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이코패스 카라마츠를 오랜만에 쓰고 싶어서 써봤습니다ㅎ

* 오소마츠가 발랄하지 않습니다. 오소마츠가 해적입니다.

* 모브시점. '오소←모브'가 있습니다.

* 공미포 11,953자.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좌우로 크게 흔들리던 어둠이 잠잠해졌다. 숨소리를 죽인 우리들 위로 둔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창에 옹기종기 모인 어른들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불안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까끌까끌한 목으로 침을 넘기며 귀를 기울이자 어렴풋하게 사람들의 함성과 비명이 들렸다.

“해적인가?”

“서, 설마⋯.”

수군대기 시작한 어른들의 말에 몸에 걸친 누더기를 움켜쥐고 숨을 삼켰다. 조금 전, 이곳에 내려왔던 선원의 외침이 귓가에서 되풀이됐다.

“레드다! 레드 브레이드(Red Braid)다!!”

항구에서 일했던 나는 알고 있다. ‘레드 브레이드’가 누구인지. 항구에 정박한 상선의 선원들이 반드시 한 번 이상은 입에 담는 해적. 대륙과 대륙을 잇는 대양의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대해적. 레드 브레이드의 습격을 받은 상선은 한 번도 멀쩡히 돌아온 적 없었다. 최악 일로를 달리는 생각을 간신히 억누르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칼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우리는 어, 어떻게 되는 거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덜덜 떠는 어린아이의 질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항해 중간에 해적을 만나 운반하던 노예 모두를 잃었다며 한탄하던 선원을 본 적이 있었다. 간신히 목숨만을 구할 수 있었다던 그 선원의 말에 나와 동료들은 덜덜 떨었다. 금이나 식량, 럼주같이 물건을 우선하는 해적에게 노예는 별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뱃속이 울렁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삼키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으면 이 상선에 남겨지겠지만, 운이 나쁘면 우리는⋯.


축축한 바다 공기에 절여진 녹슨 철창살을 쥐고 한 번도 믿은 적 없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자 마치 구원처럼 빛이 내려왔다. 열린 갑판 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등진 채 계단을 내려온 남자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혀를 찼다.

“선장~, 여기 노예들이 있는뎁쇼?”

남자의 껄렁한 외침에 검은 코트를 입고 머리 한 가닥을 길게 땋은 남자가 내려왔다.

해적, 그것도 악명 높은 대해적 레드 브레이드의 선장. ‘레드’라 불리며 많은 선원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는 의외로 단정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예는 놔둬. 처리가 귀찮으니까.”

“넵!”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손을 흔든 ‘레드’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붉은빛이 도는 짙은 눈동자가 닿는 순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세이렌에 홀린 것처럼 1초라도 더 그의 시선을 받고 싶었다.

“저거.”

“예?”

레드의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저 꼬마, 잡일꾼으로 쓸 거니까 빼놔.”

“예⋯? 저 꼬마요?”

“응.”

“아, 알겠습니다.”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얼굴로 말을 끝낸 레드는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레드의 명령을 받은 남자가 “후―.” 하고 한숨을 쉬고 상선의 주인을 끌고 왔다. 해적에게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은 상인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철창을 열었다.


부러움과 동정이 섞인 눈빛이 등에 꽂혔다. 남자를 따라 철창을 나와 갑판에 오르자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널려 있었다. 상인이 호위로 고용한 용병들은 갑판을 붉게 적시며 쓰러져 있었고, 상인과 그의 수족들은 두꺼운 밧줄에 묶여 갑판 한가운데에 모여 있었다.

레드 브레이드의 해적선과 상선 사이에 걸쳐진 나무판을 건너 해적선에 발을 올린 순간, 내 인생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2.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가던 해적선이 속도를 늦췄다. 대걸레질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자 정착할 곳 하나 없는 망망대해가 사방에 펼쳐졌다. 갑판에 오른 해적들은 분주히 움직여 돛을 접고 닻을 내리기 시작했다. ‘쿵’하고 해저에 닻이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 왜 닻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해적들은 익숙하게 작은 배를 해적선 아래로 내리고 사다리를 걸었다.

“어이, 꼬마! 이리 와서 도와라.”

“아, 네!!”

남자의 외침에 대걸레를 돛대에 걸고 뛰어갔다. 사다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배 옆면에 단단히 묶고 숨을 돌리자 ‘레드’가 선장실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는 끝났나?”

“네, 캡틴!”

뻣뻣하게 허리를 굽힌 선원들 사이로 걸어온 레드가 말없이 사다리를 내려가 바다 위에 띄운 작은 배에 올랐다. 작은 배에 혼자 오른 레드는 그대로 노를 저어 바다 저쪽으로 나아갔다. 수면에 이는 작은 파도를 따라 넘실대는 작은 배 너머로 작은 점이 하나 보였다.

“서, 선장님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자 난간에 기대 수평선을 응시하던 남자가 작은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저~기 보이는 무인도에 가는 거야.”

“무인도⋯.”

망원경의 둥근 렌즈에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섬이 담겼다. 망원경을 넘겨준 남자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도 잘은 모르지만, 선장님이 정기적으로 들리는 섬이야. 아마 약탈한 보물 중에서 제일 값비싼 걸 보관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보물 지도를 숨겨놨거나!”

“나도 한번 가보고 싶은데 말이야~. 저 무인도.”

선장을 배웅한 해적이 모여 여러 추측을 쏟아냈다. 한참 동안 말이 오갔지만, 그 누구도 레드가 들리는 섬의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다.


작은 점이 되었다 이윽고 사라져버린 작은 배는 다음 날 아침 해적선으로 돌아왔다. 어제와 변함없는 얼굴로 배에 오른 레드가 항해사를 불렀다.

“해골섬으로 간다.”

“네!!”

‘해골섬’이라 불리는 그곳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해류에 둘러싸인 돌섬이었다. 해적이 모이는 곳, 약탈물을 거래하고 다음 항해를 준비하는 곳으로 해군의 손이 닿지 않는 무법지였다. 레드의 한 마디에 수십 명의 해적이 배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접었던 돛을 펼치고 닻을 올려 항해를 시작한 배가 해적들만이 이용하는 거친 항로에 올랐다.


“포도주 가져왔습니다.”

“응, 거기 둬.”

책상에 포도주병과 와인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책상에 발을 올리고 앉은 의자를 기울인 레드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느리게 깜빡이던 눈이 얇은 눈꺼풀 아래에 묻혔다.

대양의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그 일대를 종횡하는 대해적. 해군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지고, 상선이 이용하기 좋은 안전한 항로가 있는 바다를 차지한 ‘레드’는 가장 유명하고 가장 부유한 해적이었다. 게다가 선장인 레드는 해군 사이에서 ‘불사신’이라 불렸다.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화살을 쏘아도, 대포를 퍼부어 배를 침몰시켜도 ‘레드’는 다시 나타났다. ‘지긋지긋한 녀석’이라고 해군 장교가 이를 갈던 것을 봤었기에 강철 같은 몸을 지닌 우락부락한 사내라고 멋대로 상상했었다.

“응⋯? 더 시킬 일 없으니까 나가.”

“아⋯, 네.”

짙은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나른하게 젖은 눈동자에 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흉터투성이에 근육이 가득한 험상궂은 남자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저렇게 가련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뜨거워진 얼굴을 숨기고 선장실을 나왔다.




3.


우둘투둘한 부두가 정박하는 배를 맞이했다. 높이 솟아오른 뾰족한 산봉우리가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해적들의 섬, 해골섬에 도착했다. 항구에서 말로만 듣던 해골섬을 처음 보니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부두 옆에 있는 술집에서 나오는 이도, 배를 점검하는 이도, 저 멀리서 물물교환을 하는 이도 모두 해적이었다.

이렇게 많은 해적으로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꼬마! 어서 이거 날라!”

“아, 네, 넵!!”

거칠게 어깨를 두드리는 두꺼운 손에 고개를 주억였다. 나와 다른 노예들이 있던 상선에서 빼앗은 물건들을 골라 배 아래로 내렸다. 여기 해골섬에서 이 물건들을 팔고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사는 거겠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물건들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자 레드가 배에서 내려와 내 옆을 지나쳤다.

“가자.”

“네!”

레드의 말에 대답하는 해적들은 모두 레드보다 몸집이 컸다. 자신보다 왜소한 레드에게 저렇게 충성을 바칠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나름 노예를 잘 대해준다는 내 전주인에게도 충성을 바칠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레드의 부하들은 레드의 명령이면 죽는시늉이라도 낼 것처럼 굴었다.

“꼬마, 너는 이걸 들고 따라와.”

“네.”

앞서 걸어가는 레드를 보다 건네진 상자를 받아 들었다. 제일 선두에서 검붉은 코트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레드를 짐을 하나씩 든 해적이 뒤따랐다.

우리는 해군의 습격을 대비한 것인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길을 한참 걸어 해골섬 안쪽에 있는 시장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호객 행위에 꼭 일반 시장 거리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좁은 길목에 늘어선 천막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고 파는 물건을 늘어놓지도 않았지만, 해적들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망설임이 없었다.

“꼬마, 그거 여기에 내려놔라.”

어린애처럼 사방을 둘러보다 급히 상자를 내려놓았다. 레드의 해적들은 나를 노예라고 무시하거나 괴롭히진 않았지만, 성질이 급했다. 또 버럭 화를 내기 전에 빈 천막에 상자를 내려놓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빌, 켓, 딘. 이번엔 너희가 남아.”

“네, 캡틴. 다녀오십쇼!”

레드는 어딘지 몽롱한 얼굴로 세 명의 부하를 호명했다. 무슨 중대한 임무라도 받은 것처럼 차렷 자세를 하고 고개를 끄덕인 세 해적이 상자를 지키고 섰다.

“나머지는 따라와라.”

기세등등하게 상자 앞에 선 부하들의 모습에 피식- 헛웃음을 흘린 레드가 천막을 나섰다. 나는 저 세 해적과 함께 천막에 남아야 하는지, 레드가 말한 ‘나머지’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 고민하다 억센 팔에 질질 끌려갔다.


레드는 시장 거리에 세워진 천막들을 누볐다. 해적들 사이에 암묵적인 규칙이라도 있는 건지 레드가 먼저 천막을 지키고 있는 이와 말을 트고 나서야 물건을 볼 수 있었다. 레드의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은 레드가 손짓하고 나서야 필요한 물품을 받아 나올 수 있었다. 다음 항해에 필요한 물품이 하나씩 레드의 부하들 손에 올려졌다. 서서히 양손에 짐을 든 부하들이 늘어났고, 곧 내게도 커다란 상자 하나가 떠넘겨졌다.

레드는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자 걸음을 멈췄다. 홱 뒤돈 레드 뒤에 서 있는 우리들은 모두 짐을 한가득 안고 있었다.

“짐은 전부 배에 가져다 놓고 남은 시간은 자유다. 단, 내일 아침까진 배로 돌아와.”

“네!”

레드의 말에 해적들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자유 시간이라는 것에 들뜬 해적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가 짐을 실었다. 해적들의 지시에 따라 짐을 배에 옮기고 나니 윗도리가 흠뻑 땀으로 젖어 있었다.

“꼬마, 너는 어쩔래?”

“네?”

옷을 들어 이마를 닦아낸 내게 해적이 팔을 걸치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어⋯.” 하고 말을 흐리자 해적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도 우리랑 술집에 갈래? 아님 빌 녀석들 따라 시장 구경?”

“아⋯, 아뇨. 저는⋯.”

해적은 뭐든 말하라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짐을 옮기는 사이 주변이 깜깜해져 있었다. 해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술집에서는 노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저는 배에 남아있을게요.”

“응? 자유 시간인데도 말이냐?”

“네.”

해적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팔을 내렸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아마 곧 캡틴이 오실 테니 캡틴 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라구.”

기분이 상했는지 싸늘하게 내뱉은 해적이 배에서 내려갔다. 해적 무리가 배를 떠나자마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싣고 넘어오는 바닷바람에 눈을 감았다.


나는 이대로 해적이 되는 건가?

감았던 눈을 뜨고 눈가를 문질렀다. 레드는 왜 나를 데려왔을까. 상선에서 마주친 눈동자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눈동자가 순간 이채를 띠었다. 그래서 나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레드는 그 이후 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해적선에 오른 뒤로 가끔 마주친 레드의 눈은 항상 메말라 있었다.

“어머니랑 닮은 눈.”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평생 노예로 살다가 죽어버린 어머니와 똑같은 눈이었다. 바라는 것도 없이 공허하게 삶을 이어갈 뿐인, 내가 제일 싫어하는 눈.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해적의 선장인 레드가 왜 그런 눈을 하는 걸까. 그리고 그 눈에 왜 나를 담았을까.

레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늘어간다.


“아무도 없나?”

눈동자 뒤가 뜨거워 눈을 비비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난간을 잡고 배 아래를 보자 레드가 처연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 선장님?”

“배에 오를 거니까 사다리 내려.”

“아, 네!”

부두에 홀로 서 있는 레드에게 끄덕인 후, 난간에 묶여 있던 매듭을 풀었다. 촤르륵 늘어진 사다리를 타고 레드가 배에 올랐다.

“다른 녀석들은?”

“자, 자유 시간이라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레드가 지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에 입을 다물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레드에게 마실 거라도 가져다줘야 하나 고민할 무렵 건너편 부두에 선 배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은근히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다.

‘뭐지?’하고 일어난 호기심에 아래를 응시하자 해적으로 보이는 험악한 남자가 뭔가를 질질 끌고 갔다. 해적이 손에 쥔 굵은 그물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그만 숨을 삼켰다.

인어다!

해적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것은 인어였다. 우리들과는 다른 귀와 허리 아래로 펄떡이는 비늘에 감싸인 꼬리. 생전 처음 보는 인어에 절로 감탄했다. 인어는 모두 생김새가 아름답다더니 정말이었다. 훤히 드러난 상반신으로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위에 달린 얼굴은 도저히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묘하게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인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어는 높으신 분들의 애완동물로 팔리기도 한다더니⋯. 저런 생김새라면 탐낼 만했다. 노예 중에서도 얼굴이 반반한 이는 귀족에게 잘 팔렸으니까.

인어는 말없이 비참한 얼굴로 해적에게 끌려갔다. 물 밖에 있는 게 힘든지 숨을 헉헉거리며 꼬리를 파닥이는 게 전부였다. 해적들도 인어는 쉽게 볼 수 없는지 사람들이 점점 몰리고 있었다.

가장 넓은 바다를 차지하고 있는 대해적인 ‘레드’는 인어를 본 적 있을까? 그런 궁금증에 인어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돌렸다.


“⋯.”

“서,”

“오늘 더 할 일 없으니 들어가 봐.”

얼음 같은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레드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선장실에 들어갔다. 레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멈췄던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서웠다.

인어를 응시하는 레드의 눈빛이,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그가 내뿜는 기운에 다리가 풀릴 정도로.


대해적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레드는 부하들과 사이가 좋아 보였다. 부하들이 그에게 보여주는 신뢰를 보면 그가 얼마나 부하들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해적답지 않게 가혹한 모습을 보인 적 없었기에 나도 모르게 그를 편하게 생각했던 걸까.

잘게 떨리는 손을 맞잡아 진정시켰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풀린 다리를 주물렀다.



다음 날 아침, 배로 돌아온 해적들에게 은근슬쩍 어젯밤의 일을 말했다. 해적들은 내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서 그렇게 꼬리 말고 숨으려는 개새끼가 된 거냐? 우리 캡틴이 좀 노려봤다고~?”

