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호 오소마츠 x 학생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아프지 않아요...


* 공미포 14,755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


올해도 이제 끝이구나, 하고 흩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뿌연 입김을 내뱉었다. 

봄에 혼례식을 올리고 이제 겨울. 곧 오소마츠와 함께 지낸지 1년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창고에서 코타츠를 꺼내기로 했으니 서둘로 집으로 향한다. 

내일은 연극부 선배님들의 송별회가 있으니 귀가가 조금 늦어질 것이라고 오소마츠에게 미리 말해놓지 않으면 안된다. 

저녁은 오소마츠가 알아서 먹을 수 있게 오늘 넉넉하게 만들어 놓자. 



집에 도착해 본채를 지나쳐 별채로 몸을 돌렸을 때, 토도마츠가 나를 불러 세웠다.


“카라마츠 형!! 잠깐, 이리 와봐.”

“무슨 일 있나?”

“아빠, 엄청 화나셨어....”

“아버지가? 왜....”

“일단 빨리 가봐.”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을 토도마츠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나를 잡아 끌었다. 

무슨 일이냐고 토도마츠에게 물어도 토도마츠는 고개를 저을 뿐,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본채에 도착해 거실에 들어가자 아버지와 할머니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팔짱을 끼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아버지가 정말로 많이 화가 났을 때 흔히 취하는 자세였다. 

그 맞은편 소파에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초조하게 나를 응시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그래. 여기 앉아봐라.”

아버지의 말에 쵸로마츠와 이치마츠 사이로 들어가 앉았다. 

할머니는 잔뜩 화나신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아버지도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마츠.”

“네.”

“너, 진로계획 조사서에 ‘연극배우’라고 썼다고 하던데.”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라 아버지를 향해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거죠? 진로계획 조사서는 선생님과 1대 1 상담할 때만 쓰인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연극 배우’라고 쓰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너는 우리 가문의 장자다! 앞으로 가문을 이어야할 녀석이 그런 놀이나 하고 있을 틈이 어디 있다고! 네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알고 있는 거냐!”

쾅!, 하고 아버지가 내리친 주먹에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몸을 움찔였다. 

소파 뒤에 서 있던 토도마츠도 흠칫 놀라 소파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할머니조차 아버지의 역정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상하게 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나 무서웠던 아버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분노로 머리에 피가 쏠려서 그럴 수도 있겠다. 

아버지의 분노 앞에서 나는 당돌하게 입을 열고 언성을 높였다.


“장자가 뭐요! 꼭 장자가 집안을 이어야 하나요!? 저는 싫어요! 저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서 하는 것보다 연기가 하고 싶어요!! 연기가 훨씬 더 재미있고 보람된 ㅇ,”

대체 왜 그러냐는 눈빛과 놀란 얼굴들, 제정신이냐는 의심의 표정들이 경악으로 바뀌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크게 팔을 휘둘렀다. 

쿵, 하고 바닥을 울리며 쓰러진 것은 나였다. 

혀에 퍼지는 미지근한 액체를 꿀꺽 삼키고나서야, 그것이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릿한 철냄새가 입안에 남았다. 멈추지 않고 입안을 채우는 피를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부로 부활동은 금지다. 외출도 금지하겠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네가 성실히 아비의 말을 지키고 있는지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에게 확인하게 할 테니, 반항하지 말고 잘 들어라. 잘 지키는 걸 봐서 외출금지는 풀어주마. 단, 부활동은 영원히 금지다! 내일 바로 연극부 탈퇴하고 와!”

거친 숨을 내쉬며 끓는 듯이 외친 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 거실을 빠져 나갔다. 

아버지의 손지검에 놀란 할머니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나를 보며 “쯧, 쯧. 괜히 요상한 헛바람이 들어서는....” 하며 한탄하며 스쳐지나갔다. 

놀라 입을 열지 못하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를 두고 가방을 들어 거실을 나왔다. 

운동화를 구겨 신고 별채로 달려가 거칠게 현관문을 열었다. 

덜컹,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지만 무시하고 문을 세게 닫고 복도에 발을 올렸다. 

차가운 마룻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전해진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흡, 흐, 으읏....”

목구멍을 타고 새어나오는 흐느낌을 핏물과 함께 삼키고 복도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팔을 교차해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흐르는 눈물을 팔로 닦아내도 커다란 눈물은 멈추지 않고 소매를 짙게 적셨다. 



“카라마츠.”

부드러운 목소리, 라고 우는 와중에 생각했다. 

평소와 전혀 다른 꼭 연인을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귀가 닿았다. 

어머니처럼 상냥한 손길이 내 머리 위에 올려진 순간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덜룩한 시야에 황금색 귀가 길게 늘어진 것이 걸렸다. 

기 죽은 강아지인가? 너는.... 

항상 자랑스럽게 좌우로 흔들어대던 꼬리도 힘을 잃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 

저러면 바닥에 있는 먼지가 묻는다고, 오소마츠. 

코를 훌쩍이며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고 오소마츠와 눈을 맞췄다. 

나를 보는 오소마츠의 미소는 슬픈 것 같으면서도 어머니와 같이 자애로워 보여서 겨우 멈출 수 있었던 눈물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

말없이 긴 손가락이 벌건 눈가에 닿았다. 

