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편입니다! 이제 이야기의 중반정도 왔네요ㅎ

 요번 주말에 할일이 많아서 50제는 주중에 올리겠습니다ㅠ


* 체스나 장기라는 놀이가 나옵니다만, 명칭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놀이라고 생각해주세요ㅎ


* 아주 잠깐, 살짝 잔인한 표현이 있습니다.


* 공미포 10,946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붉은 왕국의 겨울 중 가장 추운 시기를 휴양지에서 보내고 다시 레드 버로우로 돌아온 우리

별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마츠요 왕비님이 밝은 미소와 함께 우리를 맞이해주셨다

고향의 색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글리아 지방에서 산 특산물을 마츠요님에게 드렸더니, 그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를 피우며 선물을 받았다

푸른 왕국의 음식과 장식품, 그것들을 응시하는 마츠요님의 눈빛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내 팔짱을 끼고 별궁 안으로 끌어들이며 글리아 지방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달라는 마츠요님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마츠요님이 우리를 따라 거실로 들어오려는 오소마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오소마츠.”

?”

폐하가 찾으셔.”

…. .”

마츠요님의 말에 귀찮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 오소마츠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혀를 차고 거실을 나섰다

마차에서 짐을 내려 옮기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에게 본궁에 다녀오겠단 말 한 마디를 던지고 오소마츠가 본궁을 향해 걸어갔다.


한 나라의 왕이라곤 하나 오소마츠에겐 아버지. 하지만 지금까지 오소마츠를 지켜본 바로는 오소마츠와 현왕 레온 3세는 그리 친한 것 같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노골적으로 왕과 함께하는 자리를 피하고, 왕이 자신을 부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왕과 왕자, 그 자리는 단순한 부자 사이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고향에 있을 아버지를 떠올리고 잠시 뭉클 조여오는 심장에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향에 혼자 남아 계신 아버지는 우리는 걱정하고 계시겠지…. 

우리가 없는데도, 잘 생활하고 계실까…. 

인자하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미소를 그리며 오소마츠가 향한 본궁이 보이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리아 지방에서는 잠도 편하게 자도, 일을 하고 있어도 줄곧 편안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는데…. 

왕이 부른다는 소리에 단숨에 오소마츠의 얼굴이 굳어졌다

얼굴에 슬며시 드리운 그늘이 마음에 걸려, 마츠요님의 부름도 듣지 못하고 내내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2.

 

시녀도, 하인도 없이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 하얀 문을 노크한다

똑똑 소리에 이어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씨익-, 의미 모를 미소를 피운 중년 남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모시던 하녀도, 시종도 모두 물리친 방 안에, 화려한 주홍색 드레스를 입고 온갖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제 1왕비, 그레이스가 중년 남성을 맞이했다.


준비는 어떻게 되었나요, 아버님.”

그레이스의 물음에 귀족의 우두머리, 왕을 제외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 쥬드 공작이 미소와 함께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착착 진행되고 있지요. 왕비님, 당신이 할 일은 잘~ 숙지하고 계시겠지요?”

나라 최고의 귀족이자 제 1왕비의 아버지라고 하나 그는 한낱 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1왕비로서, 왕가의 일원이 된 자신의 딸에게조차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없는 것이 나라의 법도, 왕실의 규칙이었다

그레이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활짝 피우고 우아하게 핀 부채를 손에 쥐었다.


잘 알고 있지요, 허나 아버님. 이번 일은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당연합니다. 반드시 성공시킬 터이니 큰 걱정 마시길…. 이대로 그 검은 머리의 망나니가 왕이 되는 것은 왕국의 수치니까요.”

엘린만, 엘린만 죽지 않았다면….”

쥬드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레이스가 눈물을 글썽였다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미의 눈물 속엔 자신의 야심을 이루지 못하게 된 분노와 아쉬움도 함께 섞여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가지런히 접혀있던 손수건을 정중히 내민 쥬드 공작이 그레이스의 손에 입맞춤을 내렸다.


