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입니다! 빼빼로 데이는 놓쳤지만, 좋은 오소카라 데이(11.12)는 챙겼네요ㅎㅎ


* 이제 정말 중간 넘게 왔네요! 앞으로 6화 이어지면 완결입니다ㅎ


* 공미포 14,444자.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6







1.

 

차가운 서릿발이 서서히 가라앉아갈 무렵, 오소마츠는 유난히 파란이 많았던 해를 바쁘게 마무리하고 있었다

본성에 마련된 오소마츠의 방

책상에 무수히 쌓인 서류들을 보면 절로 커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래전, 선대 왕들이 처리했던 서류들

제왕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내준 과제로 오소마츠는 그야말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선대 왕들이 치세가 위대했던 이유를 분석해 보고하라는 교수의 과제와 더불어 왕이 하는 일을 잘 알아야 한다며 현왕 레온 3세가 내준 숙제

노랗게 바래 세월이 묻어나오는 서류를 하나씩 들춰보며 어떤 사항에 대해 회의를 열었고, 왕의 판단은 어땠으며,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 천천히 분석해 종이에 써 내려가는 오소마츠의 글씨엔 수많은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 진짜! 내가 왜 이런 머리 아픈 일을 해야 하는 거냐고~~!!”

깃펜을 홱 책상 위로 던지고 의자를 뒤로 기울여 기지개를 피며 한탄하는 오소마츠의 쵸로마츠의 못마땅한 시선이 박혔다.

펜과 함께 책상 아래로 떨어진 서류를 주워 톡톡, 가볍게 두드려 먼지를 털어낸 쵸로마츠가 미간에 짙은 주름을 만들고 오소마츠를 가만히 응시했다.


왕이 되는 게 쉬울 거로 생각했어? 이 정돈 당연히 해야지.”

“…하아~.”

쵸로마츠의 핀잔에 오소마츠의 한숨이 깊어졌다

다음 왕이 될 왕세자로 오소마츠가 결정된 날, 진심으로 기뻐하며 오소마츠를 축하하고, 나서서 오소마츠를 보좌할 것을 다짐하는 동생들에게 도저히 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오소마츠와 전장을 누비며 함께 동고동락했던 적기사단의 기사들도, 오소마츠의 최측근이자 소중한 동생인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도, 어머니 마츠요도 오소마츠의 진정한 속내를 알지 못한다

혼자 모든 것을 떠안고 있는 것에 지쳐가는 자신을 쓴웃음으로 바라본 오소마츠가 눈을 껌뻑이며 의자에 바르게 앉아 다시 서류를 들추기 시작했다.

오소마츠의 호흡에 맞춰 적당한 속도로 다음 서류를 넘기고, 처리된 서류를 정리하던 쵸로마츠가 문득 창밖에 비치는 환한 햇살에 손을 뻗었다

밝은 빛과 함께 부드럽게 피부를 감싸는 햇빛의 따뜻함을 손에 넣고자 주먹을 쥔 손이 뜨끈하게 데워졌다

커다란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포근하게 방 안의 공기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두꺼운 옷이 아닌데도 쵸로마츠는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새삼 깨닫고, 어두워진 얼굴로 오소마츠를 불렀다.


“…오소마츠 형.”

~?”

쵸로마츠의 부름에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든 오소마츠가 쵸로마츠의 굳은 얼굴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네.”

그렇네…?”

“…‘기도제’, 할 시기네.”

“….”

머뭇거리며 전한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깃펜을 놀리던 손을 멈췄다

따뜻한 햇볕과 너무나 이질적인 무겁고 차가운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조금 전까지 햇살 감싸여 따뜻했던 몸이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물에 들어간 것처럼 찼다

침을 꿀꺽 넘긴 오소마츠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럼, ‘기도제의 책임자는….”

오소마츠 형이겠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쵸로마츠가 내뱉은 말에 오소마츠가 천장을 보며 폐 속에 가득 찬 탄식을 불어 날렸다.

 

 

 

왕과 관료, 귀족이 참여한 어전회의.

왕세자 신분으로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자리에 오소마츠가 답답한 심정을 껴안고 서 있었다

하나둘씩 나랏일을 처리한 후, 회의가 끝나갈 무렵

제발….’ 하고 믿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초조하게 손을 조물거리던 오소마츠가 마침내 나온기도제라는 단어에 온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렇군. 올해기도제는 전통에 따라 왕세자인 에드윈 왕자에게 맡기겠다.”

왕의 말에 오소마츠는 마음속으로 거하게 한숨을 내리고 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왕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귀족이 다수.

노골적으로 발언하진 않아도쥬드 공작의 세력권에 속한 귀족들은 하나같이 눈썹을 찌푸리고 오소마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소마츠에게 보이는 것이 왕에게 안 보일 리 만무

귀족들의 표정에 한쪽 눈썹을 찡긋인 왕이 낮은 목소리로 회의장 안이 울리도록 크게 외쳤다.


“‘기도제의 책임자는 에드윈 왕자이다. 왕자는 형제들과 함께기도제를 성공으로 이끌라.”

