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호 오소마츠 x 학생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아프지 않아요...ㅎ


* 공미포 18,049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부활동이 끝나고 본채에 들러 엄마와 할머니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후, 별채로 향했다. 

혼례식을 올린 후로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사람의 버릇은 한 달이면 생긴다는데, 3개월이 지난 지금은 별채에서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 

드륵- 현관문을 열고 “다녀왔습니다.” 하고 빈 복도에 인사를 던졌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한숨을 내쉬고 신발을 벗어 복도에 올랐다.



“오소마츠….”

이마에 솟아난 힘줄을 누르며 오소마츠를 부르는 목소리가 절로 낮게 깔렸다.


“방 꼴이 이게 뭔가!!! 먹었으면 치워라!! 그리고 집 안에서 담배피지 말라고 했잖아!! 냄새 난다!!! 저번에도 교복에 냄새가 배여서 주임 선생님께 혼났다고!!!”

“오-, 어서와~. 신부님~.”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과자 봉투에 발에 밟히는 부스러기. 

방 안은 담배 연기로 탁하다 못해 뿌옇다. 

쾅! 하고 발을 굴리며 잔소리를 퍼부어도 오소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가볍게 웃었다. 


“당장 담배 꺼라!”

“에에~, 너무 잔소리가 많은 거 아냐? 카라마츠우~.”

푹신해 보이는 꼬랑지를 훌렁훌렁 흔들며 말을 늘이는 오소마츠를 노려보았다. 

바닥에 널린 과자 봉지를 줍고 아직도 담배를 끌 생각이 없는 오소마츠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계속 담배 피우면 저녁밥 없다.”

“끄겠습니닷! 근데 오늘 저녁 반찬 뭐야?”

“가라아게.”

“너, 진짜 고기 좋아한다…. 뭐, 네 음식은 맛있으니까 불만은 없지만.”

손을 한번 휘저어 순식간에 담뱃대를 없앤 오소마츠가 황당하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 들리도록 한숨을 크게 내쉬고 과자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방을 치우는 동안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담배 연기가 빠져나가 방 안 공기도 맑아졌다. 

편안해진 호흡에 잔뜩 공기를 들어 마시고, 방 한가운데 누워있는 오소마츠를 한 번 더 노려보고 주방으로 향했다. 



별채 안은 의외로 쾌적하다. 

주방에 있는 주방기구도 전부 본채에 있는 것보다 신식에 쓰기 쉬운 녀석들뿐.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온 닭고기를 조리대에 올리고 식탁에 놓인 푸른색의 앞치마를 둘렀다. 

통통, 식칼로 양배추를 썬다. 

사각사각-, 양배추를 써는 소리와 감각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잠시, 주방에 들어온 오소마츠 덕분에 평안한 공기가 깨지고 말았다.


“후아~, 심심해. 카라마츄~, 밥 아직~?”

“이제 막 요리 시작했다!”

“에-, 심심한데. 카나 할멈한테 여기에도 TV 놓아달라고 할까?”

“엣? 가능한 건가?”

“…? 전기 들어오잖아, 여기.”

“그러고보니….”

환하게 주방을 밝히고 있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말을 흐렸다. 

생각할수록 이 별채는 ‘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없다. 

전기도 들어오고, 주방은 신식에…, 욕실도 깔끔하다. 

신이 머무는 곳인데도 경건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하긴 머무르고 있는 신이 저 모양이니…. 

어느새 꺼낸 게임보이를 집중해 연타하고 있는 오소마츠를 보며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고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가라아게를 건져냈다.



“음~! 맛있어!”

의자 뒤로 튀어나온 꼬리가 크게 살랑거렸다. 

아직 뜨거운 가라아제를 한입 가득 물고 오물거리며 중간중간 뜨거운 숨을 내뱉는 오소마츠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지금까지 신부수업이라는 명목 하에 우리 가족의 요리는 전부 내가 맡았지만, 최근엔 ‘맛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저렇게 기쁘게 먹으면 만드는 입장에서는 꽤 기쁘다. 

오소마츠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간이 책상을 폈다. 

본채에서도 방 하나에 여섯이 함께 살다 보니 책상을 놓을 공간이 없어 간이 책상에 앉는 것은 익숙하다. 

곧 연극부의 정기 공연이 다가오고 있으니 연습을 철저하게 해 두어야만 한다. 

형광펜으로 알록달록 칠해진 대본을 펴 들고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이번엔 주역을 놓쳤지만, 주역을 보좌해주는 중요한 역을 맡았다. 

선배들도 기대하고 있다고 해주었고, 연극부에 들어가고 처음 맡는 큰 역할이기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연필을 꺼내 떠오르는 생각을 대본에 적고 마지막으로 대사를 외우며 감정을 잡았다.


“-그게 정말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네가 편하기 때문에 고른 것이 아닌가? 대답해라!”

이야기의 절정 부분, 망설이는 주인공을 추궁하고 힘을 실어주는 장면이다. 

담담히, 하지만 힘있게 목소리를 내지르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주인공의 절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주인공을 믿고 쓴소리를 하는 내 역할에 큰 감정은 필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해서는 내 전부를 연극 속의 역할에 내던져야 한다. 

주인공은 변명한다.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주인공을 보며 더 답답해하고 기어이 인상을 찌푸리고 만다.


“변명이다! 너는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포장하며 자기자신을 속이고 있어! 요령을 피우고 있다는 것은 너도 느끼고 있잖아!”

주인공은 침묵한다. 

분노가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허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내가 미운 것이다. 

친우인 주인공의 원망 어린 눈빛은 아프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설령 주인공이 나를 미워하게 되더라고 나는 주인공을 옳은 길로 인도해주고 싶은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너는 이렇게 비겁한 사내였나!? 어쩔 수 없다며 불의를 그냥 지나가는 치졸한 남자였던가! 그렇다면 나는 너와 연을 끊겠다!”

마지막으로 단호히 외친다. 

비통한 심정을 감추고 정말로 분노한 것처럼. 

속으로는 주인공이 마음을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며 애절하게 주인공을 응시한다. 

주인공의 눈빛에선 원망이 서서히 사라지고 뚜렷한 빛이 비친다. 

쓴웃음과 함께 주인공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몸을 돌린다. 

주인공이 사라진 무대 위에서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걸로 마지막. 주인공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무대를 떠난다. 