부디 근심 마시길….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분명 엘린 왕자님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 그래야죠. 반드시!”

그레이스의 눈에 서린 증오와 분노에 음흉한 미소를 피운 쥬드 공작이 수긍했다

어릴 적부터 남의 것을 탐냈던 쥬드 공작은 주변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야심가였다

자신의 것은 물론 남의 것도 원한다면 반드시 손에 넣고서야 마는 탐욕자

쥬드 공작은 귀족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왕국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아무리 위세가 좋은 귀족이라도 단숨에 목을 칠 수 있는’. 

쥬드 공작은 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웅왕 시절 쌓아올려진 절대 왕권

그것이 쥬드 공작은 참을 수 없이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왕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이 절대 왕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히 언어도단

그렇기에 쥬드 공작은 자신의 딸을 제 1왕비로 세웠다

딸의 아들, 자신의 손자가 왕이 된다면, 그 절대 왕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올 것이란 계산 하에.

 

왕비의 방을 나서며 쥬드 공작은 한 번 더 차분히 계획을 머리속에 그렸다

고르고 골라 뽑은 실행자들, 날짜, 시간, 만약에 있을 변수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금 계획을 곱씹고 수정하며 쥬드 공작은 손을 겹쳐 신께 빌었다

부디, 부디 이번 일이 성사되기를 간절히 빌며.

 

 

 

 

 

3.

 

왕의 집무실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왕의 목소리에 문을 열자, 서류 더미 속에서 안경을 낀 왕궁 호위대 대장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옆에 앉아 서류를 훑던 왕이 나를 불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감과 동시에 호위대 대장이 방을 떠났다.


그래, 글리아는 어땠나. 왕국 유일한 자치령이라 배울 것이 많았을텐데….”

묘하게 심문하는 듯한 어조에 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과연, 너무 순순히 수업을 보류하고 글리아 지방에 가는 것을 허락한다 싶었더니…. 

글리아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지방의 대소사를 확인하고 오라는 명령의 뜻이 이거였나

덕분에 휴양지에서 지낸 시간의 절반은 그곳의 일을 처리하는데 쓰고 말았다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억누르고, 헛기침을 빙자해 한숨을 내쉬었다.


. 잘 보고 왔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먼 길을 여행한 노고를 풀 시간도 없이 너를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매사냥때문이다.”

“….”
매년 겨울, 왕실 모두가 참여하는 매사냥

사냥감을 얼마나 잡는지에 따라 다음해의 운을 점치고, 왕실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구실을 가진 행사이다

초대왕이 즐겨했던 사냥의 왕실의 행사로 만든 것은 영웅왕이었다

영웅왕은 영토를 넓힌 그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형제와 왕비, 그리고 자식들과도 굉장히 돈독했다는 점으로도 유명했다

항상 왕좌에 오르기 위한 싸움이 빈번한 왕실에서 지위에 상관없이 왕실이 모두 원만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시라는 이유로 작년엔 하지 않았지만, 올해는 그럴 수 없지.”

“….”

왕실이 전쟁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간소하게나마 매사냥을 실시할 생각이다.”

.”

해서, 트루디와 제 1왕비에게도 매사냥 개최를 알려주었더니, 1왕비가, 네 약혼자도 함께 가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해왔다.”

“…?”

왕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멍청히 되물었다

내 약혼자라니, 카라 공주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카라 공주는 아직약혼자’.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지 않은 자다.

약혼자이지만 아직 정식으로 왕실에 들어온 것은 아니니까, 변명만 잘 둘러댄다면 카라 공주를 이번 행사에서 빼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게다가 제안을 해 온 것이 제 1왕비라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왕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약혼자라곤 하나, 슬슬 정식으로 혼례를 올려도 이상할 것이 없지. 왕실의 일원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푸른 왕국의 공주를 참석시키는 제안 자체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다음주, 매사냥을 나갈 예정이니 준비해라.”