긴 손톱에 연약한 살갗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오소마츠는 내 눈물을 한방울 두방울 받아 털어냈다.


“뭐 때문에 이렇게 울까~? 우리 신부님은.”

따뜻한 미소가 건네는 질문에 슬픔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오소마츠가 이렇게나 나를 걱정해주고 있는데 오소마츠를 원망하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 눈을 질끈 감고 뺨에 닿은 오소마츠의 손을 쥐었다.


“...오소마츠, 왜 나는 장자로 태어난 걸까? 나는 ‘연기’가 하고 싶은데, 모두 그러면 안된다고 말한다. 집을, 가업을 이어야한다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도 할 수 없다면, 나는 대체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건가....”

한심한 불평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오소마츠이 손이 천천히 움직여 내 얼굴을 감쌌다. 

마주한 눈이 가늘게 휘어지곤 가까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오소마츠의 팔 안에서 잔잔히 울리는 오소마츠의 목소리에 지친 눈을 감았다.


너는 그대로도 괜찮아. 다른 사람들의 말에 맞춰 변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흐트러진 마음을 매만지며 정돈해주는 그 말은 느긋하게 마음 속에 퍼져 마지막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부활동도, 외출도 금지당한 채 본채엔 발도 들이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등교, 하교길을 함께 하는 형제들 뿐. 

아버지와도 어머니와도 벌써 며칠 째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나 나름의 반항이지만, 아버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실 것이다.


분주히 움직이는 친척들을 보며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허공에 날리는 먼지에 초점을 맞췄다. 

제삿날인 오늘은 혼례식에 왔었던 친척들이 모두 모여 본채 안을 바쁘게 드나들었다. 

형제들과 함께 나도 일을 도와야하지만 본채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나는 마당에 서 있을 뿐이다. 

중간중간 스쳐 지나가는 형제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박혀도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날씨 참 좋네-, 하고 늙은이 같은 감탄을 흘리고 있을 때, 가볍게 어깨를 치는 손길에 눈을 돌렸다.


“야호! 신부님!”

“...고모.”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키코 고모의 품에는 볼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아이가 안겨 있었다.


“많이 자랐네요.”

내 손가락을 잡으려 손을 뻗는 아기를 보며 말하자 고모는 “그렇지~?” 하고 웃으며 아기를 흔들어보였다.



고모부에게 아기를 맡긴 고모가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내 옆에 자리잡았다. 

일 도우러 가지 않아도 되냐 묻자 되려 너는 왜 여기 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아버지랑 싸워서요.”

“어머, 그래? 오빠랑? 별일이네-.”

흐응~, 하고 말을 흐린 고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겨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날씨는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있어도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고모의 몸이 걱정돼 들어가라고 하자 고모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럼 카라마츠도 같이 들어가. 여긴 춥잖아.”

“아니, 저는....”

“오빠랑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지? 그럼 할아버지 방 들어가자.”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처럼 씩- 웃은 고모가 내 손을 끌어 당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빈방으로 남아있는 그 방은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았다. 

제사 준비로 바쁜 오늘은 더더욱 사람의 발이 들지 않는 장소였다. 

고모에게 이끌려 할아버지 방에 도착해 난방을 켰다. 

사람이 머물지 않는 방 안은 입김이 서릴 정도로 냉랭했다. 

전기 난로에서 뿜어나오는 열이 방안 공기를 어느정도 데웠을 때, 고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소마츠랑 지내는 건 좀 어때? 할만 하니?”

“아, 네.... 처음엔 말도 안 듣고, 공부하는데 방해만 하고 그랬는데, 요즘엔 괜찮아요. 지낼만 해요.”

고모의 입에서 ‘오소마츠’의 이름이 나온 것에 내심 놀라며 깍지낀 손가락을 꼼질대며 대답했다. 

“훗-.” 하고 옅은 웃음을 흘린 고모가 방 한쪽에 놓인 할아버지의 담뱃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석은 아직도 그러고 있구나~.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가끔 애같은 장난도 치고 그러지?”

“...네.”

어떻게 고모가 그걸 알고 계세요?, 라는 질문을 집어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곳을 바라보는 고모의 눈빛엔 아렴풋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나도 오소마츠랑 같이 지내면서 화도 많이 내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 처음엔 굉장히 싫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어느새 같이 있는게 익숙해져서..., 헤어지는 날에는 꽤 많이 울었다니까? 고생도 많이 했지만, 오소마츠와 함께 지낸 날들을 떠올리면 ‘정말 그때는 즐거웠구나-.’ 하고 웃게 된다니까.”

“....”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수십 개의 답변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그렇네요, 하고 단순하게 수긍해야 하나? 

오소마츠를 잘 알고 계시네요, 라고 웃어야 하나? 

저도 지금은 즐거워요, 라고 멋쩍게 대답해야 하나? 

깍지를 낀 주먹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 혼란스럽지? 뭐가 그렇게 초조하지? 

왜, 이렇게까지 충격을 먹는 걸까....


— 오소마츠에게 나 이외의 신부가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후-, 너무 내 이야기만 했나?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도 눈치보이니까 나는 먼저 들어갈게. 카라마츠 너는 여기서 몸 더 녹이고 가.”