큰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팡팡 내려찍는 해적에게서 떨어지자 다른 해적이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하고 실실댔다.

“야~, 놀랐겠네. 꼬마-. 우리 캡틴이 여리여리해 보여도 화내면 무섭거든!”

“처음 봤으니 놀랄 만하지~.”

“우리도 처음 봤을 때는 오줌 지릴 뻔했다니까?”

“크허헣!” 하고 돼지 울음소리 같은 웃음을 멈춘 해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캡틴은 인어 싫어하시거든.”

“그럼 전에도 인어를 보신 적 있으신 거예요?”

해적의 말에 놀라 묻자 해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캡틴하고 항해하다 보면 묘하게 인어를 많이 보는 것 같단 말이야―. 3년 동안 그 보기 힘든 인어를 2번이나 봤으니.”

해적의 말에 주변 해적이 맞장구를 쳤다. 일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인어를 2번이나 봤다니. 그런데 왜 레드는 인어를 싫어하는 거지? 어제 본 그 얼굴을 떠올리면 싫어한다 수준이 아니라 깊이 증오하는 것 같았다. 바다의 생물인 인어는 특별히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인어를 잡아 팔 생각을 하는 상인이 아니라면 인어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할 텐데, 왜⋯.

“왜⋯, 싫어하시는 거예요?”

“글쎄? 우리도 몰라.”

돌아오는 대답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레드의 부하들은 그를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레드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면 먼저 부하들 사이에 선을 그은 것은 레드 같았다. 동료이지만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레드는 홀로 고고히 서 있는 꽃 같았다.



아침에 돌아온 해적들은 오늘도 시장 거리로 떠났다. 어제 다 구하지 못한 물품을 사 오겠다며 배를 내려가는 해적들을 배웅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적들은 배에 남겠다는 나를 더 꾀지 않고 레드의 시중이나 잘 들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거친 손짓을 따라 들썩이는 어깨에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하아⋯.”

혼자 남은 배 위에서 마른세수를 했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어제 시장 거리에서 본 노예들이 떠올랐다. 해적들의 시장에는 노예들도 있었다. 발목에 녹슨 쇠고랑을 차고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삐쩍 마른 노예들의 푹 파인 눈동자가 내 뒤를 따라왔다. 레드 뒤를 따르며 짐을 옮기다 우연히 본 그 노예들의 모습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일하자.”

몸이라도 바쁘게 움직이면 지울 수 있겠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을 깨문 채 양동이와 대걸레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남은 건 선장실뿐인가.”

갑판과 해적들의 방을 모두 걸레질하고 남은 방 하나를 앞에 두고 허리를 두드렸다. 배 전체를 혼자 청소하니 꽤 시간이 걸렸다. 슬슬 해적이 돌아올 것 같으니 선장실까지 얼른 끝내고 쉴까. 아무 생각 없이 선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걸레질을 시작했을 때였다.

달칵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놀라 몸이 크게 튀었다. 배에 남아있는 건 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

선장실 뒤쪽에 있는 샤워실에서 나온 레드와 시선이 맞았다. 레드의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셔츠 사이로 보이는 가슴에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새겨진 표시.

노예 증표.

대해적인 그가 왜⋯?

“나가. 당장.”

레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정신없이 레드의 가슴을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안 계신 줄 알고⋯”

“‘이걸’ 본 사람이 네가 아니었다면 죽였을 텐데.”

키득, 멀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 레드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레드의 말은 내 혼란에 답을 주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숨을 삼키고 레드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선장실을 뛰어나왔다.

닫힌 문을 등지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웅크렸다. 내게 새겨진 것과 같은 증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노예였다.

“하하.” 하고 마른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슴에 움트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노예였던 그가 대해적인 된 것처럼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인지,

그의 비밀을 알게 되어 찾아온 우월감인지,

그가 나를 죽이지 않고 보내준 것에 대한 기쁨인지.

이게 무엇이든 잃고 싶지 않았다. 절대, 그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자고 홀로 다짐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4.


항해 준비를 마친 해적선이 해골섬을 떠났다. 바다를 가르고 나아가는 배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부푼 하얀 돛이 하늘에 구름처럼 떠 있었다.

“로니, 어제 말했던 경로를 바꿔야겠다.”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레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틀었다.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제대로 배가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던 항해사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예? 경로를요?”

“응.”

“목적지를 바꾸실 건가요?”

“아니.”

“그럼 왜⋯. 이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인데요.”

항해사의 물음에 레드가 지도 한쪽을 끌어당겼다. “지금 이 길 말고, 여기를 통과해서 갈 거야. 그렇게 알아둬.” 하고 이유를 말하지 않고 명령을 내린 레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항해사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드의 등을 바라보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를 돌려 방향을 바꾸라는 항해사의 말에 해적이 돛 줄을 당겼다. 마주하고 있던 바람을 살짝 비키도록 돛을 돌리고 배를 회전시킨 해적이 땀을 닦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 길은 잘 안 가는데 말이야.”

“해류를 타고 가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데, 이번에도 캡틴의 감인가?”

“뭐, 캡틴 말을 따라서 큰일 난 적은 없으니까.”

무심한 해적들의 말에 슬쩍 끼어들어 항해사의 굳은 얼굴을 보며 물었다.

“왜 방향을 바꾸신 건가요⋯?”

“글쎄. 우리는 잘 모르지만, 캡틴은 바다에 사랑받는 남자니까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느끼신 거겠지.”

항해사의 말에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바다의 사랑을 받는 남자’라니, 처음 듣는 호칭에 고개를 기울이자 해적이 호탕하게 웃으며 자랑하기 시작했다.

“우리 캡틴은 저 로니놈 보다 더 바다를 잘 아신다고! 태풍이나 큰 파도가 올 거라고 미리 알아채신다니까~! 게다가 잘 안 가는 곳이라도 캡틴이 가자고 하면 항상 바다가 조용해진다고!”

‘크하하핫’ 하고 걸걸한 웃음소리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해적들의 말은 믿기 어려웠지만, 레드에겐 뭔가 신비한 분위기가 있어 나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 근처에서 상선을 습격할 준비를 끝낸 해적들은 체력을 아끼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층층이 쌓인 해먹에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해적들 사이를 조용히 빠져나와 갑판에 올랐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돛대에 단단히 묶어 놓은 돛을 잠시 보다가 갑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까만 밤하늘에 가득한 별과 둥근 달 덕분에 갑판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돈하며 앞으로 걸어가다 낯선 인영에 걸음이 멈췄다.

긴 코트와 커다란 모자를 보아 레드와 누군가가 함께 있었다. 키가 크지만, 해적들처럼 몸집이 크지는 않았다. 배 위에서는 본 적 없는 모습에 숨을 멈추고 발소리를 죽여 레드에게 다가갔다.

뭔가 위험한 상황인 걸까. 만약을 대비해 레드에게 금방 뛰어갈 수 있도록 다리근육을 잔뜩 긴장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숨을 작게 내쉬며 머릿속에 울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 발을 옮겼다. 레드 옆의 검은 인영은 친밀감을 과시하듯 레드와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손으로 보이는 것이 레드의 얼굴로 다가간 순간, 나도 모르게 갑판을 강하게 차고 말았다.

‘첨벙’

나를 발견한 검은 인영이 순식간에 바다로 뛰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자살행위에 놀라 난간으로 뛰어가 그 아래를 응시했다. 검은 바다는 배에 부딪쳐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내고 있었다. 바다에 떨어지자마자 배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건가? 아니면 어딘가로 헤엄쳐간 건가?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며 그를 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 레드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선, 장님.”

레드는 내 쪽을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말없이 선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시린 눈을 깜빡였다.

왜 또 그런 얼굴을 한 걸까.

레드의 얼굴은 해골섬에서 인어를 봤을 때 지었던 것과 똑같았다. 짙은 증오와 무기력함, 거기에 슬픔이 버무린 내 부모님과 자주 보였던 얼굴.


바다로 뛰어내린 이는 누구였을까. 레드는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일까. 그가 가진 비밀은 밤하늘처럼 짙고 어두웠다.




5.


해골섬에서 얻었다는 정보에 따라 잠복해 있던 우리 앞에 상선이 나타났다. 레드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해적들은 곧 상선 가까이에 배를 대고 나무판을 난간에 걸쳐 상선으로 넘어갔다. 몇 번이고 반복해온 행위에 누구도 실패를 예상하지 않았다.


챙챙챙, 울리는 칼 소리를 등지고 들고 있던 나무 막대로 나를 향해 뛰어오는 해군의 칼부림을 간신히 막아냈다. 해골섬의 정보는 가짜였다. 상선으로 위장한 해군을 습격한 해적들은 잘 훈련된 해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미 많은 수의 해적이 갑판에 쓰러져 있었다.

해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해군들은 해적에 붙잡힌 노예라고 해도 처형할 것이 뻔했다.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해군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작은 몸집을 이용해 내려오는 칼을 피하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고위 해군 제복을 입은 남자가 선장실로 들어갔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해적의 칼을 들고 해군을 밀치고 달려갔다.

“선장님!!”

‘쾅’ 하고 선장실 문을 거칠게 열자 해군과 대치하고 있는 레드가 보였다. 날카로운 칼끝이 서로를 향하고 천천히 옆으로 발을 옮겨 거리를 재던 레드와 해군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칼 소리가 어지럽게 얽혔다. 찌르고, 베고, 피하면서 몇 번이고 레드와 해군의 칼이 맞부딪쳤다. 격렬한 칼싸움에 책상도 책장도 엉망이 되었다.

손을 적신 땀을 거칠게 옷에 닦아내고 칼을 단단히 쥐었다. 내가 방패가 되어 저 사이에 끼어든다면 조금은 레드의 도움이 될까. 파르르 흔들리는 숨을 내쉬고 레드와 해군 사이로 큰 함성을 내지르며 뛰어들었다.

해군의 칼을 내가 한 번이라도 막아낸다면 레드가 살 수 있다. 그렇게 가로막은 순간, 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이 바보가!!”

처음 듣는 레드의 격한 목소리와 동시에 몸이 옆으로 밀쳐졌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책장에 부딪힌 등에 뜨거운 통증이 일었다.

레드는?!

고통도 잊고 눈을 올린 순간 해군의 칼이 레드의 가슴에 박혔다.

“안 돼!!!”

내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새된 비명이 울렸다. 해군은 그 얼굴에 비열한 미소를 피우고 더 더 깊숙이 레드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다. 절망에 풀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책장 아래 주저앉은 채 레드를 응시하던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도 쉴 수 없었다.

왈칵 쏟아질 핏물을 예상하며 칼을 돌린 해군이 눈을 크게 떴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낼 것이 분명했던 레드는 비웃음을 흘리며 해군을 발로 찼다.

“어, 떻게⋯. 왜 죽지 않는 거야!!”

해군의 갈라진 비명에 레드의 비웃음이 깊어졌다. 놓쳤던 칼을 고쳐 쥔 레드가 당황한 해군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다.

“이 정도로는 나를 죽일 수 없어.”

웃음과 슬픔이 섞인 자조적인 목소리가 이미 숨이 멎은 해군에게 내려앉았다.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피를 내려다보던 레드가 한숨과 함께 칼을 빼냈다.

“선장, 님⋯.”

뚝, 뚝. 푸른 칼끝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레드를 따라 내게 다가왔다. 주저앉은 내 목에 칼을 들이댄 레드가 가슴 시리도록 슬픈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내 비밀을 본 녀석이 있으면 안 돼. 널 살려주면 그 자식이 화내거든. 그러니까⋯, 미안해.”

나지막이 죄를 고백하듯 속삭인 레드가 칼을 높이 들었다. 빛 하나 없는 밤하늘이 내게 내려왔다.




6.


잠잠하던 바다가 별안간 거칠어졌다. 5m가 넘는 커다란 해일이 배를 흔들더니 전투가 한창이던 갑판을 덮쳤다. 갑판에 있던 해군도, 해적도, 산 자도, 죽은 자도 모두 해일에 휩쓸려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어진 더 큰 파도가 해적선 옆에 있던 해군의 배를 박살 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의 비명이 가라앉는 배 위로 울려 퍼졌다.


오직 선장만이 살아남은 해적선은 바다가 이끄는 대로 먼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무인도에 배가 멈췄다. 레드는 무기력하게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던지고 사다리를 타고 섬으로 내려갔다.

“오소마츠.”

모래밭에 발을 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눈앞에 있는 자를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아래로 떨군 레드의 귓가에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디 다치진 않았나?”

퍽 자상한 말투에 레드가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얼굴을 쓰다듬는 차가운 손을 쳐낸 레드가 고개를 들어 정면에 있는 인물과 눈을 마주했다.

“⋯.”

“이런. 그렇게 화내지 마. 내가 말했잖아? 내 영역을 벗어나지 말라고. 그리고 선원은 또 사면 되잖아? 자, 여기 인어의 눈물이다.”

남자가 레드의 손에 억지로 하얀 진주를 쥐여 주었다. 손 위에 얹어진 진주는 그 어떤 보석보다 귀한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든 레드의 눈가가 붉은 것을 본 남자가 애처롭게 눈썹을 찡그렸다.

“⋯.”

“오소마츠, 설마 겨우 몇 년 함께한 그놈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아니겠지?”

순식간에 차가워진 남자의 목소리에 레드가 그럴 줄 알았다며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레드를 ‘오소마츠’라 부르는 남자. 그는 인어이자 바다신의 아들이었다. 보통의 인어는 물 밖으로 나올 수 없지만, 바다신의 아들인 그는 지느러미를 인간의 다리로 바꿀 수 있었다. 다만 인어의 특징인 인간과 다른 귀와 목과 어깨에 걸쳐 난 아가미는 인간의 모습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그시 레드를 응시하는 인어, 카라마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소마츠, 나의 사랑. 네 심장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알고 있겠지? 네가 누구의 것인지 잊지 마라.”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처럼 귓가에 비수를 꽂은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말을 내는 입술을 레드가 말없이 받아들였다. 해수에 젖은 촉촉한 입술이 부드럽게 레드의 입술을 감쌌다.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한 손으로 레드의 허리를 감싼 카라마츠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입술에 닿는 미끄러운 살덩이에 레드가 한탄을 삼키고 기계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열린 치아 사이로 불쑥 들어온 혀가 레드의 입안을 훑었다. 치열을 따라 입안으로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간질이더니 뻗어온 레드의 혀와 얽혔다. 혀의 옆면을 핥고 가장 약한 곳을 집요하게 핥는 혀에 레드가 참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하, 읏.”

타액으로 젖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가녀린 신음에 카라마츠가 빙긋 웃으며 입술을 뗐다.



레드는, 오소마츠는 노예였다. 아직 어려 노예의 증표도 새겨지지 않은 오소마츠는 그의 형제들과 상선에 태워져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운이 나빴는지 오소마츠를 태운 상선은 커다란 폭풍을 만났고, 배는 엉망진창으로 찢어졌다. 배의 파편과 함께 오소마츠의 형제들은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오소마츠 역시 형제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 터였다. 그의 인어,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작은 무인도에서 오소마츠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에 오소마츠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형제를 모두 잃었다는 슬픔보다 놀라움이 더 켰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놀라고, 눈앞에 인어가 있는 것에 놀랐다. 카라마츠는 자신을 바다신의 아들이라 간단히 소개하며 오소마츠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노예의 증표를 새겼다.


