝나는 문제이고.


하아~.”

한숨을 푹- 내쉬고 왕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하고 문 너머에서 울리는 중후한 음색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별일이구나. 네가 나를 찾다니. 무슨 일이지?”

잠시글리아지방에 다녀올까 합니다.”

-? 트루디는 그런 말 없었다만.”

왕은 서류에 싸인을 하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나를 응시했다

트루디라고 엄마를 지칭한 왕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글리아지방은 붉은 왕국의 겨울을 힘겨워하던 어머니를 위해 왕이 특별히 개발한 지방

왕국의 서남쪽에 위치해 다양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온천수가 나오는 지방이었다.


오늘 막 결정된 일이고, 어머니는 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트루디가 가지 않는데, 왜 가려고 하는게냐.”

푸른 왕국의 공주에게 앞으로 더 추워질 겨울은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요.”

아아-, 그렇군. 공주가…. 좋다. 그 동안 수업과 처리해야 할 일은 보류해주지.”

감사합니다.”

-, 에드윈.”

.”

네가 글리아에 다녀온 후에 있을 연례 행사는 잊지 않았겠지.”

“….”

그래, 알겠다.”

그럼.”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잊지는 않았지만, 잊고 싶었던 그 행사에 이제 나도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짜증난다

-, 하고 혀를 차고 거칠게 목을 옥죄고 있는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래도 일단 일주일 정도는 자유인가…. 

그 후에 있을 행사와 쏟아질 일들은 잠시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마음 편히 쉬다 오자, 스스로 다짐하며 본성을 나왔다.

 

 

 

내일 출발하니까.”

…? 휴양…?”

잠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 앉아 내일 휴양지로 출발한다는 말에 공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 앞으로 더 추워질 거고.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면 앞으로 이어질 겨울은 더 힘들 거 아냐. 그러니까 휴양.”

, 헤에….”

서남쪽에 있는 지방인데, 온천이 있어.”

온천!”

단번에 눈을 빛낸 공주가 잔웃음을 흘렸다.


원래 붉은 왕국엔 사우나가 전부인데, 엄마가 오면서 개발한 곳이야. 나도 온천은 오랜만이네.”

그런가. 나도, 온천은 푸른 왕국에 있을 때조차 자주 가보지 못했다.”

그래. 그럼 빨리 자두는 게 어때? 내일 일찍 출발할거야.”

-! 알겠다!!”

거세게 고개를 끄덕인 공주가 침대가 출렁거릴 정도로 재빨리 이불 속에 몸을 묻었다

기대로 빛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잘 자, 오소마츠.” 하고 인삿말을 끝내자마자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든 공주의 모습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5.

 

수도 레드버로우에서 남서쪽으로 꼬박 이틀을 달려 도착한글리아지방

온천으로 유명해 수도나 다른 지방의 귀족들도 종종 찾는 대표적인 휴양지이다

마차에서 내린 카라마츠는 눈앞에 펼쳐진 그리운 광경에 놀라 미소가 넘실대는 얼굴로 좌우를 살폈다.

마츠요를 위해 개발된 글리아 지방은 전체적으로 푸른 왕국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건축 양식부터 사람들의 복장까지 거의 모두가 푸른 왕국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글리아 지방의 모습은 붉은 왕국의 추위를 힘겨워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츠요를 위한 왕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푸른 왕국과 닮은 풍경에 카라마츠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린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도 눈을 커다랗게 뜨고 감탄사를 흘렸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에 카라마츠는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소마츠의 뒤를 따라 숙소에 도착해서도 카라마츠와 토도마츠, 쥬시마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밖에서 보이는 모양 뿐만 아니라 속소 안도 역시 푸른 왕국과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 오소마츠 일행을 방으로 안내한 종업원이 떠나자마자 오소마츠가 커다란 가방에서 정장 한 벌을 꺼냈다.


.”

?”

당연하다는 듯이 카라마츠에게 내민 정장에 눈을 고정하자, 오소마츠가 옷을 흔들어 재촉했다.


뭐해? 갈아입어. 여기선 굳이 드레스 입을 필요 없고. 계속 그렇게 입고 있으면 불편하잖아.”

. 아아….”

여기선 괜찮아. 모처럼 왔으니까, 몸도 마음도 편히 있다 가야지 손해 안 보지!”

오소마츠의 설명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띄우고고맙다….” 하고 인사한 카라마츠가 오소마츠가 건넨 정장을 받아들었다

마츠요에게 선물받은 정장과 달리 디자인보다는 보온에 신경을 쓴 옷 같았다

그럼 갈아입고 오겠다.” 하고 말하곤 방을 떠난 카라마츠를 기다리며 오소마츠가 제 옆에 서 있던 토도마츠가 불렀다.


저기 말야-.”