“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의 담뱃대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방을 나서는 고모를 배웅했다. 

혼자 남겨진 채, 충분히 따뜻해진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오소마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8.


“카~라~마~츄우~~, 놀아줘어~~!”

발을 동동 구르며 매달리는 오소마츠의 손을 피해 카라마츠가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두 팔을 벌려 안으려 했던 몸이 멀어진 것을 본 오소마츠가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깜빡였다. 

“카라마츠?” 하고 불러도 카라마츠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오소마츠를 못미덥다는 눈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뭔가.”

“어? 아니, 왜 피하나~ 싶어서.”

“...별로, 피하지 않았어.”

어디로보나 명백하게 자신을 피해놓고 시침을 떼는 카라마츠의 대답에 오소마츠가 눈썹을 찌푸렸다. 

요 며칠 계속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데도 카라마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대답을 반복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노골적으로 피하고, 불러도 대답하려 하지 않는다. 

한 이불에서 잘 때도 최대한 오소마츠와 거리를 벌려 이불 구석에서 자는가 하면, 오소마츠가 뭘 같이 하자고 하면 공부 핑계를 대며 그 자리를 피했다.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빼면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와 한 장소에 있는 것조차 꺼리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를 빤히 응시하는 오소마츠의 시선을 고개를 살짝 돌려 피한 카라마츠가 작게 “나는, 공부해야 하니까.” 하는 변명을 놔두고 방을 떠났다.

 커다란 다다미방에 홀로 남겨진 오소마츠의 꼬리가 바닥으로 축 처졌다. 

힘없이 아래로 떨군 꼬리를 붙잡고 바닥에 털퍽 누운 오소마츠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담뱃대를 꺼내 물었다.


“이번엔 꽤 빠른데....”

수십 명의 신부가 이렇게 오소마츠를 거쳐 갔다. 

‘신의 가호’를 바라서 시집이라는 명목으로 오소마츠의 곁에 머물게 된 신부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떠나갔다. 

집안의 보호를 받으며 집에 갇혀있던 신부들이 자라 ‘세상’에 나갈 때, 오소마츠는 제 힘을 모조리 쏟아부어 신부들의 앞길을 축복했다. 


카라마츠와 함께 한 시간은 제법 즐거웠다. 

사내아이를 신부라 보낸 것은 황당했지만, 다른 신부들보다 더 즐거웠다. 

제멋대로 화내고, 불평하고, 웃는 귀여운 사내아이는 어느새 오소마츠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금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씁쓸한 웃음과 함께 허망한 소원을 연기에 실어 날려보낸 오소마츠가 천장을 응시하며 눈을 감았다.


“그럼, 저녀석에겐 어떤 작별선물을 줄까.”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한데 모여 무릎 꿇고 앉은 토도마츠와 쵸로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제삿날 카라마츠가 본채에 발도 들이지 않고 일을 돕지 않았다는 말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아버지의 호통과 그에 대드는 카라마츠의 외침을 들으며 토도마츠가 저려오는 다리를 꼼질였다. 

집안의 대를 이을 녀석이 어쩌고 저쩌구 화내는 아버지와 집을 이을 생각따위 없다고 응수하는 카라마츠의 싸움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싸움을 끝내주길 원하면서 방 안을 둘러보아도,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어머니와 묵묵히 둘의 싸움을 지켜보는 카나코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언성에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도 지친 기색을 비추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을 때,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문이 열렸다.


“이야~, 시끄럽네? 시끄러워서 낮잠도 못 잘 정도야~?”

낯선 이의 목소리에 오둥이의 눈이 문쪽을 향했다. 

주먹을 높이 치켜든 채 멈춘 아버지도 놀란 얼굴로 거실 입구를 응시했다. 

붉은 기모노에 황금색 꼬리와 귀를 가진 요상한 남자가 성큼성큼 거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 오, 오소마츠님!! 여긴 어쩐일로...!!”

재빨리 남자에게 뛰어가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카나코의 모습에 쵸로마츠 이하 네명의 동생들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집안의 최고 어르신이 몸을 낮추어 존댓말을 할 정도로 남자는 늙어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오둥이의 또래로 보일 정도로 남자는 어린 티가 묻어나오는 청년이었다.


“시끄러워서 왔다고 했잖아~. 여어-, 거기 주먹 든 녀석. 카나코 아들내미.”

함부로 카나코의 이름을 부르고, 한참 연상으로 보이는 아버지에게 건방지게 손짓하는 남자의 모습에 거실에 있는 모두가 입을 벌렸다. 

오소마츠의 등장에 적잖이 놀란 카라마츠도 제 아비를 쏘아보는 오소마츠에게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누구한테 허락받고 내 신부한테 손을 대려고 하고 있어?”

“오, 오소마츠?!”

“내 신부를 만질 수 있는 건 남편인 나뿐이거든?”

“오소마츠으!?”

카라마츠의 옆으로 걸어가 카라마츠를 감싸 안은 남자, 오소마츠는 어쩔 줄 몰라하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아버지에게 눈을 맞췄다.


“장자니 뭐니,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장자 타령? 가업이야 저-기 앉아있는 놈들 가운데 아무나 이으면 되잖아. 카라마츠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놔둬.”

