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우골 이야기 쓰다가 막혔을 때, 떠오른 이야기입니다..ㅎ 설마 중편이 될 줄은 몰랐어요..
* 유명한 작가(소설가) 카라마츠 X 담당편집자 오소마츠 이야기 입니다.
* 보류죠가 세 쌍둥이, 합격조가 세 형제입니다.
* 소설가나 출판업계에 관한 부분은 그저 제 생각대로 썼습니다. 전부 망상입니다ㅎ..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딩동”
맑은 벨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싸구려 정장을 입고 초인종을 누른 마츠노 오소마츠는 아카츠카 출판사에 입사한지 겨우 3년이 지난 신출내기 편집자였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드디어 신진 작가가 아닌 프로 작가의 담당이 되어, 오늘은 담당할 작가를 만나는 첫날이었다.
책을 내는 족족 베스트 셀러에 국내외 여러 작가상을 휩쓸고 있는 유명한 대(大)작가.
젊은 나이에 저명한 작가가 된 그를 만나는 것은 낙천주의가인 오소마츠라 할 지라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작가와 계약을 성사시키고 오라는 상사의 명령을 떠올리며 푹- 한숨을 쉰 오소마츠가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오소마츠가 사는 낡은 아파트의 조잡한 초인종 소리와 달리 우아한 클래식이 빈 복도에 울렸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은 벨소리 도중, 갑자기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오소마츠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웠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카츠카 출판사의 마츠노 오소마츠라고 합니다. 이번에…”
-쾅!-
커다란 굉음을 내며 쇠문은 살짝 벌렸던 입을 도로 닫았다. 눈 앞에서 닫힌 문에 보기 좋게 무시당한 오소마츠의 어깨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굳게 닫힌 쇠문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오소마츠가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순간, 끼익- 하고 문이 도로 열렸다.
문이 열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무표정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인사법인가?”
오소마츠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아름답게 솟아나 있는 오소마츠의 가운데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비꼬았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오소마츠가 천천히 손가락을 접고 새 명함을 꺼내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카츠카 출판사의..”
“그건 아까 들었다. 들어와.”
또 다시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남자에게 이를 갈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고 오소마츠가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소마츠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의 5배는 되어 보이는 넓은 집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저리 집 안을 둘러보는 오소마츠를 남자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저기…”
넓은 거실에 들어서자 그 깔끔함에 압도된 오소마츠가 말을 더듬었다.
커다란 창 너머로 환한 햇빛이 비추고 있는 넓은 거실은 모던 테마로 꾸며져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았다.
거실 중앙에 놓인 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가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앉으라 말도 하지 않는 남자 덕분에 오소마츠는 뻘쭘하니 거실 입구에 선 채, 남자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래서?”
거만한 태도로 남자가 눈썹을 올리고 물었다. 남자의 태도에 속으로 실컷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오소마츠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이번에 저희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실 수 있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흐음-“
흥미 없다는 덤덤한 어조로 한숨과 같은 탄성을 내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대로 된 대답도 돌려주지 않은 채, 남자는 오소마츠에게서 눈을 돌리고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한 오소마츠가 먼저 입을 연 순간, 남자가 손으로 머리를 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내 책을 읽어보긴 했어?”
“..네?”
남자의 질문에 오소마츠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되물었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 남자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죽 소파가 내는 까득거리는 소리에 오소마츠가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담당하는 작가의 책도 읽어보지 않는 편집자와는 일하고 싶은 마음 없어.”
“아, 저, 저기…”
“꺼져주겠어?”
무표정으로 낮게 읊조리는 남자의 압력에 오소마츠는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커다란 집에서 쫓겨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언제 열렸냐는 듯 굳게 닫힌 쇠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오소마츠가 얼굴을 구겼다.
“뭐야, 저 또라이는?”
황당하단 얼굴로 내뱉은 오소마츠가 씩씩 거리며 발을 옮겨 고급 맨션을 나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솟은 맨션을 나와 위를 올려다보며 오소마츠는 혀를 내밀어 메롱-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다른 이가 봤다면 양복도 갖춰 입은 성인 남성의 어린애 같은 행동에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다른 이가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직장으로 향하는 오소마츠의 발걸음은 심히 무거웠다.
