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 카라오소가 쓰고 싶어져서 썼습니다. 이제 저는 내일 있을 미팅 준비를 하러...(주섬주섬)


* 카라오소가 이미 사귀고 있다는 전제입니다.


* 초단편이에요ㅎㅎ.  공미포 2,647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얏!”

조용했던 거실에 울린 한마디 비명에 카라마츠가 들고 있던 거울을 내렸다

한손을 감싸고 가슴께로 숨긴 토도마츠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리모컨을 손에 쥔 오소마츠를 노려보았다.


“아프잖아!! 손톱 좀 깎아! 오소마츠 형!”

찌릿- 날카로운 눈길로 오소마츠에게 매섭게 외친 토도마츠가-!’ 하고 콧바람을 내뱉고 몸을 일으켰다

약속이 있는지 즐겨 드는 에코백을 들고 거실을 나가는 토도마츠의 뒷모습을 오소마츠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배웅했다

! 하고 토도마츠가 거칠게 닫은 거실문을 보고 한숨을 내쉰 오소마츠가 TV를 향해 리모컨을 들었다

, 전원 버튼을 누르는 오소마츠를 보며 카라마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집중하고 있어 듣지는 못했지만 분명 오소마츠가 토도마츠에게 리모컨 좀 집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하얀 손톱이 길게 늘어난 오소마츠의 손에 리모컨을 건네주던 토도마츠가 긁혔을 것이리라, 그렇게 추리한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손을 지그시 응시했다.


오소마츠는 형제 중 가장 게으른 편에 속했다

뭘 해도 대충대충

아침 늦게 일어나 세수도 대충 물만 묻히고 스킨, 로션은 일체 바르는 일이 없었다

움직이기 귀찮아하며 주변에 있는 동생들에게 부탁하길 좋아했고, 일어서기 보단 발로 리모컨을 누르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게을렀다

그런 오소마츠가 길게 자라난 손톱을 알아서 깎을 리 만무했다

귀신마냥 길게 늘어난 오소마츠의 손톱을 바라본 카라마츠가 허리를 들어 거실 선반 앞에 섰다

제일 아래에 있는 서랍에서 쉽게 손톱깎기를 찾아낸 카라마츠가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오소마츠를 불렀다.


“형님.”

“응—?”

카라마츠의 부름에 오소마츠가 힐끗 눈을 돌렸다

카라마츠는 말없이 오소마츠 앞에 손에 든 손톱깎기를 내밀었고, 오소마츠는 푹- 한숨을 내쉬더니 얌전히 손톱깎기를 받아 들었다.


“아-, 귀찮아. 손톱 좀 안 자랐으면 좋겠네.”

그야말로 게으름뱅이의 표본과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오소마츠가 거실 구석에 접어놓았던 경마 신문을 바닥에 펼쳤다

양반다리를 하고 신문 위에 올라 앉은 오소마츠가 오른손에 손톱깎기를 쥐고 왼손을 쫙 펼쳤다

좁은 손톱깎기 입구에 오소마츠가 손톱을 가져댄 순간, 카라마츠가 재빨리 손을 들어 오소마츠를 멈췄다.


“오, 오소마츠! 잠깐만!!”

“어? 뭐야?”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기울이고 물었다

카라마츠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내가 해줘도 될까...?”

“허? 뭐를?”

“손톱 깎는 거 말이다.”

“에....”

카라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멍청히 눈을 깜빡였다

어린 시절 혼자 손톱을 깎다가 살을 함께 잘라냈던 시절엔 마츠요가 대신 손톱을 잘라주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곧 오소마츠 혼자서도 손톱을 깎을 수 있게 되었고, 마츠요가 대신 손톱을 잘라주던 시절의 기억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하게 가라앉은 그런 오래된 것이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잠잠히 곱씹으며 카라마츠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대답 없는 오소마츠를 초조하게 마주보는 카라마츠가 멋쩍게 웃으며안 되, ...?” 하고 되물었다.


“아니..., .... 그럼 부탁해.”

그리운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 살며시 눈을 내린 오소마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맡겨줘!”

오소마츠의 대답에 활짝 얼굴을 빛낸 카라마츠가 조심스럽게 오소마츠 등 뒤로 걸어가 앉았다

살포시 오소마츠의 손을 쥐고, 오소마츠에게서 손톱깎기를 뺏어든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손가락을 그리듯 쥐었다

살짝, 하지만 빠져나가지 못하게 힘을 주어 쥔 손가락 끝을 손톱깎기에 넣고 톡, , 손톱을 하나씩 자르기 시작했다

, , . 손톱 크기에 따라, 또 손톱이 잘려나가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내며 손톱이 신문지 위로 훌쩍 날아갔다.


 

손톱깎기를 떠나 점프하는 것처럼 신문지 위로 날아가는 하얀 손톱을 보며 카라마츠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항상 손톱이 너무 길다는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손톱을 자르는 오소마츠는 그 귀찮음 때문인지 혹은 버릇인지 손톱을 너무 짧게 자르는 경향이 있었다

하얀 손톱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짝 살에 붙여 손톱깎끼를 끼워넣는다

-, 하고 잘린 손톱엔 하얀 부분은 남아있지 않았고, 노출된 분홍색 살갗은 보기엔 너무나 아팠다

아프지 않냐고 나지막히 물어보아도 오소마츠는별로?” 하고 시큰둥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손톱에 보호되어야 할 손끝의 연한 살갗이, 분홍빛이 카라마츠는 항상 마음에 걸렸다

오소마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짧은 손톱으로 맥주캔도 따고, 젓가락도 집고, 동전도 집어들었다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없었지만, 카라마츠에겐 유독 오소마츠의 짧은 손톱이 눈에 띄었다


카라마츠만이 알고 있었다

그 짧은 손톱이, 둘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사랑을 나눌 때, 애처롭게 굽어진다는 것을

쾌락에 휩쓸려 사랑스럽게 울며 카라마츠의 등에 손을 돌린 오소마츠는 눈물과 함께 손가락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쾌락을 참을 수 없어서인지, 몰려오는 쾌락이 두려워서인지 오소마츠는 항상 손가락에 힘을 주고 카라마츠의 등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손끝이 아릴 정도로 꾹- 힘을 준 그 손은 결코 카라마츠의 등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짧은 손톱 덕분에 손끝에 남겨진 분홍빛 살갗은 카라마츠의 등에 박히지 못하고 땀과 함께 주르륵- 미끄러졌다

오소마츠의 너무나 짧은 손톱은 카라마츠의 등에 흔적을 남기는 대신 손끝이 꺾이는 것을 선택했다

보드라운 오소마츠의 손가락이 땀에 젖은 뜨거운 카라마츠의 등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에 맞춰 미끄러졌다

좀 더 단단히 잡으면 좋을 텐데-, 이 등에 흔적을 남겨주면 좋을 텐데-, 하고 카라마츠는 소망했다


뜨거운 밤의 증거를

카라마츠와 오소마츠가 살과 살을 맞댈 정도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를

단순한 형제가 아닌 그 이상의 관계라는 증거를

카라마츠는 간절히 소망했다


매일 형제들과 함께 나가는 목욕탕 탓에 오소마츠의 하얀 몸에 자신의 것이라는 증표를 남길 수 없는 대신, 카라마츠는 오소마츠가 자신의 몸에 어떠한 증거를 남겨주길 원했다.

 


마지막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떠난 손톱이 툭, 신문지 위로 떨어졌다

다 끝났다는 말과 함께 손톱깎기를 접는 카라마츠의 품에서 떠난 오소마츠가 제 손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무 긴 거 아냐?”

적당히 남은 흰 손톱. 제대로 손끝의 연한 살을 보호할 정도의 길이였다

항상 제가 자르던 것보다 더 길게 남은 손톱을 이리저리 돌리며 불만스럽게 눈썹을 찌푸린 오소마츠의 모습에 피식-, 카라마츠가 웃음을 흘렸다.


“그 정도가 적당한 길이다, 오소마츠. 너는 항상 너무 짧게 잘라.”