아버지를 향해 콧방귀를 끼며 꼬리를 살랑이는 오소마츠의 말에 입을 뻥끗거리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연실색한 카나코가 오소마츠의 앞에 끼어들었다.


“오소마츠님! 말씀을 거두어 주세요! 당연히 가문은 장자인 카라마츠가 이어야 할 일입니다!”

“누가 그게 법이라고 말했어? 상관 없잖아, 장자가 아니어도. 너희는 ‘누군가’가 집안을 잇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내가 장자가 아닌 다른 녀석이 집안을 이었다고 화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를 모실 수 있는 녀석이면 누구든 상관 없다고? 그게 아니면, 내 말을 거역할 특별한 이유라고 있어?”

“하지만, 대대로...!”

“카나코, 누구 덕분에 지금까지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

카나코의 항변에 오소마츠의 음색이 변했다. 

장난기나 묻어나오는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공기를 울리며 듣는 이의 소름을 불러 일으켰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호랑이의 울음소리에 몸이 얼어붙은 토끼처럼 카나코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말이야~. 카나코, 너도 이딴 집안 싫다면서 뛰쳐나가놓고, 카라마츠한텐 집안을 이으라고 화내는 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거다?”

“오, 오, 오, 오소마츠님!!”

오소마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카나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만 말하라며 오소마츠를 다급히 부르는 카나코의 당황한 모습에 오둥이는 그저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 꼬맹이들도.”

““““!!””””

오소마츠의 시선이 네 명의 동생들에게 옮겨졌다. 

차갑게 노려보는 붉은 눈을 마주한 동생들이 몸을 흠칫 떨며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카라마츠도 너희랑 동갑인 단순한 ‘아이’야. 너희가 귀찮다는 이유로 카라마츠가 받는 불합리한 대우를 보기만하면서 카라마츠한테 전부 떠넘기고 무시하지 마.”

““““....””””

뜻밖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동생들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오소마츠와 그 품에 안긴 카라마츠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오소마츠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카라마츠는 장자니까, 라는 사실을 앞세워 귀찮은 일을 피했다.

그것이 카라마츠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본 동생들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죄책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카라마츠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카라마츠도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들의 눈빛에 서린 죄책감을 알아채고 짙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헤실 웃었다. 

카라마츠와 동생 사이에 사과와 용서의 눈빛이 오고가는 것을 본 오소마츠가 반쯤 감은 눈을 동생들에게 꽂아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네!!!””””

목이 떨어지라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들의 힘찬 대답에 오소마츠가 만족스럽게 웃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카나코는?”

“...알겠습니다.”

“아들내미도?”

“...네.”

흔들리는 눈으로 카나코와 카라마츠를 바라본 아버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오소마츠가 싱긋- 웃고는 품에서 카라마츠를 꺼내 툭- 등을 밀었다. 

거실 한 가운데 선 카라마츠에게 카나코가 먼저 다가갔다.


“카라마츠, 미안하구나. 내가, 나도 젊었을 적 얼마나 이 집안을 싫어했는지 잊고 있었구나. 너도 나만큼이나 싫었을 터인데.... 나도 원치 않았던 일들을 네게 강요해서 미안하구나.”

“...할머니....”

진심어린 카나코의 사과에 카라마츠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눈물을 글썽이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쓰다듬는 카나코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미소지은 오소마츠가 슬며시 거실을 떠났다.



“오소마츠!! 잠깐만!”

별채로 향하는 오소마츠를 급히 카라마츠가 붙잡았다. 

카나코의 사과로 카라마츠에겐 더이상 집안을 이으라는 압력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집안 최고 어르신의 결정이 가지는 위력을 남자 신부가 되었던 카라마츠는 싫어도 잘 알고 있었다.


“고맙다. 오소마츠.”

“오-. 이정도야 껌이지?”

카라마츠의 인사에 배시시 웃으며 코 밑을 문지른 오소마츠가 별채 현관에 도착하자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 내가 줬던 부적, 지금 가지고 있어?”

“이거 말인가?”

오소마츠의 말에 카라마츠가 줄곧 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오소마츠가 신부의 증표라고 건네준 부적은 카나코의 잔소리 덕분에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내민 부적을 오소마츠가 손에 쥐었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부적을 살핀 오소마츠가 그대로 부적을 쥐고 소매에 손을 넣었다.


“오소마츠?”

“이제 좁은 우물에 널 묶어두던 건 전부 없어졌어.”

“...에?”

“마음껏, 너 살고 싶은대로 살아. 카라마츠.”

“그게, 무슨 소리야....”

“짐은, 카나 할멈한테 옮겨놓으라고 할게.”

“오소마츠...?”

영문 모를 말을 끝낸 오소마츠의 식신이 연기를 뿜어내며 종이가 되어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오소마츠의 말에 불길한 예감을 지우지 못한 카라마츠가 재빨리 별채 현관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으왓!”

치직-, 하고 정전기가 오른 것처럼 현관문에 닿은 카라마츠의 손이 튕겨졌다. 

찌릿찌릿 손에 남은 이질적인 감각에 카라마츠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굳게 닫힌 별채 현관을 응시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시 손을 뻗어도 현관문에 닿기도 전에 카라마츠의 손은 튕겨져 나왔다. 


