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의 중편! 오랜만의 오소카라입니다ㅎ


* 천호 오소마츠 x 학생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아프지 않아요(카라마츠 말투 은근히 쓰기 힘들어요ㅠ)


* 오소마츠 제외 오둥이입니다.

 오둥이 부모님이 마츠조와 마츠요가 아닙니다.


* 공미포 8,375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친척들 사이에서 카라마츠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분만실 문을 노려보았다. 

딱, 딱, 손톱을 물어 뜯고 있는 고모부만큼이나 카라마츠도 안절부절 못했다. 

아기가 태어남과 동시에 카라마츠의 미래도 결정된다. 

카라마츠는 묵묵히 근엄한 얼굴로 분만실을 응시하는 가문의 최고 어른, 카나코에게 눈을 돌렸다.


8시간이나 이어진 난산 끝에 아기 울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모두 환해진 얼굴로 카라마츠 옆에 앉아있던 고모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기를 안고 분만실을 나온 의사에게 벌떡 일어나 달려간 고모부가 아기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태어나 처음 자리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에 카라마츠도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기가 귀엽다, 누굴 닮았다 담소를 나누는 친척들을 헤치고 아기에게 다가간 카나코가 의사에게 물었다.


“아기는 여자 아이인가요?”

“아뇨, 건강한 남아입니다.”

의사의 말에 친척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모두 카라마츠를 향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친척들 가운데 카나코가 다가와 카라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구나…. 이번 대(代)의 신부는 너다.


카나코의 발언에 카라마츠는 발 아래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2.


달그락- 식기가 맑은 소리를 울리자 어김없이 할머니의 매서운 호통이 귀청을 울렸다.


“떽!! 몇 번을 말해야 알겠냐! 식기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 놓아야 한다고!”

하도 들은 호통 소리에 이젠 겁도 나지 않았다. 푹- 한숨을 내쉬며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자 또 “한숨 쉬지 말고!” 하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신부 선언을 듣고 3년.

매일 신부 수업이라는 명목 하에 할머니에게 가정 교육과 잔소리를 받게 되었다. 

요리는 물론이고 청소, 빨래, 바느질, 인사법까지. 

청소를 할 때는 절대 청소기를 쓸 수 없고, 세탁소라는 편한 가게를 놔두고 일일이 내가 바느질하고, 손빨래까지 해야 했다. 

조신한 아내에 어울리는 인사와 말투까지. 

3년이나 그 고생을 하고 나니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 참을 수 없다.


“좋은 아침, 카라마츠 형.”

“아-, 좋은 아침.”

밥그릇에 밥을 푸고 있자 제일 먼저 일어난 쵸로마츠가 주방으로 들어와 인사했다. 

식탁엔 이미 8명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물론 요리한 건 나. 

마지막으로 푸른색의 밥그릇에 밥을 퍼 식탁에 올려놓자, 등교•출근 준비를 마친 가족들이 우르르 주방으로 몰려와 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생일 축하해~, 아들들~.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바쁘게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던 엄마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형제들은 모두 눈을 굴리며 고민하더니 쵸로마츠가 나서서 엄마의 질문에 대답했다.


“용돈 주시면 알아서 쓸게요.”

자칫 쌀쌀맞은 대답일 수 있겠지만, 우리집에선 이게 보통이었다. 

눈을 슬쩍 돌려 아빠를 보면 아빠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신문에만 집중해 있었다. 

그 앞에서 할머니가 “밥상 앞에서 신문 읽지 말거라!” 하고 핀잔을 주자 그제야 신문을 아래로 내렸다. 

시위원인 아빠는 어지간히도 바쁜지 항상 우리에게 무관심했다. 

아빠의 보좌인 엄마도 바쁜 건 마찬가지. 두 분 다 우리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쵸로마츠의 대답에 모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아쉬운 듯이 쓴웃음을 짓고는 “그래…. 그럼 너희 계좌에 용돈 보내놓을게.” 하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번째 생일. 하지만 생일 케이크도 따뜻한 포옹도 없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 내 만든 미역국을 후루룩 들이키며 주방을 떠나는 부모님을 배웅했다.



고등학교 교복으로 지정된 검은 가쿠란을 입고 집은 나오자, 토도마츠가 총총 걸음을 서둘러 내 옆에 섰다.


“카라마츠 형, 오늘 할머니한테 이야기할 거야?”

“당연하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으니까.”

내 대답에 토도마츠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잘 되면 좋겠네.” 하고 어깨를 툭 치며 응원했다. 

앞서 걷던 쵸로마츠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뭐, 힘내.” 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아.” 하고 대답하면서도 쵸로마츠와 토도마츠의 가망 없을 거라는 얼굴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얼굴을 들이댔다. 