선생님의 발을 핥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계약을 받아오라는 편집장의 호통이 오소마츠의 머리 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직장으로 돌아간 오소마츠는 바로 직속 상사인 편집장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계약 따오라고 보냈더니, 바보 취급 당하고 돌아오면 어쩌냐?! 이 바보야!!!”
“누가 바보에요!!! 그런 편집장이야말로 뭐 저런 또라이하고 일을 하려고 합니까?!!!!”
책상을 내리치며 화를 내는 상사에게 질세라 오소마츠도 언성을 높였다. 온 사무실이 떠내려가라 쩌렁쩌렁 울리는 두 사람의 노성에 동료들은 커피를 홀짝이며 웃었다. 자유분방하고 상사나 후배 같은 상하관계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오소마츠와 그런 오소마츠를 아끼는 편집장의 언쟁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젠 아예 두 사람의 언쟁이 없으면 하루가 시작한 것 같지 않다는 동료도 나오는 지경이었다. 결국 편집장이 오소마츠의 등을 퍽퍽 때리며 “다시 선생님께 가서 계약 받아와!!!!” 하는 큰 외침으로 언쟁은 어찌어찌 마무리되었다.
“우씨~ 아파 죽겠네.”
편집장에서 얻어 맞은 등을 쓸며 오소마츠는 집으로 향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전철역에서 나와 집을 향하는 길목, 마을에서 제일 큰 서점 앞을 지나던 오소마츠가 잠시 망설이더니 얼굴을 잔뜩 구기고 혀를 차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소라쇼우(空松)’
오늘 오소마츠가 찾아간 남자의 필명이었다. 책을 정리하고 있던 서점 직원에게 다가간 오소마츠는 ‘소라쇼우’의 책을 모두 찾아달라고 했다. 올해 초, 유명한 작가상을 수상한 ‘소라쇼우’는 그 명성에 걸맞게 서점의 한 코너를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지금까지 발간된 ‘소라쇼우’의 책 10권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갔다. 합계 금액을 말하는 아르바이트 여성의 말에 눈물을 삼키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다. 당분간 담배는 물론이고 식후의 반주도 금지해야 할 금액에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는 책을 들고 서점을 나온 오소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수 kg은 나갈 것 같은 책의 무게에 오소마츠는 한숨을 내쉬며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겨 낡은 아파트로 향했다.
2.
“어서 와- 오소마츠 형.”
집에 들어서자 바닥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막내 동생, 토도마츠가 오소마츠를 반겼다.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들어서자 작은방 문이 열리고 얼굴을 드러낸 동생,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에게 다가왔다.
“뭐야? 그거.”
오소마츠가 들고 있는 서점 문구가 찍힌 종이 가방을 가리키며 묻는 이치마츠에게 오소마츠가 “책.” 하고 대답했다.
오소마츠의 대답에 이치마츠가 입을 벌리고 “거짓말… 오소마츠 형이 책을 읽는다고?” 하고 중얼거렸다.
낑낑대며 책을 거실로 옮긴 오소마츠가 발끈하며 “나도 책 정도는 읽어!!” 하고 외치자, 토도마츠와 이치마츠가 동시에 ““아니,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하고 말했다.
동생들의 태도에 오소마츠가 “우씨..” 하고 숨을 내쉬며 종이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가만히 책을 내려다보던 이치마츠가 물었다.
“왜 ‘소라쇼우’ 책만 사 왔어?”
“이번에 담당하게 돼서.”
“..정말로??”
“어? 어.. 왜?”
갑자기 눈을 빛내며 다가온 이치마츠에게 놀라 어깨를 움찔하며 오소마츠가 묻자 뒤에서 TV에 시선을 고정한 토도마츠가 “이치마츠형, 그 작가 좋아하지-“ 하고 이치마츠를 대신해 대답했다.