요리조리 돌리던 오소마츠의 손을 붙잡은 카라마츠가 가볍게 오소마츠의 손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딱 적당한 길이로 남은 손톱을 사랑스럽게 바라본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손을 잡아 들어 손끝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이 손끝으로, 다음번엔 제대로 사랑의 증표를 남겨주길 소원하면서.





* 요즘 바빠져서 블로그에 들릴 시간이 없네요... 그래서 댓글의 답글이 조금 늦어질 수 있어요ㅎㅎ;;


* 추석 연휴가 다가오네요!! 저는 전남에 있는 시골에 갑니다만... 거긴 인터넷도 없고... 편의점도 없어요.

 읍내 나가려면 차타고 20분... 하지만! 저에겐 핫스팟이 있으니까!! 연휴 동안에도 소설은 올릴 생각입니다!!

 2기 방영 맞춰서 오소카라 장편 연재 시작할 거에요!!


* 50제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아직 플롯을 다 못짰...ㅠㅠ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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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 오소마츠 x 학생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아프지 않아요...


* 공미포 14,755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


올해도 이제 끝이구나, 하고 흩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뿌연 입김을 내뱉었다. 

봄에 혼례식을 올리고 이제 겨울. 곧 오소마츠와 함께 지낸지 1년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창고에서 코타츠를 꺼내기로 했으니 서둘로 집으로 향한다. 

내일은 연극부 선배님들의 송별회가 있으니 귀가가 조금 늦어질 것이라고 오소마츠에게 미리 말해놓지 않으면 안된다. 

저녁은 오소마츠가 알아서 먹을 수 있게 오늘 넉넉하게 만들어 놓자. 



집에 도착해 본채를 지나쳐 별채로 몸을 돌렸을 때, 토도마츠가 나를 불러 세웠다.


“카라마츠 형!! 잠깐, 이리 와봐.”

“무슨 일 있나?”

“아빠, 엄청 화나셨어....”

“아버지가? 왜....”

“일단 빨리 가봐.”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을 토도마츠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나를 잡아 끌었다. 

무슨 일이냐고 토도마츠에게 물어도 토도마츠는 고개를 저을 뿐, 대답을 해주진 않았다.

본채에 도착해 거실에 들어가자 아버지와 할머니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팔짱을 끼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아버지가 정말로 많이 화가 났을 때 흔히 취하는 자세였다. 

그 맞은편 소파에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초조하게 나를 응시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그래. 여기 앉아봐라.”

아버지의 말에 쵸로마츠와 이치마츠 사이로 들어가 앉았다. 

할머니는 잔뜩 화나신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아버지도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마츠.”

“네.”

“너, 진로계획 조사서에 ‘연극배우’라고 썼다고 하던데.”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라 아버지를 향해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거죠? 진로계획 조사서는 선생님과 1대 1 상담할 때만 쓰인다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연극 배우’라고 쓰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너는 우리 가문의 장자다! 앞으로 가문을 이어야할 녀석이 그런 놀이나 하고 있을 틈이 어디 있다고! 네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줄 알고 있는 거냐!”

쾅!, 하고 아버지가 내리친 주먹에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몸을 움찔였다. 

소파 뒤에 서 있던 토도마츠도 흠칫 놀라 소파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할머니조차 아버지의 역정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상하게 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나 무서웠던 아버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분노로 머리에 피가 쏠려서 그럴 수도 있겠다. 

아버지의 분노 앞에서 나는 당돌하게 입을 열고 언성을 높였다.


“장자가 뭐요! 꼭 장자가 집안을 이어야 하나요!? 저는 싫어요! 저는 아버지의 일을 이어서 하는 것보다 연기가 하고 싶어요!! 연기가 훨씬 더 재미있고 보람된 ㅇ,”

대체 왜 그러냐는 눈빛과 놀란 얼굴들, 제정신이냐는 의심의 표정들이 경악으로 바뀌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크게 팔을 휘둘렀다. 

쿵, 하고 바닥을 울리며 쓰러진 것은 나였다. 

혀에 퍼지는 미지근한 액체를 꿀꺽 삼키고나서야, 그것이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릿한 철냄새가 입안에 남았다. 멈추지 않고 입안을 채우는 피를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부로 부활동은 금지다. 외출도 금지하겠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네가 성실히 아비의 말을 지키고 있는지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에게 확인하게 할 테니, 반항하지 말고 잘 들어라. 잘 지키는 걸 봐서 외출금지는 풀어주마. 단, 부활동은 영원히 금지다! 내일 바로 연극부 탈퇴하고 와!”

거친 숨을 내쉬며 끓는 듯이 외친 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 거실을 빠져 나갔다. 

아버지의 손지검에 놀란 할머니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나를 보며 “쯧, 쯧. 괜히 요상한 헛바람이 들어서는....” 하며 한탄하며 스쳐지나갔다. 

놀라 입을 열지 못하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를 두고 가방을 들어 거실을 나왔다. 

운동화를 구겨 신고 별채로 달려가 거칠게 현관문을 열었다. 

덜컹,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지만 무시하고 문을 세게 닫고 복도에 발을 올렸다. 

차가운 마룻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전해진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흡, 흐, 으읏....”

목구멍을 타고 새어나오는 흐느낌을 핏물과 함께 삼키고 복도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팔을 교차해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흐르는 눈물을 팔로 닦아내도 커다란 눈물은 멈추지 않고 소매를 짙게 적셨다. 



“카라마츠.”

부드러운 목소리, 라고 우는 와중에 생각했다. 

평소와 전혀 다른 꼭 연인을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귀가 닿았다. 

어머니처럼 상냥한 손길이 내 머리 위에 올려진 순간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덜룩한 시야에 황금색 귀가 길게 늘어진 것이 걸렸다. 

기 죽은 강아지인가? 너는.... 

항상 자랑스럽게 좌우로 흔들어대던 꼬리도 힘을 잃고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 

저러면 바닥에 있는 먼지가 묻는다고, 오소마츠. 

코를 훌쩍이며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고 오소마츠와 눈을 맞췄다. 

나를 보는 오소마츠의 미소는 슬픈 것 같으면서도 어머니와 같이 자애로워 보여서 겨우 멈출 수 있었던 눈물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

말없이 긴 손가락이 벌건 눈가에 닿았다. 

긴 손톱에 연약한 살갗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오소마츠는 내 눈물을 한방울 두방울 받아 털어냈다.


“뭐 때문에 이렇게 울까~? 우리 신부님은.”

따뜻한 미소가 건네는 질문에 슬픔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오소마츠가 이렇게나 나를 걱정해주고 있는데 오소마츠를 원망하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 눈을 질끈 감고 뺨에 닿은 오소마츠의 손을 쥐었다.


“...오소마츠, 왜 나는 장자로 태어난 걸까? 나는 ‘연기’가 하고 싶은데, 모두 그러면 안된다고 말한다. 집을, 가업을 이어야한다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도 할 수 없다면, 나는 대체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건가....”

한심한 불평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오소마츠이 손이 천천히 움직여 내 얼굴을 감쌌다. 

마주한 눈이 가늘게 휘어지곤 가까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오소마츠의 팔 안에서 잔잔히 울리는 오소마츠의 목소리에 지친 눈을 감았다.


너는 그대로도 괜찮아. 다른 사람들의 말에 맞춰 변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흐트러진 마음을 매만지며 정돈해주는 그 말은 느긋하게 마음 속에 퍼져 마지막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부활동도, 외출도 금지당한 채 본채엔 발도 들이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등교, 하교길을 함께 하는 형제들 뿐. 

아버지와도 어머니와도 벌써 며칠 째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나 나름의 반항이지만, 아버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실 것이다.


분주히 움직이는 친척들을 보며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허공에 날리는 먼지에 초점을 맞췄다. 

제삿날인 오늘은 혼례식에 왔었던 친척들이 모두 모여 본채 안을 바쁘게 드나들었다. 

형제들과 함께 나도 일을 도와야하지만 본채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나는 마당에 서 있을 뿐이다. 

중간중간 스쳐 지나가는 형제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박혀도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날씨 참 좋네-, 하고 늙은이 같은 감탄을 흘리고 있을 때, 가볍게 어깨를 치는 손길에 눈을 돌렸다.


“야호! 신부님!”

“...고모.”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키코 고모의 품에는 볼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아이가 안겨 있었다.