이 날이 평생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등교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동아리를 마치고 최대한 어기적 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늦췄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이어질 할머니의 호통과 싸워야 한다. 

어수선해 질 집 안 분위기를 떠올리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들은 이미 오늘은 귀가가 늦어진다고 했고, 부모님도 야근할 것이 분명하다. 

즉, 집에 돌아가면 나와 할머니뿐. 가까워지는 커다란 집의 지붕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 각오를 다졌다.



“몇 번이고 이야기 했잖니!”

역시나, 할머니의 호통에 고개를 푹 숙였다. 

커다란 방에 할머니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정좌한 다리가 슬슬 저리다. 

“어휴~.” 하고 내쉬는 숨소리에 고개를 들어 다시 말했다.


“싫어요. 신부 따위.”

“아키코는 이제 아기를 낳을 수 없어! 이번 세대(世代)엔 여자 아이가 없으니 장자(長子)인 네가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하느냐? 이건 우리 마츠노 가문의 전통이자 의무! 잔소리 말고 내일 혼인식 올릴 준비나 하거라!!”

탕!, 하고 바닥을 내리치며 할머니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여기서 반론을 떨쳐봤자 할머니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아카츠카 구에서 유명한 명가, 마츠노 가문. 

집안 어른들은 모두 정치, 사회, 경제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아카츠카 구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마츠노 가문을 알고 있을 정도. 

소문난 명가에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매 세대, 가장 먼저 태어난 여자 아기를 가문을 수호해 주는 신에게 신부로 바친다. 


그것이 마츠노 가에 길게 이어진 전통이었다. 

마츠노 가문이 시작했던 순간부터 이어진 전통은 스마트폰이 생기고, 비행기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전 세계가 작은 마을처럼 가까워진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아키코 고모가 난산 끝에 낳은 아기는 남자 아이. 

결과, 우리 세대에 신부로 보낼 여자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평소 몸이 약했던 아키코 고모는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고, 친척들은 오랜 회의를 거쳐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는 결정을 내렸다. 


맏딸 대신에 맏아들을 신부로 바치자.


지금 생각해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외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내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당한 채, 나는 ‘신부 후보’가 되었다. 

처음부터 내 의견 따위는 중요치 않았던 거겠지. 

친척들에게,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웃기지도 않는 이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방으로 오르는 발이 무겁다. 

이불에 지친 몸을 묻고 한숨을 내쉬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베개에 얼굴을 박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울다 지쳐 졸음이 눈꺼풀에 앉자 차라리 이대로 평생 깨어나지 않았으면, 아니 오늘 잠들면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하고 자신을 저주하며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신부복을 눈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내게 하얀 시로무쿠(일본 전통 결혼식의 신부용 하얀 기모노)를 입혀주는 엄마와 할머니의 손길에 저항하지 못하고 옷 위에 하얀 비단이 자리잡았다. 

당장 찢어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친척들이 기다리고 있는 혼인식장으로 향했다. 

오면서 지나친 형제들도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멍청히 창밖을 응시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 

정말 싫다.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식이 시작될 시간인가, 하고 시계를 확인했지만 아직 30분이나 여유가 있었다. 

고개를 기울이고 “네-.” 하고 대답하자, 아키코 고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모….”

“오-! 제법 잘 어울리잖아~.”

“….”

“그렇게 삐지지 마~. 착잡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신부가 그런 얼굴 하면 복 날아간다?”

“하아~.”

“…카라마츠, 미안해. 내가 여자 아이를 낳았다면,”

“아니, 이건 고모 잘못도 아니고, 괜찮아요. 저는….”

내 대답에 머쓱하게 웃은 아키코 고모가 내 옆에 와 앉았다. 

한창 식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창밖을 보더니 홱-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있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걸?”

“네?”

나도 모르게 그게 할말이냐는 투로 되묻자, 아키코 고모가 쿡쿡 웃음을 흘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꽤 즐거울걸?”

“…하?”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키코 고모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키들대며 “두고 봐.” 하고 말하곤 방을 나섰다. 

대기실에 홀로 남겨져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 없잖아. 

난 남자인데, 신부로 가는 이 상황의 어디가 즐겁다는 거야?

다리를 덜덜 떨며 불평을 툭툭 흘리고 있을 때, 할머니가 대기실로 들어오셨다.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엉덩이를 들었다.


오늘, 나는 남편 없는 결혼식을 올린다. 


남편은 부재, 신부는 남자.


최고네-, 하고 자조하며 식장으로 발을 옮겼다.






3.