오소마츠가 놀라 “그래?” 하고 묻자, 거세게 고개를 끄덕인 이치마츠가 오소마츠를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마을 내에서 내로라하는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치마츠의 방 안은 책으로 가득했다.
책이 꽉꽉 들어찬 책장을 가리키며 이치마츠가 흥분에 차 거센 숨을 내쉬었다.
“이거 전부 ‘소라쇼우’ 책.”
“엑-!! 이렇게 많아?!!”
책장 2칸은 채우고 있는 책의 양에 오소마츠가 절망했다.
게다가 책장엔 방금 전, 오소마츠가 서점에서 산 책들도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괜한 돈 낭비를 했다는 사실에 오소마츠가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으며 “빨리 말하라고~” 하고 울먹였다.
오소마츠의 절망은 신경도 안 쓰는 이치마츠는 책장에서 5권 정도의 책을 꺼내 오소마츠 앞에 내밀었다.
“뭐야?”
“소라쇼우 책이야. 좀 덜 유명한 것들.”
“하- 이것도 읽어야 되는 거냐…”
한탄하며 이치마츠가 내민 책을 받아 든 오소마츠는 마치 방학을 앞두고 숙제를 잔뜩 부여 받은 초등학생 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내, 형.” 하고 응원했지만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오소마츠를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장장 3주라는 시간을 소요하고 나서야 겨우 ‘소라쇼우’의 책을 독파한 오소마츠가 다크 서클을 매달고 출근했다.
오소마츠의 얼굴이 심각해 보이긴 하는지, 출근하며 만나는 동료들마다 괜찮냐며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편집장의 자리로 간 오소마츠가 분주하게 이번에 연재될 소설을 확인하고 있는 편집장을 불렀다.
“이시이씨…”
오소마츠의 부름에 쓰고 있던 검은 뿔테 안경을 벗은 편집장, 이시이가 오소마츠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뭐, 뭐야.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며칠째 잠 줄여가며 책 읽어서요.”
“뭐어?!”
“암튼, 오늘 다시 그 또라이한테 갔다 오겠습니다.”
“유명한 선생님께 ‘또라이’가 뭐냐, 또라이가…”
황당하단 어조로 눈썹을 찡그린 이시이가 오소마츠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치며 “잘 다녀와- 꼭 계약 따오고~” 하고 배웅했다.
은근한 상사의 압박에 한숨을 쉬며 오소마츠가 졸린 눈을 비비며 회사를 나왔다.
“또 올 줄은 몰랐군.”
초인종을 누르자 이번엔 순순히 모습을 드러낸 ‘소라쇼우’가 의외라는 얼굴로 문가에 기댔다.
이번엔 들어오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 눈 앞의 남자에게 어퍼컷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오소마츠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읽었습니다. ‘소라쇼우’의 책.”
“호오- 그래? 그럼 한번 말을 들어주지.”
피식- 거만하게 웃음을 흘리며 남자가 문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비켜서 앞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며 오소마츠는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에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3주 전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거실에는 먼지 하나 앉아있지 않았다.
밝게 방 안을 비추는 햇빛 때문인지, 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밝은 빛의 향연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남자는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오소마츠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평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한 번 정말로 다 읽었는지 확인해볼까?”
“..네, 얼마든지요.”
체념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대답한 오소마츠를 보며 남자가 얄밉게 한쪽 입가를 올리고 질문을 던졌다.
“주인공이 30대에 싱글맘, 그리고 형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건?”
“..「탈출」”
“편지 형식으로 서술되었던 책은?”
“..「마지막 인사」, 단편 「너에게」.”
“총을 맞은 주인공이 결국 죽게 되는 책은?”
“..「연쇄」. 그리고 주인공은 멀쩡히 살아나게 됩니다만..”
“호오- 정말로 다 읽었나 보네?”
눈을 크게 뜨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하는 남자를 보며, 처음으로 무표정이 아닌 얼굴을 봤다고 오소마츠가 멍청히 생각했다.