.”

왕의 명령에 오소마츠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귀족들 역시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왕의 명을 받아들였다.

 

 

 

 

 

2.

 

어전회의를 끝마치고 오소마츠와 쵸로마츠, 이치마츠가 별궁에 돌아왔다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와 함께 셋을 맞이하자마자 거실로 향한 오소마츠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몸을 날렸다

곧이어 거실에 들어온 쵸로마츠가 잔소리를 퍼부어도 오소마츠는 들은 체 만 체으응~~.” 하고 신음만 흘리며 소파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걱정되어 옆에 있는 이치마츠에게 물어도 이치마츠는 작은 한숨을 내쉴 뿐, “오소마츠 형한테 들어.” 하고 말을 마치고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소파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오소마츠를 보며어이구….” 하고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쉰 쵸로마츠가 흰 종이와 펜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리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오소마츠 형, 빨리 이리로 와. 뭐가 필요할지 리스트 정도는 짜야지!!”

쵸로마츠의 호통에 오소마츠가아으~.” 하고 신음하며 소파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친 기색이 가득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자, -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오소마츠와 눈이 맞았다

뭐가 웃긴지 픽-, 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쵸로마츠 옆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내리고 나를 손짓해 불렀다

자못 심각한 분위기에 내가 옆에 있어도 되는가 고민했지만, 오소마츠의 부름에 결국 옆에 다가가고 말았다.


! 일단, 빨리 날짜와 시간을 잡아야지. 국민들에게 발표하려면. 그리고 초대 명단도 필요하고…, 입을 예복, 중앙 홀에 걸 깃발과 장식, 성의 경비도 강화해야 하고, 근위대 배치랑 복장, 기도곡하고….”

그렇게 많아?”

귀찮단 얼굴 하지 마! -부 오소마츠 형이 할 일이라고! 그리고, 기도문도 준비해야 되는 거 알고 있지?”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푹- 한숨과 함께 머리를 붙잡았다

말이 나온 사항을 하나씩 쵸로마츠가 하얀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뭔자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섣불리 셋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힘들어 보여 말없이 오소마츠의 옆에 있자, -, 하고 혀를 차고 고개를 돌린 오소마츠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기도제준비하는 거야.”

기도제…?”

. 연말에 하는 행사인데 말이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무사히 1년을 보낸 것에 감사하고 내년도 나쁜 일 없이 평탄하길 비는 행사야. 보통 왕이나 왕세자가 책임을 맡아서 여는데 말이지….”

, 이번기도제는 오소마츠가 맡게 되었다는 건가?”

-, 그런 거지.”

그렇군.”

간결하게 대답하는 것과 달리 오소마츠의 얼굴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서로 의논하며 착실히 준비할 목록을 채워가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를 바라보는 오소마츠의 눈빛엔 이유 모를 불편함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괜찮은 건가?” 하고 물었지만, 오소마츠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괜찮아.”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기도제 날짜가 결정되고 오소마츠는 더욱 바빠졌다

왕세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과 일, 그리고 기도제의 준비가 겹쳐 별궁에서 오소마츠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기도제 준비가 겨우 한 달이 남았을 때, 오소마츠는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기도제 준비에 집중했다

준비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오소마츠의 피곤한 얼굴을 볼 때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져도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잘 시간을 훨씬 지나, 곧 해가 뜨려는 새벽. 겨우 별궁에 돌아온 오소마츠가 침대에 누웠다

눈 아래 짙게 깔린 피로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키자, “미안, 깨웠어?” 하고 오소마츠의 다정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니다. 오늘을 일찍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 그래. 그럼 미안하지만, 아침 식사 전에 깨워줄래?”

좀 더 자는 게 좋지 않나? 아침 식사 전이라면 바로 몇 시간 후인데….”

. 괜찮아.”

“…오소마츠, 내가 도와줄 일은 없나? 많이 힘들다면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 돕겠다.”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 천천히 깜빡이던 오소마츠의 노곤한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었다

호흡조차 잊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부드러운 미소에 말을 잃자, 오소마츠가 무거운 팔을 올려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하지만 마음만 받을, ….”

졸음이 덮쳐왔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금세 평온한 숨을 내뱉으며 잠든 오소마츠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눈 밑에 자리 잡은 기미를 슬쩍 어루만지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나 내뱉었다

이렇게나 힘들어하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슬프다

괜한 참견이라는 건 알고 있다

타국에 인질 아닌 인질로 시집온 공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괜히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하얀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눈앞에 두고 문득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붉은빛이 묻어나오는 갈색의 찻물이 꼭 오소마츠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욱신거렸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정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들었다

마츠요님과 함께 하는 다과회 자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마음껏 큰 한숨을 내쉰 것에 당황하며, 예의를 잊은 것에 사과하자 마츠요님이후후-.” 하고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소가 역시 오소마츠와 닮았다

찬 공기에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넘긴 마츠요님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 포개진 손 위에 턱을 살포시 올렸다.