몇 번을 반복해도 카라마츠는 별채에 들어갈 수 없었다.






9.


별채에 있었던 내 짐은 다음날 할머니가 본채로 옮겨놓았다. 

오소마츠에게 부적을 돌려준 후로 나는 별채에 들어갈 수 없었다. 

혼례식을 올렸던 날엔 부적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오소마츠 덕분에 나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아버지와는 어색하지만 더는 내가 하고 싶다는 일을 막지 않았다. 

형제들도 그동안 내가 힘든 것을 못 본척 했다며 사과했고, 어머니도 미안하다며 내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셨다. 

오소마츠 덕분에 멀어져있던 가족이 다시 내 곁에 돌아왔다.


하지만, 외로워. 


오소마츠가 곁에 없는 것이 이렇게나 쓸쓸할 줄 몰랐다. 

내 마음대로 살라고 했던 오소마츠의 슬픈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게 작별 인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슬픈 미소는 그만두라고 화냈을 텐데.

오소마츠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멋대로 나를 밀쳐냈다. 

무슨 생각으로 나를 밀어낸걸까, 그럼 이제 별채엔 오소마츠 혼자 있는 건가, 밥은 잘 챙겨먹고 있을까 등등, 시간만 나면 오소마츠를 생각하고 있었다. 

부활동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연기하는 순간조차 오소마츠가 떠올라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내가 연기 연습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곁에 다가온 오소마츠가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항상 제법 잘한다며 칭찬의 한 마디를 던졌다. 

무심한 듯 내뱉은 그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이제야 깨닫다니, 바보인가 나는.... 

연극부 선배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송별 공연에서 주역을 맡아도 기쁘지 않았다. 

오소마츠가 봐주지 않는다면 전부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그리운 아이방에 앉아 대본을 펼쳐들어도 대사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본을 내려놓았을 때, 방으로 들어온 토도마츠가 훌쩍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카라마츠 형, 들었어?”

“뭘?”

“아키코 고모 소식!”

“무슨 소식인데?”

“고모가 여자아이를 입양한대!”

“...에?”

흥분해 고모네 소식을 전하는 토도마츠의 말소리가 하나도 흐릿하게 들렸다. 

‘여자아이’라니. 그럼, 그 아이가 오소마츠의 신부가 되는 건가? 

내가 했던 것처럼 하얀 신부복을 입고 혼례를 올리고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는 건가...? 

황금색 귀를 쫑긋거리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꼬리를 휘젓는 오소마츠의 곁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그린 순간, 마음이 어둡게 물들었다. 

먹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검어진 마음 속에서 수없이 떠오른 한 마디가 귀를 막고, 시야를 가리고, 호흡을 억눌렀다.


— 그건, 싫다.

오소마츠 곁에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 있는 건, 싫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이 몸을 움직였다. 

토도마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방을 빠져나가는 발은 멈추지 않았다. 

신발을 구겨 신고 본채를 나와 별채 앞에 섰다. 여전히 나는 별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안된다, 오소마츠.

나 말고 다른 녀석을 신부로 삼는 건.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물었다. 

확답이 필요했다. 

다른 신부는 맞이하지 않겠다는 오소마츠의 대답이 필요했다. 

그 대답을 듣지 않으면 용솟을쳐 울렁거리는 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오소마츠!!!”

마당에 가득 찰 정도로 크게 불러도 별채는 잠잠했다.


“오소마츠, 오소마츠, 오소마츠으!!! 나올 때까지 부를 거다!!! 오소마츠!!!”

목이 쉴 때까지 몇번이고 오소마츠를 외쳤다. 

목이 따끔거리고 심한 기침이 나와도 오소마츠를 불렀다. 

백 번쯤 불렀을 때, 드르륵- 하고 별채 현관문이 열렸다.


“시끄럿! 몇 번을 부르는 거야! 카라마츠!!”

겨우 3일 못봤던 것 뿐인데, 너무나 그리운 얼굴이 문 밖으로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지만 금방 따끔한 느낌과 함께 몸이 밀쳐졌다. 

보이지 않는 막을 경계로 별채 안의 오소마츠와 마당에 선 내가 마주보았다.


“왜 부른 건데-.”

“오소마츠! 아키코 고모가 여자아이를 입양한다고 했다.”

“어. 들었어.”

“그럼, 오소마츠는 그 아이를 신부로 삼을 생각인가...?”

“응-, 뭐. 그렇ㅈ”

“싫다!!!”

“허?”

“부탁이다, 오소마츠. 나 말고 다른 녀석을 곁에 두지 말아줘....”

“너, 무슨 말하는거야. 모처럼 자유롭게 만들어줬는데. 너한텐 넓은 세상이 있으니까 굳이 내 곁에 남을 필요 없다고. 네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많이 느끼고, 많이 경험해서 좋은 여자 만나서 아이도 낳고. 네 아이라면 분명 귀여울 테니까.”

“안 돼!! 내 딸도 신부로 줄 수 없다!!”

“하아!?”

“내가!! 오소마츠 곁에 있고 싶다!”

“에에-? 그럴 필요 없다니까~?”

“왜!”

“왜냐니.... 그러니까~, 내 곁에 있을 필요 없이 세상을...”

“아아-, 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응?”