무인도에서 나와 배를 타고 해골섬을 향해 조타를 돌린 오소마츠가 자신의 가슴께를 강하게 쥐었다. 노예의 증표, 카라마츠의 것이라는 증거. 손바닥 아래 가슴에서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구한 이유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소마츠는 그 무인도에서 몇 년 동안 카라마츠의 애완인간으로 살았다. 카라마츠는 끊임없이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오소마츠를 속박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곁에서 미지근하고 달달한 설탕물에 익사해가는 것 같았다. 점점 그의 손길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싫어 몇 번이고 무인도를 탈출하려 했지만, 카라마츠는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탈출 시도가 스무 번을 넘기자 오소마츠가 망가지는 것을 걱정한 카라마츠가 제한된 자유를 허락했다. 무인도에서 나가 인간들 사이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다만 정기적으로 이 무인도에 돌아와 카라마츠와 만나야 했다.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가슴에 새긴 증표로는 부족했는지 무인도를 떠나는 오소마츠의 심장을 빼앗았다.

오소마츠의 목숨과 더불어 그의 모든 것은 카라마츠의 것임을 잊지 못하도록.



지평선 너머로 보이기 시작한 해골섬에 오소마츠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망할 새끼.”

자신 외의 다른 이가 오소마츠의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을 카라마츠는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정기적으로 오소마츠의 부하들을 죽였다. 그것을 알기에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으려 선을 그었지만, 가슴을 아리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 오소마츠의 동생을 떠올리게 하던 작은 아이조차.

철창에 갇혀 고요하게 자신과 눈을 맞추던 작은 아이를 떠올린 오소마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증오를 짓씹으며 이를 갈았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주인을 향해 세상의 모든 욕을 퍼붓는 오소마츠의 눈가에서 맑은 눈물 하나가 떨어졌다.





* 카라마츠는 인어였습니다~

* 여기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랜만에 오소른입니다^^

* 제가 몇 년 전에 꿨던 꿈을 소재로 써 봤어요.

* 공미포 9,157자.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소른 50제


42. 영혼 (오소른)   



1.


제각각 한심한 신음을 내며 여섯 명의 형제가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알았는지 득달같이 달려든 파칭코 경찰 덕분에 실컷 먹고 마신 결과였다. 제일 먼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토도마츠가 형제들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마시더니 꼴 좋~다.’

파칭코 경찰에게 갈취당한 피해자로서 실컷 욕을 짓씹으며 세면실로 걸어갔다. 형제들만큼은 아니더라도 토도마츠 역시 과음을 했다. 머리를 옥죄는 두통에 눈을 찡긋거린 토도마츠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형제들 모두 일어나있었다. 끙끙대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1층으로 내려가는 형제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토도마츠가 눈을 돌렸다.

“오소마츠 형?”

“……응, 어?”

3초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불린 것을 눈치챈 오소마츠가 고개를 들었다. 숙취의 영향인지 오소마츠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오소마츠의 눈은 토도마츠와 시선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허공을 맴도는 것 같았다.

“괜찮아?”

평소와 다른 오소마츠의 태도에 발꿈치가 간지러웠다. 크진 않으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위화감에 토도마츠가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아.”

또다시 몇 초가 지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시선을 늘어뜨린 오소마츠가 비싯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지? 뭔가, 이상한데-.’

조금씩 커지는 위화감에 토도마츠의 시선이 오소마츠에게 머물렀다. 느릿느릿 이불에서 벗어나 계단으로 걸어가는 오소마츠의 뒤를 쫓으며 토도마츠는 이유 모를 위화감의 꼬리를 붙잡았다.



“으으~.”, “머리 아파….”, “으게엑─.” 하고 앓는 소리가 밥상을 둘러쌌다. 숙취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맛없다는 듯이 아침 식사하는 형제들 사이에 오소마츠가 멍청히 앉아있었다. 토도마츠의 시선은 오소마츠에게서 벗어날 줄 몰랐다. 오소마츠를 지켜볼수록 위화감은 더 커져만 갔다.

“오소마츠 형, 입맛 없어?”

“……?”

뭉그적거리며 밥을 먹는 형제들과 달리 오소마츠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젓가락을 보며 토도마츠가 물었다. 오소마츠는 소리도 내지 않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천천히 나른하게 눈을 내린 오소마츠가 “…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소마츠는 내키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듯 젓가락을 쥐고 밥을 입으로 가져갔다. 밥알을 셀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깨작깨작 식사하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이치마츠도 위화감을 느꼈는지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오소마츠 형, 어디 아파?”

이치마츠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짜 아픈 거 아니야?”

못 믿겠다는 투로 토도마츠가 재차 물었지만, 오소마츠는 여전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지만, 특별한 이상은 발견하지 못한 채 손을 되돌렸다.



식사가 끝나고 형제들은 어느 정도 숙취가 해소되었는지 각자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고양이 밥을 챙긴 이치마츠가 다소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고양이를 더 걱정했는지 쵸로마츠와 함께 현관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토도마츠도 집을 나설 생각이었다.

발목을 붙잡은 위화감만 아니었다면.


토도마츠는 놀러 가지 않겠냐는 친구 아츠시의 연락에 답장하며 오소마츠를 시야 구석에 담았다. 평소 식사량의 반의반도 먹지 못한 오소마츠는 멍청히 거실 구석에 앉아있었다.

‘아픈 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오소마츠를 볼 때마다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불안이 피어났다. 해답을 찾지 못한 수수께끼처럼 답답한 마음이 오소마츠에게 다가갈수록 커졌다.

“오소마츠 형,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몇 번째인지 모를 질문에 오소마츠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너희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그렇게 했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토도마츠는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절레절레 도리질하는 오소마츠를 붙잡고 그럼 왜 이러는 거냐고 외치고 싶은 충동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오소마츠 형아.”

오소마츠의 어깨를 붙잡으려던 토도마츠의 손이 멈췄다. 당연히 형제들처럼 외출한 줄 알았던 쥬시마츠가 자못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걸어왔다.

“쥬시마츠 형은 알아?”

‘오소마츠 형이 왜 이러는지.’

확실치 않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을 담아 물어도 쥬시마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손을 뻗어 오소마츠의 양 볼을 감싼 쥬시마츠가 이리저리 오소마츠의 얼굴을 살폈다.

“꿈이, 아니었구나….”

낮게 가라앉은 작은 혼잣말이 바닥을 기어 토도마츠에게 닿았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쥬시마츠의 얼굴은 꼭 오소마츠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꿈, 이 아니었어….”

“쥬시마츠 형?”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쥬시마츠의 모습에 불안이 한껏 짙어졌다. 귓가에서 쿵쿵 울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에 토도마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 박동에 맞춰 불안이 굽이쳤다. 어둠 속에서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손을 더듬는 것처럼 숨통을 옥죄는 답답함이 토도마츠를 덮쳤다.

“쥬시마츠 형.”

흘러나온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망연히 오소마츠에게서 손을 뗀 쥬시마츠가 몸을 일으켰다.

“형아들, 찾아야 해…. 빨리.”

울음을 참고 결연하게 뱉은 말에 토도마츠가 숨을 들이마셨다. 긴 소매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친 쥬시마츠가 “토도마츠, 빨리!” 하고 재촉했다. 왜 쥬시마츠가 이리도 초조해하는지 토도마츠는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로 토도마츠를 일으켜 세운 쥬시마츠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현관문을 벌컥 열어 달려 나갔다.


쥬시마츠가 떠난 현관에 멀거니 선 토도마츠가 거세지는 박동 소리에 떨리는 손을 그러쥐었다.

‘어, 라…?’

혼란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 작은 파편 하나가 박혔다. 어둠 속을 더듬던 손에 뭔가가 잡혔다. 토도마츠가 파칭코로 딴 돈을 들고 찾은 치비타의 오뎅 마차. 그곳에서 한껏 마셨던 기억이 뚝 끊겨있다. 억지로 잘라낸 끈처럼 우둘투둘한 끝을 잡아낸 토도마츠가 홱 고개를 돌려 웅크려 앉아있는 오소마츠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울렸다.

“좋아, 가져가.”




2.


항상 시간을 보내는 다리 위, 카라마츠가 문득 한숨을 흘렸다. 숙취로 지끈거리던 머리는 한층 나아졌지만, 어쩐지 알 수 없는 불쾌함이 남아있었다. 흘러가는 강물을 멍청히 바라보던 카라마츠가 시선을 내렸다. 길가에 눌어붙은 껌처럼 검은 뭔가가 머릿속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흐르는 물줄기처럼 오소마츠가 아른거렸다.

밥을 깨작거리던 오소마츠를 떠올린 카라마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답지 않게 꼭 혼이 나간 얼굴로 밥을 먹던 오소마츠를 토도마츠와 이치마츠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처럼 숙취가 심해 저런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상하게 오소마츠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아파도 티를 잘 안 내니.’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오소마츠는 가족 앞에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상태가 심해져 혼자 방에 널브러져 앓고 있던 걸 발견한 게 몇 번인지. 불쑥 고개를 든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구둣발이 땅에 부딪히며 탁탁탁 소음을 냈다.

혹 상태가 안 좋은 것인가,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가. 수많은 추측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흘러가는 강물에 띄워진 질문들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내려갔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카라마츠가 난간에 기댔던 몸을 뗐다. 찡그린 얼굴로 어젯밤의 기억을 헤집은 카라마츠가 입을 꾹 다물었다. 토도마츠가 딴 돈으로 먹고 마셨던 어젯밤. 공짜 술에 다들 주량을 넘겼었다. 술이 약한 카라마츠도 분위기에 들떠 맥주를 몇 잔이고 들이켰다.

‘그러다 곯아떨어졌고, 그리고….’

이어진 수순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모두 쓰러져 잠들었을 거고, 치비타가 잠든 틈을 타서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게 다였을 것이다. 그런데 찐득하게 달라붙은 불안은 그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무엇이, 있었지?’

눈을 굴리며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부풀어 오른 불안이 기억을 가져왔다. 술에 취해 잠들기 직전, 검은 남자를 본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그 남자는 오소마츠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기억에 카라마츠가 인상을 쓰고 남자의 생김새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흐릿하게 기억나는 것과는 달랐다. 꼭 남자의 얼굴에 검은 칠을 한 것처럼 자신이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소마츠를 향한 그 남자의 비릿한 미소뿐.

남자는 오소마츠를 보며 줄곧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기분 나쁜 미소로 뭔가를 말했다.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것에 깊은 불쾌감을 느꼈다. 지금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남자는 누구였지? 그리고 무슨 말을 했었지?’

남자는 한결같이 오소마츠만을 눈에 담았다. 꼭 자신들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검은 남자의 존재를 떠올린 카라마츠가 까득 이를 갈았다. 불안과 섞인 불쾌감이 전신을 감쌌다. 뭔가에 화풀이라도 하지 않으면 풀릴 것 같지 않은 기분 나쁨에 카라마츠가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떠났다.


터덜터덜, 카라마츠가 목적지 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집에 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이 기분으로 집에 간다면 귀여운 동생들에게 짜증을 낼 것 같았다.

‘파칭코? 아니면 경마장.’

뒷주머니에 꽂아둔 지갑을 의식하며 번화가를 향해 걷던 카라마츠가 저에게 달려오는 익숙한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 형아!!!”

크게 팔을 흔들며 달려온 쥬시마츠가 덥석 카라마츠 손을 붙잡았다.

“빨리, 집에!!”

다급하게 외치며 집을 향해 저를 끌어당기는 쥬시마츠 모습에 카라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쥬시마츠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을 보면 집에 큰일이 난 것 같았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신발을 잃은 쥬시마츠의 발 한쪽을 응시한 카라마츠가 숨을 들이 삼켰다.

쥬시마츠를 따라 집에 가야 하는데, 존재감이 커진 불쾌함이 카라마츠를 막아 세웠다.


순수하게 집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가슴이 아프도록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었다. 쥬시마츠와 함께 무거운 발을 움직여 집으로 향하는 동안 스멀스멀 올라온 불안이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거칠게 현관문을 열어젖힌 카라마츠가 숨을 멈췄다. 카라마츠를 스쳐 안으로 뛰어 들어간 쥬시마츠가 거실에 모인 형제들에게 다가갔다.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와 쵸로마츠가 오소마츠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름 끝자락에 걸친 날씨에 오소마츠는 두꺼운 옷과 목도리로 몸을 칭칭 싸매고 있었다.




3.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술렁거림은 라이브를 앞둔 탓이라 생각했다. 꼭 멀미한 것처럼 뱃속을 뒤집는 울렁거림을 애써 무시한 쵸로마츠가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손에 들었다.

“드라이몬스터가 무슨 일이래.”

화면에 뜬 ‘톳티’라는 글자에 쵸로마츠가 한쪽 눈썹을 찡끗거렸다. 형들을 팬티에 묻은 뭐 취급하는 막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치솟는 의심을 꾹 누르며 통화 버튼을 누른 쵸로마츠가 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집을 향해 뛰어가며 쵸로마츠는 자신에게 물었다. 정말 이런 거로 라이브도 포기하고 집으로 가야 하냐고. 평소라면 단번에 ‘NO’라고 대답했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뱃속에 움텄던 울렁임이 간절함으로 일변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간절함이 목을 조여왔다.


집에 도착한 쵸로마츠가 거실에 웅크리고 있는 오소마츠에게 다가갔다.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쵸로마츠를 반긴 토도마츠가 울먹였다.

“오소마츠 형이, 이상해….”

몸을 달달 떨며 중얼거린 토도마츠가 구원을 구하듯 쵸로마츠의 옷자락을 쥐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토도마츠에게서 넘어와 쵸로마츠를 둘러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쵸로마츠가 조심스럽게 오소마츠의 어깨를 흔들며 그를 불렀지만, 오소마츠는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다.

“오소마츠 형. 오소마츠 형! …오, 소마츠 형!!”

오늘따라 가녀리게 느껴지는 어깨를 강하게 흔들며 크게 외쳐도 오소마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현듯 해일처럼 몰려온 불안에 쵸로마츠가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오소마츠!”

“……응.”

반복된 부름에 간신히 대답이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힘없이 늘어진 목소리에 쵸로마츠의 얼굴이 구겨졌다. 무릎을 껴안고 고개를 든 오소마츠의 눈동자에 토도마츠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탁한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쵸로마츠조차 담지 못했다. 죽은 이의 그것처럼 초점 없이 허공에 걸린 눈을 마주한 쵸로마츠가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죽음’이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토도마츠의 훌쩍임을 밀어내고 오소마츠의 손을 잡은 쵸로마츠가 털썩 주저앉았다.

오소마츠의 손이 지나치게 찼다. 조금 전까지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하던 심장이 고요해지고 자신의 숨소리가 귓속에 울려 퍼졌다. 갈 곳 잃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을 때, 오소마츠의 희미한 목소리가 발치에 내려왔다.

“쵸로…, 츠. 나, 추…, 워.”

사그라지는 속삭임에 쵸로마츠가 황급히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미친 사람처럼 2층 방 벽장을 열고 그 안을 헤집어 겨울옷을 꺼낸 쵸로마츠가 오소마츠에게 두꺼운 옷을 둘러 주었다. 니트와 목도리, 장갑까지 오소마츠에게 입힌 쵸로마츠가 뒤통수를 뻐근하게 잡아당기는 기억에 이를 갈았다.