식이 끝나고 하나 둘씩 식장을 떠나는 친척들을 뒤로 하고 할머니와 함께 마당에 세워진 별채로 향했다. 

별채 앞에서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할머니에게 떠밀려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할머니와 엄마, 형제들은 별채 밖에서 “잘 해.” 하고 짧은 응원의 말을 던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하얀 신부복을 벗어 던졌다. 

청바지와 하늘색 티셔츠 차림으로 별채 안을 돌아다녔다. 

어릴 적 마당에서 뛰어 놀다 별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가면 할머니가 호되게 혼냈던 기억이 있다. 

우리집에 있는데도 한 번도 들어와본 적 없는 별채의 모습에 조금 호기심이 일었다.

복도를 어슬렁거리다 안방으로 보이는 큰 방 앞에 섰다. 

망설임 없이 스륵- 문을 열자, 붉은 기모노를 입은 남자가 다다미에 누워 담배를 물고 있었다.


“응-? 네가 이번 신부~?”

“…허?”

남자의 머리 위에서 쫑긋거리는 황금색 귀와 등 뒤에서 너울거리는 4개의 꼬리에 멍청히 신음을 흘렸다.


“으응~?”

남자는 자신을 보고 얼어버린 내 앞으로 다가와 이리저리 살피며 눈썹을 찌푸렸다.


“너, 사내 아냐?”

“…아, 아아….”

“하아!?”

내 대답에 남자가 크게 외쳤다. 

머리 위에 달린 귀가 곤두서고 부드럽게 살랑거리던 꼬리고 바짝 털을 세웠다. 

남자의 큰 목소리에 놀라 움찔거리자 남자가 황당하단 얼굴로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무슨 ‘신부’로 사내놈을 보내~? 카나 할멈, 날 속였구나? 사내놈은 안을 맛도 없다고~! 아――! 정말 오랜만에 맞이한 신부인데 사내놈라니, 최―악!!”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진심으로 싫다는 듯이 내뱉는 말에 까득- 이를 갈았다. 

그만 닥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노려보자 남자도 나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왜 사내놈인 네가 신부로 온 거야?”

툭 던진 남자의 마지막 한 마디에 눈앞이 새빨개졌다.


“나도-, 신부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냐!! 여자애가 태어나지 않는데 어떡하라는 거야!! 내가 좋아서 신부 수업 받은 거 아니라고!! 나도 이 빌어먹을 전통 따위 지키고 싶지 않았어!!! 나는 남자라고!! 신부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고!! 누군 입이 없어서 다물고 있는 줄 아나?!!!”

씩-, 씩-,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울분을 쏟아내고 거친 숨을 골랐다. 

정신 없이 외친 탓에 산소가 부족해진 머리가 지끈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푹-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라. 난 받아들였다. 쿨- 하게.”

“…풋, 푸, 크하하하하핫!!!”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배를 잡고 굴렀다. 

바닥의 먼지를 제 옷으로 닦아낼 생각인지 이리저리 구르며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한참 후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등 뒤로 솟은 꼬리가 좌우로 크게 한들거렸다.


“그렇게 잔뜩 쏟아내고 받아들였다니…, 완-전 거짓말이잖아~! 아―,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며 씩- 웃고 몸을 일으킨 남자가 귀를 쫑긋거리며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코가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좋아, 너 재미있으니까. 그럼 듬뿍- 사랑해주지, 신부여.”

얄궂게 웃으며 말을 마친 남자가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를 대하는 손길에 짜증이 치솟아 툭- 손을 내치고 몸을 돌렸다.


“그거 고맙군. 그럼….”

“응? 어디 가게?”

“하? 이제 집에 가서 잘 시간….”

“무슨 소리야? ‘첫날밤’ 보내야지.”

“첫…,”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하? 

첫날밤? 

하? 

누가? 누구랑? 

하?


생각을 거부한 머리 속이 새하얘졌다. 

남자는 내 얼굴을 보고 또 큭- 짧은 웃음을 흘리고 손을 흔들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이상한 상상하지 마, 야한 꼬맹아. 나한테 시집 온 거잖아? 앞으로 나랑 여기서 살아야 돼. 첫날밤도 그냥 나란히 옆에서 자는 것뿐이고.”

“하…?”

“카나 할멈이 설명 안 해줬어?”

“…안, 해줬다.”

“그 망할 할멈….”

남자는 멍청히 대답한 나를 보며 작게 혀를 차고 머리를 긁적였다. 

“귀찮네….” 하고 중얼거린 남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딱 치자 아무것도 없던 다다미 바닥에 커다란 이불이 나타났다.