?”

오소마츠의 부름에 토도마츠가 고개를 들었다

갸웃거리는 토도마츠에게 오소마츠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뭐 부족한 거나 불편한 거 있어?”

“…왕자님 덕분에 딱히 없습니다.”

그런 빈말하지 말고 말야. 정말로 없어?”

오소마츠의 질문에 토도마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오소마츠의 얼굴엔 일말의 가식도 묻어있지 않았다

토도마츠는 눈을 굴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생각하다 결국 한숨과 함께 솔직한 대답을 내뱉었다.


현재로선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나중에라도 뭐가 있으면 말해줘. 그리고 또,”

“…?”

별궁, 관리 고마워.”

, , 아뇨….”

솔직하게고맙다는 발언과 함께 눈을 가늘게 뜨고 부드러운 미소를 피운 오소마츠를 보며 토도마츠가 적잖이 놀라 말을 더듬었다

푸른 왕국에서도 붉은 왕국에서도 귀족이나 왕족이라는 치들은 콧대가 높고 쓸데없이 자만심이 높은 인종이 태반이었다

잘못이 있다고 해도 남에게 돌리기 일쑤였으며 시종에게 고마움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런 뻔뻔한 녀석들이라고, 토도마츠는 내심 생각해왔다

그것이 편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오소마츠와 쵸로마츠, 이치마츠 또한 그런 일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소마츠는 너무나 솔직하게 토도마츠에게고맙다는 인사를 던졌다

앞으로 일국의 왕이 될 왕세자가, 가직도 빈말도 아닌 진실된 감사를 건네온 것에 토도마츠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정말 왕족 같지 않아….’

종종 느꼈지만, 오소마츠는왕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왕족이 가지는 위엄은 일체 보이지 않는 그런 왕자였다

겨우 일개 시종에 불과한 토도마츠에게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토도마츠는 솔직한 오소마츠의 태도에 무례한 것을 알면서도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 저희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나요?”

? 뭐가?”

, ….”

“…이게 보통 아냐? 엄마, 가 아니라 어머니가 남의 호의엔 꼭 보답하라고 하셨고.”

마마보이냐!’

토도마츠는 오소마츠의 말에 저도 모르게 속으로 태클을 걸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오소마츠는 배시시-, 어색한 미소를 보내곤 코 밑을 검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난 카라 공주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친구의 편의를 봐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오소마츠의 말에 토도마츠는 잠시 얼이 빠졌다. 그리고 곧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 이 사람은….’

오소마츠의 미소에 토도마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토도마츠가 보아왔던 자들은 대체 어땠나

모두 귀족이다 평민이다 신분으로 사람을 나누고, 그 자의 심연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보고 있는 자가 치를 떨 정도로 편협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넘쳐났던 푸른 왕국

토도마츠는 어쩌면 붉은 왕국이 푸른 왕국보다 강국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와 함께 자신들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여겨주고 있었다.

카라마츠를 너무나 당연하게친구라 부르고, 토도마츠와 쥬시마츠의 것도 제대로 봐주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끓어오르듯 치솟는 뜨거운 숨을 후-, 내쉬며 마음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 하나를 깨뜨린 토도마츠가 눈을 들어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빙그레-, 온화한 미소를 피우고, 한 사람의 인간인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6.

 

서남쪽에 있다는글리아지방은 확실히 수도보다는 추위가 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쪽 출신인 우리가 견디기엔 매서운 추위인 것은 매한가지였고, 토도마츠와 쥬시마츠와 함께 여러 효능이 있다는 다양한 온천을 일주하기에 바빴다

차가운 공기를 위에 두고 따끈한 온천에 몸을 푹 담그면 그동안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까지 저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았다

별궁에 있으면서 줄곧 내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던 고민들도 온천수에 녹아 흐물흐물해져서 완전히 사라질 것 처럼 느껴졌다

다양한 온천과 더불어 길가에 세워진 노점들은 푸른 왕국의 음식을 팔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즐길 수 있는 놀거리도 모두 푸른 왕국에서 넘어온 것들

그리운 것들에 들뜬 기분은 온천에 들어가도 가라앉지 않았고, 오소마츠가 건네준 돈으로 토도마츠와 쥬시마츠가 먹고 싶어하는 것들을 잔뜩 사주었다.

신나게 돌아다닌 우리와 달리 오소마츠는 수도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잔업이 남아있다며 방에 남았고, 잔업을 다 마친 후에도 이상하게 매번 우리와 엇갈리고 말았다

오소마츠도 나름 온천을 즐기는 것 같았지만, 온천에서 오소마츠나 쵸로마츠, 이치마츠와 마주치진 못했다.