“네 영혼을 내게 줘.”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남자가 말했다.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오소마츠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4.


‘응냥냥냥’하고 소리를 내며 맛있게 습식 사료를 먹는 고양이들을 이치마츠가 가만히 응시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치마츠가 준비한 밥그릇이 텅 비었다. 배를 채운 고양이들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고 입맛을 다시며 이치마츠에게 다가왔다. “야옹~.” 하고 간드러지게 울며 다리에 몸을 비비는 고양이들을 쓰다듬은 이치마츠가 어젯밤 꿈에 본 붉은빛을 떠올렸다.

오소마츠의 심장 부근에서 작고 붉은빛이 빠져나갔다. 그 빛을 손에 쥔 남자는 만족스럽게 눈가를 휘며 웃고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도저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그 장면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꿈이겠지. 그게 현실일 리가….’

이치마츠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모든 것을 ‘꿈’이라 정했다. 섬뜩하게 웃던 그 남자도, 오소마츠에게서 빠져나갔던 그 빛도 모두 꿈속의 일이라고 치부했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가 잘못될 것만 같았다.


“꿈이야, 그건.”

자신에게 되뇌면 그것이 사실이 될 것처럼 이치마츠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빈 고양이 캔을 수거해 비닐봉지에 넣은 이치마츠가 슬리퍼를 끌며 공터를 빠져나왔다.

“집에 갈까….”

말로 꺼내 자신을 재촉한 이치마츠가 숨을 들이마시며 집으로 향했다.



‘챙’하고 빈 캔이 서로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모습에 이치마츠의 손에서 미끄러진 비닐봉지가 가라앉았다.

“현실이 아니어야 하는데….”

이치마츠의 혼잣말이 허공에 퍼졌다. 쵸로마츠는 수화기를 붙잡고 언성을 높여 상대방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쵸로마츠 목에 선 핏발을 멍청히 응시한 이치마츠가 활짝 열린 거실문 너머로 눈을 옮겼다.

왜 쥬시마츠와 토도마츠는 울고 있는 걸까, 왜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껴안고 있는 걸까, 왜 오소마츠는 이 날씨에 저렇게 옷을 껴입고 있는 걸까. 답을 찾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질문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실의 기묘한 풍경에 이치마츠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소마츠의 체온이 점점 내려가고 있다. 쵸로마츠가 데카판 박사에게 전화하고 있지만,”

갈라진 카라마츠의 낮은 목소리에 갈 곳 잃은 시선이 오소마츠에게 닿았다. 어느새 오소마츠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이치마츠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오소마츠의 얼굴을 매만졌다. 차가운 체온과 핏기없는 얼굴. 눈을 감고 있는 오소마츠가 시체처럼 보였다. 부정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그 자리에 얼어버린 이치마츠에게 울음 섞인 토도마츠의 말이 넘어왔다.

“깨워도 깨워도 자꾸 자려고 해, 오소마츠 형. 이대로 안 일어날 것처럼…!”

울컥 치솟은 눈물에 말을 끝맺지 못하고 엎드린 토도마츠의 등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소, 마츠 형…. 혀, 혀엉.”

불러보아도 오소마츠는 눈을 뜨지 않았다. 방황하던 손을 내린 이치마츠가 조심스럽게 오소마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크게 울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보다 훨씬 느리게 뛰는 오소마츠의 심장에 이치마츠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점점 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이 두려워 손을 뗀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의 손을 붙잡았다. 딱딱한 나뭇가지처럼 뻣뻣한 오소마츠의 손을 혹시나 부러지지 않을까 신중하게 붙잡은 이치마츠가 그 손에 기도하듯 이마를 대고 흐느꼈다.




5.


“준비 끝났대! 카라마츠!”

쾅,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쵸로마츠가 카라마츠를 불렀다. 오소마츠의 체온이 더 떨어지지 않도록 그를 안고 있던 카라마츠가 쵸로마츠가 내민 이불로 오소마츠를 꽁꽁 감쌌다. 이제 호흡까지 얇아지기 시작한 오소마츠를 둘러업은 카라마츠와 쵸로마츠가 데카판 박사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소에 도착하자 데카판이 준비된 방으로 오소마츠를 데려갔다. 호흡기와 여러 기계를 오소마츠에게 붙인 데카판이 화면에 표시되는 수치들을 심각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연구소에 오는 동안 완전히 잠들어버린 오소마츠는 완전한 혼수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원인도 알 수 없이 발생한 괴이한 증상에 데카판이 신음하는 동안 형제들은 오소마츠가 누워있는 침대 옆을 지켰다.

넋이 나가 초점조차 잡히지 않는 흐린 시야에 오소마츠를 담은 형제들을 본 데카판이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발명했던 여러 가지 기계들을 사용한 덕분에 증상의 원인을 찾아낸 것은 좋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했다. 푸후~, 큰 한숨을 내쉰 데카판이 손뼉을 쳐 형제들의 주의를 끌었다.

“원인을 알아냈다요.”

“그게 정말인가!? 데카판!”

“뭔데, 왜 오소마츠 형이 이렇게 된 건데!”

데카판의 말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카라마츠와 쵸로마츠를 간신히 밀어낸 데카판이 큼큼 헛기침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영혼이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요. 영혼이 없는 몸은 서서히 죽어간다요. 그러기 전에 빨리 오소마츠 군의 영혼을 되찾는다면 괜찮지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그 끝을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원인을 찾았다는 말에 반색하던 형제들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자 데카판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영혼만 되찾으면 된다는 거지?”

“그, 그렇다요.”

토도마츠의 날 선 목소리에 데카판이 한걸음 물러섰다.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형제들 모두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을 떠올렸다.


검은 남자.

치비타네에 찾아왔던 검은 남자. 그 남자를 찾아야 한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형제들이 데카판에게 오소마츠를 부탁한다며 의자에서 일어선 순간, 오소마츠 위에 떠오른 검은 공간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6.


수많은 시대와 수많은 세계를 스쳐 지나간 악마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느 세계로도 넘어갈 수 있는 검은 우주에서 나른하게 기지개를 켠 악마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응? 꽤 재미있어 보이는데?”

드래곤이나 마법, 영웅이나 용사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악마의 흥미를 끌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그 세계 속에서 작은 빛이 반짝였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욕망과 가지각색의 영혼을 접했지만, 이토록 구미가 당기는 영혼은 처음이었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작은 영혼에 시선을 고정한 악마가 입꼬리를 올렸다.

“뺏을까-.”

무척 마음에 든 영혼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악마는 차디찬 미소를 품고 날개를 펼쳤다.



“네 영혼을 내게 줘. 그렇지 않으면 네 옆에 있는 녀석들을 죽일 거야.”

악마가 말했다. 피처럼 붉은 악마의 눈동자가 따뜻한 빛을 발하는 영혼을 응시했다.


“그래, 좋아. 가져가.”

인간이 대답했다. 너무나 간단하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악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아. 이제 네 영혼은 내 것이야.”

순순한 인간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으나 영혼을 가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생각보다 쉽게 성사된 거래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가득 피운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손에 쥐었다. 따뜻하고 어쩐지 가슴을 가득 채워주는, 너무나 마음에 드는 작고 붉은 영혼을.




7.


“그랬는데 점점 빛을 잃어가더니 이젠 별 볼 일 없는 영혼이 되어버렸어~.”

악마가 손에 굴리던 작은 구슬을 앞에 내밀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공간에서 나온 검은 남자. 오소마츠의 영혼을 빼앗은 악마가 저를 노려보는 눈빛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제게 손 하나 댈 수 없는 무력한 인간 주제에 살기 가득한 눈을 한 녀석들이 퍽 우스웠다. 잘게 어깨를 떨며 웃은 악마가 고개를 기울였다.

“말해두겠는데 거래는 꽤 정당했다고? 나는 이 녀석에게 영혼을 빼내면 죽을 거라고 말해줬단 말이야─. 그래도 괜찮다고 한 건 이 녀석이니까?”

얇고 긴 꼬리를 살랑이며 말한 악마가 제 아래에 누워있는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거래는 확실했다. 영혼을 받는 대신 형제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게 성립된 거래였다.


하나 이상했던 것은 영혼을 빼앗기면서도 이 인간은 웃고 있었다는 점. 인간의 영혼을 빼앗은 적은 많았지만, 그런 미소를 본 적은 처음이었다. ‘왜?’ 하는 의구심과 호기심이 들었다. 그래서 악마는 영혼을 빼앗고도 이 세계를 떠나지 않고 이들을 지켜보았다.

“왜 점점 빛을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다니까─.”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악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을 잃은 몸이 죽어갈수록 악마가 손에 넣은 영혼도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 완전히 빛을 잃어 회색이 되어버린 영혼은 아무런 매력도 없는 쓰레기가 되었다.

“오소마츠 형의 영혼을 돌려줘!”

제가 뭘 상대하는지도 모르고 대차게 외친 인간을 향해 악마가 빙긋 웃었다.

“싫은데? 그리고 지금 내가 이 영혼을 돌려준다고 해도 이 인간은 죽을 거야.”

“뭐, 라고?”

“완전히 빛을 잃었잖아, 이거. 이렇게 되면 돌려주나 마나야.”

쓰레기가 되어버린 영혼은 그 주인의 몸을 되살리는 것조차 할 수 없다. 그대로 영혼을 버릴까 고민하던 악마는 작은 즐거움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들 앞에 나타났다. 악마는 제 말에 흔들리는 인간의 눈동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가 인간의 영혼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바로 ‘절망’이었다. 점점 짙어지는 절망에 악마가 즐겁게 날개를 파닥였다.

“어떻게 해야, 오소마츠 형을 살릴 수 있지?”

녹색 영혼의 인간이 포기하지 않고 흰 가운을 입은 인간에게 물었다. 공중에 떠서 턱을 괴고 인간들을 내려다보던 악마가 미세하게 빛이 돌아온 영혼에 눈을 깜빡였다.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아주 작은 빛이 돌아왔다. 악마가 손 위에 올려놓은 영혼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야릿한 미소를 피웠다.

“너희들의 영혼을 조금씩 나눠주는 건 어때? 이 인간은 살릴 수 있을지도. 대신 너희 수명이 깎이거나 몸이 이상해질지도 모르지만~.”

변덕스럽게 내뱉은 말이었다. 악마는 당연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오소마츠 형이 살아날 수 있다는 거야?”

“꽤 높은 확률로.”

“그럼 좋아.”

“허?”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 인간들을 보며 악마가 꼬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왜 너희도 그렇게 웃는 거야.”

홀연히 새어 나온 말을 인간들은 듣지 못했다. 자신의 형제를 살릴 수 있다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피운 얼굴로 악마를 올려다보는 그들이, 악마는 너무나도 이상했다.

“수명이 줄어들어도, 몸에 이상이 생겨도 좋아?”

“괜찮다! 오소마츠를 살릴 수 있다면.”

푸른 영혼을 가진 인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가 넘실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놈들.”

단번에 즐거움이 날아가 버렸다. 악마는 차가운 얼굴로 다섯 인간의 영혼 조각을 떼어냈다. 빛을 잃은 회색 영혼에 다섯 개의 영혼 파편이 스며들자 악마가 탐냈던 붉은빛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악마의 손을 떠난 영혼은 자석에 끌리듯 주인의 몸으로 돌아갔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죽음이 사라진 눈동자가 빛을 발하자 오소마츠 주변에 모여있던 형제들이 환호했다.

“오소마츠!!”

“오소마츠 형!”

저를 부르는 동생들을 한 명씩 껴안은 오소마츠가 젖은 눈가를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7.


다 함께 얼싸안고 웃는 인간들을 내려다본 악마가 혀를 찼다. 붉은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뺏으려면 여섯 개를 모두 뺏어야 했던 건가-.”

다섯 색의 영혼에 둘러싸여 가장 탐스럽게 빛나는 붉은빛을 보며 한탄한 악마가 검은 공간 속으로 몸을 날렸다.



‘저 녀석들에게는 손대지 않는다고 거래해버렸으니…. 실수다, 실수.’

몇백 년 만에 저지른 실수에 한숨을 내쉰 악마가 검은 우주로 사라졌다.





* 여기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짧은 한 문장이라도 댓글 남겨주시면 글 쓰는데 많은 힘이 됩니다. 여유가 있으시다면 남겨주세요ㅎ




* 오랜만의 카라오소 단편인데 굉장히 건조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 전지적 관찰자 시점. 다큐멘터리의 나래이션 느낌으로 썼습니다.

* 장형과 동생들이 나이차 형제입니다.

* 공미포 5,366자.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눈앞에서 풀을 뜯는 토끼를 노려보던 인랑 아성체(새끼와 성체의 중간)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막 유년기를 벗어난 인랑 ‘붉은 천둥 (Red thunder)’. 희귀한 자연림과 넓은 들판으로 이루어진 파인 필드 (pine field)를 영역으로 삼은 인랑 가족의 장남이다.

바람에 실려 온 낯선 냄새에 붉은 천둥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동그랗게 뜬 눈에 비친 두려움이 붉은 천둥의 발을 묶었다.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야생에서 낯선 냄새는 곧 위험을 뜻했다. 붉은 천둥이 사냥을 중단하고 가족이 있는 굴로 향했다.

파인 필드에 존재하는 인랑족은 붉은 천둥의 가족뿐이었다. 우두머리 부부와 이제 막 아성체가 된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 (Blue fang), 지난달에 태어난 세 마리의 새끼들이 파인 필드가 품은 인랑족이었다. 지금까지는.


이제 막 눈을 뜬 새끼들을 굴속 깊숙이 밀어 넣은 우두머리 부부와 붉은 천둥이 초원에서 합류했다. 푸른 송곳니는 새끼들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듬성듬성 난 긴 풀더미 사이로 밀려오는 냄새는 적의에 가득 차 있었다. 100m 정도 떨어진 언덕에 침입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식지를 찾아 떠돌다 무리를 이루었는지 침입자들의 나이와 덩치는 모두 달랐다. 침입자 무리를 이끄는 것은 얼굴의 커다란 흉터를 가진 ‘스카페이스’였다. 검은 털을 가진 스카페이스 뒤로 젊은 남성체 셋과 여성체 둘, 아성체 셋이 나란히 섰다. 아성체를 제외한다 해도 침입자들의 수는 여섯이, 그들을 이끄는 스카페이스는 비열하고 강한 개체였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의 결말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침입자 무리가 먼저 울기 시작했다.

석양으로 물든 하늘로 울려 퍼진 하울링에 붉은 천둥과 우두머리 부부가 이를 드러냈다. 윗입술을 비틀어 잇몸까지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우두머리 부부를 향해 침입자 무리가 돌진했다. 붉은 천둥의 아버지와 스카페이스가 충돌했다. 침입자 무리의 여성체 둘과 붉은 천둥의 어미가 뒹구는 사이 붉은 천둥에게 젊은 인랑 남성체 셋이 달려들었다.


초원에 밤의 장막이 내려앉았을 때, 전쟁이 끝났다. 힘을 잃고 풀 위에 쓰러진 부모를 등진 붉은 천둥이 굴을 향해 뛰었다. 앞을 가로막는 젊은 인랑의 다리를 물어뜯고 도망치는 붉은 천둥의 뒤를 젊은 인랑 둘이 쫓았다. 아성체의 작은 몸집을 이용하여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겨 추격자를 따돌린 붉은 천둥이 푸른 송곳니가 지키고 있는 굴에 들어갔다.


