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입니다!  이제 다음화가 완결이네요.


* 공미포 15,218자. (길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오소마츠가에드윈 2로서 왕좌에 오르고 한 달

붉은 왕국은 눈에 띄지 않지만 소소한 곳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귀족 중심의 정치는 관료 중심의 정치가 되었고, 관료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순전히 실력으로 등용되었다

미행으로 신분을 숨기고 떠돌이올슨으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눈여겨 보았던 이들을 중앙으로 불렀다

새로운 인재를 바탕으로 왕국에 숨어있던 폐단을 하나씩 잡아나가는 오소마츠 덕분에 왕국은 서서히나라로서 올바른 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휴전을 틈타 세금 제도를 개혁한 덕분에 국민들의 부담이 줄어들고 물가가 차츰 안정되기 시작하자, 새 왕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올랐다

전설 속 영웅왕에 버금가는 현왕(賢王, 어진 왕)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조금씩 국민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왕좌 옆에 선 쵸로마츠가 태연하게 다음 의제를 내놓았다

부정부패를 없애고 개혁을 이어가기 위해 어전회의에 올라오는 안전은 많았고 하나같이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쵸로마츠가 귀족들이 내놓은 군비 축소에 대해 안건을 발표했다

곧바로 오소마츠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관료들은 놓치지 않았다

군비를 축소하면 걷어야 할 세금이 줄어들고 자동으로 귀족들이 내야 할 세금의 액수도 줄어든다

오소마츠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전이 이루어졌을 뿐, 아직 우리 왕국은 전쟁 중이다. 국경 지역엔 여전히 많은 병사들이 왕국을 지키고 있는 와중에 군비 축소는 너무 이르다 생각하는데?”

오소마츠의 말에 귀족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평민 출신의 관료들이 귀족을 응시하는 눈빛은 한겨울 벌판에 내리치는 태풍처럼 차가웠다

침묵 속에서 생각이 옅은 젊은 귀족 하나가 나왔다.


하지만 현재 왕국에 들어오는 세금은 많지 않습니다. 전쟁 때문에 힘들다며 국민들의 세금을 차감하신 탓에 국고가 텅 비었습니다! 줄일 수 있는 부분은 줄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은근슬쩍 세금이 줄어든 이유를 오소마츠에게 돌리며 불평을 쏟아낸 귀족의 얼굴을 쵸로마츠가 빤히 응시했다

쥬드 공작가 다음가던 세력가베커백작가의 젊은 당주

속으로 코웃음을 흘린 쵸로마츠가 슬쩍 옆에 앉아있는 오소마츠를 쳐다보았다.

변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귀족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새 왕이 세워지고 정치권을 개편하는 과정은 돈이 필요했다

더불어 세금 개혁까지 했으니 중앙으로 모이는 돈이 줄어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머리를 벅벅 긁적이고 귀찮다는 듯이 왕관을 벗어 손가락에 건 오소마츠가 눈을 굴렸다.


—, 그럼 그렇게 하자. 아직 전쟁 중이니까 국비를 줄일 수는 없어. 부족한 세금은 교회에서 걷는 게 어때?”

가볍게, 친구에게 말 걸듯 내뱉는 오소마츠의 말투에 놀라는 이는 없었다

오소마츠가 왕위에 오르고 한 달

그동안같지 않은 오소마츠의 언동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물론 처음 이 모습을 봤을 때, 경악하던 귀족들과 관료들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오소마츠가 말을 끝내자마자 귀족들과 관료들이 한마음이 되어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교회가 크게 반발할 겁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교회는 성역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 세금을 붙이면 국민들도 반발할 것입니다.”

그럼 이건~? 교회가 세워진 땅은 어쨌든 우리 땅이잖아~? 그럼 땅값을 붙이는 건?”

그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땅은 하늘에서 정해준 땅이라고 반발할 겁니다.”

그럼 성직자에게만이라도 세금을 물리는 건?”

성직자도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인데 당연히 반발하겠죠.”

교회와 유착 관계에 있는 귀족들의 거센 반대 속에서 오소마츠와 관료가 찬찬히 방법을 하나하나 짚어가기 시작했다

붉은 왕국은 종교의 힘이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웅왕을 신처럼 모시는 교회에겐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며 귀족과 하나가 되어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방법을 내도 근본적인 의식 개혁이 없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 한숨을 내쉰 오소마츠가 손을 휘적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 몰라. 그럼 일단 이 건은 다음으로 미루자. 부족한 세금은 부자에게 추가로 부과하고 왕실에서 쓰는 돈도 줄이면 얼추 맞겠지.”

오소마츠의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관료들과 달리 귀족들이 다시 반발하려 손을 들기도 전에 오소마츠가 씩- 웃으며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지.” 하고 어전 회의를 끝냈다

부들부들 떠는 귀족들을 보며쌤통이다.’ 하고 생각한 오소마츠가 왕좌에서 일어난 순간, 귀족 사이에서 마지막 말이 튀어나왔다.


폐하, ‘ 2 왕비는 언제 맞이하실 예정인지 여쭙겠습니다.”

당돌하게 오소마츠를 빤히 바라보며 묻는 귀족은 귀족 사이에서 별 볼 일 없는 세력을 가진 말단이었다

단번에 오소마츠의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귀족이 말을 이었다.