남자의 말에 꾸벅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한 오소마츠를 향해 남자가 손을 뻗어 자신이 앉아있는 맞은편의 긴 소파를 가리키며 “앉아.” 하고 말했다.
다시 꾸벅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소파에 앉자 놀라울 정도로 몸을 감싸오는 편안함에 절로 감탄 섞인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바로 잠에 골아 떨어질 것만 같은 몽롱한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오소마츠가 남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아카츠카 출판사의 마츠노 오소마츠라고 합니다.”
순순히 오소마츠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든 남자가 가만히 명함을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어?”
“..선생님의 책 중에서요?”
“그래.”
“..「심해」요.”
오소마츠의 대답에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소파의 등받이게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숨을 삼키며 “왜 그 책이..?” 하고 묻는 남자의 태도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어 대답했다.
“뭔가, 가장 선생님답다고 생각해서요.”
오소마츠의 대답에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빤히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오소마츠는 자신이 잘못 답한 것인가 하는 불안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의 침묵과 날카로운 눈빛이 오소마츠를 향한지 벌써 수 분이 지났다.
남자의 눈길을 피하지도 못하는 오소마츠는 그저 죽을 맛이었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나고 집에 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오소마츠의 머리 속을 지배했다.
“..마츠노 카라마츠다.”
“..네?”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멍청히 되묻자 남자가 빙긋- 웃었다.
“함께 일을 하려면 이름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잖아? ‘소라쇼우’는 필명일 뿐이지. 본명은 마츠노 카라마츠다.”
“어… 그러면..”
“아아, 계약 하지.”
남자, 아니 카라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라마츠에게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손을 들어 말리고는 작업실로 보이는 방에 들어갔다가 펜을 들고 나왔다.
“계약서는?”
“아, 여, 여기요!!”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계약서를 꺼내 소파 앞 커피테이블에 올려놓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멋지게 휘갈겨 싸인을 한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카라마츠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오소마츠가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겨우 맘 놓고 회사에 돌아가 보고를 하고 푹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오소마츠는 그저 기쁠 뿐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을 알지 못하는 오소마츠는 그저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사실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3.
씩씩 거리며 맨션을 복도를 걷는 오소마츠의 양 팔에는 여러 개의 종이 봉투가 걸려 있었다.
겨우 계약을 성사해, 유명한 작가의 책을 출판할 수 있게 되어 좋아했던 것을 오소마츠는 마음 깊이 후회했다.
출판사에 입사한지 3년. 그 동안 신입 작가들을 맡아왔던 오소마츠는 글을 쓰는 ‘작가’라는 인종들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글을 통해 세계를 만들어내는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가 있었고, 아무리 담당 편집자나 출판사의 편집장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작품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것이 가끔은 히스테리나 편집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는 것을 오소마츠는 동료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고, 몇몇 신진 작가들을 통해 그것을 피부로 경험해왔다.
하지만, 오소마츠가 겪은 작가들 중에서도 이번 또라이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또라이라고 오소마츠는 단언할 수 있었다.
오소마츠가 중간 상황을 확인할 때마다, 슬럼프니 글이 안 써진다니 하면서 오소마츠를 불러 잡일에 부려먹었다.
엄연히 편집자의 영역을 벗어난 잡일에 동원되는 것에 열 받아 편집장에게 하소연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 쪽에서 원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줘!!” 하는 이시이의 호통뿐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사 오라는 각종 간식과 세탁소에서 찾아오라고 한 옷을 옆구리에 끼고 카라마츠의 맨션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청량한 벨소리가 복도에 울리는 것을 들으며 오소마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개의 종이 가방을 들고 있는 팔이 아팠다. 간식들 사이 근처 서점에서 사오라는 책까지 들고 있어 오소마츠의 팔은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들어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카라마츠가 말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고 온 종이 가방을 거실에 내려놓자, 카라마츠가 책이 든 가방만 들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가방을 계속 들고 있어 저려오는 팔을 주무르며 오소마츠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다.