반문을 허락치 않는 근엄한 목소리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왕의 단호한 음성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입술을 꽉 물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

사냥 중엔 반드시 내 옆에 있어라.”

“….”

왕의 말에 머리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사냥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팀으로 나뉘어 동물을 몰아 잡는 팀웍이다

보통은 왕과 왕자가 나뉘어 왕자가 동물을 몰고 왕이 그 동물을 잡는 것이 전례

그런데반드시라는 말을 붙여가며 옆에 있으라고 하는 왕의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며 무슨 말이냐 물으려는 나를 가로막은 왕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리며나가보거라.” 하고 말했다

.” 하고 대답하고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방을 나섰다.


사냥 중 왕의 옆에 붙어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카라 공주를 대동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일이 꾸며지고 있는지 안개 속에 숨겨진 제 1왕비의 속내가 신경을 끈다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무슨 일이 있더라고 잘 처신할 것을 다짐하며 별궁으로 발을 돌렸다.

 

 

 

오소마츠가 떠난 방에 남겨진 왕이 신경질 적으로 깃펜을 내던졌다.

, 하고 서류에 떨어진 깃펜에서 잉크 한 방울이 떨어져 종이에 번진다.

하아….” 하고 근심어린 한숨을 내쉰 왕이 목을 젖히고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1왕비의 제안과 쥬드 공작.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매사냥이라는 것은 소수의 왕실만 참여하는 것이고, 그 사냥터는 당일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으니 무슨 수략을 부릴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 숙인 왕이 오소마츠가 떠난 문을 바라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혹여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들, 에드윈 왕자를 걱정하며 내쉰 왕의 깊은 한숨을 오소마츠는 듣지 못했다.

 

 

 

 

 

4.

 

별궁 거실에 도착하자 함께 체스를 두고 있던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두 녀석의 얼빠진 얼굴을 보자마자 진이 빠짐과 동시에 몰려오는 피로감에 소파에 그대로 뒹굴었다

팔을 올려 눈 위에 얹고 깊은 한숨을 내쉬자마자, 녀석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런 한숨을 내쉬어?”

쵸로마츠의 목소리에 팔을 내리고 슬쩍 쵸로마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다문 세모꼴의 입술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 왕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다음주에 매사냥이 있을 것도, 그리고 카라 공주가 함께 참가해야 하는 것도

당연히 두 녀석은 내 말에 경악하며 턱을 떨어뜨렸다.


하아!? 카라 공주도 참가한다고!?”

…. 진짜로…?”

과장되게 경악하는 쵸로마츠에 이어 이치마츠도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되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녀석의 깊은 함숨이 거실에 퍼졌다.


카라 공주는?”

왕에게 가기 전, 어머니와 거실에 들어갔던 녀석이 보이지 않아 묻자, 쵸로마츠가 윗층을 눈짓했다.


침실에 들어갔어. 어머니가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끌고 들어갔지.”

그래…. 그 녀석, 말은 탈 수 있겠지?”

아마도…? 아니면 어머니 옆에 있으면 되겠지. 그것보다, 카라 공주는 공주이지만남자인데, 왕실 행사에 참여해도 괜찮은 거야?”

쵸로마츠의 질문에 이치마츠가 수긍하며 고양이를 꽉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해지는 머리에 골을 잡고 다시 소파에 몸을 내던지며 대답했다.


그 녀석, 원래 엘린의 약혼자였고. 1왕비쪽 사람들 모두 그 녀석이 남자인 거 알고 있겠지. 이번엔 규모를 줄여서 왕과 왕비, 왕자만 참여한다고 했으니까.”

그럼 문제는 없겠지만….”

암튼, 다음주 출발이니까 준비 부탁해, 쵸로마츠.”

….”