대관식 이후, 1 왕비님이 되실 카라 공주님의 사정을 밝혀주신 것은 그 이유가 아니십니까?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제 2 왕비를 얻는 것은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만….”

당장 귀족을 입을 풀로 붙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오소마츠가 왕좌에 엉덩이를 내렸다.


공주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제대로 할 일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장차왕비님이 되실 분으로서 할 일은 똑바로 해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왕비의 가장 중요한을 하지 못하고 계시지요.”

헤에~? 무슨 일?”

“‘후사를 보는 것 말입니다.”

“….”

귀족의 말에 오소마츠가 치솟는 짜증을 삼켰다

한 번쯤은, 아니 언젠가는 반드시 나올 말이라는 것은 예상했다

왕이 되기 전에 카라마츠가 남자라는 것을 밝혔을 때, 귀족들이 번뜩였던 것을 오소마츠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위세를 이어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붙잡으려는 이리와 같은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카라마츠는 자신의 성별을 알고 있는 귀족들이나 관리들과 함께 훌륭하게 왕비로서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

왕을 대신해 국민들을 만날 때에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최대한 남자라는 것을 숨겼다.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 곁에 남기를 바랐고, 오소마츠 또한 카라마츠가 제 옆에 남아주길 바랐다.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은 카라마츠 한 명으로 충분했고, 더불어 선왕과 같이 2명의 왕비를 얻어 일어날 수 있는 분란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미리 선왕에게 두 번째 왕비를 들이지 않을 것을 밝혔다

그 뜻을 귀족들과 관료들에게도 전했지만 소용없었다

오소마츠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귀족들의 눈을 살폈다

하나같이 욕망이 일렁이는 것이 염증을 불러일으킨다

—.” 하고 한숨을 내쉬는 오소마츠를 쵸로마츠가 동정했다

오소마츠는 조금 전 자신이 회의를 끝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오소마츠가 입술을 뗀 순간 선수를 친 것은 귀족이었다.


토토코 님 정도라면…, 2 왕비에 합당하지 않을까요?”

뜬금없이 나온 소꿉친구의 이름에 오소마츠가 눈썹을 찌푸렸다.
토토코? 유학 갔잖아.”

얼마 전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혼잣말 같은 오소마츠의 말에 재빨리 대답한 귀족의 말에 오소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어 서쪽의 소국으로 유학을 갔던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는 놀랐다

어릴 적엔 형제들과 함께 토토코를 쫓아다녔던 적도 분명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돌아왔다 한들 오소마츠에겐 아무 감흥도 없는 이야기였다.


, 그래. 아무튼,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 다들 돌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또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오소마츠가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2.

 

당연한 이야기가 나온 거야

시큰둥하게 내뱉으며 쵸로마츠가 오소마츠에게 서류를 건넸다

책상에 푹 엎드려으으으~~.” 하고 신음하던 오소마츠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래서 왕 되기 싫었다고————!!!”

오소마츠의 외침에또 저런다.’ 하고 혀를 찬 쵸로마츠가 오소마츠가 버둥거리는 탓에 책상 아래로 굴러떨어진 펜을 주웠다.


쵸로씌~.”

알고 있어. 카라마츠 귀에 안 들어가게 하라고?”

. 부탁해.”

책상에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는 오소마츠를 보고 쵸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마츠한테도 말해 놓을게.”

.”

~.” 하고 바람을 불어 앞머리를 날린 오소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이상으로 풀 죽은 오소마츠를 보며 쵸로마츠가 쓴웃음을 흘렸다

카라마츠 덕분에 오소마츠가이 되었다

본래왕좌에 욕심을 가지지 않았던 오소마츠가 무사히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카라마츠의 공이 컸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 없었지만, 쵸로마츠만큼은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오소마츠가 기죽은 이유가 조금 전 어전회의에서 나온 말이 카라마츠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라니, 카라마츠를 만나기 전의 섬세함이라곤 태어날 적 마츠요 뱃속에 두고 온 것 같은 오소마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유였다

책상에 엎드린 오소마츠를 보며 쵸로마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커다란 창문, 높은 천장, 별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방 한가운데서 카라마츠가 축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소마츠가이 된 후, 별궁은 비워졌다

오소마츠와 함께 카라마츠도 본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오소마츠의 곁에서왕비로서 자신의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 오늘도 카라마츠는 제 앞에 쌓여있는 두꺼운 책을 하나 들어 올렸다

무슨 흉내를 내는 것인지 처음 보는 안경을 걸친 토도마츠가, .”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잘 들어!” 하고 카라마츠 앞에 섰다.


붉은 왕국의 왕비가 하는 업무는 주로 왕을 대신해 하급 귀족이나 평민을 알현하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또 본성에 출입하는 시녀들과 시종들 관리 및 임용, 왕실에서 개최하는 정기 무도회 총괄 등이 있어.”

토도마츠가 늘어놓는 말에 카라마츠의 얼굴이 허옇게 떴다.


, 그런 일을 전부 할 수 있을까.”

평민이자 평생을 그림자 무사로 살아온 카라마츠가 왕실의 법도나 예법을 알 리 없었다

오소마츠의 곁에 있기로 약속한 그 날,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 다짐했다.