벌써 이 집에 온지도 10번은 넘었다. 계약하겠다는 말을 듣고 한달, 오소마츠는 거의 일주일에 2번 꼴로 이 집에 드나들고 있었다.
“아직 마무리할 부분이 남았으니, 이거 먹고 있어.”
서재로 보이는 방에서 나온 카라마츠가 오소마츠가 사온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작은 포크와 함께 내주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오소마츠는 내심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인사했다.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오소마츠의 맞은편에 앉아 타자를 치기 시작한 카라마츠를 흘끔 쳐다본 후, 오소마츠가 포크를 들었다.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쇼트 케이크. 굉장히 먹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먹을 수 없었던 유명 베이커리의 케이크였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은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생크림과 빵이 조화를 이루며 오소마츠를 행복의 세계로 이끌었다.
저도 모르게 “음~” 하고 감탄사를 내며 얼굴을 풀고 맛을 음미하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노트북 너머로 응시하고 있는 것을 오소마츠는 눈치채지 못했다.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핥아 다시 입으로 가져가며 오소마츠가 포크로 케이크 한 조각을 더 집었다.
아예 두 눈을 감고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케이크의 맛을 감상하는 오소마츠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카라마츠가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 일단 읽어봐.”
완성된 초안을 프린트해 건네며 카라마츠가 말했다. 완전히 케이크에 정신을 팔고 있던 오소마츠가 허겁지겁 입가를 닦고 초안을 받아 들었다.
100쪽 정도로 묵직한 초안을 든 오소마츠가 바로 차근차근 초안을 읽어 내려갔다.
거실 한 켠에 마련된 오픈형 주방에서 커피를 타 가지고 온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천천히 초안을 보고 있는 오소마츠를 기다렸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하는 나르시스트’. 그것이 이번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처음 스토리와 주인공에 관한 의논을 할 때, 카라마츠가 내세운 주인공의 설정을 들은 오소마츠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않는 나르시스트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성질을 가진 주인공이라니.
그런 사람이 존재하긴 할까? 하는 의문 속에서 오소마츠는 초안을 읽었다.
아직 제대로 틀이 잡히지 않은 초안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흡입력이 있는 글에 오소마츠는 금새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상반된 성질을 가진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그 모순점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에 당황하고 휩쓸리고 매료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주인공의 행보에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다음 챕터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 읽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애초에 독서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오소마츠가 이 정도라면 분명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강하게 먹힐 수 있는 글이었다.
초안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 내려간 오소마츠가 가만히 종이 가득 빼곡하게 적힌 글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야기의 주인공은 매력적이었다.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모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일상 생활에서 겪을 수도 있는 사건들에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 읽으면 읽을 수록 궁금하고 사람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글이었다.
하지만…
“팔릴 수 있는 글을 쓰도록 유도해.”
편집장 이시이의 말을 떠올리며 오소마츠가 초안을 어루만졌다.
분명 매력적인 글이다. 매력적이지만…
“이거 팔릴려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흠칫 놀란 오소마츠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오소마츠를 응시하고 있는 카라마츠의 날카로운 눈빛에 오소마츠가 말을 잃었다.
글을 쓴 작가의 앞에서 실언을 했다는 것에 사색이 된 오소마츠가 손을 들어 거세게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 제가 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아… 뭔가 「심해」랑 느낌이 비슷해서!!”
“별로 그렇게 변명할 필요 없어. 나도 이 글은 상업성이 없다고 생각했고.”
오소마츠의 필사적인 몸짓에 카라마츠가 미소 지은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당연히 자신이 저지른 결례에 폭언을 듣거나, 자칫하면 계약을 날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오소마츠가 멍청히 행동을 멈추고 카라마츠를 쳐다보았다. 카라마츠는 자신의 옆에 놓아두었던 두 번째 초안을 내밀었다.
“이것도 읽어봐.”
오소마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 초안을 받아 들었다.
두 번째 초안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주인공이 겪는 연애이야기.
가볍고 경쾌한 글과 스토리는 확실히 쉽게 읽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 광고하기도 쉬워 보였다.