다음 장면에서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무대 밖에서 불치병으로 죽어버린 나를 주인공이 아련히 회상할 뿐이다. 

행복해지겠다는 다짐을 하늘에 하면서.


“후―.”

참았던 숨을 몰아 내뱉으며 대본을 내리자 내 앞에 앉아있던 오소마츠가 보였다. 

씩- 웃으며 짝짝짝, 손뼉을 친 오소마츠의 옆엔 게임보이가 버려져 있었다.


“게임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응-, 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갑자기 묘한 소리를 하길래~. 뭔가 싶어서 구경했지. 무슨 연습?”

“…연극부의 정기 공연이다.”

“흐응―. 꽤 잘하던데?”

“…고맙다. 하지만, 더 연습하지 않으면.”

오소마츠의 칭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본채에서는 형제들이 시끄럽다고 불평해 제대로 된 연기 연습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게 뒷마당에서 몰래 했던 연기 연습을 연극부 부원들이 아닌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 3개월간 오소마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오소마츠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다시 싱긋- 웃고 내 손에 들린 대본을 슬쩍 가져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이야긴데.”

“창작극이다. 연극부에 뛰어난 작가가 있어서, 정기 연극은 전부 창작극으로 하고 있다.”

“헤에-.”

팔락팔락, 오소마츠가 넘기는 종이가 소리를 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본을 전부 훑어본 오소마츠의 꼬리가 천천히 너울댔다.


“네가 죽는 장면도 무대에 있으면 좋은데 말이야.”

“아아-, 그렇네. 하지만 길어야 20분 정도인 공연이니 내가 죽는 장면을 생략해도 어쩔 수 없지.”

50분 정도에 달하는 공연은 1년에 한번, 축제 때 하는 것이 전부다. 

몇몇 연극부에 들러주는 고마운 학생들을 제외하면 관객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정기 공연은 대체로 15분에서 20분 정도의 짧은 공연을 한다. 

배우는 죽을 때도 무대 위에서 죽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으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오소마츠가 돌려준 대본을 받아 다시 내가 등장하는 장면을 폈다.


“그거 즐거워?”

“연극 말인가?”

“응.”

“아-, 즐겁다. 굉장히.”

“그래.”

대본을 살펴보는 내게 묻더니 싱겁게 고개를 끄덕인 오소마츠가 “끄아-.” 하고 비명을 지르며 기지개를 폈다. 

먼저 잔다며 방 한편에 이불을 깐 오소마츠가 귀를 쫑긋거리며 내일 할머니에게 TV 가져다 달라 말하라고 당부하고 이불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정기 공연이 끝나고 바로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3일에 걸친 시험 시간표에 한숨을 내쉬고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 가방에 넣었다. 

연기 연습과 오소마츠의 시중을 드느라 지금까지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이번 시험 성적은 어쩌면 꽤 위험할지도 모른다. 

몰려오는 위기감에 섬뜩해져 부르르 몸을 떨고 무거워진 가방을 멨다. 


식사를 마친 후, 책상에 교과서를 폈다. 

수업은 집중해 들었지만 복습을 하지 않아 기억이 군데군데 빠져있다. 

특히 수학 같은 건 평소에 문제를 많이 풀지 않은 탓인지 한 문제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끙끙대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풀가동해 문제를 풀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귀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라마츠우~, 놀아줘어~~. 심심해애~~!”

“게임이나 해라.”

“질렸어~~. 카라마츄 올 때까지 실컷 했다구우~. 좀 놀아줘, 신부님~.”

“저리 가, 오소마츠. 나는 공부해야 한다!”

“하루 정도 안 해도 괜찮지 않아~? 공부 때려 치고 놀아달라구우~.”

달달 떨리는 다리와 함께 인내심의 한계가 눈을 떴다. 

생각보다 문제가 풀리지 않아 초조했던 마음이 옆에서 치근대는 오소마츠 덕분에 분노로 색을 바꾸었다. 

짜증난다.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자 책상에 매달려 칭얼대던 오소마츠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니, 놀아주려는 거 아니니까. 

책상에 떨어진 연필이 데구루루 굴러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인정사정 없이 오소마츠의 머리에 주먹을 꽂고 다시 연필을 집어 들었다. 

“아팟!” 라던가 “신을 때렸어!?” 하는 헛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한다. 

사각사각 연필을 굴려가며 문제를 풀고 있으니 곧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산책이라도 하고 오려는 건지 오소마츠가 떠난 방안을 잠시 둘러보고 한숨과 함께 다시 문제에 집중했다. 

머리가 좋지 않아 한 과목을 공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짜증나는데 오소마츠가 바로 옆에서 방해하니 간신히 머리에 넣었던 것들이 다시 빠져 나온 것 같다. 

요 3개월 간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면서 위염이 생기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가끔 내 연기를 칭찬해 준다거나, 기쁘게 밥을 먹는 기특한 모습도 보이지만, 애처럼 칭얼대고, 방을 어지럽히고, 담배나 뻑뻑 피우고….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면서 좋은 일보다 싫은 일이 더 많다. 

이대로 오소마츠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국어 교과서를 펼쳤다.




“…츠, 카라마츠, 이제 일어나거라.”

“으, 응…?”

흔들리는 몸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환한 아침 햇살이 눈을 따갑게 조여와 신음과 함께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오소마츠의 자리가 비어있다.

 어제 그대로 안 들어온 것인가, 추론하며 내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께 아침 인사를 건넸다.


“오소마츠 님은 어디 계시냐?”

“…어제 나간 뒤로 안 들어온 것 같은데요.”

이불에서 나와 습관적으로 이불을 정돈하며 대답하자 할머니의 매운 손이 등을 내리쳤다.


“아우치!!”

“부인으로서 남편을 잘 모셔야지! 네가 뭘 어떻게 했길래 오소마츠 님이 안 들어오시는 거냐!”

“…죄송합니다.”

할머니의 호통에 덤덤히 사과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 역시 싫은 일이 더 많다.






5.


무난하다, 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점수를 앞에 쓴웃음을 삼켰다. 

이 성적표를 들고 간다면 분명 혼나겠지. 

오소마츠가 방해한 덕분에 시험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적은 작년보다 크게 떨어졌다. 

치솟는 짜증과 함께 오소마츠를 한껏 씹으며 성적표를 가방에 구겨 넣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웬일로 카라마츠 형이 이런 점수를 받았어?”