카라마츠로서, 오소마츠에게 사랑받는 자신이 해내지 못할 일은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토도마츠가 내려놓은 책의 수와 그 두께를 보고 아주 조금 자신감이 슬금슬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닿을 것처럼 내려앉은 카라마츠의 어깨를 본 토도마츠가 싱긋- 웃으며 카라마츠를 북돋웠다.


할 수 있어! 이렇게 공부하고 있잖아! 카라마츠 형은 분명 잘 할 수 있어!!”

아이아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지!”

토도마츠의 응원에 쥬시마츠도 힘껏 올라타 두 팔을 한껏 펼쳤다

두 동생의 응원에 카라마츠가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화이팅!”을 외치며 자신을 격려해주는 동생들에게 방그레 웃은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츠요에게 왕실의 몸가짐과 예법을 배우기 시작한 카라마츠가 복습하고 있던 책을 덮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라마츠가 걸터앉은 긴 소파에 누워있던 오소마츠가 단단히 풀죽은 카라마츠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카라마츠.”

두꺼운 책 위에 망설이듯 올려져 있던 카라마츠의 손을 덥석 잡은 오소마츠가 자신을 돌아보는 카라마츠를 향해 씩- 웃었다.


잠깐 바람 쐬러 가자!”

.” 하고 놀라는 카라마츠를 끌고 오소마츠가 다짜고짜 궁을 빠져나왔다.

 

 

이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활기찬 시장. 푸른 정장으로 갈아입은 카라마츠가올슨의 모습을 한 오소마츠를 뒤따랐다

휴전 탓인지, 매서운 겨울이 지나간 탓인지 마을 시장은 전에 왔을 때보다 더 붐볐고, 생기가 넘쳤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큰소리로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을 지나쳐 잡화점에 들어간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와 함께 잡화점의 주인을 불렀다.


-, 마이클 아저씨-!”

—, 오랜만이다, 올슨.”

오소마츠를 알아보고 반갑다는 얼굴로 다가온 마이클이 오소마츠 옆에 서 있는 카라마츠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일로 네가 이런 도련님을 오래 데리고 있냐? 항상 적당히 돈만 뜯어내고 말더니.”

이 녀석은 그런 어중이떠중이랑은 다르지~.”

마이클의 말에 씩- 웃으며 코 밑을 문지른 오소마츠가 붉게 달아오른 귀를 감추듯 고개를 돌리고 잡화점을 쭉 훑어보았다.


요즘 어때? 시장은 엄청 활발해졌던데.”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새 왕이 잘해준 덕분에 전쟁 전보다 살만해.”

마이클의 말에 오소마츠가 이를 드러내고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이클의 말에 시선 둘 곳을 몰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오소마츠를 보며 카라마츠가 자랑스럽게 미소를 피웠다.

 

 

 

뒷산에 올라 성과 마을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털썩,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풀밭에 엉덩이를 내린 오소마츠를 따라 카라마츠가 옆에 앉았다

슬쩍 본 오소마츠의 얼굴은 아무런 색을 띠고 있지 않았다

저 하늘 멀리 펼쳐진 찬란한 노을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카라마츠는 알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오소마츠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다


전쟁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에서후계문제는 꽤 중요했다

여러 이유를 덧붙여 2 왕비를 뽑을 것을 요청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오소마츠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고 있는지

본궁에 출입하는 귀족의 여식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보려는 귀족들이 자신의 딸을 궁으로 떠밀었다

무도회를 호시탐탐 기다리며, 아비의 팔짱을 끼고 오소마츠를 알현하러 다가오는 수많은 여성들

나라를 망하게 할 법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자도 있었고, 뭐든 껴안을 수 있는 풍만함을 가진 자도 있었고, 지혜의 열매를 먹은 것처럼 현명한 자도 있었다

저마다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며 필사적으로 오소마츠에게 닿으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카라마츠는 알고 있었다

이미 쓸 수 있는 변명은 다 썼다고, 인상을 찌푸리던 쵸로마츠와 토도마츠의 대화에 카라마츠는 올 것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된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남기는 것

그것은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카라마츠가 이대로 오소마츠 곁에 남는다면 그 의무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오소마츠를 생각한다면, ‘으로서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가장 좋은 수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오소마츠 곁에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만다

붉은 정복을 입은 오소마츠 옆에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여성

푸른 드레스를 입은 카라마츠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가상의 여성을 카라마츠는 미친 듯이 질투하고 증오했다

오소마츠 옆에 다른 사람이 서는 것은 싫었다

자신에게 이렇게 강한 감정이 있었나 놀랄 정도로 격렬한 증오와 질투가 머릿속을 휩쓸었다


싫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싫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왕실의 예법을 몸이 기억하도록 반복해 익혔다

복잡한 왕실의 절차도, 두꺼운 책을 몇 번이고 읽어가며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로지 무술을 배웠던 몸은 쉽게 예법을 기억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공부엔 취미가 없었던 탓에 두꺼운 책에 쓰인 글도 잘 외워지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수없이 많은 눈초리 속에서 2 왕비는 맞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이어가고 있는데…, 카라마츠는 무엇하나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혹시나 실수해서 오소마츠에게 창피를 주지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저 아래로 내려간 자신감은 바닥에 짓눌렸다. 한숨을 삼키고 눈을 감은 카라마츠에게 부드러운 온기가 닿았다.