내 말에 쵸로마츠가 내키지 않는단 얼굴로 대답을 흐렸다

옆에서 쭉 나와 쵸로마츠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치마츠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오소마츠 형은, 괜찮겠어?”

조심스럽게 묻는 동생의 귀여움에 씩- 웃고, 이치마츠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으악.” 하고 작게 신음하면서도 내 손을 피하지 않는 이치마츠를 실컷 쓰다듬어 준 후, 활짝 웃어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 카리스마 레전드 횽아 앝보지 말라고~?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

그럼 다행이지만.”

뭐야! 쵸로마츠!! 정말 괜찮을 거라구!”

, 네네.”

쵸로마츠의 적당적당인 대답에 입을 삐죽 내밀고 항의하자, 거실에 들어온 두 개의 구두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무슨 이야길 하고 있니?”

다음주에 매사냥이 있대요.”

엄마의 물음에 쵸로마츠가 대답했다

그래.” 하고 웃는 엄마의 옆에서 나를 응시하며 다가온 카라 공주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내게 물었다.


오소마츠, 무슨 일 있나?”

아니…. 공주님은, 말 탈 줄 알아?”

, …, . 일단은.”

그래.”

? 그건 왜 물어보니?”

대뜸 묻는 내 질문에 엄마가 의아하단 얼굴로 물었다

머리를 긁적이고 카라 공주도 매사냥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리자 엄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어머, 그러니! 그럼 내 옆에 있으면 되겠다!”

손뼉을 가볍게 치고 카라 공주를 보며 웃은 엄마가 시종의 알림에 본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럼 엄마는 가볼게. 잘 자렴, 아들들~.”

싱긋-, 상냥한 미소와 함께 우리 얼굴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준 엄마가 별궁을 떠나고, 여전히 잘 모르겠단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카라 공주에게 매사냥에 대해 설명했다.


정해진 사냥터에서 왕실이 다 같이 사냥을 하는 거야. 미리 잡아놓은 동물을 풀어놓고, 쫓아서 잡는…, 일종의 스포츠야.”

그렇군.”

왕실이 다 참여하는 게 전통이라서, 원래 약혼자 신분인 너는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이번엔 너도 참여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 알겠다.”

시원스럽게 알겠다고 대답하는 모습에 정말 잘 알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갔다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이러는 건지

1왕비도 온다면, 분명 시비를 걸어올 것이 분명한데…. 

그 무엇하나 신경쓰지 않는단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얼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소마츠.”

.”

정말로 괜찮은 건가? , 매사냥이라는 것이 부담되는 일인가?”

“….”

제 일이나 걱정할 것이지, 짙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내 걱정을 하는 게 참을 수 없이 바보같아서 공주의 이마에 딱콩을 날렸다.


, 무슨 짓인가!!”

당연히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며 항의하는 공주를 보며 슥-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고별로.” 하고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질퍽하게 바닥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공주는 걱정하던 표정을 지우고 내 미소에 의문을 가지며 눈썹을 찌푸리고 팩 고개를 돌렸다.


“…저건, 뭐지?”

거실 가운데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는 공주의 혼잣말에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공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잠깐 중단했던 체스를 다시 이어서 하고 있었다.


체스잖아?”

체스…?”

종류가 다른 말을 가지고 하는, 머리 싸움이랄까. 규칙이 실제로 이용되는 군사 전략과 비슷해.”

헤에….”

, 나는 머리 쓰는 일은 질색이니까 잘 안하지만.”

푸른 왕국에도 비슷한 놀이가 있다.”

—, 어떤?”

장기라고 해서, 그것도 전법과 비슷하다고 들었다.”

안 해봤어?”

“…나는, 별로 해보지 않아서…, 잘 몰라.”