하교길, 내 점수를 물어본 토도마츠에게 구겨진 성적표를 보여주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그 말에 백 번 동감한다.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안 굴러가는 머리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부모님의 역정도 피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성적 관리를 했는데,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고 난 뒤로 받은 성적이 이 모양이다.


“쵸로마츠 형이 카라마츠 형보다 성적이 좋은 건 이번이 처음이네….”

어느새 받은 쵸로마츠의 성적표와 내 성적표를 나란히 든 토도마츠가 “헤에-.” 하고 감탄하며 말을 흐렸다. 

위원회가 일찍 끝나 함께 귀가하던 쵸로마츠가 내 성적표를 힐끔 보곤 “그러게.” 하고 수긍했다.


“뭐,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지! 너무 기죽지 마, 카라마츠 형.”

툭, 어깨를 치며 성적표를 돌려주는 토도마츠의 위로에 “그래.” 하고 대답하며 성적표를 손에 쥐었다. 

부디, 집에 부모님이 없기를…. 기도했지만 오소마츠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다.



GOD IS DEAD!!!

집에 돌아가니 떡 하니 아버지가 거실을 지키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의원 일 때문에 바빠 제대로 집에 들어오는 날도 적으면서 왜 하필 이런 날은 꼭 일찍 들어오는 걸까. 

“어서 와라.” 하고 미소지으며 읽고 있던 신문을 접는 모습에 긴장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먼저 들어온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도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먼저 집에 돌아온 이치마츠와 쥬시마츠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것인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아버지가 우리에게 손짓했다.


“오늘 성적표가 나왔다던데.”

“...네.”

젠장. 욕지꺼리를 삼키고 구겨진 성적표를 내밀었다. 

이어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도 얌전히 아버지의 손 위에 성적표를 올리고 굳은 얼굴로 아버지의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찬찬히 시간을 들여 우리의 성적표를 살펴보는 아버지의 눈이 날카롭다. 

작년보다 성적이 크게 떨어진 나는 혼날 것이 분명하기에 반쯤 체념하고 이어질 호통을 기다렸다.


“카라마츠. 성적이 왜 떨어졌지?”

“그게..., 오소마츠가 방해를 해서....”

“‘신’을 핑계로 댈 셈이냐?”

“....”

“쵸로마츠와 토도마츠, 너희는 괜찮구나. 하지만 다음 시험 때는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해라.”

“네.”

“네.”

아버지의 말에 쵸로마츠와 토도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둘을 응시하던 아버지의 시선이 일변해 날카롭게 내게 고정되었다.


“카라마츠, 너는 장자로서 앞으로 우리 가문을 이끌어갈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성적을 받으면 되겠니? 우리 가족 뿐 아니라 친척들도 모두 앞으로 네가 이끌어야 하는데, 이런 성적을 받은 사람을 누가 믿고 따라갈 수 있겠니. 게다가 ‘신’이 방해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이제 곧 수험생이라서 마음이 뒤숭숭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성적으로 이어지면 안되지. 이번 한번은 용서해주마. 다음 시험에선 작년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아라.”

“...네.”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도 나를 따라 침묵하며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휴-.” 하고 아버지가 내뱉은 한숨이 바닥에 퍼지고 곧 가죽 소파가 내지르는 비명이 귀에 걸렸다.


“그럼 나는 일하러 가볼테니까, 저녁 잘 챙겨 먹고. 카라마츠는, 더 열심히 해라.”

“...네.”

“네. 다녀오세요, 아빠.”

“다녀오세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쵸로마츠와 토도마츠의 인사를 받은 아버지가 거실을 나서자마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겨 본채를 나와 별채를 향해 뛰었다. 

쵸로마츠와 토도마츠의 동정어린 시선이 얽히는 그 자리에서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거칠게 별채 문을 열고 복도에 서고 나서야 참았떤 눈물이 터져 나와 시야를 흐렸다.


사실인데. 

오소마츠가 방해를 한 것은 사실인데. 

게다가 ‘신부’다 뭐다 해서 혼례를 올리고 오소마츠와 함께 살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는데.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면서 도저히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건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 앞에서 작아진 나를 변호해주지 않은 토도마츠와 쵸로마츠도 미워진다.


이 모든게 전부 오소마츠 때문이라는 생각에,


―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오소마츠가 있을 다다미방에 들어가지 않고 주방으로 직행했다. 

식탁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대로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었다. 

퉁퉁 부운 눈두덩이가 무겁다. 

빨리 차게 식혀야 내일 티가 나지 않을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왜 나한테만.’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여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아서 신부가 되고, 오소마츠와 함께 살아야하고, 싫은 일을 참아야하고, 원하지 않는 가업을 이어야한다. 

겨우 장자라는 이유 하나로. 

지금이 중세시대도 아니고 장자라고 꼭 집안을 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구식의 끝을 달리는 집안 풍습에 치가 떨리고 울분이 맺혀 참을 수가 없다. 

짜증난다. 전부, 다-. 

한번도 바란 적 없는데, 이런 꼴을 당하고 정작 원하는 것은 이룰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척 훈계하는 아버지도, 나를 신부로 만든 할머니도, 남일보듯 끼어들지 않는 형제들도, 모두 미워서, 싫다.... 

다시 뜨거운 눈물이 식탁에 툭,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흐느낌 없는 조용한 눈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카라마츠?”

얼마나 울었을까, 심하게 퉁퉁 부은 눈을 비비고 있는 내게 모든 원흉이 된 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

“무슨 일 있었어?”

친근하게 다가와 내 옆에 선 오소마츠의 존재가 거슬린다. 

말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못 본척 지나가주었으면 마음을 한껏 담아 “별 일 없었다.” 하고 차갑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너무 운 탓에 의자에서 일어선 순간 현기증이 일어 몸이 크게 기울었다. 

“우왓!” 하고 오소마츠가 급히 나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크게 넘어져 다쳤을 지도 모른다. 

오소마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나를 도로 의자에 앉혔다.


“오늘은 내가 저녁 할 테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

“...에?”

생각지도 못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눈덩이가 부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 눈을 끔뻑이자 오소마츠가 빙긋- 웃더니 항상 내가 맸던 푸른 앞치마를 들어 제 목에 걸었다.


“이 카리스마 레전드 신인 오소마츠님께서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내게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 보인 오소마츠가 뭐가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할머니가 사서 넣어둔 갖가지 재료들을 휘적대더니 곧 면과 고기, 양배추, 당근을 꺼냈다. 