오소마츠…?”

어느새 카라마츠 뒤로 자리를 옮긴 오소마츠가 품 안에 카라마츠를 가두었다

카라마츠의 가슴에 둘린 오소마츠의 팔이 카라마츠를 좀먹고 있던 생각을 질책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오소마츠의 체온에 카라마츠가 울컥 치솟는 눈물을 삼켰다

얌전히 오소마츠에게 기대는 카라마츠의 귓가에 마른 목소리가 울렸다.


카라마츠 너는, 그대로 있어도 돼.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오소마츠의 목소리는 지쳐있었지만 확실한 힘이 담겨 있었다

힘든 일이 많으리라는 것을 미리 밝혔다. 그래도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마츠의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다

카라마츠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여 눈가에 어른거리던 눈물을 말렸다.


, 물론이다, 오소마츠. 모든 것이 완벽한, 이 퍼펙트 길티-가이 카라마츠님이 곁에 있어 주지!!”

,”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 단언하는 카라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웃음을 들이마셨다

어깨를 잘게 흔들며 카라마츠의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고 끅꾹거리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응시했다

오소마츠?” 하고 저를 부르는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오소마츠가크흠-!” 하고 헛기침과 함께 웃음을 날리고 고개를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에게 씨익- 웃어준 오소마츠가 더욱더 카라마츠를 꽉 끌어안았다.


. 곁에 있어.”

나직이 가슴을 어루만지는 목소리에 카라마츠가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하고 대답했다.

쑥스럽다는 듯이 살며시 얼굴을 붉히고 코 밑을 문지르는 오소마츠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카라마츠의 전신에 행복이 퍼졌다

절대로 이 사람의 곁에 있겠다, 홀로 다짐하며 저 아래, 아주 작게 얼굴을 내민 초조를 가만히 응시했다.

 

 

 

 

 

3.

 

본성 한구석에 위치한 마츠요님의 방

아침 문안 인사를 올리고 되돌아오려는 우리를 마츠요님이 붙잡으셨다

즉석에서 차와 쿠키를 준비해 테이블에 나를 앉힌 마츠요님이 부드러운 미소로 물으셨다.


본성은 좀 익숙해졌니?”

정들었던 별궁을 떠나 오소마츠와 함께 본성으로 옮긴 지 이제 한 달

별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본성은 수십 개의 방과 응접실, 회의실이 있었다

왕족이 생활하는 공간은 본성의 왼쪽 건물

그 건물의 구조를 외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조금 망설이다 솔직하게 대답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넓기도 하고, 사람도 많아 조금 낯설어요.”

오소마츠의 명으로 거의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별궁의 시녀나 시종들과 다르게 본성에는 어디를 가나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방이 아니면 혼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내 대답에-.” 하고 고개를 끄덕인 마츠요가 제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시녀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사람이 많긴 하지. 후후후-. 오소마츠하고는 지낼만하니?”

마츠요님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멍청히 눈만 깜빡였다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하려는데 왜 어제 함께 외출했던 일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가시가 걸린 것처럼 목구멍에 매달려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마츠요님의 얼굴이 밝은 미소가 활짝 피었다.


대답이 필요 없는 얼굴이구나—. 후후, 오소마츠가 변덕이 심하고, 앞으로 힘든 일도 적지 않겠지만 우리 한심한 아들내미 옆에 있어 주렴.”

“….”

뜨거운 얼굴은 분명 새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다

푸쉬쉬- 하고 귀에서 김이 올라오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와 함께 마츠요님 방을 나와 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거실을 나와 계단을 오르면 바로 앞에 방이 있던 별궁과 달리, 길고 긴 복도를 걸어가야 방이 나온다

티끌 하나 묻어있지 않은 대리석 바닥에 구두 소리가 울린다

복도 하나를 걷는데도 여러 무리와 스쳐 지나간다

이쪽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어색해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다

인사를 마치고 지나가는 시녀 무리를 배웅한 토도마츠가 이상하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뭘 그리 일일이 긴장해? 예전엔 누가 보든 신경도 안 썼으면서.”

예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확실히 나는 모두의 이목을 끄는 어트랙티브한 길티- 보이이지만, 이제 이 몸은 오소마츠의 것이니까.”

—, 그러셔. 옛날 성격 완전히 돌아왔네.”

위험하네-! 카라마츠 형아! 나라도 알겠어!”

으응~?”

무엇이 위험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쥬시마츠가 활짝 웃고 있으니 어찌 되든 되었다

게다가 토도마츠도 내심 기뻐 보이는 얼굴이니….

 

그렇게 이야기하다 방에 거의 도착했다

모퉁이 하나만 돌면 방에 들어갈 수 있는데, 깡충깡충 앞서 뛰어가던 쥬시마츠가 딱 멈춰 서서 굳은 채 모퉁이 너머를 빤히 쳐다보았다.


쥬시마츠?”

몸을 숨기고 머리만 쏙 빼놓은 쥬시마츠 뒤로 다가가자 쥬시마츠가 팔을 들어 흔들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제스처에 토도마츠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쥬시마츠와 함께 모퉁이 너머를 응시했다.


뭐가 있나?”