“많이 자랐네요.”

내 손가락을 잡으려 손을 뻗는 아기를 보며 말하자 고모는 “그렇지~?” 하고 웃으며 아기를 흔들어보였다.



고모부에게 아기를 맡긴 고모가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내 옆에 자리잡았다. 

일 도우러 가지 않아도 되냐 묻자 되려 너는 왜 여기 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아버지랑 싸워서요.”

“어머, 그래? 오빠랑? 별일이네-.”

흐응~, 하고 말을 흐린 고모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겨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날씨는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있어도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고모의 몸이 걱정돼 들어가라고 하자 고모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럼 카라마츠도 같이 들어가. 여긴 춥잖아.”

“아니, 저는....”

“오빠랑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지? 그럼 할아버지 방 들어가자.”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처럼 씩- 웃은 고모가 내 손을 끌어 당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빈방으로 남아있는 그 방은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았다. 

제사 준비로 바쁜 오늘은 더더욱 사람의 발이 들지 않는 장소였다. 

고모에게 이끌려 할아버지 방에 도착해 난방을 켰다. 

사람이 머물지 않는 방 안은 입김이 서릴 정도로 냉랭했다. 

전기 난로에서 뿜어나오는 열이 방안 공기를 어느정도 데웠을 때, 고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소마츠랑 지내는 건 좀 어때? 할만 하니?”

“아, 네.... 처음엔 말도 안 듣고, 공부하는데 방해만 하고 그랬는데, 요즘엔 괜찮아요. 지낼만 해요.”

고모의 입에서 ‘오소마츠’의 이름이 나온 것에 내심 놀라며 깍지낀 손가락을 꼼질대며 대답했다. 

“훗-.” 하고 옅은 웃음을 흘린 고모가 방 한쪽에 놓인 할아버지의 담뱃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석은 아직도 그러고 있구나~.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가끔 애같은 장난도 치고 그러지?”

“...네.”

어떻게 고모가 그걸 알고 계세요?, 라는 질문을 집어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곳을 바라보는 고모의 눈빛엔 아렴풋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나도 오소마츠랑 같이 지내면서 화도 많이 내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 처음엔 굉장히 싫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어느새 같이 있는게 익숙해져서..., 헤어지는 날에는 꽤 많이 울었다니까? 고생도 많이 했지만, 오소마츠와 함께 지낸 날들을 떠올리면 ‘정말 그때는 즐거웠구나-.’ 하고 웃게 된다니까.”

“....”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수십 개의 답변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그렇네요, 하고 단순하게 수긍해야 하나? 

오소마츠를 잘 알고 계시네요, 라고 웃어야 하나? 

저도 지금은 즐거워요, 라고 멋쩍게 대답해야 하나? 

깍지를 낀 주먹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 혼란스럽지? 뭐가 그렇게 초조하지? 

왜, 이렇게까지 충격을 먹는 걸까....


— 오소마츠에게 나 이외의 신부가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후-, 너무 내 이야기만 했나?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도 눈치보이니까 나는 먼저 들어갈게. 카라마츠 너는 여기서 몸 더 녹이고 가.”

“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의 담뱃대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방을 나서는 고모를 배웅했다. 

혼자 남겨진 채, 충분히 따뜻해진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오소마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8.


“카~라~마~츄우~~, 놀아줘어~~!”

발을 동동 구르며 매달리는 오소마츠의 손을 피해 카라마츠가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두 팔을 벌려 안으려 했던 몸이 멀어진 것을 본 오소마츠가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깜빡였다. 

“카라마츠?” 하고 불러도 카라마츠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오소마츠를 못미덥다는 눈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뭔가.”

“어? 아니, 왜 피하나~ 싶어서.”

“...별로, 피하지 않았어.”

어디로보나 명백하게 자신을 피해놓고 시침을 떼는 카라마츠의 대답에 오소마츠가 눈썹을 찌푸렸다. 

요 며칠 계속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데도 카라마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대답을 반복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노골적으로 피하고, 불러도 대답하려 하지 않는다. 

한 이불에서 잘 때도 최대한 오소마츠와 거리를 벌려 이불 구석에서 자는가 하면, 오소마츠가 뭘 같이 하자고 하면 공부 핑계를 대며 그 자리를 피했다.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빼면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와 한 장소에 있는 것조차 꺼리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를 빤히 응시하는 오소마츠의 시선을 고개를 살짝 돌려 피한 카라마츠가 작게 “나는, 공부해야 하니까.” 하는 변명을 놔두고 방을 떠났다.

 커다란 다다미방에 홀로 남겨진 오소마츠의 꼬리가 바닥으로 축 처졌다. 

힘없이 아래로 떨군 꼬리를 붙잡고 바닥에 털퍽 누운 오소마츠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담뱃대를 꺼내 물었다.


“이번엔 꽤 빠른데....”

수십 명의 신부가 이렇게 오소마츠를 거쳐 갔다. 

‘신의 가호’를 바라서 시집이라는 명목으로 오소마츠의 곁에 머물게 된 신부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떠나갔다. 

집안의 보호를 받으며 집에 갇혀있던 신부들이 자라 ‘세상’에 나갈 때, 오소마츠는 제 힘을 모조리 쏟아부어 신부들의 앞길을 축복했다. 


카라마츠와 함께 한 시간은 제법 즐거웠다. 

사내아이를 신부라 보낸 것은 황당했지만, 다른 신부들보다 더 즐거웠다. 

제멋대로 화내고, 불평하고, 웃는 귀여운 사내아이는 어느새 오소마츠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금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씁쓸한 웃음과 함께 허망한 소원을 연기에 실어 날려보낸 오소마츠가 천장을 응시하며 눈을 감았다.


“그럼, 저녀석에겐 어떤 작별선물을 줄까.”




기어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한데 모여 무릎 꿇고 앉은 토도마츠와 쵸로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제삿날 카라마츠가 본채에 발도 들이지 않고 일을 돕지 않았다는 말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아버지의 호통과 그에 대드는 카라마츠의 외침을 들으며 토도마츠가 저려오는 다리를 꼼질였다. 

집안의 대를 이을 녀석이 어쩌고 저쩌구 화내는 아버지와 집을 이을 생각따위 없다고 응수하는 카라마츠의 싸움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싸움을 끝내주길 원하면서 방 안을 둘러보아도,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는 어머니와 묵묵히 둘의 싸움을 지켜보는 카나코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언성에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도 지친 기색을 비추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을 때,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문이 열렸다.


“이야~, 시끄럽네? 시끄러워서 낮잠도 못 잘 정도야~?”

낯선 이의 목소리에 오둥이의 눈이 문쪽을 향했다. 

주먹을 높이 치켜든 채 멈춘 아버지도 놀란 얼굴로 거실 입구를 응시했다. 

붉은 기모노에 황금색 꼬리와 귀를 가진 요상한 남자가 성큼성큼 거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 오, 오소마츠님!! 여긴 어쩐일로...!!”

재빨리 남자에게 뛰어가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카나코의 모습에 쵸로마츠 이하 네명의 동생들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집안의 최고 어르신이 몸을 낮추어 존댓말을 할 정도로 남자는 늙어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오둥이의 또래로 보일 정도로 남자는 어린 티가 묻어나오는 청년이었다.


“시끄러워서 왔다고 했잖아~. 여어-, 거기 주먹 든 녀석. 카나코 아들내미.”

함부로 카나코의 이름을 부르고, 한참 연상으로 보이는 아버지에게 건방지게 손짓하는 남자의 모습에 거실에 있는 모두가 입을 벌렸다. 

오소마츠의 등장에 적잖이 놀란 카라마츠도 제 아비를 쏘아보는 오소마츠에게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누구한테 허락받고 내 신부한테 손을 대려고 하고 있어?”

“오, 오소마츠?!”

“내 신부를 만질 수 있는 건 남편인 나뿐이거든?”

“오소마츠으!?”

카라마츠의 옆으로 걸어가 카라마츠를 감싸 안은 남자, 오소마츠는 어쩔 줄 몰라하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아버지에게 눈을 맞췄다.


“장자니 뭐니,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장자 타령? 가업이야 저-기 앉아있는 놈들 가운데 아무나 이으면 되잖아. 카라마츠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놔둬.”