 


온유로 풀어진 몸을 끌고 숙소에 도착해-.” 하고 편안해진 숨을 내뱉었다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는 푸른 왕국에 있을 때도 겪어보지 못한 온천에 완전히 신이 나서 좀 더 온천을 즐기고 오겠다며 뛰쳐나갔고, 숙소에 돌아온 것은 나 혼자

프릴과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 벗고 편안한 남성용 정장을 입어 가벼워진 몸에 경계심과 긴장도 함께 느슨해졌다

겨울에 들어서 짧아진 해가 서쪽으로 얼굴을 숨기고 녹녹한 어둠이 고즈넉이 내려앉은 방 안에 들어가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침대에서 울려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로 다가가자 이불에 파묻힌 오소마츠가 색색 잠들어 있었다

방에 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아무도 없을 것이로 생각했는데 오소마츠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것에 내심 놀라며, 오소마츠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에서 떨어져 창가로 발을 옮겼다.

 

조용한 침묵이 드리운 방 안에 오소마츠의 숨소리가 퍼졌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숨소리에 조금 안도했다


오소마츠는, 요 근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처음 전장의 소음이 들리지 않아 깊이 잘 수 없다고 고백했던 그날밤 이후로도, 오소마츠는 악몽으로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내가 곁에서 자도, 사람의 체온이 있어도 오소마츠는 쉽게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도 혼자 잘 때보다는 기분 좋게 잘 수 있었다고, 악몽도 덜 꾼다고 말했었지만, 계속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요 며칠 계속 이어진 것을 나도, 쵸로마츠도, 그리고 이치마츠도 알고 있다

아침에 종종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잠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였고, 눈밑에 깔린 검은 기미에 쵸로마츠도 걱정하는 눈치였다

왕세자가 되어서 할 일이 많아져 스트레스가 부쩍 늘어난 탓인지 최근에 악몽을 꾸는 횟수도 증가했다

지금 여기에서만큼은 편히 푹 잘 수 있기를 바라며 오소마츠의 방해가 되지 않게 방을 떠나야하나 고민했다

지금 여기서 섯불리 움직였다가 또 소리를 내서 오소마츠가 깨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계속 이 방에 있는 것보다는 빨리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혼자 고심하고 있을 때, 밤하늘에 높이 떠다니던 구름이 해를 따라 떠나고 환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커다란 보름달과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너무나 아름다운 밤하늘에 오소마츠에 대한 것도 잊어버리고 고향에서 배웠던 민요를 흥얼거렸다

오래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잠자리에서 불러주셨던 자장가

푸른 왕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리운 민요(자장가), 가사 한 마디, 단어 하나를 음미하며 천천히 작게 달빛에 맞춰 속삭였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자상한 목소리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닿아 단번에 노래를 멈추고 숨을 집어삼켰다.

 

 

 

 

 

7.

 

참수된 시체, 화살을 맞은 말의 울음소리

피눈물을 흘리며, 목에서 뿜어내는 피를 뒤집어쓴 적군의 시체들이 서서히 다가온다

기괴하게 꺾인 발을 질질 끌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서슬퍼런 칼을 들고 나를 둘러싸고 외친다.


죽어, 죽어, 죽어!!”


부패해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와 끈적거리는 타액과 피, 핏기 없는 검은 피부의 시체들이 내 팔을 움켜쥐고 뜯어낼 것처럼 강하게 당긴다

칼도, 갑옷도 없는 나는 속수무책으로 시체들의 손에 이리저리 놀리며 손가락이 끊어지고, 팔이 부러지고, 다리는 으스러져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그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듣고 달려와줄 이는 없다

아파서, 두려워서, 비명을 지르다가 문득-, 온몸을 어루만져주는 은은한 노랫소리에 눈을 떴다.


-.”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소매로 닦으며 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핥았다

참을 수 없이 갈증이 일었지만, 물 먹은 스펀지처럼 푹 젖은 몸은 팔 하나 움직일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또 악몽인가…. 

한심한 자신에게 자조하며 눈을 꿈뻑이다가, 악몽에서 나를 구한 노랫소리가 들려 창가로 눈을 돌렸다

환한 달빛을 그대로 머금고 밝게 빛나는 피부

내가 준 푸른 정장을 적당히 느슨하게 풀어 편히 창가에 앉아있는 공주는 눈을 살포시 감고, 오랜만에 듣는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푸른 왕국에서 전해지는 민요, 자장가

우리가 어릴 적 엄마가 종종 불러주셨던 그 노래.

엄마와는 다른 낮고 부드러운 음색이 고요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처음엔 연민밖에 없었다

붉은 왕국과 푸른 왕국의 동맹을 위해 남자인데도 공주로서 붉은 왕국에 온 불쌍한 아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엘린과 약혼했지만,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버려진 탑에서 생활했던 불쌍한 녀석

당연히공주따위 하고 싶지 않을 텐데도, 어쩔 수 없이공주라는 자신의 신분을 받아들인 그 녀석이, 나와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인데도 공주로 살아야하는와 왕자로 태어났지만왕자이고 싶지 않은’. 