그래.”
말을 흐린 공주가 체스에 집중해 공주의 말을 듣지 못하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를 가만히 응시했다

체스말을 움직이는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딱 봐도 하고 싶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응챠-.” 하고 몸을 일으켜잠깐 기다려.” 하고 공주에게 말한 후, 창고로 향했다

여전히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짐들 사이에서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어린이용 체스판을 꺼냈다

어른이 쓰는 체스판보다 작고, 체스말도 가볍다

규칙도 어린이가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하게 수정되어 있어서 왕실의 어린 왕자나 귀족의 자제가 많이 가지고 논다

어린이용 체스판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거실에 도착하자 아직도 승부가 나지 않았는지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머리를 뜯고 있었다.


, 이거.”

이게, 뭔가?”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녀석.”

….”

멍청히 눈을 깜빡이는 공주를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체스판을 폈다

작은 체스말을 자리에 세팅하고, 체스말의 이동 방법, 규칙을 하나씩 설명했다

어린이용이라고 해도 복잡하게 느껴지는 규칙에 공주는 잠시 골머리를 앓았지만 이내 서툴게나마 체스를 둘 수 있게 되었다

체스 하나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우리가 없는 별궁에 혼자 남은 공주는 꽤 심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찾아와 수다를 떨어도 그건 매일 있는 일이 아니다

하루의 태반을 별궁에서 지내는 이 녀석은, 무슨 일을 하면서 지내는 걸까.

궁금하면서도, 심심하겠구나-, 하는 걱정이 들어서, 혼자서 놀 수 있을 장난감을 들여놓는 것이 좋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5.

 

매사냥이 이뤄질 넓은 벌판. 그 가운데 솟은 작은 언덕에 임시 막사가 세워졌다

보호구를 갖추고 말 위에 탄 왕과 오소마츠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도 함께 말에 올라 벌판으로 내려갔다

왕의 신호에 맞춰 시종들과 쵸로마츠, 이치마츠가 미리 풀어놓은 동물들을 몰기 시작했다

왕과 오소마츠가 길들인 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푸른 하늘에 힘찬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다다닥-, 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말 발굽소리가 평원에 울렸다

동물 울음소리, 매의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동물의 신음소리가 퍼졌다.

 

 

왕과 왕자들이 동물을 쫓는 동안, 언덕 위에 세워진 막사에는 왕비들이 남았다

막사 가운데 피워진 모닥불에서 몸을 녹이며 왕과 왕자들이 잡은 동물을 들고 올 때를 기다리는 그녀들은 조용히 따뜻하게 데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벌판에서 쫓기는 동물과 그 뒤를 쫓는 말. 근질대는 몸을 꾹 참고 마츠요의 옆에 자리잡은 카라마츠가 향긋한 차 속에 한숨을 녹였다.


후후후, 대단하지?”

, .”

벌판을 빤히 응시하는 카라마츠를 보며 마츠요가 웃음을 흘렸다.


영웅왕 시절엔 왕실의 여성들도 함께 말을 타고 사냥했다고 하더구나.”

헤에….”

너도 원한다면 말에 올라도 상관 없단다.”

마츠요의 배려에 카라마츠가 욕망을 상자에 담아 봉했다

마음같아선 지금 당장 말에 올라 저 넓은 평원을 뛰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푸른 왕국이 아닌 붉은 왕국

자신은공주로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젓고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괜찮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닥불을 응시하며 제 옆을 떠날 생각이 없어보이는 카라마츠의 모습에 마츠요가 슬며시 자상한 미소를 넘겼다.

 

 

 

저 멀리 울리는 매 소리가 들판에 가라앉았다

드넓은 하늘을 활공하던 매가 급격히 하강한다

하얗고 풍성한 털을 자랑하는 눈토끼가끼익-!” 하고 단발마를 끝으로 날카로운 매의 발톱 아래에 뭉개졌다

토끼의 숨통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말발굽 소리가 닿았다

토끼를 쫓던 왕과 오소마츠가 말에서 내려 이미 숨이 끊긴 토끼를 확인하고 높이 들어올렸다

말 안장에 걸린 줄에 사냥 전리품을 자랑스럽게 매단 왕과 오소마츠가 막사로 뛰었다

토끼를 잡은 것에 축하를 건네는 그레이스와 마츠요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왕이 오소마츠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번엔 여우를 잡아야지.”