그래, 무슨 고민이니~? 이야기해주지 않으련?”

그게….”

다정한 목소리에 이끌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기도제의 준비로 오소마츠가 너무 바쁜 것 같아서 걱정됩니다. 뭔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돕고 싶은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나온 새어 나온 속마음에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입조심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무슨 말을 내뱉고 만 것인가! 무슨 말이 이어질지 조마조마한 가슴을 껴안고 천천히 눈을 들어 마츠요님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마츠요님이 눈을 깜빡이며우후후~.” 하고 기쁜 미소를 피웠다.

그럼 내게 좋은 수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좋은, …?”

마츠요님의 말을 되뇌며 고개를 기울였다

한층 더 온화한 미소를 피운 마츠요님이 내게 손짓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마츠요님의 옆에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이자 귓가에 마츠요님의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그리고 이어진 마츠요님의 말에 내 심장은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으긋!!”

-, 하고 엄지게 깊숙이 박혀버린 바늘에 신음하며 벌건 핏방울이 맺힌 엄지를 입에 물었다

옆에서 나를 도와주던 토도마츠가그러게 왜 안 하던 일을 한다고 해서는~.” 하고 가볍게 핀잔을 주며 약 상자를 가져왔다

청결한 손수건으로 내 손가락을 감싸 눌러 지혈을 해준 쥬시마츠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토도마츠에게 손가락을 맡겼다

하얀 반창고가 상처를 가렸다. 작은 바늘이 만든 상처가 욱신거렸다

꼭 더운물에 데인 것처럼 따끔거리는 아픔을 참고 다시 골무를 손가락에 끼웠다.


정말로 할 거야? 그거.”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와 내 손에 들린 자수를 번갈아 응시하는 토도마츠에게 힘 빠진 미소를 돌려주었다.


아아-. 그래도 조금 익숙해졌다.”

그런 것 치고는 손가락이 상처투성이인데?”

아하하.”

토도마츠의 한숨 섞인 쏘임에 쓴웃음을 흘리고 다시 금실을 바늘에 끼워 넣었다.

기도제에 사용되는 의복은 전부 왕실의 사람이 준비한다고 한다

특히 기도문을 읊는 왕 혹은 왕세자의 의복은 그의 배우자가 만드는 것이 전통

나는 아직약혼자신분이기에 오소마츠가 입을 의복을 만드는 일에 제외되었지만, 마츠요님이 본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내게 양보해주셨다

재봉 따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가 의복 하나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시간 내에 맞출 수 있을 리 없기에 내게 맡은 일은 의복에 넣을 자수를 놓는 것

제법 섬세하고 꼼꼼함이 요구되는 일이기에 자수 하나만으로 한 달은 족히 잡아먹을 것이다

게다가 의복에 들어갈 자수는 금을 얇고 길게 뽑아 만든 금실로 만든다

실타래 하나가 한 달 치 식량비에 맞먹는 그런 고급 재료를 낭비할 수는 없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서투른 손놀림은 자주 손가락에 흠집을 남겼다

재봉틀이라는 자수 전용 기계로 놓는다면 시간도 단축되겠지만, 집 한 채 가격과 비슷한 재봉틀을 본성에서 이곳으로 옮기다 상처를 낼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일은 오소마츠 몰래 하는 일이기에, 부피도 크고 눈에 띄는 재봉틀을 별궁에 놓을 수는 없었다

자수를 처음 해보는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오소마츠는 분명 말릴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오소마츠를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바쁜 일정으로 별궁에 자주 들어오진 못해도 일단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오소마츠의 방이니까

재봉틀을 놓는다면 늦든 빠르든 들킬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손 자수를 놓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오소마츠를 위해 내가 직접 뭔가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것도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카라마츠 형아, 행복해 보임닷!!”

쥬시마츠의 즐거운 목소리에아아.”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은 상처투성이가 될지라도, 내가 오소마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쁨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소마츠에게 보여주는 나의 모든 것은 거짓되었을지 몰라도…,

오소마츠를 위한 이 마음만은 거짓이 아니니까.

 

 

 

 

 

3.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를 처리해 왼쪽으로 옮기고 고개를 들자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나를 반겼다

?” 하고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신음이 방 안에 퍼진다

쵸로마츠는기도제일로 귀족들을 만나러 갔고, 이치마츠는기도제때 사용할 중앙홀을 확인하러 갔다

오늘 해결해야 할 일을 다 끝냈는데도 혼자 남게 된 것은 오랜만이었다

기도제준비가 시작된 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이렇게 자유 시간이 생겨난 것도 놀랍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나 본궁을 빠져나와 별궁으로 향했다

정말 지독하게도 바빴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별궁에 돌아갈 수 있었고, 요 며칠 카라마츠의 잠든 얼굴밖에 보지 않았다

스스로 어이없는 한숨을 날릴 정도로, 카라 공주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부풀었다.

 

 

별궁에 도착해 곧바로 카라 공주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았다

거실, 주방, 뒤뜰, 침실. 어디에도 카라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하는 건가…. 