“일단 오늘은 씻고 잠이나 자자고. 자세한 설명은 내일 할멈한테 듣고.”

“…하아….”

“욕실은 저쪽이다.”

어디서 꺼냈는지 연하늘색의 기모노를 내게 건넨 남자가 손가락으로 복도 저편을 가리켰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피식- 웃음을 흘린 남자가 또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오-, 말 잘 듣네~.”

“난 어린애가 아니닷!”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쳐내고 남자가 알려준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겨우 방 하나 있을만한 크기의 별채인데도 욕실은 굉장히 넓었다. 

남자가 있는 다다미방도 별채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컸는데, 아무래도 무슨 조화인지 겉으로 보는 것과 실제 안의 크기는 다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상식을 농락하는 현 상황에 큰 한숨을 내쉬고 욕실로 들어갔다. 

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욕조에는 이미 따끈한 물이 받아져 있었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오늘 하루에 대한 생각은 최대한 하지 않으면서 몸을 씻고 기모노로 갈아입어 남자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

첫날밤이란 소리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고 긴장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미닫이문을 열자, 그 앞에 보이는 모습에 할말을 잃었다. 

커다란 이불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대자로 누워 코를 골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짜증이 치솟아 칫, 하고 혀를 찼다. 

목욕으로 데워진 몸이 적당한 피로를 불러와 화를 낼 기운도 없다. 

이불로 다가가 음냐-, 하고 입맛을 다시는 남자를 발로 밀어 한켠으로 치우고 이불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한숨과 함께 혀끝에 매달린 한탄을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내일, 할머니에게 모든 것을 꼬치꼬치 캐묻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지친 하루를 마감했다.




무슨 놈의 잠버릇이!! 

혈압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이마에 솟아난 핏줄을 지그시 누르고 몸을 일으켰다. 

대자로 누워 주먹과 발을 날려대는 탓에 이불 구석에서 몸을 한껏 쪼그리고 잤던 덕분에 온몸이 뻐근하다. 

삐걱대는 팔다리를 억지로 늘여 기지개를 피고 이불에 누운 남자를 내려보았다. 

붉은 기모노는 간신히 몸을 가리고 있을 정도로 풀어졌고, 이불에 이리저리 널린 황금색 꼬리는 이불과 한데 얽혀 엉망으로 꼬여있다. 

세모난 귀는 베개에 파묻혀 있고…. 

절로 ‘이게 신?’ 하고 의문을 가질법한 모습이다. 


이불에서 뒤척이느라 비틀린 기모노를 고치고 별장을 나왔다. 

하늘을 보니 아직 해가 산 위에 걸려있다.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밝아오는 것이 아직 이른 아침임을 속삭이고 있었다. 

하품을 하고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으며 별장을 떠나 본채로 들어갔다. 

습관이 되어버린 발은 방이 아니라 주방으로 먼저 나를 이끌었다. 

텅 빈 밥솥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고 혼잣말하며 쌀을 씻기 시작했다.


“카라마츠 형…?”

밥을 짓는 동안 계란말이나 햄 구이 같이 간단한 반찬을 만드는 사이, 토도마츠가 빼꼼 주방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좋은 아침이다! 토도마츠.”

“어, 어…. 어? 왜 여기 있어? 할머니가 형은 이제 별채에서 지낼 거라고 그랬는데…?”

“별로, 상관없잖아? 여기 있어도.”

“아, 응…. 그렇네!”

의아하단 얼굴로 묻는 토도마츠의 질문에 괜히 욱해 차가운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분위기를 잘 살피는 토도마츠는 단번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토도마츠 뒤를 이어서 이치마츠와 쥬시마츠, 쵸로마츠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식탁에 앉아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형제들 사이에 앉아 어제와 똑같은 밥을 먹으며 제발 이대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빌어먹은 신은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는 잔인한 녀석이었다.



“예서 뭐하고 있냐!!”

할머니의 호통에 움찔 놀라며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따각- 하고 소리를 울리며 식탁에 떨어진 젓가락이 튀었다. 

잔뜩 성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다가온 할머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아얏!!”

“남편을 혼자 놔두고 친정에서 밥을 먹는 신부가 어디 있느냐!”

신부가 다 뭐라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의 시대착오적인 호통에 절로 이가 갈렸다. 

남자인데, 신부라고 불리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할머니의 호통은 그칠 줄을 몰랐다.


“얼른 별채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가야한다는 내 말은 할머니의 귀에 닿지 안았다. 

내 팔을 꽉 붙잡고 별채를 향하는 할머니에게 끌려 주방을 떠났다.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는 할머니에게 끌려가는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토도마츠는 스마트폰에만 집중하고 있다. 