뚫어지라고 저쪽을 보고 있는 둘에게 다가가자 토도마츠가 쥬시마츠와 합세해 오지 말라며 팔을 휘저었다

그럴수록 궁금증은 커지는 법. 슬쩍 몸을 틀어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의 손을 피해 모퉁이로 몸을 뺐다.

 

모퉁이 저편에 즐겁게 웃고 있는 오소마츠가 있었다

쵸로마츠도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갈색의 머리칼을 양쪽으로 묶은 미인

분홍빛 머리띠를 한 미모의 여성이 오소마츠와 함께 있었다

자연스럽게 오소마츠의 어깨를 툭-, 하고 치는 여성은 오소마츠와 매우 친해 보였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대화하면서 저렇게 편안한 얼굴을 하는 오소마츠는, 처음 봤다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것이 뱃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검고 질척하고 꿈틀거리는 뭔가가 머리 위에 올라와 시야를 비틀었다

나를 부르는 토도마츠의 목소리도, 나를 붙잡는 쥬시마츠의 손도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오소마츠와 대화하고 있는 여성이 눈에 가득 찼다


누굴까, 누군데 저렇게 오소마츠와 친하게 대화하고 있는 걸까

아무 생각도 없이 새까매진 머리를 끌고 모퉁이를 나와 오소마츠에게 걸어갔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본 오소마츠가 활짝 웃었다

함께 대화하던 여성은 나를 보더니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침하게 드레스를 들어 올려 인사를 하고 그대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야기는 다 끝낸 걸까, 물어보고 싶어도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다

오소마츠가 점점 내게 다가오는데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항상 오전 일을 끝내고 온 오소마츠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했는데, 어쩐지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카라마츠? 무슨 일 있어?”

고개를 기울이고 걱정하는 낯으로 묻는 오소마츠에게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대답했다

자신이 들어도 힘없는 목소리는 명백히 무슨 일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썹을 찌푸린 오소마츠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더 묻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방에 가던 길이지?”

….”

앞서 방으로 들어가는 오소마츠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쉬는 시간이라며 소파에 앉은 오소마츠가 팡팡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멀뚱히 서 있는 것도 이상해 오소마츠 옆에 앉았다.

한숨과 함께 허리를 아래로 내리고 거의 누운 자세로 앉은 오소마츠를 보며 쵸로마츠가 가볍게 잔소리를 날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자신이 느끼는 이 생각이 바보 같아졌다. 겨우 나오는 목소리를 짜내듯 오소마츠에게 최대한 퉁명하게 물었다.


오소마츠, 그런데 조금 전 그 레이디-…?”

—, 꽤 귀엽지?”

, ….”

오소마츠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을 홱 돌려버렸다

왠지, 왠지 오소마츠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서 돌린 고개를 오소마츠가 붙잡았다

양 볼에 제 손을 끼우고 홱- 앞으로 돌린 오소마츠가 씩- 웃으며 가볍게 내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얼얼한 이마를 쓰다듬으며 흘겨보자후훗.” 하고 옅은 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상한 생각 했지~? 나는 카라마츠 말고 싶요 없다니깐.”

“….”

오소마츠의 말에 괜히 볼을 부풀렸다

키들대며 내게 기댄 오소마츠가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 일하기 싫어~. 카라마츠랑 같이 있고 싶어~.”

어이, 얀마. 또 그런 소리 하지 말고 후딱 일어나! 쉬는 시간 끝났어!!”

싫어~~~.”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흔들었다

매섭게 오소마츠를 노려보는 쵸로마츠의 눈길에 오소마츠가 푹- 한숨을 쉬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끄으—.” 하고 기지개를 피고다녀올게.” 하고 작게 손을 흔드는 오소마츠를 배웅하고 돌아오자 토도마츠가 내 옆에 앉았다.


쵸로마츠 형한테 들었어.”

? ?”

아까 그 미인! 토토코라고 해서 오소마츠 형들의 소꿉친구래. 오소마츠 형처럼 푸른 왕국 혼혈이고. 게다가 오소마츠 형의 전 약혼자.

 

토도마츠의 말에 또다시 말을 잃고 눈만 껌뻑였다.

 

 

 

 

 

4.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업무를 나가기 위해 옷을 입고 있는 오소마츠가 노크 소리에 몸을 돌렸다

셔츠를 정돈하고 소매 버튼을 잠그며 노크에 대답하자 쵸로마츠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무도회 제안 나온 거 들었지?”

그거 꼭 해야 해?”

베커 백작이 적극적으로 밀고 있어서,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게다가 명분이탄생제라서 거절하기가 뭐해.”

“….”

게다가 준비를 자기가 맡아서 하겠다고 자처해서….”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왕실에서 여는 행사 총괄은 왕비의 일이었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아직 정식 왕비가 아니었다

오소마츠의 대관식 이후, 전쟁으로 어지러워진 나라를 정비하고 새로운 인재를 뽑는 사이 예식을 올리지 않은 카라마츠는 여전히약혼자의 신분이었다

조금씩 공부와 함께 왕비의 일을 하고 있지만, 무도회를 여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베커 백작이 오소마츠의탄생제를 명분으로 걸고 있다면 무도회 규모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오소마츠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라마츠에게 눈을 돌렸다.


카라마츠? 왜 그래?”

방금탄생제라고 들었는데? 누구의 탄생제인가?”

—, 우리.”

?”

나랑 이 녀석들 생일이 5 24일이거든.”