“그걸로 진행할까?”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들었다.
커피를 마시며 오소마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카라마츠를 보며 오소마츠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 저희 입장에서는 이 두 번째 이야기가…”
“아아, 알겠다. 그럼 그걸로 진행하지.”
머뭇거리며 말한 오소마츠의 말을 시원스레 받아들인 카라마츠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소마츠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럼 앞으로 책이 완성될 때까지 잘 부탁하지, 담당자님.”
카라마츠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눈치챈 오소마츠가 팍 인상을 구겼다.
‘앞으로도 부려먹겠다 이거지?’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오소마츠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이마에 힘줄을 세우고도 억지로 미소를 짓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즐거운 듯 바라보았다.
4.
시끄러운 술집 가운데 자리잡은 동료들은 서로 제멋대로 떠들며 마시기 시작했다.
회식이 시작한지 벌써 1시간이 지났다.
이시이를 비롯한 동료들 모두 오래간만에 유명한 작가와 계약을 따낸 오소마츠를 칭찬하며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위에서 칭찬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 당사자인 오소마츠는 어두운 얼굴로 술을 홀짝였다.
초안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를 의논한 후로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호출하는 일이 더 늘어났다.
이젠 거의 매일 카라마츠의 집에 출입하고 있는 오소마츠로서는 빨리 이 일이 끝나기를 빌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성가신 작가일 줄이야…’
이치마츠와 말한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며 오소마츠가 술잔을 기울였다.
이전부터 카라마츠, 아니 작가 ‘소라쇼우’의 팬이었던 이치마츠는 오소마츠가 그의 담당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매일 ‘소라쇼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작가로서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그의 작품세계가 얼마나 깊고 심오한지, 무슨 상을 수상했는지 묻지도 않은 정보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이치마츠 덕분에 오소마츠는 싫어도 작가 ‘소라쇼우’에 대해 전부 꿰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어려운 집안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공부해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자랑스러운 동생이 존경하는 작가님이지만, 직접 겪어보니 절대 타인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오소마츠는 난감했다.
집에 돌아가면 이치마츠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카라마츠에 대해 물어보는데 실상을 그대로 이야기해서 동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오소마츠는 땀을 흘려가며 카라마츠의 좋은 점을 날조하기에 바빴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원인을 떠올리자 술 맛도 맛없게 느껴져 오소마츠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 이게 누구야~?”
오소마츠의 등쪽에서 들려오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오소마츠를 비롯한 동료들이 고개를 돌렸다.
몇 번 일로 얼굴을 맞댄 적이 있는 타 출판사의 직원들이었다.
이시이와 한때 같은 대학을 다녔던 동기라는 타 출판사 편집장은 바로 이시이와 합심해 옛추억을 떠들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오소마츠의 동료들과 타 출판사의 직원들은 합석해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소마츠의 옆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넨 타 출판사 직원에게 오소마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오소마츠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자신은 술이 약하다며 멋쩍게 웃고는 앞에 놓인 술잔에 음료수를 따랐다.
음료수가 담긴 잔을 든 남자가 오소마츠에게 내밀자 오소마츠도 피식 웃으며 자신의 술잔을 들어 가볍게 남자의 술잔과 부딪쳤다.
짠-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잔과 잔이 떨어졌다. 술잔을 비우고 입맛을 다신 오소마츠를 보며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나카무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요.”
“아, ‘마츠노’입니다.”
“마츠노 씨는 무슨 작가 담당이세요?”
“아, 저는 ‘소라쇼우’…요.”
자신을 나카무라라 소개한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이내 반갑게 웃었다.
“저도 맡았던 적 있어요!! ‘소라쇼우’ 작가님.”
“아, 정말요?”
나카무라의 말에 오소마츠가 얼굴을 피고 물었다.
오소마츠가 카라마츠 때문에 꿀꿀했던 기분을 함께 험담이나 하며 조금이나마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담아 나카무라를 바라보았다.
“그 작가님, 담당하기 편하죠?”
“…네?”