쥬시마츠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조금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에 푹-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할머니에게 끌려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을 시간도 없이 남자가 자고 있는 다다미방으로 향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오소마츠님.” 하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다다미방문을 열었다. 

마치 여관방에서 여주인이 손님을 대하듯 예의를 차리는 할머니의 모습에 빈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격식을 차릴 정도의 ‘신’인가? 그 남자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남자는 아직도 이불에 누워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었다. 

아침보다 더 흐트러진 기모노 사이로 아예 배가 나와있다.

“쿠음….” 하고 몸을 돌리며 제 배를 벅벅 긁는 모습이 한없이 한심하다.


“오소마츠님.”

이불 앞에 조심스럽게 정좌한 할머니의 사나운 눈빛에 못이며 나도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할머니의 목소리는 넓은 다다미방에 가득 울려 퍼질 정도로 작지 않은 것이었지만, 남자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무시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할머니의 목소리에 남자의 머리 위에 솟은 귀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소마츠 님!!”

할머니의 씩씩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울리자 세모꼴의 귀가 귀찮다는 듯이 빠르게 흔들렸다.


“카나코입니다. 이제 슬슬 일어나주시죠.”

묘하게 강압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남자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뭔데…. 망할 할멈.”

“누가 할멈입니까!? 누가!!”

이불에 앉아 훤히 드러난 배를 벅벅 긁는 남자의 모습에 할머니가 눈살을 찌푸리고 “허흠!” 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이번 대의 신부는 마음에 드셨나요?”

“…. 할-멈. 저기 말이지~, 아무리 내가 신부로 누굴 고르든 신경 안 쓴다고 해도 말이야~. 보통 사내놈을 신부로 보내!?”

“이번 대엔 여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카라마츠가 무사한 걸 보니 오소마츠 님 마음에 들었다고 판단됩니다만….”

“뭐―, 이녀석 재미있으니까 마음에 들었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도 설명 안 해줬다며?”

“…어머나, 이런. 제가 깜빡 실수를 했군요.”

“거-짓-말―. 신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생각~? 자세히 설명하면 이녀석이 안 한다고 할까 봐 그런 거지?”

“….”

남자는 배를 긁던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가만히 할머니를 응시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콕 집어서 할머니에게 툭툭 내던지는 사내의 모습에 놀랐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던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어찌되었든, 카라마츠를 신부로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중으로 카라마츠의 짐은 전부 이쪽으로 옮겨놓겠습니다.”

“엣?!”

이 무슨 청천벽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할머니의 발언에 놀라 홱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응시했지만, 할머니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남자에게 인사를 마친 후 나를 끌고 별채를 나왔다.


“자, 그럼. 너는 학교 갈 준비 해야지.”

“할머니!?”

“짐은 네가 학교 가 있는 동안 옮겨 놓으마.”

“에에!?”

“앞으로 별채에서 지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본채로 들어오너라.”

“….”

아무리 항의의 뜻을 내비쳐도 깔끔하게 무시하고 할 말을 착착 이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에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랬다. 

신부로 선택될 때도, 내 의견 따위는 아무도 물어보지도, 신경 써주지도 않았으니까. 

꼭 불상에 대고 외치는 것 같은 허무함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먼저 본채로 들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겹다, 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당황하며 눈가를 훔치자마자, 태연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신부님.”

“…. 카라마츠다.”

“카라마츠, 이리로 잠깐 와봐.”

활짝 열린 별채 현관에 선 남자가 내게 손짓했다. 

여전히 기모노는 일어난 상태 그대로 흐트러져있고, 잠버릇이 걸린 뒷머리는 성대하게 솟아나있다. 

멍청한 얼굴로 크게 하품을 늘인 남자에게 다가가자 남자가 가볍게 쥔 주먹을 들어올렸다.


“뭔가?”

“손 내밀어 봐.”

“…이건?”

“부적. 항상 가지고 다녀. 내 ‘신부’가 되었다는 증표니까.”

“….”

“싫어?”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남자의 목소리에 숨을 삼켰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내 기분을 이 남자는 너무나 태연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오는 것이 놀라워 눈을 깜빡였다. 

문득, 남자의 질문이 끝난 뒤로 꽤 오래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별로 그런 건…. 고맙다, 오소마츠 ‘님’.”

“‘오소마츠’로 괜찮으니까.”

“아아….”

손바닥 위에 처연히 놓인 붉은 자수의 부적주머니. 

힐끔 눈을 들어올리면 싱긋- 웃는 오소마츠의 미소가 보였다.


“그럼, 학교 다녀오겠다.”

“오-, 다녀오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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