곧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가 새끼들을 데리고 굴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2.


인간의 마을이 있는 북쪽 숲에 붉은 천둥은 자리를 잡았다. 파인 필드보다 먹이가 적은 혹독한 환경에서 아성체 둘과 새끼 세 마리가 생존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붉은 천둥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에 굴을 파는 대신 작은 동굴을 주거지로 삼았다. 작은 동굴 입구 주변에 나뭇가지와 풀을 쌓아 위장하고 두려움에 떠는 새끼들을 달랜 붉은 천둥이 밖으로 나왔다. 그를 따라 나온 푸른 송곳니를 동굴로 밀어 넣은 붉은 천둥이 사냥을 나섰다.

침입자들이 있었던 북쪽은 인간의 마을이 근처에 있는 탓에 천적이 없었다. 하지만 벌목으로 작아진 숲은 몸을 숨길 장소가 많지 않았고, 먹이가 될 동물도 적었다. 은신처로 삼은 작은 동굴에서 1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인간의 마을이 있었다. 붉은 천둥이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발을 돌렸다.

파인 필드와 달리 북쪽에는 토끼, 족제비, 들쥐 정도의 작은 사냥감밖에 없었다. 붉은 천둥과 그의 형제들이 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사냥해야 했다.

주변의 지리를 익히고 간신히 작은 쥐 하나를 잡은 붉은 천둥이 동굴로 돌아갔다. 붉은 천둥의 어두운 얼굴을 본 푸른 송곳니가 다가오자 붉은 천둥이 사냥감을 건넸다. 새끼들에게 먹이기도 부족한 양이었다. 작은 쥐를 나누어 새끼들에게 나누어준 붉은 천둥이 새끼들 곁에 누웠다. 내일의 사냥을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새끼들을 보호하듯 감싸 안은 채 잠든 붉은 천둥이 고향을 그리며 작게 흐느꼈다.


날이 밝았다. 저들끼리 장난치던 새끼들이 굶주림에 칭얼대기 시작했다. 어젯밤 잡아 온 작은 쥐는 충분한 먹이가 되지 못했다. 동굴을 나온 붉은 폭풍이 다시 사냥을 나갔다. 만에 하나라도 북까지 쫓아올 추격자를 대비해 푸른 송곳니는 동굴을 떠날 수 없었다. 우두머리 부모가 있을 적엔 협동하여 큰 사냥감을 잡을 수 있었다. 사슴을 잡아 새끼들과 자신까지 배부르게 먹던 시절을 떠올린 붉은 천둥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북은 척박한 환경을 증명하듯 먹잇감이 너무나 적었다. 오전 내내 돌아다녔지만 수확은 들쥐 하나였다. 동굴에서 새끼들을 지키고 있는 푸른 송곳니에게 먹잇감을 전달한 붉은 천둥이 숲 깊숙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오만가지 냄새 중에서 사냥감의 체취를 잡아낸 붉은 폭풍이 토끼굴을 발견했다. 운이 좋다면 어미와 새끼까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토끼굴을 파헤치는데 집중한 나머지 붉은 천둥은 뒤에서 달려오는 멧돼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간발의 차로 붉은 천둥을 스쳐 지나간 멧돼지의 날카로운 엄니에 붉은 천둥이 훌쩍 뒤로 물러섰다.

붉은 천둥의 두 배를 넘는 덩치의 멧돼지가 발을 굴렀다. 멧돼지는 쉽지 않은 사냥감이었다. 인랑 성체 셋이 달라붙어야 잡을 수 있는 먹잇감이었다. 성난 멧돼지의 숨소리에 붉은 천둥이 몸을 움츠렸다. 꼬리를 다리 사이에 숨긴 붉은 천둥이 때를 보다가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멧돼지는 붉은 천둥을 뒤쫓지 않았다. 붉은 천둥은 무사히 도망친 뒤에도 사냥을 이어갔지만, 오늘도 들쥐 한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터덜터덜 동굴로 향하는 붉은 천둥의 눈에서 희망이 사라져갔다.




3.


북쪽에 자리를 잡은 지 2주가 지났다. 흰 토끼를 잡아서 돌아온 붉은 천둥을 새끼들이 반겼다. 처음 북쪽에 왔을 때보다는 사냥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잡아 오는 먹잇감은 가족이 나누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서로 더 먹겠다며 싸우는 새끼들을 보며 한숨을 내쉰 붉은 천둥 옆에 푸른 송곳니가 앉았다.

붉은 천둥과 그의 형제들이 태어난 해는 유달리 먹이가 부족했다. 능숙한 사냥꾼이었던 우두머리 부부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다섯 마리의 새끼 중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만이 살아남았다. 다음 해에 태어난 네 마리의 새끼가 붉은 천둥의 동생들이었다.

몰려온 피로에 가만히 앉아있는 붉은 천둥의 뺨을 푸른 송곳니가 핥았다. 숲을 뛰어다니다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를 핥아 준 푸른 송곳니가 붉은 천둥과 교대하듯 사냥을 나갔다.

잡아 온 토끼는 금세 사라졌다. 새끼들은 토끼 한 마리로 간신히 주린 배만 달랬다. 북쪽에서 이들은 생존할 수는 있어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통통했던 새끼들의 배는 홀쭉해지고 마른 갈비뼈가 드러나 있었다. 허기를 참으려 잠든 새끼들을 내려다보던 붉은 천둥이 동굴을 나왔다.

푸른 송곳니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쥐를 잡으려 강하한 매를 노렸지만, 매의 발톱에 팔을 긁히고 놓치고 말았다. 저녁이 없으니 내일 새끼들의 칭얼거림이 커질 것이다. 꼬리를 땅에 질질 끌며 돌아온 푸른 송곳니가 동굴 앞에 앉아있는 붉은 천둥에게 걸어갔다.

푸른 송곳니의 기척에 붉은 천둥이 깊이 고개 숙였다. 보름달 아래 두 마리의 인랑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있었다.


위장을 뒤트는 허기에 새끼들이 울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사냥철이 시작된 이후로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는 허탕만 쳤다. 인간들의 총성에 먹잇감들의 경계가 높아져 들쥐조차 쉽게 잡을 수 없었다. 새끼들을 달래는 푸른 송곳니를 남겨두고 붉은 천둥이 동굴을 나섰다.

망설임 끝에 붉은 천둥이 인간 마을 근처로 내려왔다. 항상 먹이가 부족한 붉은 천둥의 가족과 달리 인간들은 굶주리는 일이 없었다. 밤이 내려오자 붉은 천둥이 조심스럽게 마을로 들어갔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를 손에 넣은 붉은 천둥이 한숨 돌리자마자 인기척이 들렸다. 놀란 붉은 천둥이 튀어 나가다 작업대와 부딪친 바람에 커다란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쇠가 부딪치는 소리에 마을이 서서히 밝아지고 곧 인간들이 몰려왔다. 마을의 명사수로 소문난 사냥꾼이 총을 붉은 천둥에게 겨누었다.

크고 날카로운 소리를 등지고 달린 붉은 천둥이 상처 입은 팔을 잡고 숲으로 도망쳤다. 힘들게 구한 고기도 버리고 깊은 숲속에 숨어 무사히 인간을 따돌린 붉은 천둥이 작은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린 붉은 천둥이 쓰러졌다. 그에게 달려온 푸른 송곳니가 붉은 천둥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하고 붉은 천둥을 안아올렸다. 새끼들이 붉은 천둥을 둘러싸고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천둥을 목격한 인간들은 괴물을 죽이기 위해 숲을 뒤집기 시작했다. 항상 들려오던 새소리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푸른 송곳니가 동굴을 빠져나가 숲을 크게 돌았다. 자칫 잘못하면 인간에게 발견될 수도 있었지만, 푸른 송곳니는 숲의 그림자에 숨어 약초를 뜯어 돌아왔다.

약초를 씹어 붉은 천둥의 상처에 밀어 넣은 푸른 송곳니가 얼굴을 찌푸렸다. 붉은 천둥 주변을 맴돌던 새끼들이 울다 지쳐 잠들자 동굴 안이 고요해졌다. 출혈로 인해 붉은 천둥의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푸른 송곳니는 말없이 붉은 천둥의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자 다행히 붉은 천둥이 눈을 떴다. 푸른 송곳니가 구해온 약초가 효과가 있었는지 출혈도 멈추고 열도 나지 않았다. 내내 뜬눈으로 그의 옆을 지킨 푸른 송곳니가 붉은 천둥에게 얼굴을 비볐다. 푸른 송곳니가 울고 있는 것을 깨달은 붉은 천둥이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는 다른 이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대화하며 서로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은 인랑을 잡기 위해 무기를 들고 숲을 수색했다. 더는 북쪽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한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는 인간들의 수색이 잠잠해진 어느 날 밤, 새끼들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향했다.




4.


인랑들에게 가장 위험한 곳으로 손꼽히는 북동쪽의 ‘잿빛 평원’은 북쪽보다 기후가 혹독하고 많은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었다. 인랑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뿔을 가진 엘크와 들소의 서식지이며 인랑의 천적인 곰이 자주 출몰했다.

우두머리 부부가 없는 인랑 가족에게는 최악의 환경이지만, 붉은 천둥의 가족에겐 이곳밖에 남지 않았다. 최후의 보루가 된 ‘잿빛 평원’에 인랑 가족이 새터를 잡았다.


붉은 천둥의 가족이 운 좋게 버려진 굴을 찾아 주거지로 삼은 지 며칠이 지나자 잿빛 평원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평원에 매서운 겨울이 왔다.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는 겨울을 대비해 필사적으로 사냥을 이어갔다. 어쩌다 평원에 들어온 작은 들짐승부터 죽을 위험을 감수해가며 엘크와 들소까지 가리지 않고 사냥했다. 아성체에서 서서히 성체의 몸으로 변해가는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의 얼굴과 몸에 사냥으로 인한 상처가 늘어났다.

사냥을 반복할수록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의 사냥 전략은 치밀해졌습니다. 두 마리가 협동하여 잿빛 평원 가장자리에 있는 절벽으로 사냥감을 몰아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거나, 엘크 무리로 달려가 혼란을 만들어 도망치던 엘크 무리에 밟혀 죽은 동물을 먹이로 삼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뿔에 받히거나 발굽에 밟혀 죽을 수도 있었지만,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는 사냥을 반복하며 점점 영리하고 노련해졌다.


처음으로 큰사슴을 사냥해 돌아온 저녁,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는 서로 얼굴에 난 상처를 핥아주었다. 얼굴을 핥아주고 코를 가볍게 깨무는 행동은 인랑족 사이에서도 가장 친근한 상대에게만 보여주는 것이었다. 부쩍 큰 새끼들이 사슴을 먹는 동안 주변을 경계하는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는 어느새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서 있었다.




5.


기록적인 한파를 가져왔던 겨울이 지났다. 고요한 잿빛 평원을 건너 붉은 천둥과 그의 형제들이 살았던 굴은 텅 비어있었다. 부모 없이 살아가야 했던 인랑 형제들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3일 뒤, 땅을 울리며 도망치는 엘크 무리를 뒤쫓는 인랑 가족이 발견되었다. 참혹했던 겨울을 버텨낸 형제들은 아성체로 성장했다. 능수능란한 사냥꾼이 된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가 사냥을 지휘하고 아성체가 된 형제들이 엘크를 쫓았다. 잿빛 평원에서 쉽지 않은 사냥을 이어간 여섯 마리의 인랑은 쉽게 엘크 한 마리를 넘어뜨렸다. 새끼들이 엘크의 발을 묶어놓은 사이 푸른 송곳니가 엘크의 배를 가격했고 붉은 천둥이 엘크의 목을 물어 끝냈다.

사냥한 엘크 한 마리로 만찬을 든 여섯 마리의 인랑이 잿빛 평원을 떠나 그들의 고향 파인 필드로 향했다.


한편 파인 필드에서는 스카페이스의 독재로 동물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먹이가 풍족한 파인 필드에서 인랑족은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했다. 인랑족 외에도 여우와 코요테, 회색 늑대 같은 포식자가 있었지만 스카페이스는 다른 종족과 먹이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배가 불러 남긴 고기를 잡아채는 여우를 물어 죽인 스카페이스는 여우뿐 아니라 늑대와 코요테까지 파인 필드에서 몰아냈다. 포식자가 줄어든 파인 필드는 뜻하지 않은 초식동물의 증식이 일어났다. 포식자와 먹잇감이 균형이 무너진 파인 필드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지키는 쪽과 빼앗으려는 쪽. 입장이 바뀐 인랑족 무리가 파인 필드에서 만났다. 고향을 되찾으러 돌아온 붉은 천둥 가족이 이를 드러내고 꼬리를 바짝 세웠다. 스카페이스 무리는 그의 폭정에 수가 여섯 마리로 줄어있었다. 하지만 붉은 천둥의 가족은 아성체 새끼가 넷인 데 반해 스카페이스 무리는 모두 성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함부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작은 전쟁이 시작되었다. 스카페이스와 남아있던 남성체 인랑이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에게 달려들었다. 네 마리의 격렬한 싸움에 합류를 망설이던 여성체 인랑들에게 붉은 천둥의 형제들이 뛰어들었다.

스카페이스와 그의 무리는 승리를 예상했지만, 결투는 그가 바란 대로 풀리지 않았다. 잿빛 평원에서 엘크와 큰사슴을 사냥하던 붉은 천둥의 가족은 큰 어려움 없이 스카페이스의 무리를 제압했다.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가 스카페이스에게 달라붙어 그의 목을 물어뜯어 파인 필드를 차지하기 위한 작은 전쟁을 끝냈다.


불가능처럼 보였던 역경을 이겨내고, 자랑스러운 인랑족의 우두머리가 된 붉은 천둥과 푸른 송곳니가 파인 필드의 주인이 되었다.




6.


“혼자 모든 것을 떠안으려 하지 말아라.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아.”

“응, 미안….”

“나는, 네 의지가 될 수 없는 건가? 이대로 네가 영영 내 곁을 떠나버린다면, 나는….”

“미안, 미안해.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시고, 저 녀석들은 어리니까….”

“나도 너와 같아…. 내가 함께할 테니까, 조금만 나를 믿고 의지해줘. 우리 둘이 같이 힘낸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응, 고마워.”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에 올릴 글은 오소른 50제가 될 것 같아요.

* 감기와 독감이라는 2개 키워드가 비슷해서 하나로 묶어서 썼습니다.

*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요즘 글 쓰는 거에 슬럼프 비슷한 게 와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ㅠ

* 공미포 15,476자.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소른 50제


03. 감기/독감 (쵸로오소/오소른)   눈송, 똑똑 님 신청 키워드.



1.

 

거대한 드래곤 무리가 줄 맞춰 날아가는 장대한 천장화(천장에 그려진 그림) 아래, 공중을 떠다니는 고서(古書)들이 하나씩 자기 자리를 찾아 책꽂이에 안착했다. 양피지에 적힌 목록을 확인하며 지팡이를 가볍게 튕겨 고서들을 모두 정리한 쵸로마츠가 큰 숨을 내쉬었다.

이 거대한 서고의 관리자인 쵸로마츠에게 신입 사서들이 추가로 들어온 책을 짊어지고 다가왔다. 오래된 책들, 폐기할 책들, 지하의 보관소에 넣을 책들을 모두 정리하자 겨우 책꽂이에 빈 곳이 생겼다. 신입 사서들이 책을 꽂는 모습을 지켜본 쵸로마츠가 뒤에서 들려오는 신음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해 놓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우우~.”