카라마츠에 대한 욕을 퍼부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오소마츠가 뜻 밖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약간 집에 틀어박히는 경향이 있는데다, 대인기피증? 비슷한 것도 있어서 자주 얼굴을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도 글은 멋지게 써주고.. 가만히 놔둬도 되니까 편하죠?”
“…네에…”
나카무라의 말에 오소마츠가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들려오는 나카무라의 잡담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도 오소마츠의 머리 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숙취로 신음하고 있는 동료들 사이에서 오소마츠가 어두운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핸드폰의 주소록에서 카라마츠의 연락처를 찾아내어 심호흡을 한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 끝에 카라마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건 처음인데?』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빌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 뵙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아아, 상관없어. 』
“그럼 항상 찾아 뵀던 시간에 가겠습니다.”
『알겠다.』
통화를 끝낸 오소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에 쌓인 일을 처리하면서도 오소마츠의 마음은 뒤숭숭했다.
밀려있던 일을 처리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침은 4에 가까워져 있었다.
항상 카라마츠를 찾아가던 시간이 된 것이 좋을 리 없는 오소마츠가 옷을 챙기고 외근 후 바로 퇴근하겠다고 보고한 뒤, 회사를 나왔다.
쇠문을 눈 앞에 두고 오소마츠는 초인종을 누르려는 손을 망설였다.
손을 들었다 내렸다는 수십 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연달아 내쉬는 오소마츠가 겨우 결심을 굳히고 초인종을 눌렀다.
딱닥한 플라스틱의 버튼이 똑딱 소리를 내며 눌리고, 이내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울렸다.
“들어와.”
덜컹 하고 문이 열리고, 카라마츠가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오소마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오소마츠를 향해 앉으라고 말하는 카라마츠의 목소리에도 오소마츠는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의아하단 눈길로 오소마츠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카라마츠가 몸을 일으켜 오소마츠에게 다가갔다.
“이봐?”
“…저기.”
카라마츠가 뻗은 손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겨우 고개를 든 오소마츠의 눈을 마주하며 카라마츠가 도로 손을 내렸다.
천천히 카라마츠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쫓아 눈을 내린 오소마츠가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어제 다른 출판사와 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담당했던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굳이 편집자를 집으로 들이지 않고 전화나 메일로만 소통하신다고 들었습니다.”
“…”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똑바로 카라마츠를 마주한 오소마츠가 말을 이었다.
“제게 뭘 원하시나요?”
오소마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카라마츠가 작게 대답했다.
“‘마츠노 오소마츠’를 원해.”
카라마츠의 대답에 오소마츠가 숨을 들이마셨다.
주먹을 꽉 쥐고 다시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게이’이신가요?”
“…그럴지도.”
민감한 질문인데도 솔직히 대답한 카라마츠를 바라보며 오소마츠가 슬프게 웃었다.
팔과 다리를 좀먹고 들어오는 기시감에 심장이 따끔하니 아팠다.
무표정으로 조용히 오소마츠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눈빛이 아팠다.
한 걸음, 카라마츠에게서 거리를 두고 오소마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런 건’ 무리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집을 나가는 오소마츠의 뒷모습을 카라마츠는 가만히 서서 응시했다.
5.
지독하다.
그렇게 읊조리며 발을 옮겼다.
오늘은 외근 후 바로 퇴근한다고 했으니 이대로 집에 가 이치마츠가 차린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그대로 뽀송뽀송한 이불에 누우면 된다.
그러면 이 뭣 같은 하루도 끝이 나는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걸음을 멈추었다.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기어코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떨어졌다.
아, 허무해.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원한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 다시 눈을 감았다.
원한다?
나를?
내가 어떤 인간인 줄 알고?
어이없이 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웃음을 공기 중에 흘려 보냈다.
‘소라쇼우’, 마츠노 카라마츠. 현재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진 대 작가.
그런 남자가 나를 원한다고 했다.
‘마츠노 오소마츠’를 원한다고 했다.
꿈인가?