찬장에서 야키소바 소스를 꺼내고는 “좋~아! 오랜만에 실력발휘 해볼까!” 하고 기합을 넣더니 능숙하게 채소를 씻고 다듬기 시작했다. 

다듬은 채소를 그릇에 넣고 프라이팬을 꺼내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볶기 시작했다. 

채소를 볶고 고기도 넣어 함께 볶는다. 야키소바 면은 물에 풀어 씻고 물기를 빼내어 팬에 넣고, 그 안에 소스를 부었다. 

축제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주방에 가득 찼다. 

야키소바다. 

오소마츠는 꼬리를 좌우로 크게 남실대면서 면을 볶은 후, 그릇에 옮겼다.


“카라마츠우~, 가츠오부시는 어디?”

“두번째 찬장에.”

“오! 찾았당!”

미리 갈려져 있는 가츠오부시 봉투를 꺼낸 오소마츠가 김이 모락모락나는 야키소바 위에 솔솔 뿌렸다. 

김을 따라 가츠오부시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두 사람 분의 앞접시와 야키소바가 든 커다란 그릇을 식탁에 올린 오소마츠가 “응.” 하고 젓가락을 내밀었다.


“...요리할 수 있었던 건가.”

그럼 내가 필요 없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든 생각에 자조하며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오소마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앞접시에 야키소바를 덜어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것만 할 줄 알아. 맛있어서 아키-한테 배웠거든. 다른 건 요리하기 귀찮고. 내가 한 것 보다 네가 한 게 더 맛있고-.”

달그락- 소리를 내며 앞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은 오소마츠가 멋쩍게 웃으며 귀를 쫑긋거렸다. 

아무런 의심 없이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니 오소마츠를 원망했던 것이 어쩐지 모두 부질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오소마츠는 그냥 웃어 넘길 것만 같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고 젓가락을 고쳐 잡고 야키소바를 입에 넣었다.


“...맛있다.”

“응, 많이 먹어~.”



배불리 야키소바를 먹고 목욕을 하고 툇마루에 앉았다. 

목욕으로 따끈하게 데워진 몸이 밤바람에 온기를 빼앗겼다. 

식어버린 피부를 쓱- 매만지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눈을 깜빡이며 밤하늘에 박힌 별의 수를 세고 있자, 끼익- 하고 마루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오소마츠가 서 있었다.


“카라마츄~, 오늘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없었다.”

“아니, 없었다는 얼굴 아니니까, 너. 매일 목욕하자마자 아무 걱정 없이 바로 자는 녀석이 처량하게 별이나 보고 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믿겠어?”

황당하단 얼굴로 툴툴댄 오소마츠가 “읏챠-.” 하고 몸을 기울여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를 보며 내 말을 기다리는 모습이 약간 강아지를 닮았다. 

아-, 그러고보니 여우는 개과였던가. 

쓸데없는 지식이 떠올라 시선을 내리고 오소마츠와 눈을 맞췄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면 좋다. 

모처럼 얻은 기회니, 한껏 불평불만을 털어놔 주지.

이상한 오기가 생긴 것을 자각하면서 오소마츠를 노려보고 입을 열었다.


“오늘 오소마츠 덕분에 성적이 떨어져 아버지에게 혼났다. 그동안 오소마츠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칭얼대서 그거 맞춰주고, 시험 기간에도 공부하고 있으면 놀아달라고 방해한 덕분에! 남자인데도, 오소마츠의 ‘신부’가 된 것도 싫은데, 오소마츠 때문에 성적이 떨어져 혼났다! 기분이 좋을 리 없잖아!! 가문을 이어야 하는 녀석의 성적이 이게 뭐냐고 들었다고!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가문을 위해서가 아닌데!! 그리고 공부를 못한 이유가 오소마츠 탓인 것도 사실인데! 전혀 믿어주지 않고! 내가 한 노력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투로 말하는 게 얼마나 열 받는지 알아!? 참고 있다고, 힘든데도! 장남이니까! 장자니까 참으라는 어른들을 위해서 참고 있는 거라고! 누가 이딴, 이딴 집이나 이으려고 지금까지 참고 노력했는줄 아나!!”

한번 트인 물꼬가 멈추지 않듯이 줄줄 말이 흘러나왔다. 

한껏 쏟아내고 나니, 중간부터 오소마츠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한 웃음이 텅 빈 입가를 메웠다. 

대체 난 누구한테 이렇게 화내고 있는 걸까. 

한심하고 허무해서 또 눈물이 나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라마츠, 미안. 네 공부 방해해서 미안해. 그렇게 중요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앞으론 공부할 때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오소마츠의 다정한 공기가 찬 밤공기를 가르고 나를 감쌌다. 

단순한 소리에 지나지 않을 음성이 꼭 온기를 가진 것처럼 부드럽게 나를 껴안고 토닥이는 것 같았다. 

왈칵 쏟아진 눈물에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미안해-.”

핫-, 하고 슬프게 웃은 오소마츠가 기모소 소매로 내 눈가를 닦았다. 

그대로 손을 올려 내 머리에 올린 오소마츠가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꼭 어머니가 아버지께 크게 혼난 우리를 다정하게 안고 쓰다듬어 주었던 것처럼, 다정할 리 없는데 너무나 다정하게 느껴지는 오소마츠의 손길에 심장이 아팠다. 

당장 쳐내고 싶은데, 이대로 있고 싶어 흔들리는 마음에 눈을 감았다.


“카라마츠.”

내 머리를 떠난 오소마츠의 손을 따라 눈을 뜨자, 씩-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피운 오소마츠가 마당을 가리켰다.


“저거 봐.”

오소마츠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마당에 푸른 불꽃이 둥둥 떠 있었다.


“부, 불 났!?”

“불 난거 아냐, 불 난거 아냐. 여우불.”

“여, 우불...?”

“응.”

샐쭉 웃은 오소마츠가 손짓하자 하나만 있던 푸른 불꽃이 여러 개로 갈라졌다. 

밤하늘에 깔린 별처럼 어두운 마당에 퍼진 푸른 불꽃이 흔들리더니 곧 울렁울렁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꼭 공이 튀는 것처럼 마당에서 통통 튀던 불꽃이 대열을 맞춰 움직이더니 제멋대로 합쳐지고 나눠지며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

“예이~! 오소마츠 님이 보여주는 여우불 쑈-!! 매일매일 볼 수 있는게 아니에용~!”