이 결계를 깨고 네가 싫어해도 네 곁에 남아주겠어!!!

“하-!?”

“마음대로 살라고 한 건 오소마츠 너잖아!!”

“하아!? 아니, 내 말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잖아!”

“기다리고 있어라!! 이딴 결계 순식간에 깨부숴주지!!!”

“에엑!?”



그 후로 별채로 들어갈 수 있는 온갖 시도를 해 보았다. 

별채에 출입할 수 있는 할머니에게도 오소마츠가 준 부적이 있어 그것을 잠시 빌려 들어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창문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실패, 지붕에서 내려가보려고 해도 실패, 땅을 파서 들어가려고 해도 실패했다. 

사람 키만큼 깊이 파 놓은 구덩이에 주저앉아 다른 방안을 모색해보았지만 전부 실패. 


한달에 걸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뒤에야 왜 오소마츠는 별채에 머무르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있고 비행기가 날라다니는 현대 사회에 한 가문을 수호하는 짐승 귀를 가진 신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비현실적이었다. 

어떻게 오소마츠가 우리집 별채에 존재할 수 있는지, 대체 언제부터 우리 가문을 수호해 온 것인지 친척들에게 물어도 그 누구도 알고 있지 않았다. 

아키코 고모에게 전화해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느냐 물었지만, 아키코 고모도 오소마츠에게 들은 이야기는 없다고 했다.


“...카라마츠.”

“할머니?”

고모와의 통화를 끝내고 절망에 빠져있을 무렵, 할머니가 내게 다가오셨다.


“이 집에서 가장 나이든 할미도 오소마츠 님에 대한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허나, 오소마츠 님에 대한 단서가 있을 법한 곳을 알고 있지.”

“네? 그게 어디....”

“지하 창고다. 대대로 집안 최고 어른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만, 네게 열어줘도 해는 없겠지. 우리 집안의 모든 역사가 그 창고에 잠들어 있으니 오소마츠 님과 관련된 물건도 있을게다. 워낙 창고가 넓고 그곳에 있는 물건이 많아 찾기는 힘들것지만....”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는 낡은 열쇠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한 번 찾아보거라.” 하고 부드럽게 웃는 할머니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학교가 끝나면 매일 지하 창고로 향했다. 

할머니의 말대로 창고엔 수십 년부터 수백 년은 지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몇몇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를 기괴한 모양을 한 것들도 있었다. 

창고의 가장 깊은 곳부터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쌓인 서적을 먼지 털어가며 훑어보았다. 

물건을 들어내고 옮기길 한 달, 한 권의 일기를 발견했다. 

종이가 노랗게 바래 한눈에 봐도 오래된 일기였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일기를 손에 집어 펼쳤다. 

옛말로 쓰인 일기를 사전을 찾아가며 조금씩 읽어 내려갔다. 


일기는 우리 가문의 시조, ‘아카츠카’라는 유명한 음양사의 것이었다.






10.


영향 7년, 유월 초하루

산길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못된 장난을 하던 여우를 퇴치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산에 올랐다. 

산길 옆에 쓰러져있는 가련한 여성의 모습을 한 여우를 발견해, 그 둔갑술을 풀자 어린 여우 요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망치려는 것을 붙잡아 불제하려하자, 여우가 깽깽거리며 시끄럽게 울었다. 

당장 내 손에 사라질 운명의 녀석이 죽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더 놀고 싶다며 울었다. 

수많은 요괴를 불제해왔지만 더 놀고 싶다며 우는 요괴는 처음 보았다. 

황당한 이유로 우는 것이 기이해 여우를 놓아주고 왜 인간들에게 장난을 쳤냐 묻자, 심심해서 그랬다는 당돌한 대답이 돌아왔다. 

꼬리 하나를 살랑이는 것이 꼭 어른의 관심을 끌려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 같았다. 

심심하다는 말 뒤엔 ‘외롭다’는 본심이 숨겨져 있었다. 

여우는 죽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우에게 다시는 인간들에게 심한 장난을 치지 말라 당부하고 숲 속에 놓아주었다.



영향 7년, 유월 스무날

스승에게 요괴를 놓아준 것이 들켜 파문을 당했다. 

오히려 잘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것이 일생이 꿈이었다. 

짐을 챙겨 스승의 집을 나오자 이전 놓아주었던 여우가 따라붙었다. 

따라오면 불제하겠다는 협박에도 여우는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았다. 

이유를 물으니 나를 돕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당돌한 녀석. 여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음양사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더냐.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나를 따르는 여우를 도저히 내칠 수 없었다. 

열살 남짓한 모습을 한 여우는 분명 나보다도 오랜 세월을 살아왔겠지만,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원하는 어린 시절의 나와 닮아있었다. 

좋다고 대답하자 여우가 활짝 웃었다.



영향 7년, 구월 사흗날

전국을 돌아다니며 거치는 마을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며 여행을 이어가던 어느날, 여우가 왜 인간들이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냐 물었다. 

내가 그들을 도와주니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리 부른다 답하자,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나를 ‘선생!’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드는지 유부를 먹을 때처럼 여우가 웃었다.



영향 7년, 시월 열하루

작물을 병들게 하는 이누가미가 선산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퇴치하러 길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선산에 있는 이누가미를 발견한 것은 좋았으나, 이누가미는 내 생각보다 더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싸우던 와중에 나를 감싼 여우가 이누가미의 발톱에 당하고 말았다. 