아버지를 향해 콧방귀를 끼며 꼬리를 살랑이는 오소마츠의 말에 입을 뻥끗거리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연실색한 카나코가 오소마츠의 앞에 끼어들었다.


“오소마츠님! 말씀을 거두어 주세요! 당연히 가문은 장자인 카라마츠가 이어야 할 일입니다!”

“누가 그게 법이라고 말했어? 상관 없잖아, 장자가 아니어도. 너희는 ‘누군가’가 집안을 잇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내가 장자가 아닌 다른 녀석이 집안을 이었다고 화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를 모실 수 있는 녀석이면 누구든 상관 없다고? 그게 아니면, 내 말을 거역할 특별한 이유라고 있어?”

“하지만, 대대로...!”

“카나코, 누구 덕분에 지금까지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

카나코의 항변에 오소마츠의 음색이 변했다. 

장난기나 묻어나오는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공기를 울리며 듣는 이의 소름을 불러 일으켰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호랑이의 울음소리에 몸이 얼어붙은 토끼처럼 카나코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말이야~. 카나코, 너도 이딴 집안 싫다면서 뛰쳐나가놓고, 카라마츠한텐 집안을 이으라고 화내는 거,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거다?”

“오, 오, 오, 오소마츠님!!”

오소마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카나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만 말하라며 오소마츠를 다급히 부르는 카나코의 당황한 모습에 오둥이는 그저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 꼬맹이들도.”

““““!!””””

오소마츠의 시선이 네 명의 동생들에게 옮겨졌다. 

차갑게 노려보는 붉은 눈을 마주한 동생들이 몸을 흠칫 떨며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카라마츠도 너희랑 동갑인 단순한 ‘아이’야. 너희가 귀찮다는 이유로 카라마츠가 받는 불합리한 대우를 보기만하면서 카라마츠한테 전부 떠넘기고 무시하지 마.”

““““....””””

뜻밖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동생들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오소마츠와 그 품에 안긴 카라마츠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오소마츠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카라마츠는 장자니까, 라는 사실을 앞세워 귀찮은 일을 피했다.

그것이 카라마츠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본 동생들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죄책감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카라마츠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카라마츠도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들의 눈빛에 서린 죄책감을 알아채고 짙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헤실 웃었다. 

카라마츠와 동생 사이에 사과와 용서의 눈빛이 오고가는 것을 본 오소마츠가 반쯤 감은 눈을 동생들에게 꽂아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네!!!””””

목이 떨어지라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들의 힘찬 대답에 오소마츠가 만족스럽게 웃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카나코는?”

“...알겠습니다.”

“아들내미도?”

“...네.”

흔들리는 눈으로 카나코와 카라마츠를 바라본 아버지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오소마츠가 싱긋- 웃고는 품에서 카라마츠를 꺼내 툭- 등을 밀었다. 

거실 한 가운데 선 카라마츠에게 카나코가 먼저 다가갔다.


“카라마츠, 미안하구나. 내가, 나도 젊었을 적 얼마나 이 집안을 싫어했는지 잊고 있었구나. 너도 나만큼이나 싫었을 터인데.... 나도 원치 않았던 일들을 네게 강요해서 미안하구나.”

“...할머니....”

진심어린 카나코의 사과에 카라마츠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눈물을 글썽이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쓰다듬는 카나코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미소지은 오소마츠가 슬며시 거실을 떠났다.



“오소마츠!! 잠깐만!”

별채로 향하는 오소마츠를 급히 카라마츠가 붙잡았다. 

카나코의 사과로 카라마츠에겐 더이상 집안을 이으라는 압력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집안 최고 어르신의 결정이 가지는 위력을 남자 신부가 되었던 카라마츠는 싫어도 잘 알고 있었다.


“고맙다. 오소마츠.”

“오-. 이정도야 껌이지?”

카라마츠의 인사에 배시시 웃으며 코 밑을 문지른 오소마츠가 별채 현관에 도착하자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 내가 줬던 부적, 지금 가지고 있어?”

“이거 말인가?”

오소마츠의 말에 카라마츠가 줄곧 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오소마츠가 신부의 증표라고 건네준 부적은 카나코의 잔소리 덕분에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내민 부적을 오소마츠가 손에 쥐었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부적을 살핀 오소마츠가 그대로 부적을 쥐고 소매에 손을 넣었다.


“오소마츠?”

“이제 좁은 우물에 널 묶어두던 건 전부 없어졌어.”

“...에?”

“마음껏, 너 살고 싶은대로 살아. 카라마츠.”

“그게, 무슨 소리야....”

“짐은, 카나 할멈한테 옮겨놓으라고 할게.”

“오소마츠...?”

영문 모를 말을 끝낸 오소마츠의 식신이 연기를 뿜어내며 종이가 되어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오소마츠의 말에 불길한 예감을 지우지 못한 카라마츠가 재빨리 별채 현관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으왓!”

치직-, 하고 정전기가 오른 것처럼 현관문에 닿은 카라마츠의 손이 튕겨졌다. 

찌릿찌릿 손에 남은 이질적인 감각에 카라마츠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굳게 닫힌 별채 현관을 응시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시 손을 뻗어도 현관문에 닿기도 전에 카라마츠의 손은 튕겨져 나왔다. 


몇 번을 반복해도 카라마츠는 별채에 들어갈 수 없었다.






9.


별채에 있었던 내 짐은 다음날 할머니가 본채로 옮겨놓았다. 

오소마츠에게 부적을 돌려준 후로 나는 별채에 들어갈 수 없었다. 

혼례식을 올렸던 날엔 부적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


오소마츠 덕분에 나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아버지와는 어색하지만 더는 내가 하고 싶다는 일을 막지 않았다. 

형제들도 그동안 내가 힘든 것을 못 본척 했다며 사과했고, 어머니도 미안하다며 내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셨다. 

오소마츠 덕분에 멀어져있던 가족이 다시 내 곁에 돌아왔다.


하지만, 외로워. 


오소마츠가 곁에 없는 것이 이렇게나 쓸쓸할 줄 몰랐다. 

내 마음대로 살라고 했던 오소마츠의 슬픈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게 작별 인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런 슬픈 미소는 그만두라고 화냈을 텐데.

오소마츠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멋대로 나를 밀쳐냈다. 

무슨 생각으로 나를 밀어낸걸까, 그럼 이제 별채엔 오소마츠 혼자 있는 건가, 밥은 잘 챙겨먹고 있을까 등등, 시간만 나면 오소마츠를 생각하고 있었다. 

부활동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연기하는 순간조차 오소마츠가 떠올라 전혀 즐겁지 않았다. 

내가 연기 연습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곁에 다가온 오소마츠가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항상 제법 잘한다며 칭찬의 한 마디를 던졌다. 

무심한 듯 내뱉은 그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이제야 깨닫다니, 바보인가 나는.... 

연극부 선배들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송별 공연에서 주역을 맡아도 기쁘지 않았다. 

오소마츠가 봐주지 않는다면 전부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그리운 아이방에 앉아 대본을 펼쳐들어도 대사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본을 내려놓았을 때, 방으로 들어온 토도마츠가 훌쩍 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카라마츠 형, 들었어?”

“뭘?”

“아키코 고모 소식!”

“무슨 소식인데?”

“고모가 여자아이를 입양한대!”

“...에?”

흥분해 고모네 소식을 전하는 토도마츠의 말소리가 하나도 흐릿하게 들렸다. 

‘여자아이’라니. 그럼, 그 아이가 오소마츠의 신부가 되는 건가? 

내가 했던 것처럼 하얀 신부복을 입고 혼례를 올리고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는 건가...? 

황금색 귀를 쫑긋거리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꼬리를 휘젓는 오소마츠의 곁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그린 순간, 마음이 어둡게 물들었다. 

먹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검어진 마음 속에서 수없이 떠오른 한 마디가 귀를 막고, 시야를 가리고, 호흡을 억눌렀다.


— 그건, 싫다.

오소마츠 곁에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 있는 건, 싫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이 몸을 움직였다. 

토도마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방을 빠져나가는 발은 멈추지 않았다. 