멍청히 여우불을 보고 있자, 또 뭐에 신이 난건지 “캬하-!” 하고 웃은 오소마츠가 여우불을 더 늘였다. 

공중으로 튀어올라 불꽃처럼 사방으로 나뉘어지고, 열을 맞춰 일렁이며 춤을 추는 것처럼 리듬을 타고 마당을 돈 여우불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읏!”

“괜찮아. 안 뜨거우니까, 만져도 돼!”

오소마츠의 말에 내 무릎치로 올라온 여우불에 손을 넣었다. 

놀랍게도 오소마츠의 말대로 여우불은 전혀 뜨겁지 않았다. 

사람의 체온 정도로 따뜻한 여우불이 내 손 위에 올라와 작게 돌며 통통 튀었다. 

꼭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 신기해 나도 모르게 빤히 열중해 보자, 오소마츠의 키들거리는 웃음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어이, 그만 웃어라.”

“아니-,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으니까아~.”

“신기하잖아. 처음 보는 거라고.”

“그것도 그렇네.”

픽- 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마당을 가득 채웠던 여우불이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검은 마당에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찌르르 울려 퍼졌다.


“이제 잘까?”

“...아.”

툭,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린 오소마츠가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름의 위로인가, 하고 이불로 들어가는 오소마츠를 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고’ 로군. 

피식-,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웃음을 밤하늘에 던지고 툇마루 문을 닫았다. 

어쩐지 굉장히 타인의 온기가 느끼고 싶어졌다.






6.


“카라마츠 형~, 집에 가자.”

교실 문을 들어오는 토도마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 자리까지 다가온 토도마츠가 내 손에 들린 대본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연습?”

“아-, 이번 축제에서 할 연극의.”

“주인공 맡았다고 했나?”

“아.”

“...부활동 하는 거에 뭐라 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카라마츠 형. 아마 화낼 거야? 할머니랑 아버지가.”

“알고 있다. 화내라지.”

“...어휴~.”

토도마츠의 말에 딱딱하게 내뱉자, 푹- 아래로 내쉰 한숨이 내게 닿았다. 

토도마츠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럼 나 먼저 갈게.” 하고 교실을 빠져 나갔다. 

창문 밖으로 교문을 빠져나가는 토도마츠의 등을 배웅하고 대본을 읽어내려갔다. 


중학교 시절, 우연히 가족과 함께 본 연극에 나는 내 영혼을 뺏기고 말았다. 

커다란 무대,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관객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연극이라는 것에. 

세상에서 제일 멋진 것은 TV에 나오는 슈퍼 히어로일 것이라 굳게 믿었던 내 생각을 열정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 한 사람이 무참하게 깨부수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형제들과 함께 했던 히어로 놀이도 그만두고 ‘연극’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극, 연기, 배우.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나도 그 멋진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는 연극부가 없었다. 

이 학교에 연극부가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나는 연극부 부실로 달려가 입부 신청서를 냈다. 

선배들과 동년배들 사이에서 연기를 배워가는 것은 즐거웠다. 

내가 ‘카라마츠’가 아닌 무대 위의 누군가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만들어냈다. 

겉모습은 ‘카라마츠’ 그대로 변하지 않았지만, 무대 위에 있는 순간 만큼은 ‘카라마츠’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연기를 하는 자가 가지게 되는 숙명적인 이중성이 내 마음을 강하게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수없이 연습하고 같은 장면을 반복해 등장인물들과 합을 맞추는 것은 힘들었지만, 한 순간 합이 맞았을 때 느끼는 환희가 마약처럼 나를 연기에 붙잡아 놓고 있었다. 


스스로가 잘 했다고 생각한 연기가 나왔을 때, 

내 연기에 압도되어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버린 선배들을 보고 있을 때, 

그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타인의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즐거웠다. 


연기를 하며 겪는 어려움조차 즐거울 정도로 ‘연기’라는 것은 이제 내게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고등학교 들어가 내가 연극부에 들어갔다는 것을 들은 아버지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내심 내가 자신과 같이 학생회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나와 형제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고 내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의 리더가 되기를 아버지는 바라고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 내 천직은 ‘연기’ 외엔 없다. 

아직 학생이니까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서도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는 아버지가 나왔던 대학에 들어가, 아버지처럼 경영학부에 다니게 되겠지.... 

피할 곳이 없는 정해진 길이 잔인하게 내 의지를 짓밟는 착각이 일었다. 

말없이 읽고 있던 대본을 내리고 창밖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은 서서히 붉게 변하며 설명할 수 없는 향수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돌아갈까.”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는 혼잣말을 던지고 대본을 가방에 넣었다.




“오늘도 연습?”

저녁 식사를 마치 ㄴ오소마츠가 내 손에 들린 대본을 보며 물었다.


“아, 축제가 가까워졌으니까.”

“무슨 연극인데?”

“정통 비극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흠-.”

대본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여주자 오소마츠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떴다. 

어딜 가냐고 묻자, “한 대 피우고 올게.” 하고 손을 흔들며 주방을 나섰다. 

성적이 떨어져 아버지에게 혼나고 오소마츠에게 그 울분을 털어놓은 날 이후로, 오소마츠는 날 배려하기 시작했다. 

시험 공부를 하고 있으면 절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훌쩍-, 방에서 사라져 내가 잠들 때에나 나타나 이불에 누웠다. 

그렇게 피워대던 담배도 내가 있으면 방 밖으로 나가 피게 되었다. 

아직 방을 어지럽히거나, 공부할 때가 아니면 여전히 귀찮게 달라붙지만 이 정도도 정말 놀라운 발전의 결과이다. 

싫은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나도 오소마츠에게 맞춰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벌써 오소마츠와 함께 지낸지 9개월이 지났다.


오소마츠가 떠난 주방에서 대본을 피고 읽어내려간다. 목을 다듬고 연기를 연습하며 지금 이 자리가 무대 위인 것처럼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즐겁게 웃으며, 슬프게 울부짖으며,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며, ‘로미오’가 되어 ‘줄리엣’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뭘 하고 있는거냐!”

주방에 크게 울리는 호통에 재빨리 대본을 접었다. 

넓게 펼쳐져 있던 무대는 할머니의 호통 한마디에 유리처럼 산산이 깨져 바닥에 깔렸다. 