때가 나쁜 것에 한숨을 내쉬며 침실을 마지막으로 카라 공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보웨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외침에 계단을 내려오던 것을 멈추고 현관 앞에 펼쳐진 홀을 응시했다

굉장히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쥬시마츠가 홀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점프하고 팔을 마구 휘두르는데도 착실히 홀이 깨끗해지는 것이 신기하다

나도 모르게 계단에 앉아 쥬시마츠가 청소하는 것을 구경할 정도로 신기했다

절로 어릴 적 보았던 유랑서커스단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요기조기 잘도 뛴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도 점프 한 번으로 털어내는 모습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기교도 없이 가볍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체 능력에 감탄하던 중, 문득 쥬시마츠의 움직임을 따라 거칠게 펄럭이는 치맛자락에 눈이 갔다.

쥬시마츠는 남자지만 메이드다

카라 공주처럼 굳이 여자처럼 입을 필요가 없는데도 왜 메이드 차림을 하고 있는 걸까

치솟는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청소가 한창인 쥬시마츠를 불렀다.


쥬시마츠.”

아이!!”

끼이익- 소리가 날 정도로 날뛰던 몸을 순식간에 멈춘 쥬시마츠가 완전히 풀린 동공으로 나를 응시했다.

조금, 무섭다…. 

움찔거리는 몸을 진정하고 솔직하게 왜 메이드 복장을 하고 있는지 묻자, 눈을 더욱 크게 하고우응~.” 하고 눈을 감은 쥬시마츠가 환한 미소와 함께 눈을 팟! 하고 떴다.


카라아ㅁ-, 형아가, 아니 공주님이 외롭지 않게!!”

쥬시마츠의 힘찬 대답에 훗-,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은 많이 부족해도, 말 속에 담긴 쥬시마츠의 마음은 확실히 전해졌다

여성의 옷을 입어야만 하는 카라 공주를 위해서, 카라 공주가 외롭지 않게 자신 또한 여성의 옷을 입고 있다,

너무나 상냥한 쥬시마츠의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거웠던 몸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특한 마음이 넘쳐 계단에서 몸을 일으켜 쥬시마츠의 머리를 크게 쓰다듬었다

귀엽다. 내 동생 녀석들만큼이나 귀엽다.

꼭 동생 하나가 더 생긴 것 같은 기쁨에 즐겁게 웃으며 쥬시마츠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쥬시마츠는 상냥하네—!!”

칭찬하자, 쥬시마츠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만개했다

볼을 살며시 붉히고에헤헤~!” 하고 웃은 쥬시마츠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아닙니다요~.” 하고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귀여움을 부추겨서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오소마츠 왕자님이 더 상냥함다~!”

? 그래~?”

!! 그리고 카라마츠 형아도 상냥해!”

“…그렇네~.”

입 밖으로 미끄러진 단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쥬시마츠를 보며 다시금 웃음을 흘리고 쥬시마츠가 청소를 재개할 수 있도록 계단 위로 몸을 피했다

칭찬에 신이 났는지 청소하는 몸짓이 훨씬 더 다이나믹해졌다

홱홱 움직이며 대걸레질을 하던 쥬시마츠를쨍그랑!’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붙잡았다.


….”

사색이 되어 천천히 뒤를 돈 쥬시마츠 뒤에는 장식되어 있던 동쪽 나라의 항아리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신나 휘젓던 대걸레로 툭 쳐버린 것을 깨달은 쥬시마츠가 새파래진 얼굴로오우오우오우….” 하고 덜덜 떨며 나를 응시했다.


-시마츠.”

, 아이!!”

빨리 치우자, 이거.”

, 괜찮슴깟!?”

눈에 띄게 놀란 얼굴로 묻는 쥬시마츠에게 씩- 웃어주고, 쓰레받기에 날카로운 항아리 파편들을 집어 담았다

멍청히 내 뒤에 서 있던 쥬시마츠도 빗자루를 가져와 자잘한 파편들을 쓸어모았다

항아리 조각이 다 모이자 그것을 한데 모아 버리는 천으로 감싸 별궁 뒤쪽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쓰레기통은 성안의 시종들이 매일 비우는 것이니 내일이 되면 항아리 조각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깨진 항아리를 치우는 내 모습에 적잖이 놀랐는지, 쥬시마츠는 내내 아무 말 없이 나를 도왔다.


나도, 어릴 때 많이 깨 먹었거든. 그러니까 이건 둘만의 비밀로.”

아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쥬시마츠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대고-!” 하고 비밀이라는 몸짓을 하자 쥬시마츠도 다시 활짝 웃으며-!!” 하고 입을 꿰매는 시늉을 했다.


역시 오소마츠 왕자님이 더 상냥함닷!!”

후핫, 그래. 칭찬 고마워~.”

그러니까-,”

?”

카라 형아도 오소마츠 왕자님을 돕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

…?”

갑자기 나온 말에 고개를 기울이고 쥬시마츠를 응시했다

에헷-!” 하고 배시시 웃은 쥬시마츠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케-, 이러케-! 카라 형아도 힘내고 있슴닷!”