신발을 구겨 신고 본채를 나와 별채 앞에 섰다. 여전히 나는 별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안된다, 오소마츠.

나 말고 다른 녀석을 신부로 삼는 건.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물었다. 

확답이 필요했다. 

다른 신부는 맞이하지 않겠다는 오소마츠의 대답이 필요했다. 

그 대답을 듣지 않으면 용솟을쳐 울렁거리는 이 마음이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오소마츠!!!”

마당에 가득 찰 정도로 크게 불러도 별채는 잠잠했다.


“오소마츠, 오소마츠, 오소마츠으!!! 나올 때까지 부를 거다!!! 오소마츠!!!”

목이 쉴 때까지 몇번이고 오소마츠를 외쳤다. 

목이 따끔거리고 심한 기침이 나와도 오소마츠를 불렀다. 

백 번쯤 불렀을 때, 드르륵- 하고 별채 현관문이 열렸다.


“시끄럿! 몇 번을 부르는 거야! 카라마츠!!”

겨우 3일 못봤던 것 뿐인데, 너무나 그리운 얼굴이 문 밖으로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지만 금방 따끔한 느낌과 함께 몸이 밀쳐졌다. 

보이지 않는 막을 경계로 별채 안의 오소마츠와 마당에 선 내가 마주보았다.


“왜 부른 건데-.”

“오소마츠! 아키코 고모가 여자아이를 입양한다고 했다.”

“어. 들었어.”

“그럼, 오소마츠는 그 아이를 신부로 삼을 생각인가...?”

“응-, 뭐. 그렇ㅈ”

“싫다!!!”

“허?”

“부탁이다, 오소마츠. 나 말고 다른 녀석을 곁에 두지 말아줘....”

“너, 무슨 말하는거야. 모처럼 자유롭게 만들어줬는데. 너한텐 넓은 세상이 있으니까 굳이 내 곁에 남을 필요 없다고. 네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많이 느끼고, 많이 경험해서 좋은 여자 만나서 아이도 낳고. 네 아이라면 분명 귀여울 테니까.”

“안 돼!! 내 딸도 신부로 줄 수 없다!!”

“하아!?”

“내가!! 오소마츠 곁에 있고 싶다!”

“에에-? 그럴 필요 없다니까~?”

“왜!”

“왜냐니.... 그러니까~, 내 곁에 있을 필요 없이 세상을...”

“아아-, 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응?”

이 결계를 깨고 네가 싫어해도 네 곁에 남아주겠어!!!

“하-!?”

“마음대로 살라고 한 건 오소마츠 너잖아!!”

“하아!? 아니, 내 말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잖아!”

“기다리고 있어라!! 이딴 결계 순식간에 깨부숴주지!!!”

“에엑!?”



그 후로 별채로 들어갈 수 있는 온갖 시도를 해 보았다. 

별채에 출입할 수 있는 할머니에게도 오소마츠가 준 부적이 있어 그것을 잠시 빌려 들어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창문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실패, 지붕에서 내려가보려고 해도 실패, 땅을 파서 들어가려고 해도 실패했다. 

사람 키만큼 깊이 파 놓은 구덩이에 주저앉아 다른 방안을 모색해보았지만 전부 실패. 


한달에 걸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뒤에야 왜 오소마츠는 별채에 머무르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있고 비행기가 날라다니는 현대 사회에 한 가문을 수호하는 짐승 귀를 가진 신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비현실적이었다. 

어떻게 오소마츠가 우리집 별채에 존재할 수 있는지, 대체 언제부터 우리 가문을 수호해 온 것인지 친척들에게 물어도 그 누구도 알고 있지 않았다. 

아키코 고모에게 전화해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느냐 물었지만, 아키코 고모도 오소마츠에게 들은 이야기는 없다고 했다.


“...카라마츠.”

“할머니?”

고모와의 통화를 끝내고 절망에 빠져있을 무렵, 할머니가 내게 다가오셨다.


“이 집에서 가장 나이든 할미도 오소마츠 님에 대한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허나, 오소마츠 님에 대한 단서가 있을 법한 곳을 알고 있지.”

“네? 그게 어디....”

“지하 창고다. 대대로 집안 최고 어른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만, 네게 열어줘도 해는 없겠지. 우리 집안의 모든 역사가 그 창고에 잠들어 있으니 오소마츠 님과 관련된 물건도 있을게다. 워낙 창고가 넓고 그곳에 있는 물건이 많아 찾기는 힘들것지만....”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는 낡은 열쇠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한 번 찾아보거라.” 하고 부드럽게 웃는 할머니의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학교가 끝나면 매일 지하 창고로 향했다. 

할머니의 말대로 창고엔 수십 년부터 수백 년은 지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몇몇은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를 기괴한 모양을 한 것들도 있었다. 

창고의 가장 깊은 곳부터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쌓인 서적을 먼지 털어가며 훑어보았다. 

물건을 들어내고 옮기길 한 달, 한 권의 일기를 발견했다. 

종이가 노랗게 바래 한눈에 봐도 오래된 일기였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일기를 손에 집어 펼쳤다. 

옛말로 쓰인 일기를 사전을 찾아가며 조금씩 읽어 내려갔다. 


일기는 우리 가문의 시조, ‘아카츠카’라는 유명한 음양사의 것이었다.






10.


영향 7년, 유월 초하루

산길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못된 장난을 하던 여우를 퇴치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산에 올랐다. 

산길 옆에 쓰러져있는 가련한 여성의 모습을 한 여우를 발견해, 그 둔갑술을 풀자 어린 여우 요괴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망치려는 것을 붙잡아 불제하려하자, 여우가 깽깽거리며 시끄럽게 울었다. 

당장 내 손에 사라질 운명의 녀석이 죽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더 놀고 싶다며 울었다. 

수많은 요괴를 불제해왔지만 더 놀고 싶다며 우는 요괴는 처음 보았다. 

황당한 이유로 우는 것이 기이해 여우를 놓아주고 왜 인간들에게 장난을 쳤냐 묻자, 심심해서 그랬다는 당돌한 대답이 돌아왔다. 

꼬리 하나를 살랑이는 것이 꼭 어른의 관심을 끌려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 같았다. 

심심하다는 말 뒤엔 ‘외롭다’는 본심이 숨겨져 있었다. 

여우는 죽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우에게 다시는 인간들에게 심한 장난을 치지 말라 당부하고 숲 속에 놓아주었다.



영향 7년, 유월 스무날

스승에게 요괴를 놓아준 것이 들켜 파문을 당했다. 

오히려 잘 되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것이 일생이 꿈이었다. 

짐을 챙겨 스승의 집을 나오자 이전 놓아주었던 여우가 따라붙었다. 

따라오면 불제하겠다는 협박에도 여우는 끈질기게 내 뒤를 쫓았다. 

이유를 물으니 나를 돕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당돌한 녀석. 여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음양사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더냐.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나를 따르는 여우를 도저히 내칠 수 없었다. 

열살 남짓한 모습을 한 여우는 분명 나보다도 오랜 세월을 살아왔겠지만,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원하는 어린 시절의 나와 닮아있었다. 

좋다고 대답하자 여우가 활짝 웃었다.



영향 7년, 구월 사흗날

전국을 돌아다니며 거치는 마을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며 여행을 이어가던 어느날, 여우가 왜 인간들이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냐 물었다. 

내가 그들을 도와주니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리 부른다 답하자,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나를 ‘선생!’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드는지 유부를 먹을 때처럼 여우가 웃었다.



영향 7년, 시월 열하루

작물을 병들게 하는 이누가미가 선산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퇴치하러 길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선산에 있는 이누가미를 발견한 것은 좋았으나, 이누가미는 내 생각보다 더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싸우던 와중에 나를 감싼 여우가 이누가미의 발톱에 당하고 말았다. 

급히 가지고 있던 영약을 먹였으나 힘이 부족한 여우의 둔갑이 풀리고 말았다. 

귀와 꼬리를 숨기고 인간으로 둔갑했던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변했다. 

여우는 꼬리가 다섯 개인 여우로 변해 잠들었다. 

줄곧 꼬리가 한 개인 줄 알았건만, 이 여우는 내 생각보다 어린 여우가 아니었던 듯하다.