깨진 유리가 쏟아져 온몸에 박혀 욱신거리는 아픔이 태어났다. 

쿵쿵, 마루를 울리며 다가오는 할머니에게 시선을 돌리고 대본을 뒤로 숨겼다.


“할머니.”

“내, 학교에서 무엇을 하던 상관하지 않겠다 했지만! ‘신’이 머무는 이 신성한 곳에서도 그런 되도않는 걸 하고 있던 거냐!!”

“....”

“너는 장차 이 가문을 이끌어야 하거늘!! 저번에 좀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벌써 마음이 풀어졌느냐! 아버지에게 해이해졌다고 혼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

“학생인 지금은 온전히 오소마츠님을 모시는 것과 공부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녀석이, 이딴 것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어쩌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사과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정신을 차려야지! 정신을!!”

쾅, 하고 할머니가 내리친 식탁이 크게 울렸다. 

씩씩, 성난 숨을 내뱉은 할머니가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거 이리로 내라.”

“...어, 쩌시려구요.”

“찢어버려야지! 그딴 것!!”

“....”

싫다, 고 말하고 싶은데 입술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는 나를 더욱 매섭게 쏘아보며 거칠게 손을 흔들었다.


“빨리 내래도!!”


“아———, 정말 시-끄럽네!!!


할머니의 호통 못지 않은 커다란 목소리가 주방을 뒤흔들었다. 

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날카로운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도 사색이 된 얼굴로 천천히 뒤돌았다. 

주방 입구에, 오소마츠가 서 있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차갑게 우리를 응시하며, 거칠게 머리를 긁적인 오소마츠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적당히 풀어진 기모노에 팔을 꽂고 터벅터벅 주방으로 걸어 들어온 오소마츠가 할머니를 내려다보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할멈-, 할멈이야말로 여기서 그렇게 큰 소리 내도 괜찮아~? 모처럼 기분 좋게 낮잠 자려고 했는데, 할멈 덕분에 완—죤히 잠기운이 날아가 버렸는데에—.”

“죗, 죄송합니다. 오소마츠 님.”

평소와 같은 말투가 차가운 목소리와 시너지를 이루어 사납게 듣는 이의 목을 옥죄었다. 

오소마츠의 짜증에 깊이 허리를 숙인 할머니는 몇 번이고 오소마츠에게 사과했다. 

“하-, 이제 됐어.” 하고 오소마츠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할머니는 다시 깊이 허리를 숙이곤 서둘러 별채를 떠났다.


“미안, 오소마츠.... 시, 끄러웠나.”

“응-? 아니, 별로. 시끄러웠던 건 할멈이지 네가 아냐.”

그렇게나 차가운 목소리를 냈으면서, 오소마츠는 금방 가볍게 웃으며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에 손이 얹어진 채로 시선을 위로 들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오소마츠의 팔 너머에 얇게 휘어져 부드럽게 나를 응시하는 오소마츠의 눈빛이 닿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이젠 아무도 찾지 않게 된 공터에 들렀다. 

곧 무슨 건물이 세워진다는 공터엔 허울 뿐인 울타리와 함께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가볍게 낮은 울타리를 넘어 공터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 놓았다. 

오소마츠는 괜찮다고 했지만, 계속 집 안에서 연기 연습을 하면 분명 시끄럽겠지. 

가족에게 들키지 않고, 오소마츠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저녁 식사 시간 아슬아슬할 때까지 이 공터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이 정기적인 일과가 되었다. 

할머니는 늦게 귀가하는 내게 잔소리를 했지만,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하다 왔다고 하면 할머니도 더는 혼을 낼 수 없었다. 

오늘도 도서실에서 공부하다 늦어졌다는 변명을 하기 위해 도서실에서 책도 한 권 빌려놓았다. 

가방에 들어있는 도서실 스티커가 붙은 책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대본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선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다. 

겨우 방 하나 정도의 크기인 공터가 마치 드넓은 바다처럼 느껴져 가슴이 뻥- 뚫렸다. 

심호흡하고 자신을 담아 미소 지으며 대본을 펼쳤다.



연기 연습에 이어 발성 연습까지 한 것은 좀 오바였나.... 

따끔거리는 목을 붙잡고 대본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오늘따라 연기가 잘 풀려 너무 집중한 탓에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서둘러 가방을 들쳐 메고 공터를 빠져나오자마자 편의점 봉투를 쥔 이치마츠와 토도마츠와 마주쳤다.


“어? 카라마츠 형? 왜 거기서 나와?”

“아, 잠시 들릴 곳이 있어서.”

“거긴 공터 밖에 없는데.... 고양이들이 잘 모이는 장소라서 알아.”

“아....”

토도마츠의 질문에 적당히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치마츠가 나를 응시하며 내뱉은 말에 쓴웃음을 삼켰다. 

토도마츠가 이치마츠를 보며 “그래?” 하고 묻자, 이치마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 확실해.” 하고 대답했다.


“그럼 카라마츠 형은 공터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이 시간까지.”

“그게....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또!?”

이건 숨길 수 없겠다 싶어 솔직히 털어놓자 토도마츠가 경악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치마츠도 토도마츠를 따라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혼이 나고도 용케 하는 구나, 카라마츠 형은....”

“왜 굳이 그런 걸 하는 거야, 개똥마츠.”

어색한 미소로 중얼거리는 토도마츠에 이어 이치마츠가 혀를 차며 툭, 말을 던지고 집을 향해 앞서 걸어갔다. 

‘굳이’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이치마츠의 한 마디에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마츠 형, 빨리 집 가자. 벌써 8시 다되가.”

“아, 응.”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버린 내 팔을 토도마츠가 잡아 끌었다. 

생긋- 귀엽게 웃는 토도마츠를 따라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땅에서 들어올렸다.




축제날이 되었다. 색색으로 꾸며진 복도와 학교 벽을 보며 마지막으로 대사들을 숙지하고 강당으로 향했다. 

연극부의 연극은 축제가 한창 무르익을 오후 4시에 시작한다. 

형제들에게 연극 시간을 알려주었지만, 모두 바쁜 것 같았으니 와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겠지. 

무대에서 보이는 관객석을 쭉 둘러보고 옅은 미소와 함께 들췄던 막을 내려놓았다. 

괜찮아. 지금 나는 ‘카라마츠’가 아니라 ‘로미오’다. 