쵸로마츠의 싸늘한 말투에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 더미에 파묻힌 오소마츠가 울상을 지었다.

휴가 못 받아도 난 모르니까.”

쵸로마츠가 높이 솟은 서류더미의 맨 위에 올려진 리포트 하나를 집어 차락차락 소리가 나도록 넘겨보며 오소마츠에게 쏘아붙였다.

싫어~! 모처럼 카라마츠가 돌아오는데 나 혼자 휴가 못 받는 거 싫다구우~!!”

어휴~.”

서류가 구겨지도록 꽉 붙잡고 징징대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쵸로마츠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발까지 동동거리면서 투정하는 저 모습은 도저히 성인 남성으론 보이지 않았다. 깊이 한숨을 내쉰 쵸로마츠가 의자를 가져와 오소마츠 옆에 엉덩이를 내렸다.

조금만 도와줄 테니까.”

쵸로 씌~!! 싸룽해!!”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눈을 빛내며 손을 맞잡았다.

데카판 교장 선생님에게 낼 서류만 내가 할 테니까 학생들 리포트는 제대로 오소마츠 형이 평가해! 딱 이것만 도와줄 거니까!”

눈 반짝반짝 빛내며 뭔가를 더 기대하고 있을 오소마츠에게 넘어가지 않은 쵸로마츠가 선언했다. 어릴 적부터 함께 해 왔기에 오소마츠의 생각은 전부 꿰뚫고 있는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의 불평도 무시하고 서류에 손을 뻗었다.

 

 

환상의 동물인 드래곤이 실존하며, 온갖 놀라운 마법이 존재하는 나라인 아카츠카에는 유명한 육둥이가 있었다. 여섯의 일란성 쌍둥이는 아카츠카국에서도 흔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육둥이 전원이 놀라운 마법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육둥이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똑같은 얼굴에 수준급의 마법 실력을 갖춘 형제들은 우애도 좋았다.

쵸로마츠는 드물게 일에 집중하는 오소마츠의 옆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드래곤 연구가로서 전국을 여행하는 카라마츠가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형제들 모두 휴가를 받아냈다. 한적한 시골 마을로 내려간 부모님 없이 처음으로 형제들끼리 보내게 된 휴일을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육둥이의 장남인 오소마츠가 제일 기뻐했다. 형제들 모두 휴가를 맞춰 함께 휴일을 보내자는 제안도 오소마츠가 처음 낸 것이었다.

눈 아래 검은 기미까지 만들며 서류 더미를 하나씩 줄여가는 오소마츠를 보며 쵸로마츠도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2.

 

아임 홈~! 디어 마이 브라더-!”

후암~. 어서 와, 카라마츠 형.”

아침 해가 산 밖으로 완전히 얼굴을 내놓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카라마츠가 외쳤다. 씩씩한 카라마츠의 외침에 토도마츠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연핑크에 귀여운 토끼 무늬가 그려진 파자마를 입고 나온 토도마츠가 주방에 들어가 물을 끓이자마자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로 나온 쥬시마츠가 카라마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라마츠 형아~! 좋은 아칠, , 삼에~, 머슬머슬! 허슬허슬!”

! 굿 모닝이다, 쥬시마츠!!”

있는 힘껏 달려든 쥬시마츠를 가볍게 받아낸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와 미소를 나눴다. 시럽이 잔뜩 들어간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주방에서 나온 토도마츠가 둘의 모습을 보며 어깨에서 흘러내린 카디건을 끌어올렸다.

카라마츠 형, 이번에 언제까지 있다가 가는 거야?”

-, 아마도 3일 후가 될 것 같다.”

“3!? 더 오래 머물다 가는 거 아냐?”

어색하게 눈을 돌리며 대답하는 카라마츠의 말에 토도마츠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랜만에 형제가 모두 모여 지내는 휴일인 만큼 더 오래 머물 거로 생각했던 토도마츠가 눈을 깜빡였다. 카라마츠에게 매달려 있던 쥬시마츠도 토도마츠에게 동의하며 , !”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미안하다. 마이 리를 브라더즈-. ‘카시아지방의 불법 경매에 부모를 잃은 드래곤 알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드래곤 알이 배드 가이즈 손에 들어가면 큰일이니까.”

일 때문에 빨리 가야 한다는 거잖아! 나는 휴가 5일 치 받아 놨는데!”

, 다음에! 다음엔 정말로 오래 머물다 가겠다.”

토도마츠가 팩 인상을 찌푸리자 카라마츠가 진땀을 흘리며 그를 달랬다.

, 대신 오늘 아침은 내가 준비하겠다! 샐러맨더의 에그후라이, 토도마츠는 좋아하지?”

, 좋아하지만.”

입을 삐죽 토도마츠에게 싱긋-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카라마츠가 가방에서 커다란 알 하나를 꺼냈다. 깨뜨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알을 안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카라마츠를 따라 시선을 옮긴 토도마츠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오소마츠 형, 화낼걸? 청 기대했단 말이야. 이번 휴가.”

, 그렇군. 형님에겐 내가 잘 말하겠다.”

프라이팬을 꺼내 요리를 시작하는 카라마츠를 보며 토도마츠가 식탁에 앉아 턱을 괴었다. 짙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하하.” 마른 웃음을 터뜨린 카라마츠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소마츠가 깨어나 상황을 알고 나서 쏟아낼 칭얼거림을 예상한 토도마츠가 지팡이를 들었다.

카라마츠가 요리를 끝낼 즈음 간단하게 거실을 청소하던 토도마츠도 지팡이를 거두었다. 식탁에 카라마츠와 쥬시마츠, 토도마츠가 둘러앉아 카라마츠가 내온 음식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셨다. 엄마의 특제 요리에 자신만의 비법을 추가한 카라마츠의 요리는 이색적이면서도 제법 맛이 있었다.

슬슬 쵸로마츠 형이랑 이치마츠 형이 일어날 때가 되었는데.”

빵 사이에 계란과 치즈를 끼워 한입 크게 베어먹은 토도마츠가 닫힌 거실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토도마츠의 말에 쥬시마츠가 힐끗 벽시계를 보고 귀를 기울였다.

! 쵸로마츠 형이랑 이치마츠 형 온다.”

양반은 못 된다니까-.”

쥬시마츠의 말에 토도마츠가 피식- 웃으며 다시 빵을 물었다.

후암~. 좋은 아침.”

좋은 아침.”

!! 굿 모닝, 마이 프레셔스 브라더즈!!”

늘어지게 하품하며 들어오는 쵸로마츠와 질질 실내용 슬리퍼를 끌고 허리를 굽은 채 걸어오는 이치마츠에게 카라마츠가 활짝 미소를 피웠다. 반갑게 손까지 흔드는 카라마츠에게 인사하며 식탁에 앉은 쵸로마츠를 따라 이치마츠가 살벌하게 혀를 차며 쥬시마츠 옆에 엉덩이를 내렸다.

, 아침부터 개똥마츠 얼굴을 봐야 한다니 최.”

.”

카라마츠, 내 몫은?”

.”

혀를 차는 이치마츠와 아침 식사를 우선하는 쵸로마츠에 치여 카라마츠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방에 들어가 쵸로마츠와 이치마츠 몫을 들고 나온 카라마츠가 아직 비어있는 의자에 눈을 고정했다.

형님은?”

오소마츠 형은 일어나려면 멀었어. 점심 때 지나서 오후에나 일어나니까, 휴일에는.”

오늘 카라마츠 온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여간 망할 장남.”

토도마츠의 대답에 쵸로마츠가 얼굴을 찌푸렸다. 빵가루가 묻은 손을 탁탁 털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쵸로마츠가 오소마츠의 방을 향했다.

 

 

오소마츠 형! 언제까지 잘 거야! 벌써 카라마츠 와 있다구!”

으으,”

이불을 홱 젖히는 쵸로마츠의 외침에 오소마츠가 몸을 웅크렸다. 굼실대는 오소마츠를 흔들어 깨우려고 손을 뻗은 쵸로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깨에 닿은 손으로 전해지는 열이 심상치 않았다.

오소마츠 형, 열 있어?”

, -. 쵸로마츠~.”

길게 늘어져 처진 목소리에 희미한 열이 담겼다. 눈살을 찌푸린 쵸로마츠가 조급하게 오소마츠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쵸로마츠, 형님은 일어났나?”

정상 범주를 벗어난 체온을 감지하고 쵸로마츠가 허리를 펴자마자 카라마츠가 때맞춰 오소마츠 방으로 들어왔다.

오소마츠 형, 감기 걸린 것 같아.”

.”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쵸로마츠의 말에 카라마츠가 놀라 침대 옆으로 뛰어왔다. 쵸로마츠의 손이 떠난 오소마츠의 이마에 카라마츠의 손이 닿았다.

“OH.”

뺏었던 이불을 목까지 덮어준 쵸로마츠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곁을 지키는 사이 쵸로마츠가 이치마츠와 함께 돌아왔다.

역시. 그러니까 말했는데.”

? 무슨 말인가, 이치마츠.”

오소마츠를 보자마자 한숨을 내쉰 이치마츠의 말에 카라마츠가 되물었다. 오소마츠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확인한 이치마츠가 작게 대답했다.

휴가 받아야 하는데 일이 많다고 불평했었잖아, 오소마츠 형. 밤새워서라도 일 끝내겠다고 나한테서 약 받아갔거든.”

하아!? 그러니까 미리미리 일 처리해두라니까! 이치마츠 약이라면 설마 그거?”

쵸로마츠의 얼굴에서 우려가 사라지고 분노가 떠올랐다. 이치마츠와 눈을 맞추고 일전에 먹었던 약의 끔찍한 맛을 떠올린 쵸로마츠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치마츠가 심심해서 만들었다던 자양강장제는 효과는 뛰어났지만, 그 맛이 몸을 비비 꼴 정도로 끔찍했다. 한 모금 마시기도 힘든 그 약을 오소마츠는 밤샘을 위해 몇 병이나 들이켰다는 말에 쵸로마츠가 입을 쩍 벌렸다.

, 그 부작용으로 감기에 걸린 건가. 이 바보 장남은.”

아마도.”

어이없이 흘린 쵸로마츠 말에 동의한 이치마츠가 느긋하게 눈을 깜빡였다.

, 오소마츠 형이 달라는 대로 준 내 잘못도 있으니까-. 치료 약 만들게.”

고마워~, 이치맛쨩.”

차분하게 내려앉은 이치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힘겹게 미소를 피웠다. “으이그.” 하고 한탄하며 쵸로마츠가 찬물이 든 물컵을 오소마츠에게 내밀었다.

일단 목 좀 축이고 누워있어. 죽이라도 만들어 줄게.”

역시 나의 쵸로 씌는 상냥하네~.”

헤헤, 멋쩍게 웃으며 물컵을 받아든 오소마츠가 , 히이-.”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케후힛!!”

.”

?”

?”

올라오는 기운에 물컵을 꽉 붙잡고 성대하게 기침을 내뱉은 오소마츠가 돌연 뿌연 연기에 휩싸였다. 침대 한가운데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에 동생들이 놀란 사이 서서히 사라지는 연기 속에서 작은 동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큐이?”

 

 

 

 

 

3.

 

큐우!? , 아니! 큐우가 아니라!!”

가만히 털로 덥힌 손을 내려다보던 오소마츠가 버럭 소리 질렀다.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은 레서 판다가 된 오소마츠였다.

하아?! 아픈 사람이 왜 변신술 같은 거 쓰는 거야!? 얼른 돌아와!”

갑자기 모습을 바꾼 오소마츠를 향해 쵸로마츠가 버럭 성을 내자 오소마츠가 흔들리는 눈으로 쵸로마츠를 응시했다.

, 마법 안 썼어.”

?”

절망이 섞인 오소마츠의 대답에 쵸로마츠가 눈썹을 세웠다. 처량하게 귀와 꼬리를 추욱 늘어뜨린 오소마츠(레서 판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법을 안 썼는데 왜 몸이 변해.”

, 나도 몰, 케췻!”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상을 지은 오소마츠가 기침하자 또다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형님, 이번엔 펭귄이다.”

에엑!? 나 진짜로 마법 안 썼어!!”

목에 앙증맞은 스카프를 두른 펭귄의 모습으로 오소마츠가 팡팡 이불을 내리쳤다. 끼우끼우 우는 펭귄의 작은 꼬리를 멍청히 응시하던 카라마츠가 고개를 들었다.

쵸로마츠.”

. 아무래도 보통 감기가 아닌 것 같아.”

카라마츠의 부름에 쵸로마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줄어든 주인의 어깨에서 흘러내려 이불에 널브러진 옷을 팔에 건 쵸로마츠가 오소마츠를 침대에 눕혔다.

열은 여전히 높으니까 울지 말고 누워서 쉬어, 오소마츠 형. 다행히 모습이 변하는 거 말고는 다른 증상이 없는 것 같으니까.”

, 쵸로마츠우~~.”

오소마츠의 눈가에 걸린 눈물을 닦아준 쵸로마츠가 오소마츠 위에 얇은 담요를 올렸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찬물에 적셔 오소마츠 머리 위에 올려준 쵸로마츠가 빙글 몸을 돌렸다.

오소마츠 형이 걸린 병이 뭔지 모르겠어. 카라마츠나 이치마츠는 짐작 가는 거 있어?”

으음. 나도 잘 모르겠다.”

, 내 약 때문인 거야? 이거.”

쵸로마츠와 카라마츠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이치마츠가 덜덜 떨리는 손을 올렸다. 오소마츠의 모습이 변한 순간부터 사색이 되어 그대로 얼어붙었던 이치마츠가 죄책감에 사로잡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바보 장남이 무리해서 걸린 거야. 자업자득이라고.”

, 그래도.”

이치마츠 탓이 아니다.”

넌 조용히 해, 개똥마츠.”

!? 이 상황에서 나한테 화내기!?”

쵸로마츠의 단언에 안심한 듯 표정을 누그러뜨린 이치마츠가 , 그래도 약에 이상이 있었던 걸 수도 있으니까 확인해볼게.” 하고 방을 뛰어나갔다.

이치마츠가 떠난 방에 남은 쵸로마츠와 카라마츠가 초조한 시선을 교환했다. 당장 심각한 증상이 없다 해도 어떤 병인지 모르는 이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색색-, 가쁘게 숨을 내쉬며 누워있는 오소마츠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둘에게 토도마츠의 목소리가 닿았다.

저기~, 이치마츠 형이 갑자기 뛰쳐나가던데 무슨 일 있, ?”

오소마츠의 방으로 들어온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를 본 쵸로마츠의 눈이 반짝였다. 간단하고 빠르게 토도마츠와 쥬시마츠에게 설명을 끝낸 쵸로마츠가 카라마츠를 끌고 방을 뛰어나가며 외쳤다.

오소마츠 형 간호 좀 부탁해!!”

에에에!?”

쵸로마츠에게 지목당한 토도마츠가 얼굴을 구기는 것도 무시하고 쵸로마츠와 카라마츠가 빗자루에 올랐다. 쵸로마츠가 관리하는 서고의 고서에서 오소마츠가 걸린 병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희망으로 쵸로마츠와 카라마츠가 서고를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멀어지는 두 형의 그림자를 보며 토도마츠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일은 꼭 나한테 시킨다니까! 하아~~, 쥬시마츠 형.”

아이!”