으응~?”

위아래로 손을 반복해 움직이며 뭔가를 보여주는 쥬시마츠의 몸짓에 눈썹을 찌푸렸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

언제까지고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자 쥬시마츠도 답답했는지 손짓을 멈추고 나를 보며 물었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슴까아~?”

준비? , 혹시 기도제.”

아이!”

, -. 잘 굴러가고 있긴 한데….”

갑자기 나온 기도제 이야기에 어리둥절해하며 대답하자, 쥬시마츠가 히쭉 웃으며 다시 손짓을 시작했다.


카라 형아도! 하고 있슴닷! 준비!!”

…?”

쥬시마츠의 손짓을 가만히 응시했다


준비? 기도제의

카라 공주가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부유하면서 멀어졌다

카라 공주에게 맡긴 일은 없다

준비의 모든 과정은 내가 총괄하고 있으니까, 쵸로마츠나 이치마츠가 카라 공주에게 일을 맡겼을 리 없다

그런데 무슨 준비

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골똘히 생각하며 쥬시마츠의 손짓을 다시금 살폈다

뭔가를 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그 사이를 왔다 갔다…. 

꼭 어릴 때 엄마가 하시던 자수 같다…. 


잠깐만

? 자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쥬시마츠를 응시하자, 해사하게 웃은 쥬시마츠가 그것이 정답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수!! 

기도제 의복에 들어갈 자수인가!! 


정답을 알아냄과 동시에 잠든 카라마츠의 손에 수많은 반창고가 붙어 있던 것을 떠올렸다

주방에 자주 드나드는 녀석이니 분명 새로운 요리라도 하다가 다친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바늘을 다루다 생긴 상처인 것 같았다


그런가…. 

자수를 하고 있었나

그건, 나를 위해서

나를 돕기 위해서 손에 상처까지 내 가면서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해도, 자만해도 되는 거지…? 


입가에 넘실대는 미소를 손으로 가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기쁘다

카라 공주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있다는 것이. 걱정 끼치는 것이 싫어서, 또 부담되지 않을까 싶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모든 일을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다고, 멋진 모습 하나 정돈 보여줄까 해서 도움도 마다했는데….

나를 위해서, 몰래 자수를…. 

감동과 기쁨이 동시에 몰려와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오소마츠 왕자님!”

“…?”

둘만의 비밀!”

-, 그래. 비밀.”

쥬시마츠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부드럽게 나를 바라보던 쥬시마츠가 조금 전 내가 했던 그대로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 하고 속삭였다.

자신이 말해줬다는 것도, 카라마츠가 나를 위해 자수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둘만의 비밀

쥬시마츠가 말하는 것을 이번엔 단번에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얼굴 위로 떠 오르는 행복한 미소를 어떻게든 숨기고 본성에 돌아오자, 쵸로마츠가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서류와 함께 어제 완성한 기도문을 한 번 더 검토하던 쵸로마츠가 나를 보더니 눈썹을 팩 찌푸렸다.


무슨 일 있었어?”

~? 무슨 일?”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별로오~?”

쵸로마츠의 물음에 대답을 늘리며 책상에 가 앉았다

그새 쵸로마츠가 가져온 서류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아도 들뜬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깃펜을 들어 하나씩 서류를 살펴보는 나를, 쵸로마츠가 기이한 생물을 보는 눈으로 한참을 응시했다.

 

 

 

 

 

4.

 

기도제. 왕실과 선별된 고위 귀족들만이 참여하는 자리.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인 만큼 그 중요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매해 왕이나 왕세자가 읊은 기도문은 전국에 발표되어 귀족들과 국민들의 입에 회자된다

역사서에도 기록되는 기도문은 전적으로 기도제를 총괄하는 자가 쓰는 것

몇 밤을 지새우며 쓴 기도문이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기도제가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10분 남짓

태연한 얼굴을 만들어도 발광하는 심장이 계속 귓속에서 울린다

-, 하고 큰 숨을 내쉬며 하얀 예복의 어깨에 걸쳐진 망토를 손에 쥐었다

팔까지 가릴 정도로 길게 내려오는 망토엔 카라 공주가 새긴 자수가 들어가 있다

금실로 정성스럽게 놓인 자수는 자세히 살피면 군데군데 엉성함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랑스러워서, 망토의 자수에 입술을 내리고 두근대는 심장은 달랬다.


오소마츠 형, 곧 시작이야.”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치마츠의 말에 몸을 돌려 중앙홀로 향했다.

 

 

태양이 하늘에 가장 높이 떴을 때, 중앙홀을 가득 채우는 햇살을 어깨에 두르고 초청받은 귀족들을 가로질러 단상으로 걸어갔다

아름다운 빛을 자랑하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색색의 빛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양편에 서 있는 왕실 가족을 한 번 둘러보고 기도제의 시작을 알렸다

붉은 왕국 제일의 합창단이 경건하게 청아한 목소리를 합쳐 기도곡을 부르고, 귀족들과 왕실 모두 몸을 낮추어 신에게 기도한다

왕실과 귀족의 대표가 되어 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기도문을 읊었다.