쵸로마츠와 방구석에서 고양이와 놀고 있던 이치마츠를 가리킨 오소마츠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카라마츠는 날짜를 들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뒤에 서 있던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도 말을 잃고 멍청히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 왜 그래?”

, 우리 생일도 5 24일이다.”

“…? 진심?”

.”

눈을 크게 뜬 쵸로마츠를 등지고 카라마츠를 쳐다본 오소마츠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카라마츠의 대답에 고양이를 품에 안고 다가온 이치마츠가 코웃음을 날렸다.


어떤 의미론 천생연분이네.”

이치마츠의 말에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기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똑같은 생일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쵸로마츠가 고개를 휙휙 흔들고 다시 무도회에 관해 물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탄생제를 내세운 이상 거절할 수는 없잖아.”

“….”

휴전했으니, 전쟁을 핑계 댈 수도 없고.”

“…하아~~, 알겠어. 하자고 해.”

오늘 어전회의에서도 말이 나올 테니까 그때 말해.”

오케-.”

 

 

준비를 마친 오소마츠가 먼저 방을 떠나고 뒤따르려는 쵸로마츠를 토도마츠가 불러 세웠다.


?”

잠깐.”

토도마츠가 힐끗, 제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카라마츠를 눈짓했다

쵸로마츠가 고개를 기울이고 카라마츠를 응시했다.


쵸로마츠, …. 오소마츠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싶은데, 뭐가 좋을 거로 생각하나?”

카라마츠의 질문에 쵸로마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왕자 시절, 1 왕비와 귀족들의 눈에 짓눌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던 그 시절에 생일은 그리 축하할 일이 아니었다

항상 마츠요와 삼둥이, 네 명이 조촐하게 치르고 지나갔던 생일에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행사는 없었다

쵸로마츠는 카라마츠를 쳐다보며으음~~.” 하고 신음했다.


글쎄…. 우리도 서로 선물을 준 적이 없어서…. 이치마츠는 뭐가 좋을 것 같아?”

눈을 돌려 쥬시마츠와 이야기하던 이치마츠에게 말을 돌리자, 흠칫 놀란 이치마츠가 눈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내가 알 거로 생각해?”

그래, 물어봐서 미안하다.”

이치마츠의 대답에어이구.” 하고 한숨을 내쉰 쵸로마츠가 간절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카라마츠에게 눈을 돌렸다

분명 명답을 내줄 것이라 기대하는 카라마츠의 반짝이는 눈에서 슬쩍 고개를 돌린 쵸로마츠가 다시….” 하고 팔짱을 끼고 신음했다.


, ‘토토코씨도 오소마츠에게 선물을 주겠지…? 소꿉친구이고…. …,”

전 약혼자라는 단어를 삼킨 카라마츠가 힘없이 눈을 아래로 내렸다

카라마츠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단어를 눈치챈 쵸로마츠가 쓴웃음을 흘리고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신경 쓰여? 토토코가.”

, 아아아아아니!! 그런 건 아니다!”

만나볼래?”

.”

놀란 카라마츠를 보며 쵸로마츠가 빙긋- 세모꼴의 입으로 미소지었다.

 

 

 

 

 

5.

 

어전 회의를 끝내고 집무실에 놓인 커다란 책상에 앉은 오소마츠가 무도회 초대 명단을 보고-.” 하고 어이없는 숨을 뱉었다.


실화냐….”

여식이 있는 귀족이란 귀족은 신분의 높낮이는 가리지 않고 모두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딸이 미인이라는 에드윈 자작부터 학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는 딸을 가진 루셀 공작까지

명단을 다시 쭉 훑어본 오소마츠가 쵸로마츠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새로운 왕의 취향은 모르겠으니, 일단 전부 때려 넣는 거지….”

? 그렇게나 두 번째 왕비가 필요해?”

조금씩 낮아지던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나워졌다

둥글둥글하던 눈매도 날이 선 채로 명단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쵸로마츠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솔직히후계이야기 나오면 이쪽은 할 말 없지.”

?”

나한테 화내지 마. 망할 장남.”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로 바라보는 오소마츠에게 혀를 찬 쵸로마츠가 명단을 집어 들었다.


무슨 수 없어?”

글쎄.”

명단을 읽어내려가는 쵸로마츠를 보며 의자를 뒤로 기울인 오소마츠가 물었다

망설이지 않고 두 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하는 쵸로마츠의 대답에 오소마츠의 한숨이 깊어졌다.

 

 

 

깊은 밤. 겨우 일을 마친 오소마츠가 지친 몸을 침대에 던졌다.

푹신한 침구 속으로 서서히 침몰해가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흔들었다.


오소마츠, 잠옷으로 갈아입고 자라.”

으부부부부-.”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불에 파묻혀 뭉개진 오소마츠의 말에 눈썹을 찡그린 카라마츠가 조심스럽게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 고생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카라마츠의 손길에 오소마츠가 웅실거리는 가슴에 눈시울을 붉혔다

빨개진 눈가를 들키고 싶지 않아 이불에 엎드린 채로 곰실곰실 움직여 카라마츠의 무릎에 머리를 올린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소마츠?”

드물게 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카라마츠가 부드럽게 오소마츠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었나? 오늘은 유난히 지쳐 보이는군.”