영향 7년, 시월 그믐날

이누가미에게 당한 여우의 상처가 다 나았다. 

도로 어린 여우의 모습으로 변한 여우에게 왜 내게 잡혔냐 물었다. 

꼬리가 다섯 개인 여우의 힘이라면 내게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여우는 생긋 웃으며 전력을 다해도 내겐 이기지 못한다는 거짓말을 했다.



영향 8년, 칠월 열아흐렛날

하룻밤 잠을 청할 마을을 찾지 못해 노숙을 했다. 

길바닥에 누워 잠을 자고 일어나니 웬 나체의 여성이 내 팔을 베고 자고 있어 혼미백산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세히 살피니 여우가 괘씸한 장난을 친 것이었다. 

여우의 머리에 커다란 혹을 만들어주고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 말라 당부했다. 

여우는 내게 맞은 뒤에서 한참을 키들거렸다. 괘씸한 녀석!



문안 2년, 삼월 아흐렛날

여행 중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산과 개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 보기에 너무나 아름다워 이곳에서 지친 심신을 추스르기로 했다. 

여우는 내가 마을에 머무는 동안 산으로 올라가 지내기로 했다. 

여우가 가끔 산짐승을 물고 내려오면 함께 고기를 뜯어 먹었다. 

여우도 이 평화로운 마을이 마음에 든 듯 했다.



문안 2년, 유월 초하루

어느새 여우와 만난지 십 년이 지났다. 신의 인도로 마을에 살던 여성과 정을 통했다. 

마을 사람들과 여우의 축복 속에서 혼례를 올렸다. 

설마 이 나이에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될 줄은 몰랐다. 여행은 이제 끝났다.



문안 3년, 사월 스무나흗날

마츠요가 태어났다. 아내가 죽었다.



보덕 1년, 팔월 닷샛날

마츠요가 무사히 세 살이 된 것을 축하하며 큰 잔치를 벌였다. 

여우도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웃었다. 

여우는 아내가 죽은 이후로 산에서 내려와 인간으로 둔갑해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마츠요는 아비인 나보다 여우를 더 따른다. 

잔치 내내 여우의 품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아내가 떠난 이후로 여우가 어미역을 했으니 마츠요가 여우를 따라도 불평은 할 수 없겠다.



강정 2년, 사월 스무나흗날

마츠요가 열 살이 되었다. 이젠 제법 계집아이 티가 난다. 

여우가 산 속에서 하얀 꽃을 꺾어와 마츠요에게 주었다. 

하얀 꽃이 마츠요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



강정 2년, 오월 스무날

마츠요가 여우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항상 여우를 ‘여우야’ 하고 부르니 마츠요가 화를 냈다. 

마츠요가 붙인 이름은 ‘오소마츠’다. 항상 실수하고 바보같고 변변찮으니 ‘오소마츠’란다. 

여우에게 너무나 어울리는 이름이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우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게 뭐냐 불평하면서도 기쁘게 꼬리를 흔들었다.



문정 1년, 정월

작은 마을에 떠돌이 사내 하나가 정착했다. 

마츠조라는 녀석으로 성실하고 근면한 것이 괜찮은 청년으로 보였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딸리는 나를 도와 함께 농사를 짓기로 했다.



문정 1년, 유월 열흘날

마츠조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올바른 아비라면 하루 빨리 마츠요와 마츠조를 혼인시켜 내보내야겠으나, 못난 아비라 아직 마츠요와 함께 살고 싶어 둘의 혼인을 미루었다. 

마츠요는 아비를 배려해 기다리겠다 했다. 

여우는 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응인 1년, 이월 여드렛날

옆마을에서 불제 요청이 들어왔다. 

역병을 옮기는 악신이 머무르고 있는 듯해 채비를 해 옆마을로 떠났다. 

산을 넘는 중에 마츠조가 독사로 변해 저를 공격하는 ‘산의 아이’를 때려 죽였다. 

분노한 산신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마츠조는 마츠요와 혼인해 가정을 꾸려야한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했다. 

여우는 마츠조를 지키지 못했다며 슬피 울고 산으로 들어갔다.



응인 1년, 이월 아흐렛날

산신이 찾아왔다. 

여우가 분노해 산신을 죽이겠다 벼르는 것을 말리고 저주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산신의 저주는 대를 따라 내려간다. 

마츠요가 ‘아카츠카’라는 성을 유지한다면 마츠요에게도 저주가 옮을 것이다. 

서둘러 마츠조와 혼인식을 올렸다.



응인 1년, 섣달 스무이튿날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산신의 저주는 이 몸과 함께 사라질 것이나 내가 그동안 방탕하게 살며 산 원한이 마츠요에게 향할까 불안하다. 

혹 요괴나 악령이 마츠요를 해코지하지는 않을까. 

못난 아비 때문에 미안하구나....



응인 2년, 섣달 그믐날

오소마츠가 마츠요를 지키겠다 맹세했다. 

거절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럴 수 없었다.

어리석은 녀석, 이 한심한 사내에게 정을 주니 자유를 빼앗기고 마는게 아니냐. 


그러니 마츠요, 내 딸아. 내게 이 일기를 남기마. 

너를 향한 원한은 모두 오소마츠가 막아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죽기 전, 오소마츠를 해방해주거라. 

내게 한 맹세로 우리 가문에 묶여버린 오소마츠를 해방해주거라. 

인간의 일은 응당 인간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곁을 지켜준 사랑스러운 여우를 다시 드넓은 벌판에 풀어주거라.



아버님께,

아버님, 제 영혼이 이 늙은 몸을 떠나기 전 아버님께 용서를 빕니다.

아버님이 저를 걱정해 오소마츠의 맹세를 받아들이셨듯, 저도 제 아이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버님을 향한 원한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오소마츠가 없다면 제 아이들은 순식간에 원령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저는 오소마츠를 풀어줄 수 없었습니다.


오소마츠, 미안. 미안해...






11.


눈물 자국이 남은 낡은 종이에 새 눈물이 떨어져 글씨가 번졌다. 

이 일기가 쓰여진 때부터, 오소마츠는 쭉- 우리 가문을 지켜주고 있었다. 

‘마츠노’ 가문에 묶여서. 

장난치길 좋아하고 짓궂으면서 상냥한 여우를, 별채에 가둬두고 있던 것은 우리들이었다.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몇백 년을 오소마츠는 이곳에 있었다. 

오소마츠가 우리를 지켜주는 이유조차 잊은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삼키고 일기 옆에 세워져있던 낡은 석장을 들고 창고를 나왔다. 



“오소마츠!!! 나와라!! 오소마츳!!!”

“시끄러어~! 지금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야! 바보 카라마츠!”

별채 앞에서 소리를 질러 오소마츠를 불렀다. 

졸린 듯 눈을 비비고 나온 오소마츠가 내 손에 들린 석장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그거.... 선생의,”

숨을 들이마시고 온힘을 다해 석장을 들어올려 크게 내리쳤다. 

콰광-! 괴음을 내며 유리가 깨지듯, 별채를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깨졌다. 

충격으로 부러진 석장을 던지고 깨진 결계를 넘어 오소마츠의 손을 잡았다.


“말했지? 내 마음대로 오소마츠 곁에 있겠다고.”

“....”

“다른 신부를 맞이하지 말아줘, 오소마츠. 나로 좋다고, 네가 말했잖아! 나를 듬뿍 사랑해준다고! 그러니까, 나를 마지막으로 해라!!



당돌하게 외치는 카라마츠를 멍청히 응시한 오소마츠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그대로 품에 안았다.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흐느끼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소마츠가 밤하늘에 뜬 별을 응시했다.


‘이만하면 됐지? 선생. 이제 내 멋대로 살아도 괜찮지? 나, 제대로 선생의 자손들 지켰고.’


닿을지 어쩔지 모르는 마음을 별에게 고백한 오소마츠가 품에서 카라마츠를 떼고 손을 마주 잡았다. 

고개를 기울여 카라마츠와 이마를 맞댄 오소마츠가 눈물에 촉촉이 젖어 반짝이는 카라마츠의 눈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래, 너를 마지막으로 하자.

“약속이다!!”