 

『신이여, 이 땅과 높은 산, 그리고 그 아래 당신의 혈족들에게 부어준 축복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내려준 은혜로 우리는 또 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냉혹한 폭풍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신이여, 당신이 깃든 이 땅에 검을 발을 들인 무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당신과 그 아들인 우리를 우롱하는 무지한 저들에게 당신의 힘을 보이소서.

 

나의 이 손에 그 어떤 것도 벨 수 있는 권능의 검을 쥐여주소서.

그리하면 저 어리석은 자들의 목을 베겠나이다.

당신의 군대를 이끌고 악의 무리를 물리쳐, 당신과 당신의 자식과 이 땅을 지키겠나이다.

 

신이여, 나와 함께하소서.

강인한 당신의 힘을 부어주소서.

당신을 위해, 이 땅의 자식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적을 섬멸하겠나이다.

 

 

 


오소마츠의 기도가 끝나고, 귀족을 대표해 쥬드 공작의 기도가 이어졌다

다가올 해의 축복을 비는 기도를 끝으로 기도제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자리를 이동해 기도제의 성공을 축하하는 왕의 칭찬에도 오소마츠는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어딘가 정신이 다른 곳에 날아가 있는 것 같은 오소마츠의 모습에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눈썹을 찌푸렸다.

 

 

환한 햇살 아래, 하얀 기도제 의복을 내려다본 오소마츠가 망토에 놓인 자수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빨리-, 카라마츠가 보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며 살포시 눈썹을 찌푸리는 오소마츠의 마음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5.

 

침실에 뚫린 발코니에 의자를 가져가 앉아 멍청히 본성을 바라본다

한창 기도제가 열리고 있을 본성은 환한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약혼자신분

게다가 아직 푸른 왕국의 공주가남자라는 것을 귀족들 앞에 드러낼 수 없기에 나는 별궁에 남았다

이 한 달간 오소마츠가 기도제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기도제가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빌며 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빨리 기도제가 끝나서 저 문을 열고 오소마츠가 달려와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지 않을까, 그렇게 바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겨우 완성한 자수는 무사히 마츠요님의 손으로 넘겨졌다

오소마츠가 걸칠 망토에 들어갈 자수는 자세히 살피면 군데군데 수가 빠진 엉성한 것이었다

내가 했다는 것을 모르는 오소마츠가 보면 분명 픽- 웃을 정도의 허술한 자수겠지만, 지금은 그 자수가 오소마츠에게 실소를 주어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하얀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손을 겹쳐 신에게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벌컥! 침실의 문이 열렸다.


“…오소마츠?!”

기도제가 벌써 끝났는지, 아직 하얀 예복을 입은 오소마츠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다

어깨에 걸친 하얀 망토가 자수와 함께 펄럭였다

발코니까지 나와 의자에 앉은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오소마츠가 쭉 바라고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활짝 피웠다.


놀러 가자!”

!?”

뜬금없는 말에 바람 빠진 신음으로 되묻자, 오소마츠가 내 손을 잡아끌고 옷장으로 걸어갔다

이전에 성 아래에 있는 마을로 미행을 나갈 때 입었던 허름한 평복을 순식간에 갈아입은 오소마츠가 내게도 푸른 정장을 안겨주고 파티션 뒤로 냅다 밀어 넣었다.


빨리 갈아입어!”

.”

영문도 모르는 채, 오소마츠의 재촉에 못 이겨 드레스를 벗었다

오늘은 다행히 혼자서 쉽게 벗을 수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 오랜 시간을 쏟지 않고 남성용 정장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정장의 리본형 넥타이를 반듯하게 피며 파티션을 나오자 오소마츠가 다시 내 손을 잡아 뛰쳐나가듯이 별궁을 나왔다.

 

 

 

전처럼 성의 뒷문을 통해 마을로 내려오자, 완전히 달라진 마을의 분위기에 턱을 떨어뜨렸다

시장도, 가정집도 전체적으로 검게 장식되어 해골이나 무시무시한 얼굴을 가진 호박등이 울타리 곳곳에 놓여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도 어딘가 기묘하고 무시무시한 장식들로 가득했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역시 귀신이나 해골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건, 대체….”

뭐가 뭔지 몰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중얼거리자 오소마츠가 힛-, 하고 웃으며 코 밑을 가볍게 문질렀다.


오늘은 축제거든!”

, …?”

“‘기도제가 끝나면 평민들의 축제가 시작돼. , 가자!”

, , 잠깐!!”