카라마츠의 물음에 오소마츠가 잘게 머리를 흔들었다

2 왕비 이야기를 카라마츠가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말없이 저를 꼭 껴안고 있는 오소마츠를 내려다보며 카라마츠가 숨을 몰아 내쉬었다

낮에 미리 쵸로마츠에게 언질을 받지 않았다면 오소마츠의 이런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지쳐서 자신에게 솔직하게 어리광부리는 것이 기쁘면서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것에 새침하게 볼을 부풀린 카라마츠가 다정하게 오소마츠를 불렀다.


오소마츠.”

.”

조금만 기다려줘.”

? ?”

카라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들었다

겨우 얼굴을 보여준 오소마츠에게 빙그레 웃어주며 카라마츠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왕비 일.”

카라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멈췄다

그렇게나 카라마츠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는데, 카라마츠 입에서 먼저왕비라는 단어가 나온 것에 놀란 오소마츠가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체념하는 얼굴로 눈을 돌린 오소마츠와 눈을 맞춘 카라마츠가 온화한 미소로 오소마츠의 손을 잡았다.


끝까지 들어라. 스스로 물러나겠단 하는 말은 하지 않아. 그럴 마음은 없다. 물론 오소마츠가 힘든 것을 보면 그런 마음이 아예 안 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함께 이겨나가기로 했으니까.”

“….”

그리고 오소마츠 옆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싫다.”

. 나도 싫어.”

카라마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오소마츠가 몸을 일으켰다

카라마츠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을 올려 카라마츠를 품에 안고, 그대로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카라마츠와 함께 푹신한 이불에 쓰러진 채, 제 밑에 누운 카라마츠에게 새가 쪼듯이 입맞춤을 내린 오소마츠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

.”

오소마츠의 말에 카라마츠도 잔잔한 미소로 대답했다

팔을 들어 오소마츠의 등에 감싼 카라마츠가 내려오는 입맞춤에 눈을 감았다

쪽쪽, 침실에 울리는 소리에 체온이 드솟는 것과 동시에 아련하게 퍼지는 행복과 안도에 살포시 고개를 기울였다

더 깊어진 입맞춤과 맞닿은 피부의 온기를 만끽하며 카라마츠가 다시금 그 누구에게도 이 품을 뺏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때때로 솔직하게 어리광을 부리고 장난스럽지만 다정한 오소마츠를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다

떨어진 입술에 아쉬움을 느끼며 바라본 오소마츠의 얼굴에 가득 피어난 환한 미소를 마주 보며 카라마츠가 함께 행복하게 웃었다.

 

정말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편이다.’

 

 

 

 

 

6.

 

붉은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하얀 예복을 입은 오소마츠가 따분하단 표정으로 왕좌에 앉았다

하나하나 호명되어 앞으로 나오는 귀족 영애들이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홍조를 피우며 인사해도 오소마츠는 그저 지루할 뿐이었다

오소마츠 앞에 끝없이 이어진 줄은 무도회 내내 인사를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대놓고 왕좌에 걸터앉아 딴짓하는 오소마츠를 쵸로마츠가 이마에 핏줄을 세우고 응시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영애들의 인사도 이제 열 명 남짓 남았을 때, 커다란 나팔 소리가 새 손님의 등장을 알렸다

또 누가 오는 건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오소마츠가 금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게 걸어오는 사람을 응시했다

무도회용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푸른 드레스. 어깨를 감싼 긴 망토는 적당히 몸매를 가려주었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높은 구두를 신고 우아하게 왕의 앞으로 걸어온왕의 약혼자’, 카라마츠가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려 인사를 올렸다

약혼자라는 신분에, 2 왕비를 위한 무도회에 카라마츠는 참석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오소마츠가 멀뚱히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카라마츠?”

“….”

오소마츠의 부름에,” 하고 작은 웃음을 흘린 카라마츠가 당당하게 영애들을 지나쳐 오소마츠의 왕좌 앞으로 올라갔다

왕과 왕비만 오를 수 있는 단상 위에 오른 카라마츠가 너무나 태연하게 오소마츠의 무릎에 앉았다

당돌한 카라마츠의 행동에 무도회에 흐르던 음악이 멈췄다

아름다운 선율을 뽑아내던 연주자들도, 댄스를 추던 귀족들도, 길게 늘어선 영애들도 모두 경악해 호흡도 잊고 카라마츠와 오소마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오소마츠 역시 카라마츠의 돌발 행동에 말을 잃었다

베일 너머로 씨익- 미소를 피운 카라마츠가 뻣뻣하게 굳은 오소마츠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오소마츠, 팔을 내게 감아라.”

카라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하고 반문했다

가볍게 제 팔을 치며빨리.” 하고 재촉하는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한숨을 쉰 오소마츠가 한쪽 팔을 들어 제 무릎 위에 앉은 카라마츠의 허리에 둘렀다

밀착한 둘의 자세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과 영애들의 얼굴은 더욱 경악으로 물들었다

입을 벌리고 자신과 오소마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귀족들을 둘러본 카라마츠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피우자마자,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베커 백작이 오소마츠 앞에 나섰다.


, 카라 공주님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당장 공주님이 앉으실 자리를 준비하겠습니다.”