.”

먼저 말을 돌려 다시 평원으로 내려가는 왕을 본 오소마츠가 힐끗, 모닥불 옆에 앉은 카라마츠와 마츠요를 응시했다

오소마츠의 눈빛에 서린 걱정에 마츠요가 빙그레- 웃으며 카라마츠를 눈짓했다

카라마츠가 옆에 있으니 괜찮다.’는 마츠요의 눈빛에 오소마츠가 쓴웃음을 흘리고 마지못해 왕의 뒤를 따랐다

곧 여우 하나를 발견해 말을 거세게 몰았다.

매가 다시 하늘 높이 뜨고, 왕과 오소마츠가 여우를 뒤쫓는 와중에 시종하나가 뛰어왔다

말발굽에 치일까 급히 말을 세운 왕이 성난 음성으로 시종에게 호통쳤다.


이 무슨 짓인가!!”

, 1왕비님께서 급히 전할 말이 있다 하시어….”

왕의 노성에 벌벌 떨며 말을 전하는 시종이 몸을 움츠렸다

, 하고 혀를 찬 왕이 오소마츠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속 쫓거라.”

여우를 놓칠까, 왕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오소마츠가 다시 말을 달렸다

왕은 말을 돌려 시종과 함께 언덕을 올라 막사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린 왕이 언짢은 기분을 감추지 않고 제 1왕비에게 다가가자, 한껏 요사스런 미소를 피운 왕비가 제 어린 아들을 앞세웠다.


폐하, 기특하게도 오닐 왕자가 겨울이 끝난 후, 출정을 자처했습니다.”

1왕비의 말에 왕이 인상을 찌푸렸다. 1왕비의 두번째 아들인 오닐 왕자는 아직 어렸다

오소마츠보다 5살 어린 그는 아직 성인식도 치루지 않았고, 군사 훈련조차 제대로 받은 적 없었다

야들야들한 피부와 부드럽지 짝이 없는 여린 손

긴장한 얼굴로 제 아비인 왕을 올려다보는 오늘 왕자를 가만히 내려다본 왕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성인식도 치루지 않은 어린 왕자를 전쟁터에 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왕자를 함부러 전쟁터에 내보냈다가 병사들을 개죽음 만들 가능성이 다분했다

병사를 지휘해본 적도, 전술을 짜 본적도 없는 왕자를 전쟁터에 보낼 어리석은 왕이 아니었다

1왕비의 말을 듣고 있던 마츠요가 머릿속을 스치는 의심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왜 굳이 그런 말을 지금 한 것일까

왕이 오닐 왕자를 전쟁터에 보낼 리 없다는 것은 제 1왕비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단순히 왕의 점수를 따귀 위해서 한 말이라고 친다면 때와 장소가 너무나 나빴다

의심은 곧 불안으로 변모했고, 마츠요가 흔들리는 눈으로 여우를 쫓고 있는 오소마츠를 급히 찾았다.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 “!!” 하고 우는 여우

마츠요의 눈에 휘청거리는 말과 그 위에서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오소마츠가 비쳤다.

벌판에 파인 홈, 그 위에 눈이 덮혀 보이지 않던 함정에 말의 발이 걸리고, 중심을 잡으려 어지럽게 땅을 박차는 말발굽에 치인 여우가 비명을 지르며 말의 다리를 물었다.