오소마츠 형 좀 잠깐 보고 있어 줘. 나는 죽 만들어서 가져갈게.”

알겠슴닷!”

씩씩하게 대답하며 손을 위로 올려 경례한 쥬시마츠가 오소마츠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마당의 구석에 마련한 작은 텃밭에서 채소 몇 가지를 꺾은 토도마츠가 주방에 들어갔다. 카라마츠가 밥이 맛있게 된다며 남부 지방에서 사 온 돌냄비에 물과 밥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하얀 죽이라면 오소마츠는 또 불평하며 먹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형의 아이 입맛을 떠올리고 푸욱- 숨을 내쉰 토도마츠가 텃밭에서 방금 가져온 싱싱한 채소를 잘게 잘랐다. 향신료로 쓸 수 있는 이파리도 몇 개 다듬어 죽이 끓고 있는 냄비에 넣자마자 힘없는 목소리가 귓바퀴에 닿았다.

, 맛없는데.”

!?”

작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오소마츠의 목소리에 토도마츠가 홱 몸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멍청히 눈을 깜빡이는 토도마츠의 귀에 또다시 장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왔다.

, 갑자기 돌지 마아~! 머리 아프다구우~!”

으응?! , 소마츠 형? 대체 어디에.”

뭐야, 오소마츠 형 귀신?? 아니, 오소마츠 형 아직 안 죽었지?’

몰아치는 생각들로 어지러운 시야를 이리저리 굴리던 토도마츠가 문득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에 숨을 삼켰다.

오소마츠 형, ,”

토도마츠의 어깨에 올라와 있던 작은 무당벌레, 정확히 말하자면 무당벌레 비슷한 옷을 입은 오소마츠가 붉은 얼굴로 흐에~?” 하고 대답했다. 아직 열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벌건 얼굴로 휘청대며 떨어질 것 같은 오소마츠를 서둘러 손 위에 옮긴 토도마츠가 신음했다.

모습이 변한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작아질 수도 있는 거야?”

손바닥에 딱 들어맞는 사이즈에 놀라 물어도 오소마츠는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 톳티-! 오소마츠 형이 기침하더니 팟! 하고 사라졌어~!”

때맞춰 벌컥 문을 열고 주방으로 들어오는 쥬시마츠의 다급한 외침에 토도마츠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떨궜다. “오소마츠 형 여기 있어, 쥬시마츠 형.” 하고 쥬시마츠에게 오소마츠를 보이자 쥬시마츠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피었다. 조심스럽게 쥬시마츠의 손으로 오소마츠를 옮긴 토도마츠가 복잡한 시선으로 오소마츠를 내려다보았다. 어린아이들이 가장할 때나 입을 법한 무당벌레 옷을 입고, 손에 들어가는 작은 몸의 오소마츠를 지그시 내려다본 토도마츠가 으으.” 하고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뭐야, 저거. 오소마츠 형 주제에 귀엽잖아!”

홀로 씩씩대며 토도마츠가 국자를 들었다. 죽이 타거나 눌러 붙지 않도록 휘휘 저으면서 조금 전에 본 오소마츠의 모습을 다시 그렸다. 열 때문에 어지러운지 몸이 크게 휘청일 때마다 오소마츠의 등에 붙어있던 작은 날개가 잘게 파닥였다. 머리 위에 쫑긋 솟아난 두 개의 더듬이도 오소마츠의 머리를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크기뿐 아니라 체형까지 어린아이 같아진 오소마츠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릴수록 토도마츠의 신음은 점점 짙어졌다.

으으으~~, 오소마츠 형이 그렇게 귀여울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어.”

작은 그릇 하나를 꺼내 죽을 한 국자 떠서 덜어낸 토도마츠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오소마츠 형, 지금 상태로는 이만큼 못 먹잖아? 애초에 무당벌레가 죽을 먹을 수 있던가?”

하얀 김을 내는 죽을 내려다보던 토도마츠가 한숨과 함께 죽을 냄비에 부었다. 밥그릇보다 한참 작은 종지를 꺼내 그곳에 티스푼 하나 정도의 죽을 덜어낸 토도마츠가 컵 하나를 꺼내 그곳에 꿀을 쭉 짜냈다. 근처 양봉업을 하는 친구에게서 받아온 꿀은 그 맛만큼이나 향도 달콤했다. 적당히 데운 물을 꿀이 든 컵에 부어 꿀물을 만든 토도마츠가 죽을 넣은 종지를 함께 들고 오소마츠가 기다리는 거실로 향했다.

오소마츠 형, 괜찮아?”

우응~.”

쥬시마츠의 손 위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오소마츠가 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열이 올랐는데도 동생에게 미소를 보여주는 오소마츠를 보니 가슴이 조여왔다. 식탁에 꿀물과 죽을 내려놓은 토도마츠가 티스푼으로 꿀물을 떠서 오소마츠 앞에 내밀었다.

꿀물이니까 이거라도 조금 마셔.”

. 고마워~, 톳티-.”

지친 얼굴로 힘겹게 숨을 쉬던 오소마츠가 배시시 웃으며 티스푼에 매달렸다. 작은 몸집 탓에 티스푼에 담긴 꿀물마저 한 번에 들이키지 못하고 깨작깨작 마시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의 마음에 걱정이 쌓였다.

안쓰럽긴 한데, 저렇게 찔끔찔끔 마시는 게 너무 귀엽잖아!!’

오소마츠가 꿀물을 마시는 동안 티스푼을 내릴 수 없는 토도마츠가 부들부들 어깨를 떨며 행복한 비명을 참는 동안 쥬시마츠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소마츠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자기보다 훨씬 작아진 오소마츠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진귀한 광경이었지만, 쥬시마츠의 눈빛에는 그 이상의 뭔가가 담겨있었다.

티스푼에 담긴 꿀물을 절반 정도 먹었을까, 오소마츠가 스푼에서 입을 뗐다.

그만 먹을래.”

후우-, 열 때문에 뜨거운 숨을 내쉬며 털썩 식탁에 주저앉은 오소마츠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오소마츠를 보며 조심스럽게 길게 늘어진 소매에서 손을 빼낸 쥬시마츠가 손가락으로 오소마츠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작은 몸에서 전해지는 열은 여전히 높았다. 근심 가득히 눈썹을 내린 쥬시마츠가 잘은 호흡을 따라 오소마츠의 등을 쓸어주었다.

 

 

오소마츠가 식탁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검은 오라를 잔뜩 어깨에 진 이치마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녀왔어.”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갈 것 같은 목소리에 토도마츠가 눈썹을 찌푸렸다. 터덜터덜 평소보다 더 질질 끄는 발걸음에 쥬시마츠가 반갑게 흔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누구 왔어? , 이치마츠.”

식탁 앞에 서 있던 토도마츠가 시야를 가리고 있던 탓에 이치마츠의 도착을 뒤늦게 알아챈 오소마츠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치마츄~~!”

, 오소마츠 형!?”

아직 붉은 얼굴로 활짝 웃은 오소마츠가 이치마츠를 향해 작은 날개를 펼쳤다. 파다닥, 투명한 날개를 열심히 파닥이며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작은 오소마츠를 본 이치마츠가 크게 당황해 손을 뻗었다.

쿠힛!”

이치마츠를 향해 날아가던 오소마츠가 뿜은 기침에 공중에 연기가 퍼졌다. 눈앞에 구름처럼 피어오른 연기에 이치마츠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서둘러 발을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뜨끈하고 푹신한 것이 품에 안겼다.

? , ?”

하얀 것 같으면서도 얼핏 붉은빛이 도는 작은 토끼를 내려다보며 이치마츠가 멍청히 중얼거렸다. 오소마츠가 변하는 모습을 처음 본 토도마츠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치마츠에게 다가와 색색 거친 숨을 내쉬는 토끼를 바라보았다.

이거, 설마, 오소마츠 형??”

여전한 열과 갑자기 몸을 움직인 탓인지 현기증이 겹친 오소마츠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숨만 내쉬었다. 쥬시마츠까지 의자에서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다가왔을 때, 이치마츠가 퍼뜩 고개를 들고 오소마츠를 안은 채 침실로 향했다. 오소마츠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뛰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침실에 들어간 이치마츠가 오소마츠를 눕히고 주머니에서 해열제를 꺼냈다.

이치마츠 형아! 약은 괜찮았슴까?”

조심스럽게 오소마츠의 입으로 해열제를 흘려보낸 이치마츠가 따라 들어온 쥬시마츠의 질문에 침울하게 눈을 내렸다.

아니. 재료 다 맞게 들어갔고 만들 때 이상한 부분도 없었어. 오소마츠 형한테 주고 남은 약을 확인했는데 문제없었고.”

무거워지는 목소리에 쥬시마츠가 쓴웃음을 피웠다. 서서히 고른 숨을 내쉬는 오소마츠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이치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문제인지, 무슨 병에 걸린 건지 모르니까 약을 만들 수도 없어. 다른 약들도 어떤 효과가 나올지 모르니까 함부로 줄 수도 없고.”

나는 아무런 도움도 안 돼.” 하고 씁쓸한 숨을 내쉰 이치마츠가 축 늘어져 있는 토끼의 귀를 어루만졌다. 조금씩 열이 내려가고 있지만 오소마츠의 귀는 여전히 뜨거웠다. 해열제로 골라온 약도 그 재료가 완벽하게 안전한 것만 들어있어서 오소마츠에게 줄 수 있었다. 오소마츠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이치마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소마츠 형아는 약 만들어줘도 쓰다고 안 먹을 거야!”

말없이 이치마츠를 바라보던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약을 받자마자 이거 써?” 하고 물어볼 오소마츠의 모습을 쉽게 떠올린 이치마츠가 빙그레- 옅은 미소를 올렸다. “그러게.” 하고 쥬시마츠와 눈을 맞춘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쓴 약 먹는 것도 싫어하고 아픈 것도 싫어하니까-. 얼른 나으라고, 망할 장남. 안 그러면 엄청 쓴 약 가져다줄 테니까.”

잔잔한 애정이 담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오소마츠에게 닿았다. 열이 주는 괴로움에 잔뜩 찌푸려진 눈썹이 아주 조금 풀린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이치마츠가 침대 옆에 앉아 오소마츠를 지켜보았다.

 

 

 

 

 

4.

 

한참 동안 오소마츠의 옆을 지키던 이치마츠가 쥬시마츠의 부름에 고개를 올렸다.

이치마츠 형아, 교대임닷!”

, 오케이.”

번쩍 팔을 들고 침대 옆으로 다가온 쥬시마츠에게 이치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키는 이치마츠의 등을 쥬시마츠가 떠밀었다.

톳티가 저녁 식사하라고 했슴닷!”

오소마츠의 옆을 지킨다고 식사도 거른 이치마츠에게 얼른 밥 먹으라며 손을 흔든 쥬시마츠가 눈을 돌려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이치마츠의 해열제 덕분에 열은 내렸지만, 오소마츠는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쥬시마츠가 미소를 지우고 지그시 오소마츠를 내려보았다. 오소마츠가 걸린 병명을 찾기 위해 나간 카라마츠와 쵸로마츠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며 쥬시마츠가 어스름한 창밖의 하늘을 응시했다.

케욱!”

?”

귓가에 작게 들린 기침소리에 놀라 홱 고개 돌린 쥬시마츠가 침대 위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에 입꼬리를 움찔댔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이번엔 오소마츠를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연기를 뚫어지라 응시한 쥬시마츠가 서서히 옅어지는 연기 속에서 오소마츠를 발견했다.

오소마츠 형아!”

, 에에?”

제 기침에 깨어난 오소마츠가 졸음이 매달린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는지 몸을 휘청인 오소마츠가 손을 가득 덮은 깃털에 고개를 기울였다.

?”

오소마츠 형아, 지금 새가 됐슴다.”

쥬시마츠의 중얼거림에 오소마츠가 작게 에에~?” 하고 신음했다.

 

 

이제 뭐야, 모처럼 다 모였는데-. 오랜만에 재미있게 놀고 싶었다구우~.”

작은 새가 되어 쥬시마츠의 어깨에 앉은 오소마츠가 한탄했다. 희미하게 울음이 섞인 혼잣말에 심장이 조여왔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오소마츠는 형제들 그 누구보다도 이번 휴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응시하는 오소마츠의 얼굴에 짙게 깔린 포기를 본 쥬시마츠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오소마츠 형아!”

? 쥬시마츠 어디 가??”

오소마츠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은 쥬시마츠가 오소마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쌩 방을 나갔다. 곧 우당탕하는 소음과 함께 그림 도구를 팔에 가득 안고 들어온 쥬시마츠가 침대 옆에 이젤을 폈다.

쥬시마츠의 행동을 지켜보는 오소마츠에게 하핫-’하고 활짝 웃어준 쥬시마츠가 오소마츠를 다시 제 어깨 위에 올렸다. 경쾌한 몸짓으로 붓을 든 쥬시마츠가 커다란 캔버스에 길게 선을 그었다. 색을 하나씩 칠할 때마다, 붓을 움직일 때마다 캔버스에 퍼지는 풍경에 오소마츠의 눈이 커졌다.

푸른 숲과 그 너머로 펼쳐진 넓은 바다, 그리고 바다와 숲의 산뜻한 향을 가득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오소마츠를 스쳐 지나갔다. 마법을 담은 쥬시마츠의 그림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숲속의 새소리가 새어 나왔다. 깃털 속으로 파고드는 산바람에 오소마츠의 얼굴에 사라졌던 미소가 피었다.

쥬시마츠!”

아이!”

오소마츠의 밝아진 목소리에 쥬시마츠도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작은 날개를 퍼덕이며 그림에서 퍼지는 바람을 만끽한 오소마츠가 덕지덕지 물감이 번진 쥬시마츠의 얼굴을 보고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배를 잡고 웃는 오소마츠와 그것을 보는 쥬시마츠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 떠올랐다.

 

 

 

 

 

5.

 

아침을 알리려 해가 산 너머에서 살짝 얼굴을 내민 시각. 지친 얼굴로 쵸로마츠와 카라마츠가 빗자루에서 내려왔다. 불이 꺼진 집에 들어와 거실 소파에 털썩 쓰러진 둘이 낸 소음에 토도마츠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쵸로마츠 형, 카라마츠 형. 어서 와.”

졸린 목소리로 둘을 반기는 토도마츠에게 카라마츠가 아아-.” 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녹초가 되어 침대에 쓰러진 쵸로마츠를 힐끗 본 토도마츠가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어때? 성과는 있었어?”

. 간신히 알아냈다. 형님이 걸린 병이 뭔지.”

진짜!? 뭔데?”

화색이 된 토도마츠의 물음에 쿠션에 얼굴을 박고 있던 쵸로마츠가 대답했다.

드라콜드.”

드라콜드?”

쿠션에 먹혀 웅얼대는 쵸로마츠의 목소리에 토도마츠가 눈썹을 찌푸렸다. 잘못 들은 것인지 확인하듯 쵸로마츠의 말을 반복하는 토도마츠에게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드래곤이 걸리는 감기다. 드래곤에겐 별다른 증상도 없는 감기지만, 인간이 걸리면 오소마츠 같은 증상이 나온다더군.”

하아!? 그걸 왜 오소마츠 형이 걸려? 카라마츠 형이라면 몰라도 오소마츠 형은 드래곤이랑 만난 적도 없는데!”

토도마츠의 외침에 카라마츠가 작게 신음했다. 드래곤 연구가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카라마츠 역시 병의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토도마츠의 말대로 마법 학교의 교사를 하는 오소마츠는 드래곤과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다.