베커 백작의 말에 카라마츠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우으….” 하고 오소마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신음한 카라마츠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 자리는 이곳이니까요.”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카라 공주님도, 전하도 불편하실 텐데요….”

싱긋- 웃는 베거 백작의 얼굴에 차가움이 스쳤다. 카라마츠는 베커 백작을 향해 눈썹을 찌푸리고 꾸욱 오소마츠의 손을 눌렀다

흥미진진하단 얼굴로 베커 백작과 카라마츠의 신경전을 구경하던 오소마츠가 키들대며 카라마츠를 거들었다.


백작, 그럴 필요 없다. 공주가 있을 자리는 이곳이니까.”

빙긋- 웃으며 카라마츠의 허리에 감을 팔을 당겨 카라마츠를 끌어안은 오소마츠가 베커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입술을 씹으며 일순간 사나운 얼굴을 한 베커 백작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싹 바꾸고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주님과 전하는 사이가 좋으시군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상글상글 웃는 얼굴 뒤편에 어떤 생각이 굴러가고 있을지 모른다

경계하는 눈으로 베커 백작을 응시한 오소마츠가 작게 혀를 차고 입을 연 순간, 또 나팔 소리가 무도회장에 울려 퍼졌다

귀족 영애들을 뚫고 짙은 홍색 드레스를 입은 토토코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왕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 오소마츠 앞에 토토코가 서자, 베커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누가 선수라도 칠까, 서둘러 토토코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은 베커 백작이 오소마츠를 보며 뱀과 같은 미소를 올렸다.


이런 토토코 님이야말로왕비에 어울리는 여성이지 않겠습니까.”

베커 백작의 말에 오소마츠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토토코의 아버지와 모종의 계약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딸이 없는 베커 백작이 이렇게 커다란 무도회를 자진해서 열고 토토코를 추켜세울 리 없었다

모든 행동의 밑에 깔린 것이 권력욕이라는 것에 치를 떤 오소마츠가 말없이 베커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한쪽 눈썹을 치켜 세운 오소마츠에게 기가 죽지도 않는지, 다시 토토코가 얼마나 왕비에 어울리는 인물인지 늘어놓기 시작한 베커 백작이 토토코의 부름에 말을 멈췄다.


백작님, 미천한 소녀를 그리 말씀해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토토코가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왕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사람이 아닌 권력을 보고 혼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오직 저만을 사랑해주시는 분의 곁에 서고 싶습니다.”

토토코의 말에 베커 백작의 얼굴에서 색이 사라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토토코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베커 백작이 당혹해하자마자 오소마츠가 큭큭 웃으며 토토코에게 가담했다.


토토코도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말하는 건 좋지 않다, 백작. 짐은 그녀의 깊은 뜻을 존중하는 의미로 앞으로 토토코에게왕비에 대한 발언을 하는 자는 짐이 친히 엄하게 벌하도록 하겠다.”

침묵이 내려앉은 무도회장에 오소마츠의 명이 울려 퍼졌다

토토코의 발언과 오소마츠의 명에 인사를 기다리고 있던 영애들이 슬슬 눈치를 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제 딸을 왕비로 만들어 권력을 잡으려 했던 귀족들도, 그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고 했던 자들도 모두 오소마츠와 카라마츠에게서 눈을 돌렸다

생각 이상으로 오소마츠와 카라마츠가 가깝고, 토토코의 발언으로 더는왕비에 대한 말을 꺼내기 힘들어졌다

무도회를 기회로 삼으려던 자들은 오히려 나빠진 상황에 쓴 입맛을 다셔야 했다

당황해하는 베커 백작과 귀족들을 보며 이치마츠가 슬쩍 쵸로마츠에게 물었다.


이거 형이 짠 작전이지?”

이치마츠의 물음에 쵸로마츠가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설마. 조금 돕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라.”

? 그럼 누가….”

이치마츠의 혼잣말에 쵸로마츠가 살짝 고갯짓으로 카라마츠를 가리켰다

또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는지 카라마츠를 무릎에 앉힌 채로 끅끅 웃는 오소마츠를 본 이치마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토토코를 만나자마자 무도회를 기회로 삼아 이 모든 계략을 짠 것이 카라마츠라는 것을 알고 있는 쵸로마츠는 그저 말없이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7.

 

무도회가 끝난 후, 귀족들에게서왕비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도리어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카라마츠와 오소마츠의 금술이 화제가 되었다

저렇게 사이좋은 두 사람 사이에 낄 수는 없다고, 귀족 영애들이 아쉬운 한탄을 내뱉었다

궁에 출입하는 여성들도 그 수가 확실히 줄어들어, 오소마츠는 쾌적해진 궁 내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오늘도 열린 어전회의에서 많은 안건을 처리한 오소마츠가 피곤한 눈을 누르고 한숨과 함께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기에게 오늘의 안건을 정리해 집무실로 보내라는 명을 끝으로 회의를 끝내려던 그때, 황급히 회의장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건넨 것은 동의 제국 문장이 찍힌 서신이었다.

 

 

모두의 눈이 집중된 가운데 오소마츠가 서신을 찢어 편지를 꺼냈다

천천히 종이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 오소마츠가 귀족들을 향해 외쳤다.


동의 제국에서 화친을 제안해왔다.”





* 크리스마스에 맞춰 마지막화를 올리겠네요!ㅎㅎ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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