“응, 약속.”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새끼 손가락을 내민 카라마츠를 보며 “쿠후후-.” 하고 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안심한 얼굴로 행복하게 웃는 카라마츠 너머로 아카츠카 선생이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하는 환상이 보였다.






12.


“오디션 어떻게 됐어?”

“물론, 합격이다! 나의 퍼펙트한 연기를 보고 거부할 수 있는 심사위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 네네-. 너, 도시로 나오고 성격 변하지 않았어?”

“응—?”

“아니다. 그럼 오늘은 축하하는 의미로 외식할까?”

“논논, 오소마~츠? 오늘은 그거다! 콩그레츄레이션의 가라아게다!!”

“누가 (요리) 하는데.”

“물론 내가!”

“오-!! 그럼 빨리 재료 사러 갈까!”

“아!”



“그런데 오소마츠.”

“응-?”

“너는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어-? 음, 글쎄.... 어쩔까?”

“오소마아츠~? 이럴 땐 나를 기다린다고 대답해야지!”

“에에~? 네가 언제 환생할 줄 알고.”

“기다려.”

“쳇. 그럼 기왕 환생할 거 요괴로 환생해줘.”

“요괴?”

“쭉- 같이 있을 수 있게.”

“오! 그렇군! 그럼 텐구로 환생하겠다!”

“엑, 왜 하필 텐구?”

“응~? 그거야, 멋지잖아?”

“...아, 그러십니까.”

“오소마츠?”

“아냐아냐, 그럼 텐구를 기다리는 동안 지옥에 있는 유흥가나 돌까.”

“오소마츠!? 나라는 신부가 있으면서 유흥가라니 무슨 소린가!!”

“너가 언제 돌아올 줄 알고! 혼자 있는 거 싫다고!”

“바로 돌아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

“에에———!!”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천호 오소마츠 x 학생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아프지 않아요...ㅎ


* 공미포 18,049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부활동이 끝나고 본채에 들러 엄마와 할머니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후, 별채로 향했다. 

혼례식을 올린 후로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사람의 버릇은 한 달이면 생긴다는데, 3개월이 지난 지금은 별채에서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 

드륵- 현관문을 열고 “다녀왔습니다.” 하고 빈 복도에 인사를 던졌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한숨을 내쉬고 신발을 벗어 복도에 올랐다.



“오소마츠….”

이마에 솟아난 힘줄을 누르며 오소마츠를 부르는 목소리가 절로 낮게 깔렸다.


“방 꼴이 이게 뭔가!!! 먹었으면 치워라!! 그리고 집 안에서 담배피지 말라고 했잖아!! 냄새 난다!!! 저번에도 교복에 냄새가 배여서 주임 선생님께 혼났다고!!!”

“오-, 어서와~. 신부님~.”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과자 봉투에 발에 밟히는 부스러기. 

방 안은 담배 연기로 탁하다 못해 뿌옇다. 

쾅! 하고 발을 굴리며 잔소리를 퍼부어도 오소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가볍게 웃었다. 


“당장 담배 꺼라!”

“에에~, 너무 잔소리가 많은 거 아냐? 카라마츠우~.”

푹신해 보이는 꼬랑지를 훌렁훌렁 흔들며 말을 늘이는 오소마츠를 노려보았다. 

바닥에 널린 과자 봉지를 줍고 아직도 담배를 끌 생각이 없는 오소마츠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계속 담배 피우면 저녁밥 없다.”

“끄겠습니닷! 근데 오늘 저녁 반찬 뭐야?”

“가라아게.”

“너, 진짜 고기 좋아한다…. 뭐, 네 음식은 맛있으니까 불만은 없지만.”

손을 한번 휘저어 순식간에 담뱃대를 없앤 오소마츠가 황당하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 들리도록 한숨을 크게 내쉬고 과자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방을 치우는 동안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담배 연기가 빠져나가 방 안 공기도 맑아졌다. 

편안해진 호흡에 잔뜩 공기를 들어 마시고, 방 한가운데 누워있는 오소마츠를 한 번 더 노려보고 주방으로 향했다. 



별채 안은 의외로 쾌적하다. 

주방에 있는 주방기구도 전부 본채에 있는 것보다 신식에 쓰기 쉬운 녀석들뿐.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온 닭고기를 조리대에 올리고 식탁에 놓인 푸른색의 앞치마를 둘렀다. 

통통, 식칼로 양배추를 썬다. 

사각사각-, 양배추를 써는 소리와 감각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잠시, 주방에 들어온 오소마츠 덕분에 평안한 공기가 깨지고 말았다.


“후아~, 심심해. 카라마츄~, 밥 아직~?”

“이제 막 요리 시작했다!”

“에-, 심심한데. 카나 할멈한테 여기에도 TV 놓아달라고 할까?”

“엣? 가능한 건가?”

“…? 전기 들어오잖아, 여기.”

“그러고보니….”

환하게 주방을 밝히고 있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며 말을 흐렸다. 

생각할수록 이 별채는 ‘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없다. 

전기도 들어오고, 주방은 신식에…, 욕실도 깔끔하다. 

신이 머무는 곳인데도 경건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하긴 머무르고 있는 신이 저 모양이니…. 

어느새 꺼낸 게임보이를 집중해 연타하고 있는 오소마츠를 보며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고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가라아게를 건져냈다.



“음~! 맛있어!”

의자 뒤로 튀어나온 꼬리가 크게 살랑거렸다. 

아직 뜨거운 가라아제를 한입 가득 물고 오물거리며 중간중간 뜨거운 숨을 내뱉는 오소마츠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지금까지 신부수업이라는 명목 하에 우리 가족의 요리는 전부 내가 맡았지만, 최근엔 ‘맛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저렇게 기쁘게 먹으면 만드는 입장에서는 꽤 기쁘다. 

오소마츠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간이 책상을 폈다. 

본채에서도 방 하나에 여섯이 함께 살다 보니 책상을 놓을 공간이 없어 간이 책상에 앉는 것은 익숙하다. 

곧 연극부의 정기 공연이 다가오고 있으니 연습을 철저하게 해 두어야만 한다. 

형광펜으로 알록달록 칠해진 대본을 펴 들고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이번엔 주역을 놓쳤지만, 주역을 보좌해주는 중요한 역을 맡았다. 

선배들도 기대하고 있다고 해주었고, 연극부에 들어가고 처음 맡는 큰 역할이기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연필을 꺼내 떠오르는 생각을 대본에 적고 마지막으로 대사를 외우며 감정을 잡았다.


“-그게 정말 마지막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네가 편하기 때문에 고른 것이 아닌가? 대답해라!”

이야기의 절정 부분, 망설이는 주인공을 추궁하고 힘을 실어주는 장면이다. 

담담히, 하지만 힘있게 목소리를 내지르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주인공의 절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주인공을 믿고 쓴소리를 하는 내 역할에 큰 감정은 필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해서는 내 전부를 연극 속의 역할에 내던져야 한다. 

주인공은 변명한다.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주인공을 보며 더 답답해하고 기어이 인상을 찌푸리고 만다.


“변명이다! 너는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포장하며 자기자신을 속이고 있어! 요령을 피우고 있다는 것은 너도 느끼고 있잖아!”

주인공은 침묵한다. 

분노가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허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내가 미운 것이다. 

친우인 주인공의 원망 어린 눈빛은 아프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설령 주인공이 나를 미워하게 되더라고 나는 주인공을 옳은 길로 인도해주고 싶은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너는 이렇게 비겁한 사내였나!? 어쩔 수 없다며 불의를 그냥 지나가는 치졸한 남자였던가! 그렇다면 나는 너와 연을 끊겠다!”

마지막으로 단호히 외친다. 

비통한 심정을 감추고 정말로 분노한 것처럼. 

속으로는 주인공이 마음을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며 애절하게 주인공을 응시한다. 

주인공의 눈빛에선 원망이 서서히 사라지고 뚜렷한 빛이 비친다. 

쓴웃음과 함께 주인공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몸을 돌린다. 

주인공이 사라진 무대 위에서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걸로 마지막. 주인공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무대를 떠난다. 

다음 장면에서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무대 밖에서 불치병으로 죽어버린 나를 주인공이 아련히 회상할 뿐이다. 