우리가 학생일 때, 학교 사육장에서 관리하던 드래곤이 한 마리 있지 않았나?”

문득 떠오른 기억에 카라마츠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간신히 소파에서 일어난 쵸로마츠가 눈을 반짝였다.

맞아!! 아직 있을 거야, 그 드래곤. 마법 생물 수업 때문에 기르고 있는 거!”

겨우 원인을 알겠다는 얼굴로 외친 쵸로마츠가 스리슬쩍 끼어든 낮은 목소리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근데 오소마츠 형은 그 드래곤이랑 안 친하잖아. 오소마츠 형은 주로 이론 수업을 가르치니까 사육장에 갈 일도 없고.”

이치마츠 형 말이 맞아.”

언제 일어났는지 거실에 나온 이치마츠의 말에 토도마츠가 동의했다. 오소마츠가 가르치는 수업은 모두 이론에 치우쳐 있었다. 게다가 오소마츠는 드래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아 학교 사육장에 있는 드래곤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을 터였다. 간신히 붙잡은 실마리가 별 도움이 되지 않자 쵸로마츠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럼 뭐가 원인이야, 대체.”

, 짐작 가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쵸로마츠의 말에 대답하듯 이치마츠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형제들의 시선에 어깨를 오그린 이치마츠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소마츠 형이 마신 자양강장제 말이야. 거기 들어가는 재료 중에 드래곤의 숨결이 들어가는데,”

“““그거다!!!”””

이치마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쵸로마츠와 카라마츠, 토도마츠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갑작스럽게 거실에 울린 형제들의 큰 목소리에 이치마츠가 놀라 펄떡이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동안 카라마츠가 짙은 눈썹을 내리고 턱을 쓸었다.

드래곤의 숨결을 채취할 때, 그 드래곤이 드라콜드에 걸렸었다면,”

거기다 오소마츠 형은 카라마츠가 도착하기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다면.”

그럴 수가 있어?”

카라마츠의 짐작에 쵸로마츠의 추리가 올려지자 토도마츠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 드라콜드라는 걸 낫게 하는 약은 있어?”

무거워진 공기를 깨는 이치마츠의 질문에 쵸로마츠가 빙긋- 웃었다. 크게 고개를 끄덕인 쵸로마츠가 품에서 약의 재료를 적은 종이를 꺼냈다.

다비드의 손이랑 불의 눈물은 가게에 있고.”

나도 보여줘!”

쵸로마츠가 펼친 종이를 내려다보던 이치마츠가 불쑥 얼굴을 들이민 토도마츠에게 종이를 건넸다. 단순한 감기와 닮은 탓인지 종이에 적힌 재료들은 몇 가지 없었다. 찬찬히 재료를 살펴보던 토도마츠가 의외라는 얼굴로 종이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구하기 힘든 건 없네? 독당근하고 하늘엉겅퀴는 내가 키우고 있는 거 쓰면 될 것 같고.”

토도마츠의 말에 이치마츠가 반갑게 눈을 깜빡였다. 쵸로마츠는 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당장 구할 수 있다는 소식에 이치마츠와 토도마츠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셋이 함께 재료를 구해 이치마츠의 가게에서 약을 만들 동안 오소마츠의 간호는 카라마츠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쥬시마츠의 몫이 되었다.

 

 

똑똑, 노크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라마츠는 천천히 문을 열어 오소마츠의 방 안으로 발을 넣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오소마츠 옆을 지킨 쥬시마츠가 침대에 쓰러져 잠들어있는 모습을 본 카라마츠가 쓴웃음을 흘렸다.

쥬시마~?”

, 우응?”

부드러운 카라마츠의 부름에 쥬시마츠가 눈을 떴다. 커다랗게 하품을 하는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은 카라마츠가 쥬시마츠를 자신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침대에서 편히 자고 와라, 쥬시마츠. 형님은 내가 보고 있겠다.”

아이!”

피로가 가득 내려앉은 얼굴로 활짝 웃은 쥬시마츠를 보내고 카라마츠가 한숨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밤새 또 기침했는지 오소마츠는 작은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오소마츠.”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 오소마츠의 귀가 움찔댔다. 잠들었으면서 카라마츠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이불 속에서 흔들리는 꼬리를 따라 천이 울렁거렸다.

형제 중 그 누구보다 더 자신의 귀가를 반기는 오소마츠를 닮아 좌우로 너울대는 꼬리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으음. , 라마츠?”

-. 꽤 귀여운 모습이 되었군, 오소마츠.”

눈을 깜빡이며 아침 햇볕에 적응한 오소마츠가 저를 쓰다듬는 손길에 해죽 웃었다. 자상한 웃음을 나누며 오소마츠를 쓰다듬은 카라마츠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가를 내기 위해서 무리했다고 들었다.”

그야아~, 모처럼 너도 오고 다른 녀석들도 휴가를 썼는데 나만 일하면 억울하잖아~?”

그런가. 그래도 무리하면 브라더-들이 걱정하니까 자제해라.”

네네~.”

-, 어릴 적부터 변하지 않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피운 오소마츠를 따라 카라마츠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무리하지 말라 말은 했지만,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소마츠가 무리한 것이 내심 기뻤다. 집에 올 때마다 매번 크게 자신을 환영해주는 오소마츠가 더 오래 함께 있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 카라마츠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오소마츠를 쓰다듬는 자신의 손길을 따라 크게 요동치는 꼬리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행복한 숨을 들이마신 카라마츠가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더 자주 오라구~. 저번처럼 오랫동안 안 오면 횽아 외로워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하하, 형님이 쓰러지기 전에 빨리 성과를 내서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겠군.”

오소마츠의 농담에 타며 잘게 웃은 카라마츠가 아직 열이 남은 오소마츠의 이마를 보듬었다.

이치마츠가 약을 만들러 갔으니까 금방 나을 거다. 너무 브라더-들을 걱정하게 만들지 말라고, 형님.”

나도 아프고 싶어서 아픈 거 아닙니다아~.”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대는 오소마츠를 향해 카라마츠가 온화한 미소를 던졌다. 오소마츠를 덮고 있는 이불이 꼬리 움직임에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이 모습은 오소마츠의 본심을 바로 알 수 있어서 좋군.’

새침을 떼며 말해도 오소마츠가 형제들의 걱정에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흔들리는 꼬리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에게조차 가장 진실한 속마음은 쉽게 보여주지 않은 오소마츠를 응시하며 옅은 슬픔을 삼킨 카라마츠가 규칙적으로 오소마츠의 가슴을 두드렸다.

자고 일어나면 약이 만들어져 있을 거다.”

. 땡큐-, 카라마츠.”

히힛-’하고 형의 얼굴로 웃는 오소마츠의 눈을 손으로 덮은 카라마츠가 낮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잘 자라, 오소마츠.”

 

 

 

 

 

6.

 

하늘이 어두워질 즈음, 쵸로마츠가 이치마츠, 토도마츠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 레서 팬더의 모습을 한 오소마츠가 돌아온 쵸로마츠를 보자마자 카라마츠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쵸로마츄~!”

저를 향해 달려오는 오소마츠의 작은 몸을 황급히 안아 올린 쵸로마츠가 붕붕 꼬리를 흔드는 오소마츠를 노려보았다.

열 아직 다 안 내렸으면서 뛰지 마!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에에~, 여기서 잔소리하기 있음?”

불만스러운 목소리와 달리 축 늘어진 레서 판다의 귀와 꼬리에 쵸로마츠가 말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활기차게 흔들리던 꼬리가 힘없이 늘어진 모습에 신음을 삼킨 쵸로마츠가 레서 판다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다녀왔어, 오소마츠 형.”

! 어서 와~, 쵸로마츄~!”

그럼 이제 약 먹자.”

헤실 웃는 오소마츠를 고쳐 안은 쵸로마츠가 이치마츠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으히힛!” 하고 음산한 웃음을 깐 이치마츠가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 그거 뭐야?”

오소마츠 형이 먹을 약.”

아니아니아니아니. 약이 보라색인데!? 그리고 이상한 녹색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는데? 이치맛쨩!?”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막았는데도 거실에 알싸하게 퍼지는 약의 독한 향에 오소마츠가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쵸로마츠는 예상했다는 듯이 오소마츠를 단단히 붙잡고 이치마츠에게 눈짓했다.

꺄아~~!! 싫어어~~!!”

얼른 약 먹어, 오소마츠 형! 그거 마셔야 더는 변신 안 하고 열도 완전히 내린다고!”

쵸로마츠의 호통에도 오소마츠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오소마츠가 다가오는 이치마츠의 손에 들린 약병을 차버리자 쵸로마츠는 더 참지 않고 오소마츠를 안은 채 강제로 약을 입에 밀어 넣었다.

자아~~. 다 마시라구~?”

, 으으읍~!!!”

입에 약병을 꽂고 발버둥 치는 오소마츠를 토도마츠가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엑!! 맛없어!”

보라색 약을 힘겹게 넘기고 나서야 쵸로마츠에게서 해방된 오소마츠가 헛구역질하며 몸을 일으키자마자 하는 소리와 함께 뽀얀 연기가 오소마츠를 감쌌다.

?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것 봐, 쵸로마ㅊ,”

연기가 옅어지고 만 하루만에 본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확인한 오소마츠가 환호성을 불렀다. 해맑게 웃은 오소마츠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쵸로마츠에게 들려 형제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예상은 했지만.”

눈을 굴리며 붉어진 얼굴을 돌린 토도마츠가 중얼거렸다. “, 그렇군.” 하고 헛기침을 섞은 맞장구를 친 카라마츠가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오소마츠 형아, 알몸이었지!”

되새겨주지 않아도 괜찮아, 쥬시마츠.”

쥬시마츠의 한마디에 이치마츠가 푸후~’ 숨을 내쉬며 얼굴을 내렸다.

 

 

10분 정도 후에 오소마츠가 형제들이 모인 주방으로 들어왔다. 이치마츠의 해열제로도 잡지 못했던 미열까지 완전히 사라졌는지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로 달라붙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모두가 잔잔한 미소를 올렸다.

토도마츠와 카라마츠가 준비한 저녁 식사를 함께 끝내고 오소마츠의 고집을 따라 형제들이 모여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돈까지 걸고 공격적으로 카드를 뽑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쵸로마츠가 혀를 내둘렀다.

오소마츠 형, 아직 완전히 나은 거 아니거든!? 그렇게 설치다가 다시 열나면 어쩌려고!”

괜찮아~, 괜찮아~.”

쵸로마츠 형, 오늘 정도는 봐줘-.”

응응! 카라마츠 형아, 내일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오소마츠의 편을 드는 토도마츠와 쥬시마츠의 말에 쵸로마츠가 찡그린 눈썹을 거두었다. 카라마츠가 돌아오고 형제들이 다 함께 보내는 시간을 오소마츠가 얼마나 고대했었는지, 옆에서 줄곧 보아 왔던 쵸로마츠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 한숨을 내쉰 쵸로마츠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잔소리를 삼키고 묵묵히 오소마츠 옆자리를 지켰다.

 

 

푸른 달빛이 가득 들어온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은 쵸로마츠가 오소마츠를 바라보았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평온한 얼굴로 잠든 오소마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은 쵸로마츠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또 그렇게 무리해서 아프지 마.”

조용히 속삭인 쵸로마츠가 지난 밤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피식-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오소마츠가 병에 걸렸다는 것에, 그것도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병에 걸렸다는 것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항상 어린애같이 웃으며 저를 놀리는 재미에 빠진 오소마츠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하며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모습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카라마츠와 함께 서고에 날아가 밤새도록 미친 듯이 고서들을 뒤지던 자신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떨어뜨린 쵸로마츠가 눈썹 아래로 내려온 오소마츠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걸었다. 매끄러운 머리칼을 비비다가 이마 위로 쓸어 올려준 쵸로마츠가 눈을 내리고 오소마츠의 볼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다시는 아프지 마, 오소마츠 형. 그리고 자는 척도 그만하고.”

쭈욱-, 쓰다듬던 볼을 잡아 늘인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눈을 떴다.

, 아햐(아파)~!”

자는 척하니까 그렇지.”

우우~, 그렇다고 꼬집을 필요는 없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고 쵸로마츠에게 잡혀있던 볼을 매만진 오소마츠가 쵸로마츠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나도 감기 같은 거 걸리고 싶지 않았다구~! 카라마츠도 왔는데 같이 놀지도 못 했고 말이야.”

볼을 퉁퉁 부풀리고 중얼거린 오소마츠의 말에 쵸로마츠가 눈썹을 찡긋거렸다.

하여간 이 망할 장남은.’

가끔 오소마츠가 자기 자신보다 형제들을 우선하는 것이 쵸로마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아프지 않게 주문걸어줘-. 쵸로마츠.”

실실 웃으며 저를 놀리는 오소마츠를 보며 쵸로마츠가 팩 얼굴을 구겼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팠으면서 쌩쌩해지니 또 이 모양이다.

하아~, 하여간 이 망할 장남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오소마츠의 머리에 하고 가벼운 주먹을 내린 쵸로마츠가 허리를 굽혔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온 둘만의 주문을 위해 쵸로마츠가 오소마츠의 입술에 살포시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7.

 

그럼 조만간 또 돌아오겠다!”

조악하게 개조한 자신의 빗자루에 올라탄 카라마츠가 윙크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카라마츠를 배웅하기 위해 일렬로 늘어선 형제들 사이에서 오소마츠 혼자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치마츠의 약이 훌륭했던 것인지, 오소마츠의 회복력이 놀라운 것인지, 오소마츠는 완전히 병을 털어내고 카라마츠와 웃음을 주고받았다.

횽아 외로워지기 전에 돌아오라구~?”

아아! 그런데 형님. 쵸로마츠는 어쩌다 그렇게 된 건가?”

오소마츠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인 카라마츠가 멍청히 오소마츠 팔에 안긴 쵸로마츠를 응시했다. 푹신푹신하고 하얀 털에 뒤덮인 양의 모습으로 얼굴을 구긴 쵸로마츠가 !” 하고 혀를 찼다.

글쎼에~? 어제 나한테 걸어준 주문이 너무 강했던 거 아닐까나~?”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린 쵸로마츠를 내려다보며 오소마츠가 빙긋 웃었다.

으응~? 주문?”

고개를 기울이고 되묻는 카라마츠에게 오소마츠는 손을 흔들며 별거 아냐~.” 하며 카라마츠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른 카라마츠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한 오소마츠가 점점 흐려지는 카라마츠를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엔 다 건강하게 만나서 실컷 놀자.”

 

 

 

 

PS.

 

저번에 오소마츠 형이 마신 약 만들면서 재료를 다 써버렸단 말이지-. 다시 만들려면 좀 걸릴 거야.”

하아!?”

무슨 짓을 했길래 오소마츠 형 감기가 옮은 건지~. 정상인 코스프레해도 속은 응큼하다니까-, 쵸로마츠 형은.”

!?”

세크로스??”

쥬시마츠으!?”






* 여기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에 공지했던대로 앞으로 R-18글은 모두 포스타입에 올릴 예정입니다. 


티스토리에는 포스타입의 링크를 올려두겠습니다.




* 오소마츠 형아가 의미불명


* 모브오소 묘사가 있습니다


* 뒷끝이 찜찜한 새드엔딩



포스타입 링크 : http://posty.pe/59fr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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