오소마츠에게 이끌려 시장을 돌아다니고 노점상에서 군것질거리를 사 먹는 동안, 겨울의 짧아진 해가 서쪽으로 얼굴을 감췄다

새까만 어둠이 마을을 덮쳤는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반기는 것처럼 더 활기차게 축제를 만끽했다

호박등이 주황빛으로 반짝이고, 광장은 즐거운 민속 음악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벌써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야 할 어린아이들도 어른들 사이를 바삐 누비며 귀신 분장을 하고 즐겁게 웃고 있었다

광장 한쪽에 놓인 분수대에 앉아 오소마츠가 사 온 간식을 먹으며 신기하단 눈으로 마을 사람들을 눈으로 쫓자, 오소마츠의 들뜬 목소리가 옆에 다가왔다.


신기하지? 겨울의 축제는 특히 신난다구~.”

, 아아….”

힘들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내년이 오면서 신의 축복이 들어오는 것을 축하하는 거야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악귀들을 무서운 분장으로 하고 몰아내는 거지.”

그렇군….”

줄곧 기도제 준비로 지친 얼굴만 보여주었던 오소마츠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에 안도하며, 오소마츠의 눈을 따라 흥겹게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팔짱을 끼고 좌우로 팔짝이며 원을 돌고 파트너 체인지

여성들은 치마가 펄럭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너무나 행복하게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무서운 분장도 잊을 정도로 정말 즐겁게 춤을 추는 모습이 어쩐지 부러웠다

아무런 근심도 없이, 걱정도 없이, 즐겁게

혹시 저것이 오소마츠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잔잔한 미소로 마을 사람들을 응시하는 오소마츠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도 출까?”

!?”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깨끗이 먹어치운 오소마츠가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오소마츠가 나를 끌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서로 마주 보고 가볍게 인사를 하고 팔짱을 낀다

그리 어려운 춤이 아니기에 나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다

음악에 맞춰 오소마츠와 함께 광장을 돌고 손을 맞잡았다

파트너를 바꾸면 모두가 웃는 얼굴로 나와 함께 춤을 춘다

즐겁다

정말로 오랜만에 무거운 생각을 날려버리고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밤이 깊을수록 무르익어가는 축제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성 뒤에 있는 산에 올랐다

이전 오소마츠가 데려와 주었던 산 중턱, 동물들이 있는 장소

그곳에 앉자 성과 함께 축제로 밝게 빛나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오소마츠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동물들이 하나둘 오소마츠 곁에 다가와 앉았다

노점에서 산 무서운 가면을 머리 위에 올리고 제 품에 안기는 동물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오소마츠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잔잔히 울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 녀석들 말이야-. 원래 다른 왕자들이 키우던 녀석들이야. 잠깐 키우고 금방 질려서 버려진 녀석들을 내가 주웠거든. 내가 완전히 키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가 오면 반겨주는 기특한 놈들이야.”

-, 그렇군.”

오소마츠의 손길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눈을 지그시 감은 토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오소마츠 주변에 모인 동물들은 오소마츠를 굉장히 아끼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자기도 만져달라고 불쑥 얼굴을 내민 회색 늑대의 목덜미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2 왕비라는 건, 입장이 참 곤란해서 말이야. 특히 엄마는, 대단한 가문의 사람도 아니고…. 타국의 귀족이었으니까, 여러모로 힘들었어. 툭하면 귀족들이나 1 왕비의 눈치를 봐야 했고…. 쥬드 공작 일당은 엄마를 무시하지~, 쥬드 공작의 독재에 불만인 귀족들은 멋대로 엄마한테 기대하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거든. 게다가 어느새 우리한테도 그런 문제가 옮겨와서…. 1 왕비의 왕자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쥬드 공작 일당은 시시때때로 음모를 꾸미고…, 부상 입기도 하고….”

“….”

그래서, 전부 다싫어졌을 때, 여기에 왔었어.”

“….”

이 녀석들의 위로를 받으면 조금은, 나아져서…. 때때로 힘들 때마다 여길 왔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난 별로이 되고 싶지 않거든. 바라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아. 나는 그냥 쵸로마츠랑 이치마츠랑 엄마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만 있으면 만족해. 결혼도, 아이도 필요 없어. 누구든 간에 함께 행복해질 자신 없고, 형편없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리도 없고…. 그런데 덜컥 왕세자가 되고, 교육이다, 기도제다, 뭐다, 쏟아지는 일에 치여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어서 지쳐있었거든…. 그러니까—….”

마을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돌린 오소마츠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푸른 달빛에 비친 오소마츠의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가늘게 휘었다.


“…도와줘서, 굉장히-, 기뻤어.”

, 하고 울리는 소리에 겨우 오소마츠가 내 손에 입 맞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투성이에 거친 투박한 손을 붙잡고 소중히 입맞춤을 내린 오소마츠의 미소에 단번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밤의 그림자 속으로 고개를 내려 숨겼다.


많이 지쳐 보였으니까…. 도와주고 싶었다. 오소마츠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친구로서 돕고 싶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투르게 전한 진심에 내 손을 잡고 있던 오소마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뼈가 삐걱거릴 정도로 강하게 내 손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힘을 푼 오소마츠가그래…. 고마워.” 하고 대답을 흘렸다

목소리가 어쩐지 기운이 없다

고개를 들자 산 아래로 눈을 돌린 오소마츠의 얼굴에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문득, 오소마츠의 표정에, 감정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사 나는, 오소마츠와 함께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오소마츠를 생각했다

오소마츠의 표정에, 작은 손짓 하나에, 걱정하거나 기뻐했다

지금도 오소마츠의 얼굴이 묘하게 슬퍼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심장이 아팠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오소마츠의 슬픔을 달래주고 싶었다.