급히 가지고 있던 영약을 먹였으나 힘이 부족한 여우의 둔갑이 풀리고 말았다. 

귀와 꼬리를 숨기고 인간으로 둔갑했던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변했다. 

여우는 꼬리가 다섯 개인 여우로 변해 잠들었다. 

줄곧 꼬리가 한 개인 줄 알았건만, 이 여우는 내 생각보다 어린 여우가 아니었던 듯하다.



영향 7년, 시월 그믐날

이누가미에게 당한 여우의 상처가 다 나았다. 

도로 어린 여우의 모습으로 변한 여우에게 왜 내게 잡혔냐 물었다. 

꼬리가 다섯 개인 여우의 힘이라면 내게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여우는 생긋 웃으며 전력을 다해도 내겐 이기지 못한다는 거짓말을 했다.



영향 8년, 칠월 열아흐렛날

하룻밤 잠을 청할 마을을 찾지 못해 노숙을 했다. 

길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일어나니 웬 나체의 여성이 내 팔을 베고 자고 있어 혼미백산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세히 살피니 여우가 괘씸한 장난을 친 것이었다. 

여우의 머리에 커다란 혹을 만들어주고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 말라 당부했다. 

여우는 내게 맞은 뒤에서 한참을 키들거렸다. 괘씸한 녀석!



문안 2년, 삼월 아흐렛날

여행 중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산과 개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 보기에 너무나 아름다워 이곳에서 지친 심신을 추스르기로 했다. 

여우는 내가 마을에 머무는 동안 산으로 올라가 지내기로 했다. 

여우가 가끔 산짐승을 물고 내려오면 함께 고기를 뜯어 먹었다. 

여우도 이 평화로운 마을이 마음에 든 듯 했다.



문안 2년, 유월 초하루

어느새 여우와 만난지 십 년이 지났다. 신의 인도로 마을에 살던 여성과 정을 통했다. 

마을 사람들과 여우의 축복 속에서 혼례를 올렸다. 

설마 이 나이에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될 줄은 몰랐다. 여행은 이제 끝났다.



문안 3년, 사월 스무나흗날

마츠요가 태어났다. 아내가 죽었다.



보덕 1년, 팔월 닷샛날

마츠요가 무사히 세 살이 된 것을 축하하며 큰 잔치를 벌였다. 

여우도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웃었다. 

여우는 아내가 죽은 이후로 산에서 내려와 인간으로 둔갑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마츠요는 아비인 나보다 여우를 더 따른다. 

잔치 내내 여우의 품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아내가 떠난 이후로 여우가 어미역을 했으니 마츠요가 여우를 따라도 불평은 할 수 없겠다.



강정 2년, 사월 스무나흗날

마츠요가 열 살이 되었다. 이젠 제법 계집아이 티가 난다. 

여우가 산 속에서 하얀 꽃을 꺾어와 마츠요에게 주었다. 

하얀 꽃이 마츠요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



강정 2년, 오월 스무날

마츠요가 여우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항상 여우를 ‘여우야’ 하고 부르니 마츠요가 화를 냈다. 

마츠요가 붙인 이름은 ‘오소마츠’다. 항상 실수하고 바보같고 변변찮으니 ‘오소마츠’란다. 

여우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이름이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우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게 뭐냐 불평하면서도 기쁘게 꼬리를 흔들었다.



문정 1년, 정월

작은 마을에 떠돌이 사내 하나가 정착했다. 

마츠조라는 녀석으로 성실하고 근면한 것이 괜찮은 청년으로 보였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딸리는 나를 도와 함께 농사를 짓기로 했다.



문정 1년, 유월 열흘날

마츠조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올바른 아비라면 하루 빨리 마츠요와 마츠조를 혼인시켜 내보내야겠으나, 못난 아비라 아직 마츠요와 함께 살고 싶어 둘의 혼인을 미루었다. 

마츠요는 아비를 배려해 기다리겠다 했다. 

여우는 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응인 1년, 이월 여드렛날

옆마을에서 불제 요청이 들어왔다. 

역병을 옮기는 악신이 머무르고 있는 듯해 채비를 해 옆마을로 떠났다. 

산을 넘는 중에 마츠조가 독사로 변해 저를 공격하는 ‘산의 아이’를 때려 죽였다. 

분노한 산신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마츠조는 마츠요와 혼인해 가정을 꾸려야한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했다. 

여우는 마츠조를 지키지 못했다며 슬피 울고 산으로 들어갔다.



응인 1년, 이월 아흐렛날

산신이 찾아왔다. 

여우가 분노해 산신을 죽이겠다 벼르는 것을 말리고 저주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산신의 저주는 대를 따라 내려간다. 

마츠요가 ‘아카츠카’라는 성을 유지한다면 마츠요에게도 저주가 옮을 것이다. 

서둘러 마츠조와 혼인식을 올렸다.



응인 1년, 섣달 스무이튿날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산신의 저주는 이 몸과 함께 사라질 것이나 내가 그동안 방탕하게 살며 산 원한이 마츠요에게 향할까 불안하다. 