자기암시를 하며 몇 번이고 스스로가 ‘로미오’라 되새기며 선배의 콜 사인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생애 최고의 연기라고 자찬할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낸 연극은 박수갈채 속에 막을 내렸다. 

땀에 흥전히 젖은 이마를 닦아내고 무대에서 내려온 내게 선배들이 달려들어 최고였다며 칭찬해주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선배들의 표정을 내가 만들어냈다는 것이 기뻤지만 동시에 허무하기도 했다. 

내가 정말로 바랐던 것이 이것이었나...? 

축제가 끝나고 부원끼리 뒤풀이 가자며 내 등을 치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 운동장으로 나왔다. 

연극엔 와주지 않았지만, 다른 형제들의 반엔 가봐야 겠지. 

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운 이치마츠의 반으로 뛰어가려던 참에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이 멈추고 말았다.


“카라마츄~!”

“...오, 오소마츠?!”

환하게 웃으며 거세게 손을 흔드는 남자는 분명 오소마츠였다. 

항상 입던 붉은 기모노가 아닌 붉은 츄리닝 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청년이 내게 다가왔다. 

항상 이리저리 너울대던 꼬리도, 실쭉샐쭉 움직이던 귀도 보이지 않는다.


“어, 떻게 여길....”

“아니, 오늘 축제라고 그랬잖아? 재미 있을 것 같아서 보러 왔찡~!”

어린아이처럼 웃는 오소마츠 뒤로 뒷짐을 진 할머니가 걸어왔다.


“할머니..., 도 오신 건가요?”

“그래, 하지만 이제 나는 돌아가봐야 하니.... 카라마츠, 네가 오소마츠 님을 잘 돌봐드려라.”

“...엑.”

내 대답도 듣지 않고 할머니는 몸을 돌려 교문 밖으로 사라지셨다. 

남겨진 오소마츠는 눈을 빛내며 운동장을 크게 훑어보고 있었다. 


“오소마츠, 부탁이니 얌전히 있어라.”

“아! 야키소바닷!!”

“잠, 오소마~츠!?”

설마했던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꼬리가 튀어나오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흥분해있던 오소마츠가 야키소바를 파는 노점을 보자마자 그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3살 짜리 애도 아니고! 

얌전히 있으란 말이 끝나자마자 튀어나가는 건가!? 오소뫄츠으으으!!! 


쵸로마츠만큼이나 발이 빠른지 순식간에 오소마츠는 운동장 저편으로 멀어졌다.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 오소마츠 뒤를 쫓았다. 

일렬로 늘어선 다양한 노점의 끝에 있는 야키소바 노점에서 1인분을 주문한 오소마츠가 행복한 얼굴로 야키소바를 쭉 빨아들였다.


“아, 카라마츠. 계산!”

나를 발견한 오소마츠가 손짓하며 노점에 서 있던 학생을 가리켰다. 

역시, 오소마츠에겐 돈이 없었다. 

다시 큰 한숨을 내쉬고 지갑을 꺼냈다. 

야키소바 값을 치르고 뒤돌자마자, 바로 앞에서 야키소바를 먹던 오소마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으응~?!?!?!”

만화도 아니고, 연기처럼 사라진 오소마츠를 찾아 또 운동장을 이잡듯이 뒤져야 했다. 

얼마나 뾸뾸 돌아다닌 건지, 오코노미야키, 교자, 야키토리, 솜사탕까지 사먹고는 전부 내가 계산하게 만들고, 1시간이나 운동장을 헤맨 후에야 오소마츠를 붙잡을 수 있었다.


“부탁이니까!! 제발! 얌전히 있어라! 오소마츠!!”

“알겠엉, 알겠엉~.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너 때문이다!”

짜증을 뒤섞어 거칠게 내뱉고 오소마츠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 둘이 팔을 붙잡고 걷는 모양이 이상하게 보일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잡아두지 않으면 오소마츠는 또 어딘가로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넓은 운동장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오소마츠를 끌고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가는 중이야? 우리.”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의 클래스다.”

“쵸로마츠, 하고 이치마츠? ...아-, 셋째랑 넷째?”

“아.”

오소마츠의 중얼거림에 문득,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오소마츠를 만난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첫만남인가. 

홱 고개를 돌려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응?” 하고 내 시선에 고개를 기울이는 오소마츠는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다. 

‘신’과의 첫만남인데 이런 모습으로 만나도 되는 것인가 하는 불안이 괜히 일어났지만, 평소에도 그닥 ‘신’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괜찮겠지-, 하고 끄덕이며 오소마츠를 끌고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고양이, 카페...?”

“아-, 그런 것 같군.”

창문에 붙여진 홍보 포스터를 보고 오소마츠가 한쪽 눈썹을 찡긋거렸다. 

혹시 고양이 카페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닐까 싶어 물어보자, 오소마츠는 시원스럽게 정답을 말했다.


“TV에 나왔었다고!”

“그런가. 그럼 들어가자.”

“오우-!”

씩- 웃으며 가슴을 내밀고 자랑하는 오소마츠에게 적당히 맞춰주고 클래스 안으로 들어갔다. 

분주히 움직이는 점원들 사이에 고양이 탈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 카페는,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 탈을 쓴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아니, 진짜 고양이는 학교에 데리고 올 수 없으니까 이렇게 한 것 같다만....”

오소마츠의 질문에 대답하며 앞치마를 두른 학생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건네준 메뉴엔 평범한 카폐 메뉴가 적혀 있었다.

물론 학교에서 커피를 팔 수는 없으니 음료만 가득했다. 

가장 무난한 오렌지 주스 2잔을 시키고 오소마츠에게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에서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교실 안을 돌아다니는 고양이들-고양이 탈을 쓴 학생들-을 따라 시선을 이리저리 옮긴 오소마츠가 홱-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밝게 웃었다.


“웃기네-.”

“아, 아아....”

갑자기 이쪽을 향한 미소에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에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 정도로 좋아할 줄 알았다면 정식으로 축제에 와 달라고 말할 걸 그랬나.... 

한참을 두리번거리는 오소마츠를 보며 다음번엔 축제에 오라고 먼저 말하자 다짐했다. 


주문했던 오렌지 주스를 기다리는 동안 오소마츠를 따라 교실 안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고양이 탈을 쓰고 있는 학생들 속에 있는 건가? 