 

이것은 정말로, 단순한 친구의 마음인 건가…?

 

 

자신의 마음인데도 시원한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오소마츠의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렸다.


이제 내려갈까?”

아아….”

손을 내밀어준 오소마츠에게 끄덕이고 손을 마주 잡았다

어두운 산길은 자신의 발조차 보이지 않아서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오소마츠는 익숙한지 휙휙 돌부리나 길을 막는 나무가 없는 쪽으로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나를 인도했다

성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겨우 산길에 닿았을 무렵, 오소마츠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나를 응시했다.


오소마츠?”

“…겨울이, 끝나가. 공주님.”

…, 그렇군.”

왜 지금 새삼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기울이고 대답했다

예상했다는 듯이 쓴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다시, 전쟁이 시작될 거야.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해 왔던 호흡을 잊을 정도로 오소마츠의 말에 담긴 의미가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오소마츠가 다시, 전장에 나간다


겨우내 함께 있는 것이 당연했던 오소마츠가, 한 침대에서 체온을 나누며 잠들었던 오소마츠가….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어버린 나를 오소마츠가 옅은 미소로 쓰다듬고 다시 손을 잡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산길을 밝히는 불빛은 점점 밝아오는데, 내 마음에 내려앉은 어둠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6.

 

오소마츠의 출정일이 결정되고 곧 세 왕자는 바빠졌다

기사단의 재편입, 무기 보강, 보급 준비 등등…. 

전쟁을 준비하는 움직임은 착실히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혹독한 겨울바람에 깡깡 얼었던 땅이 녹아갔다

카라마츠는 자수를 놓으며 익숙해진 바느질 솜씨를 십분 발휘해 작은 부적을 만들었다.

다시 전장에 나가는 오소마츠를 위해, 뭔가 해 줄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카라마츠에게 마츠요가 제안한 것이었다

오소마츠를 지켜줄 부적. 붉은 주머니에 한 땀 한 땀, 마음을 담아 오소마츠가 다시 무사히 별궁에 돌아올 수 있기를 빌었다.

 

 

그리고 마침내 출정일이 다가왔다. 성문 앞에 집결된 기사들과 병사들

그 옆에 보급품을 잔뜩 실은 마차를 세워두고 별궁으로 돌아온 세 왕자가 마츠요와 카라마츠, 쥬시마츠, 토도마츠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피가 튀기고, 죽음이 바로 코앞에서 흔들리는 전장에 세 아들을 보내는 마츠요는 눈물을 숨기지 못하고 하나하나 아들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 손에 자신이 만든 부적을 쥐여주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당부하는 마츠요의 바람에 세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쵸로마츠의 손에 녹색 부적을, 이치마츠의 손에 자색 부적을 쥐여준 마츠요가 오소마츠를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제 어미한테 받으면 안 되지.”

마츠요의 말에 어리둥절해 있는 오소마츠의 앞에 카라마츠가 다가와 붉은 부적을 내밀었다

서투른 자수가 박힌 부적을 본 오소마츠가 눈을 크게 떴다

카라마츠의 손에 올려진 부적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오소마츠가 손을 들어 부적을 건네받아 소중히 감싸 쥐었다.


고마워.”

“…무사히 돌아와라, 오소마츠.”

. 꼭 돌아올게.”

떨리는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말에 오르고 마츠요의 배웅을 뒤로하고 성문을 향해 달렸다

동생들을 따라 말에 오르려 말고삐를 손에 쥔 오소마츠가 다시 카라마츠에게 다가갔다.


잊은 게 있었어.”

“…?”

눈을 깜빡이는 카라마츠의 허리에 팔을 감아 강하게 끌어당긴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

수호의 키스

따뜻하고 조금 마른 오소마츠의 입술이 닿은 순간,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으로 떠나야 했던 오소마츠와 나누었던수호의 키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키스는 어째선지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 하는 낯뜨거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카라마츠의 부드러운 귓불을 슬쩍 매만진 오소마츠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다녀올게.” 하고 인사를 던지고 말에 올랐다

이랴-!” 하고 오소마츠의 외침에 맞춰 말이 성문을 향해 힘차게 뛰었다

멀어지는 오소마츠를 배웅하며 카라마츠가 뜨거워지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부디, 부디무사히 돌아와 줘.

 

카라마츠의 바람이 오소마츠를 뒤따르는 바람에 실려 그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 마을의 축제는 할로윈을 살짝 변형시켰습니다ㅎ 눈치채셨는지 모르겠네요.


* 이제 좀 꽁냥대나 싶었는데 다시 오소마츠가 떠나고 말았습니다만, 괜찮을 거에요, 아마...ㅎ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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