혹 요괴나 악령이 마츠요를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못난 아비 때문에 미안하구나....



응인 2년, 섣달 그믐날

오소마츠가 마츠요를 지키겠다 맹세했다. 

거절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럴 수 없었다.

어리석은 녀석, 이 한심한 사내에게 정을 주니 자유를 빼앗기고 마는게 아니냐. 


그러니 마츠요, 내 딸아. 내게 이 일기를 남기마. 

너를 향한 원한은 모두 오소마츠가 막아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죽기 전, 오소마츠를 해방해주거라. 

내게 한 맹세로 우리 가문에 묶여버린 오소마츠를 해방해주거라. 

인간의 일은 응당 인간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곁을 지켜준 사랑스러운 여우를 다시 드넓은 벌판에 풀어주거라.



아버님께,

아버님, 제 영혼이 이 늙은 몸을 떠나기 전 아버님께 용서를 빕니다.

아버님이 저를 걱정해 오소마츠의 맹세를 받아들이셨듯, 저도 제 아이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버님을 향한 원한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오소마츠가 없다면 제 아이들은 순식간에 원령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저는 오소마츠를 풀어줄 수 없었습니다.


오소마츠, 미안. 미안해...






11.


눈물 자국이 남은 낡은 종이에 새 눈물이 떨어져 글씨가 번졌다. 

이 일기가 쓰여진 때부터, 오소마츠는 쭉- 우리 가문을 지켜주고 있었다. 

‘마츠노’ 가문에 묶여서. 

장난치길 좋아하고 짓궂으면서 상냥한 여우를, 별채에 가둬두고 있던 것은 우리들이었다.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몇백 년을 오소마츠는 이곳에 있었다. 

오소마츠가 우리를 지켜주는 이유조차 잊은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삼키고 일기 옆에 세워져있던 낡은 석장을 들고 창고를 나왔다. 



“오소마츠!!! 나와라!! 오소마츳!!!”

“시끄러어~! 지금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보 카라마츠!”

별채 앞에서 소리를 질러 오소마츠를 불렀다. 

졸린 듯 눈을 비비고 나온 오소마츠가 내 손에 들린 석장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그거.... 선생의,”

숨을 들이마시고 온힘을 다해 석장을 들어올려 크게 내리쳤다. 

콰광-! 괴음을 내며 유리가 깨지듯, 별채를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깨졌다. 

충격으로 부러진 석장을 던지고 깨진 결계를 넘어 오소마츠의 손을 잡았다.


“말했지? 내 마음대로 오소마츠 곁에 있겠다고.”

“....”

“다른 신부를 맞이하지 말아줘, 오소마츠. 나로 좋다고, 네가 말했잖아! 나를 듬뿍 사랑해준다고! 그러니까, 나를 마지막으로 해라!!



당돌하게 외치는 카라마츠를 멍청히 응시한 오소마츠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그대로 품에 안았다.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흐느끼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소마츠가 밤하늘에 뜬 별을 응시했다.


‘이만하면 됐지? 선생. 이제 내 멋대로 살아도 괜찮지? 나, 제대로 선생의 자손들 지켰고.’


닿을지 어쩔지 모르는 마음을 별에게 고백한 오소마츠가 품에서 카라마츠를 떼고 손을 마주 잡았다. 

고개를 기울여 카라마츠와 이마를 맞댄 오소마츠가 눈물에 촉촉이 젖어 반짝이는 카라마츠의 눈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래, 너를 마지막으로 하자.

“약속이다!!”

“응, 약속.”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새끼 손가락을 내민 카라마츠를 보며 “쿠후후-.” 하고 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안심한 얼굴로 행복하게 웃는 카라마츠 너머로 아카츠카 선생이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하는 환상이 보였다.






12.


“오디션 어떻게 됐어?”

“물론, 합격이다! 나의 퍼펙트한 연기를 보고 거부할 수 있는 심사위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 네네-. 너, 도시로 나오고 성격 변하지 않았어?”

“응—?”

“아니다. 그럼 오늘은 축하하는 의미로 외식할까?”

“논논, 오소마~츠? 오늘은 그거다! 콩그레츄레이션의 가라아게다!!”

“누가 (요리) 하는데.”

“물론 내가!”

“오-!! 그럼 빨리 재료 사러 갈까!”

“아!”



“그런데 오소마츠.”

“응-?”

“너는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어-? 음, 글쎄.... 어쩔까?”

“오소마아츠~? 이럴 땐 나를 기다린다고 대답해야지!”

“에에~? 네가 언제 환생할 줄 알고.”

“기다려.”

“쳇. 그럼 기왕 환생할 거 요괴로 환생해줘.”

“요괴?”

“쭉- 같이 있을 수 있게.”

“오! 그렇군! 그럼 텐구로 환생하겠다!”

“엑, 왜 하필 텐구?”

“응~? 그거야, 멋지잖아?”

“...아, 그러십니까.”

“오소마츠?”

“아냐아냐, 그럼 텐구를 기다리는 동안 지옥에 있는 유흥가나 돌까.”

“오소마츠!? 나라는 신부가 있으면서 유흥가라니 무슨 소린가!!”

“너가 언제 돌아올 줄 알고! 혼자 있는 거 싫다고!”

“바로 돌아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

“에에———!!”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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