놀라 흥분한 말이 제 등에 타고 있는 이물질을 떼내려 발버둥쳤다

오소마츠는 힘겹게 말의 목덜미를 잡고 날뛰는 말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낙마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에 마츠요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저렇게 날뛰는 말에서 떨어진다면 말발굽에 급소를 치여 즉사할 수도 있었다

운좋게 발굽을 피한다고 해도 말에서 떨어지는 높이와 중심을 잡지 못해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중상을 피할 수 없다

말에서 떨어져 며칠을 앓다 죽는 이들을 마츠요는 많이 봤다

왕도,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도 사색이 된 얼굴로 재빨리 말에 올랐다

오소마츠를 도우려 말의 고삐를 쳐내기도 전에, 푸른 드레스를 펄럭이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향해 뛰어갔다.

 


카라마츠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오소마츠가 탄 말이 휘청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마자 카라마츠는 대기되어 있던 말의 고삐를 풀고, 단숨에 안장에 올랐다

등자를 힘껏 차 말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드레스가 바람에 펄럭이며 맨다리가 드러나도 카라마츠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오소마츠를 눈에 담고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오소마츠의 코앞까지 뛰어간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소마츠!!”

!”

카라마츠가 내민 손을 오소마츠가 강하게 쥐어 잡았다

그대로 오소마츠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에 앉힌 카라마츠가 날뛰는 말을 피해 고삐를 돌려 잡았다

날뛰던 오소마츠의 말은 또 다른 함정에 발이 빠져 다리가 부러졌고, 그대로 눈밭에 쓰러지고 말았다

말에서 멀리 떨어져 멈춘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보며 다급히 물었다.


오소마츠, 괜찮은건가!!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

이리저리 오소마츠의 몸을 더듬으며 무사한 것을 확인하는 카라마츠를 보며 쓴웃음을 지은 오소마츠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직접 제 손으로 만져 오소마츠의 팔다리, , 머리가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한 카라마츠가 힘빠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 다행이다….”

안도하며 눈물짓는 카라마츠의 모습에 오소마츠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카라마츠에게 손을 뻗은 순간, 왕과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뛰어왔다.


에드윈! 다친 곳은?!”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야.”

왕의 물음에 대답한 오소마츠가 뒤이어 다가온 마츠요에게도 같은 대답을 건넸다

평원 곳곳에 빠인 함정에 이글거리는 눈을 빛내며 대노한 왕은 시종을 불러 당장 함정을 판 범인을 찾으라 명했고, 매사냥은 그대로 끝이 났다.

 

 

혹시 모를 부상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본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말 위에 타지 않고 카라마츠와 함께 마차에 오른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정말로 괜찮아.”

아직도 저를 걱정하는 카라마츠의 얼굴에 오소마츠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카라마츠는 더욱 눈썹을 찌푸리고 눈물이 맺힌 눈을 쓱 닦으며 코를 훌쩍였다

-, 하고 숨을 내뱉은 오소마츠가 붉게 부어오른 카라마츠의 눈가에 손을 뻗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닦아주며,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달랬다

뜨거운 눈물이 맺힌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픽-, 웃음을 흘리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사납게 노려보며 뭐가 웃기냐, 쏘아붙였다

그 툴툴거림도 오소마츠는 그저 웃긴지 본궁으로 향하는 내내 입가에 넘실대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6.

 

왕실 전담 의사의 진료를 받고, 큰 상처가 없다는 확진을 받은 오소마츠에게 쵸로마츠가 다가왔다.


폐하가 꼭 범인을 잡겠다고 벼르고 계셔.”

—.”

쵸로마츠의 말에 시큰둥하게 대답한 오소마츠에게 쵸로마츠가 말을 이었다.


암튼 오늘은 쉬어. 엄마도 조금 전에 본궁으로 돌아가셨고.”

웬일로 쉬라는 말을 해~? 잔소리꾼 쵸로마츠 씨가.”

지금은 그런 말에 대꾸해줄 기운 없으니까 잔말말고 쉬어!”

.”