혹시 그럴까, 싶어 오렌지 주스를 들고 온 학생에게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의 행방을 묻자, 휴식시간이 되어 교실 밖으로 나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소마츠를 소개해주려 했는데, 타이밍이 나빴던 모양이다.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는 이 교실에 없는 것 같다.”

“흐응-, 그래?”

컵에 꽂힌 빨대로 오렌지 주스를 한번에 빨아들인 오소마츠가 “어쩔 수 없네.” 하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이후, 토도마츠의 반과 쥬시마츠의 반에도 들렀지만, 무슨 조화인지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오소마츠가 기지개를 폈다. 

운동장에 세워져있던 노점들도 하나둘씩 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카라마츠, 나는 알아서 돌아갈게.”

서로 협력해 테이블과 천막을 옮기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 오소마츠의 잔잔한 목소리가 나를 감쌌다. 

고개를 돌려 “괜찮겠나?” 하고 묻자, “당근!” 하고 오소마츠가 장난기 가득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친구들하고 놀다 와-!”

손을 흔든 오소마츠가 운동장을 걸어 나갔다. 

노을을 앞에 두고 붉게 물든 하늘이 오소마츠 너머로 멀리 뻗어나왔다.

푸른 하늘을 몰아내고 하루의 끝을 선언하듯이 널리 퍼진 빨강을 들여다보고 발을 돌려 연극부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그래! 월요일에 보자!”

허리 굽혀 인사하자, 부장 선배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주역인 내가 뒤풀이에 빠져선 안 되지만, 친척이 왔다는 핑계를 부장 선배는 용인해 주었다.

다른 부원들에게도 미안하단 사과를 건네고 부실을 나와 오소마츠가 사라진 낙조를 향해 뛰었다.


“오소마츠!!”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겨우 따라잡은 오소마츠가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전력으로 뛰어 심장이 귓가에 쿵광거리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기침까지 토해가며 호흡을 진정시키는 나를 본 오소마츠가 망연히 서서 말했다.


“혼자 가도 된다고 했는데....”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오소마츠 혼자 보낸 걸 알면 또 혼날테니까.”

“뭐야~, 내가 걱정되서 온 건가 했더니, 자기 몸보신하려고 한 거냐!”

“당연하지! 내가 오소마츠 걱정을 왜 하나!!”

“쳇-! 괜히 기대했어어~!”

부루퉁한 얼굴로 볼을 부풀린 오소마츠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노을 속으로 멀어지는 오소마츠의 뒷모습을 본 순간, 그대로 홀로 보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눈을 맞추고 씩- 웃는 오소마츠의 미소에 안도하며 오소마츠의 곁에 서서 함께 집을 향해 걸었다.



“아, 참.”

“응? 뭔가?”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오소마츠가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가볍게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혹시 학교에 두고 온 것이라도 있나 싶어 묻자, 오소마츠의 입가에 처음 보는 잔잔한 미소가 어렴풋이 피어났다.


“연극, 잘 봤어.”

“엣.”

단순히 축제를 즐기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오소마츠가 연극을 봤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가볍게 내 머리를 툭툭 토닥인 오소마츠가 “제법 잘 하던데?” 하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기쁘다. 

처음으로 연극부원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족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이고, 칭찬 받은 것에 마음이 둥실둥실 하늘 위로 떠올랐다. 

괜히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숨기고 고개를 홱 돌려 멋쩍게 입맛을 다시고 대답했다.


“나 정도 되면 그정도 연기는 식은 죽 먹기다!”

“아-, 그러십니까아~.”

뒤통수 너머에서 오소마츠의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한발짝 먼저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 오소마츠는 빙글 몸을 돌려 나를 향해 손짓했다.


“자-, 얼른 가자고. 신부님~.”

“...아.”




집에 도착하자 아무도 없는 적막함이 우리를 반겼다. 

아직 축제를 즐기고 있을 동생들은 훨씬 더 늦게 돌아올 것이다. 

부모님은 항상 바쁘니 늦게 들어오실 것이고, 오늘은 할머니도 볼 일이 있으신 것 같았으니 늦게 돌아오실 것이다. 

성큼성큼 별채로 걸어가는 오소마츠를 뒤따라 본채에 들리지 않고 바로 별채로 발을 옮겼다.


“카라마츠.”

“뭔가?”

별채에 도착해 현관에 들어가기 직전, 오소마츠가 발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머리를 긁으며 요리조리 눈을 굴린 오소마츠가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

“뭐를?”

“이거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옆에 서 있던 오소마츠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새벽 안개처럼 서늘한 연기를 남기고 사라진 오소마츠의 모습에 당황해 “하!?” 하고 비명을 지른 순간, 드륵- 하고 별채 현관문이 열렸다.


“여-! 카라마츠, 어서 와!”

“에!? 오소마츠? 왜 별채 안에서 나오는 거야...?”

방금 전까지 내 옆에 있었던 오소마츠가 사라지고, 별채 안에서 오소마츠가 나와 나를 반기는 것에 놀라 생각이 꼬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꼭 눈앞이 뱅뱅 도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어버버거리면서 내 앞에 서 있는 오소마츠와 방금 전 사라진 오소마츠가 있던 자리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놀라지 말라고 했잖아-.”

귀찮다는 투로 고개를 잘게 저으며 한숨을 내쉰 오소마츠가 내 팔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별채 안에 들어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오소마츠의 말에 눈썹을 찌푸리고 오소마츠의 말을 끊었다.


“아니! 방금 전 그건 대체 뭔가! 날 놀래려고 그런 짓을 한 건가!?”

“아니거든요~? 나 그렇게 한가하지 않고! 그건 식신이었어.”

“식, 신...?”

“저기 땅 바닥에 봐봐.”

오소마츠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틀었다. 

열린 현관문 너머, 흙바닥에 흰 종이 하나가 떨어져있었다. 

여우 모양으로 잘린 종이는 곧 바람에 휩쓸려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식신....”

“나는 이 집에서 나갈 수 없으니까,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식신을 부리는 거라고. 집에 도착했으니까 식신이 필요 없어져서 없앤 것 뿐.”

“...하아....”

오소마츠의 설명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마츠는 내 표정을 빤히 보더니 “이해 못했구만.” 하고 작게 한탄하며 몸을 틀어 방으로 향했다. 

오소마츠의 말대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단 한가지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오소마츠는 이 집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만은 이상하게 단단히 기억에 박혀, 이유 모를 꺼림칙한 마음을 한구석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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