왕자라는 이유 하나로 다른 이들에게 멋대로 기대를 받고, 책임감을 강요당하고, 1왕비와 그 아들들에게 모함을 받고, 그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나

그리고 동맹을 위해 왕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여장을 하고 공주로서 타국에 시집 온 저 녀석


처음 보자마자-, 이 녀석. 나랑 같은 처지구나.’ 하고 생각했고, 그래서 잘해주고 싶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같이 생활해보니 지나칠 정도로 녀석은 상냥했고, 순수했다

바보같을 정도로…. 

이런 좋은 녀석이 우리 나라에 볼모로 와 있는 것이 더 안타까워서,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좋은 친구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한 친구가….

 

그런데, , 점점….

 

자신의 마음 속에서 녀석이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쵸로마츠와 이치마츠, 엄마였는데…. 

가족 외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는데, 어느순간 가족보다 저 녀석을 우선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녀석이 차지하는 공간이 커지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도, 잘 부르는 것이 아닌 저 노래를, 언제까지고 영원히 듣고 싶은 마음이 들어버린다

저 녀석이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잠들면 악몽도 꾸지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어버리고 만다.

왜 그럴 수 없을까, 심장이 아프다

적군의 칼에 베이는 것보다 왜, 저 녀석을 보고 있을 때 느끼는 고통이 더 큰지, 나는 알 수 없다

마치 가시나무 줄기로 심장을 꽁꽁 둘러싸고 꽉 눌러 짓이기는 느낌이다

이 고통도, 내가 저 녀석에게 가지고 있는 이 수수께끼의 감정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말 중에서, 이 마음에 꼭 맞는 말이 있을까

표현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답답하다


심장이 아프다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저런 창가에 앉아있지 말고 내 옆에서, 바로 옆에서 불러주었으면 좋겠는데….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모르게 녀석 쪽으로 뻗은 손이 닿지 못하고 이불 위로 추락하면서, 이불이 뭉개지며 비명을 질렀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녀석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굉장히 기뻐서, 퍽퍽하게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8.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침대에서 난 것을 깨닫고 놀라 숨을 삼켰다

달빛이 닿지 않는 침대 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 미안하다. 내가 깨워서.”

곤히 잘 자고 있던 오소마츠를 깨우고 말았다는 것에 얕은 자괴감을 느끼며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잘 수 있도록 빨리 이 방을 나가주자

그렇게 생각해 발을 옮기려는 순간, 잠에서 막 깬 탓인지 낮게 갈라진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왜 멈춰…? 더 들려줘, 네 노래.”

“….”

놀라 말을 잃었다

오소마츠가 침대에 누운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무말도 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오소마츠가 내 노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불렀던 자장가와 잔잔한 민요,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 주셨던 자장가들을 몇 곡이고…. 

오소마츠가 멈추라는 말을 할 때까지 불렀다

얼마나 불렀을까, 밤이 더욱 깊어지고 달빛조차 어스름하게 세상을 잠재울 때, 오소마츠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로 다가가자, 안온히 잠든 오소마츠의 얼굴이 보였다

악몽을 꾸는 기색도 없이, 세상모르고 깊이 잠든 오소마츠의 앳된 얼굴에 심장이 일순 강하게 조여들었다.

항상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를 이끌었던의 얼굴이 아닌, 장난을 좋아하는 개구쟁이 아이같은 얼굴

본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얼굴이, 오소마츠의 진짜 얼굴처럼 느껴져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만약 오소마츠가 왕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렇게 편안히,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장난을 치며 마냥 즐겁게 살지 않았을까…. 

오소마츠를 깨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을 뻗어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천천히 상냥하게 쓰다듬고, 가만히 오소마츠의 잠든 얼굴을 응시했다


—, 정말로 편히 잠들었다


별궁에서는 항상 새벽에 악몽으로 괴로워하며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었던 오소마츠가

자신의 노래로 이렇게 깊이 잠든 것이 아닐까, 내심 자만하면서, 부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오소마츠가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빌었다.





* 조금씩 두 사람의 감정선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ㅎㅎ


* 오소마츠가 전장에서 돌아온 뒤로 마냥 잘 지내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잘 드러났는지 모르겠네요.

 중세에도, 현재도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습니다.

 이라크 전쟁 이후에도 집에 돌아온 군인들이 이 PTSD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소마츠도 (물론 쵸로마츠, 이치마츠도 함께)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ㅎ

 결론은, 전쟁은 나쁩니다. 여러분.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 주말에 6화 들고 올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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