쵸로마츠의 핀잔에 오소마츠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그대로 카라마츠에게 이끌려 침실에 들어간 오소마츠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었다

카라마츠와 쵸로마츠, 이치마츠 뿐만 아니라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도 오소마츠가 누운 침대 곁에 다가와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오소마츠가 눈을 감았다

푹신한 이불의 감촉이 곧 오소마츠를 꿈 속으로 이끌었다.

 

 

 

눈을 뜨자 주변이 깜깜했다. 창 밖으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에 간신히 물건의 실루엣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흔들리고 곧으음….” 하고 잠꼬대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색색- 곤히 잠든 카라 공주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베개에 흩어진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쓸어올렸다

훤히 드러난 이마와 짙은 눈썹에 픽- 웃고, 손을 내려 부드러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픈지—.” 하고 신음하며 눈썹을 찌푸리는 모습이 썩 재미있다

입을 우물거리며 자세를 바꾸어 발 하나를 이불 밖으로 꺼내고 천장을 보고 누운 공주를 가만히 응시했다.

깊이도 잠들었는지 그 후로 볼을 꾹꾹 눌러대도 깨어나지 않는다.


“…—, 한심해….”

자조하며 내뱉고 무릎을 세워 끌어앉았다

말이 놀라 날뛰던 순간, 전장의 모습이 눈앞에 비쳤다

적군의 칼을 맞고 휘청대는 말, 그 위에 탄 기사는 곧 적군의 칼에 목이 날아갔다.

흩뿌려진 붉은 피와 땅에 쓰러진 말

필사적으로 말에 매달려 고개를 들자, 흔들리는 말 갈기 사이로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내 차례라는 것처럼 한껏 입꼬리를 치켜들고 비웃으며 내게 서슬퍼런 칼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날뛰는 말에서 다치지 않도록 뛰어내리는 훈련은 몇 번이고 했는데, 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내가 전장에 있는 것인지, 사냥터에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공주가 없었다면, 어쩌면 나는 정말로….

 

다시 곤히 잠든 공주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를 향해 드레스를 흩날리면서 뛰어오는 그 모습은 정말로 늠름했다

짙은 눈썹을 한껏 찌푸리고 나를 향해 뻗은 그 손은, 마치 구원 같았다

손에 닿은 온기와 말을 멈추고 내 몸을 더듬으며 나를 걱정해 울먹이는 얼굴

그 모든 것이 가슴 아플 정도로 멋있었다

회상하며 뜨거워지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숨기고, 터져 나오는 미소를 삼켰다


기뻤다

나를 위해서 그런 얼굴을 하고 뛰어오는 것이. 만사를 젖히고 내게 달려오는 모습이, 진심으로 멋있고 또 기뻤다

달아오른 얼굴을 밤공기로 식히며 다시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 모르고 잠든 얼굴이 귀엽다

공주가 있어서, 밤에도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잠들 수 있게 되었다

휴양지에서 들려준 자장가에 푹 잘 수 있었다

공주 덕분에 오늘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전부, 공주 덕분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작게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이럴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될 예정따위 세우지 않았다

내가 다음 왕이 되는 것도, 그리고….

 

이 바보에, 울보에, 귀엽고 상냥한, 고릴라 공주를 사랑하게 된 것도.

 

평생왕자라는 지위에 안위하며 탱자탱자, ‘의 자리따위 탐내지 않고 편지 지내려던 내 인생 계획이 전부 먼지가 되어 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틀어진 걸까. 나는 언제부터, 이 고릴라 공주를 사랑하게 되버린 걸까

자신의 마음이, 생각이 낯설다

그렇게나 왕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공주가 옆에 있어준다면이라는 자리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섭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네게 이렇게 빠져버리고 만 것일까…. 

물어도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어둠을 가르는 평온한 숨소리만이 귀에 닿았다.

 

부드러운 머리를 어루만지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내일부턴 또 일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분명 공주가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 인사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주면 좋을까, 홀로 그리며 행복한 미소를 피우고 나를 유혹하는 잠의 저편으로 몸을 던졌다.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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