꿈이기를 빌며 볼을 잡아당기자 잔인한 현실임을 알리는 아픔이 신경을 타고 올라 뇌를 자극했다.
내뱉는 숨과 함께 눈물이 다시 흘러 내려 소매로 눈을 가리고 주저앉았다.
지독하다.
지독하고 악랄하고 끔찍하다.
‘나’를 원한다고 말한 그가, 밉다.
아니길 바랬는데, 나카무라의 이야기를 듣고 뒤통수를 때리며 들어오는 기시감에 제발 내 예상이 빗나가기를 빌었는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과 감정에 몸이 떨렸다. 싫다. 싫어.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 기억, 그런 더러운 과거.
잘도 이런 ‘나’를 원한다고 말해왔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속으로 실컷 비웃으며 몸을 일으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집에 가서 모든 걸 잊고 자고 싶다. 빨리, 지금 당장.
빠르게 걷던 다리는 이내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전철역으로 향해 뛰어가며 차오르는 숨과 함께 눈물을 삼켰다.
집에 도착해 거실로 들어서자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이치마츠가 나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평소와 같이 웃으며 “아니?” 하고 대답하니 이치마츠가 푹 인상을 쓰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를 잘 살피는 섬세한 내 동생은 내가 감추려고 하는 부분까지 어느새 눈치채고 있었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은 채, 이치마츠는 곧 저녁이 준비되니 옷 갈아입고 나오라고 말하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상냥한 동생의 배려에 속 깊이 감사하며 큰 방으로 향했다. 넥타이를 풀고 옷걸이에 양복을 걸며 머리 속을 비웠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헛소리를 지껄인 그 남자나, 숨기고 싶은 과거 따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생각을 날리려고 해도, 마치 귀 속에서 벌레가 속삭이는 것 마냥 그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바닥에 앉았다.
온 몸을 타고 올라온 소름에 팔을 쓸었다. 오돌토돌한 살갗이 과거의 기억을 더 강하게 불러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필사적으로 잊어온 기억이다.
동생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언급도 하고 싶지 않은 기억.
하- 하고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공허한 마음과 허탈함이 몸을 침식하고 눌러 자근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방에 들어오자마자 거칠게 벗어 던진 크로스백이 열려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놓고 있었다.
혀를 차며 가방을 들고 바닥에 널려진 서류와 필기구를 가방 안으로 쑤셔 넣다가, 얼마 전 받은 초안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을 한 켠에 세워놓고 초안을 들어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팔락거리는 종이가 스치는 소리를 내며 초안은 금새 마지막 페이지를 보였다.
두 손으로 초안을 붙잡고 처음 이 글을 읽었던 때를 떠올렸다.
첫 번째 초안도 그렇고 두 번째 초안도 그렇고, 나는 감히 꿈도 못 꿀 정도로 수준이 높은 문장력과 흡입력에 압도되었던 것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과연 이치마츠가 칭찬할만한 수준. ‘대작가’라는 명칭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 인간 자체가 어떤 사람이건, 그가 쓰는 글이 훌륭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성격이 더럽고, 까칠하고, 재수없기는 해도 이런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나 같은 놈은 그의 발톱에 묻은 때만도 못한 가치를 가진 보잘것없는 인간이다.
그런 그가 나를 원한다고 했다. 그럼 나는? 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의 고백이 싫지 않았던 걸까?
모르겠다.
그의 고백에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안 되는 거다.
나 같은 놈이 그 같은 자를 좋아하면.
쓰레기는 쓰레기답게, 제 분수를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왕족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나는 그저 제 처지를 잘 알고, 이리저리 사람들의 발에 치이며 땅바닥을 굴러다니면 되는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초안을 다시 가방에 밀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마침 이치마츠의 저녁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기에 적당히 대답을 던지고 방을 나섰다.
* 과거의 경험으로 저는 중편을 쓰던 단편을 쓰던 놔두면 안된다는 생각에 다 완성하고 올리기로 했습니다.
* 그러므로 중편, 하편을 연이어 올리겠습니다ㅎㅎ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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