행복해지겠다는 다짐을 하늘에 하면서.


“후―.”

참았던 숨을 몰아 내뱉으며 대본을 내리자 내 앞에 앉아있던 오소마츠가 보였다. 

씩- 웃으며 짝짝짝, 손뼉을 친 오소마츠의 옆엔 게임보이가 버려져 있었다.


“게임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응-, 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갑자기 묘한 소리를 하길래~. 뭔가 싶어서 구경했지. 무슨 연습?”

“…연극부의 정기 공연이다.”

“흐응―. 꽤 잘하던데?”

“…고맙다. 하지만, 더 연습하지 않으면.”

오소마츠의 칭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본채에서는 형제들이 시끄럽다고 불평해 제대로 된 연기 연습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게 뒷마당에서 몰래 했던 연기 연습을 연극부 부원들이 아닌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 3개월간 오소마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오소마츠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다시 싱긋- 웃고 내 손에 들린 대본을 슬쩍 가져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이야긴데.”

“창작극이다. 연극부에 뛰어난 작가가 있어서, 정기 연극은 전부 창작극으로 하고 있다.”

“헤에-.”

팔락팔락, 오소마츠가 넘기는 종이가 소리를 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본을 전부 훑어본 오소마츠의 꼬리가 천천히 너울댔다.


“네가 죽는 장면도 무대에 있으면 좋은데 말이야.”

“아아-, 그렇네. 하지만 길어야 20분 정도인 공연이니 내가 죽는 장면을 생략해도 어쩔 수 없지.”

50분 정도에 달하는 공연은 1년에 한번, 축제 때 하는 것이 전부다. 

몇몇 연극부에 들러주는 고마운 학생들을 제외하면 관객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정기 공연은 대체로 15분에서 20분 정도의 짧은 공연을 한다. 

배우는 죽을 때도 무대 위에서 죽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으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오소마츠가 돌려준 대본을 받아 다시 내가 등장하는 장면을 폈다.


“그거 즐거워?”

“연극 말인가?”

“응.”

“아-, 즐겁다. 굉장히.”

“그래.”

대본을 살펴보는 내게 묻더니 싱겁게 고개를 끄덕인 오소마츠가 “끄아-.” 하고 비명을 지르며 기지개를 폈다. 

먼저 잔다며 방 한편에 이불을 깐 오소마츠가 귀를 쫑긋거리며 내일 할머니에게 TV 가져다 달라 말하라고 당부하고 이불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정기 공연이 끝나고 바로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3일에 걸친 시험 시간표에 한숨을 내쉬고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 가방에 넣었다. 

연기 연습과 오소마츠의 시중을 드느라 지금까지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이번 시험 성적은 어쩌면 꽤 위험할지도 모른다. 

몰려오는 위기감에 섬뜩해져 부르르 몸을 떨고 무거워진 가방을 멨다. 


식사를 마친 후, 책상에 교과서를 폈다. 

수업은 집중해 들었지만 복습을 하지 않아 기억이 군데군데 빠져있다. 

특히 수학 같은 건 평소에 문제를 많이 풀지 않은 탓인지 한 문제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끙끙대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풀가동해 문제를 풀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귀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라마츠우~, 놀아줘어~~. 심심해애~~!”

“게임이나 해라.”

“질렸어~~. 카라마츄 올 때까지 실컷 했다구우~. 좀 놀아줘, 신부님~.”

“저리 가, 오소마츠. 나는 공부해야 한다!”

“하루 정도 안 해도 괜찮지 않아~? 공부 때려 치고 놀아달라구우~.”

달달 떨리는 다리와 함께 인내심의 한계가 눈을 떴다. 

생각보다 문제가 풀리지 않아 초조했던 마음이 옆에서 치근대는 오소마츠 덕분에 분노로 색을 바꾸었다. 

짜증난다. 쥐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자 책상에 매달려 칭얼대던 오소마츠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니, 놀아주려는 거 아니니까. 

책상에 떨어진 연필이 데구루루 굴러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인정사정 없이 오소마츠의 머리에 주먹을 꽂고 다시 연필을 집어 들었다. 

“아팟!” 라던가 “신을 때렸어!?” 하는 헛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한다. 

사각사각 연필을 굴려가며 문제를 풀고 있으니 곧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산책이라도 하고 오려는 건지 오소마츠가 떠난 방안을 잠시 둘러보고 한숨과 함께 다시 문제에 집중했다. 

머리가 좋지 않아 한 과목을 공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짜증나는데 오소마츠가 바로 옆에서 방해하니 간신히 머리에 넣었던 것들이 다시 빠져 나온 것 같다. 

요 3개월 간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면서 위염이 생기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가끔 내 연기를 칭찬해 준다거나, 기쁘게 밥을 먹는 기특한 모습도 보이지만, 애처럼 칭얼대고, 방을 어지럽히고, 담배나 뻑뻑 피우고….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면서 좋은 일보다 싫은 일이 더 많다. 

이대로 오소마츠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국어 교과서를 펼쳤다.




“…츠, 카라마츠, 이제 일어나거라.”

“으, 응…?”

흔들리는 몸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환한 아침 햇살이 눈을 따갑게 조여와 신음과 함께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오소마츠의 자리가 비어있다.

 어제 그대로 안 들어온 것인가, 추론하며 내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께 아침 인사를 건넸다.


“오소마츠 님은 어디 계시냐?”

“…어제 나간 뒤로 안 들어온 것 같은데요.”

이불에서 나와 습관적으로 이불을 정돈하며 대답하자 할머니의 매운 손이 등을 내리쳤다.


“아우치!!”

“부인으로서 남편을 잘 모셔야지! 네가 뭘 어떻게 했길래 오소마츠 님이 안 들어오시는 거냐!”

“…죄송합니다.”

할머니의 호통에 덤덤히 사과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 역시 싫은 일이 더 많다.






5.


무난하다, 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점수를 앞에 쓴웃음을 삼켰다. 

이 성적표를 들고 간다면 분명 혼나겠지. 

오소마츠가 방해한 덕분에 시험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적은 작년보다 크게 떨어졌다. 

치솟는 짜증과 함께 오소마츠를 한껏 씹으며 성적표를 가방에 구겨 넣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웬일로 카라마츠 형이 이런 점수를 받았어?”

하교길, 내 점수를 물어본 토도마츠에게 구겨진 성적표를 보여주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그 말에 백 번 동감한다.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안 굴러가는 머리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부모님의 역정도 피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성적 관리를 했는데,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고 난 뒤로 받은 성적이 이 모양이다.


“쵸로마츠 형이 카라마츠 형보다 성적이 좋은 건 이번이 처음이네….”

어느새 받은 쵸로마츠의 성적표와 내 성적표를 나란히 든 토도마츠가 “헤에-.” 하고 감탄하며 말을 흐렸다. 

위원회가 일찍 끝나 함께 귀가하던 쵸로마츠가 내 성적표를 힐끔 보곤 “그러게.” 하고 수긍했다.


“뭐,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지! 너무 기죽지 마, 카라마츠 형.”

툭, 어깨를 치며 성적표를 돌려주는 토도마츠의 위로에 “그래.” 하고 대답하며 성적표를 손에 쥐었다. 

부디, 집에 부모님이 없기를…. 기도했지만 오소마츠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다.



GOD IS DEAD!!!

집에 돌아가니 떡 하니 아버지가 거실을 지키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의원 일 때문에 바빠 제대로 집에 들어오는 날도 적으면서 왜 하필 이런 날은 꼭 일찍 들어오는 걸까. 

“어서 와라.” 하고 미소지으며 읽고 있던 신문을 접는 모습에 긴장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먼저 들어온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도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먼저 집에 돌아온 이치마츠와 쥬시마츠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것인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아버지가 우리에게 손짓했다.


“오늘 성적표가 나왔다던데.”

“...네.”

젠장. 욕지꺼리를 삼키고 구겨진 성적표를 내밀었다. 

이어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도 얌전히 아버지의 손 위에 성적표를 올리고 굳은 얼굴로 아버지의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찬찬히 시간을 들여 우리의 성적표를 살펴보는 아버지의 눈이 날카롭다. 

작년보다 성적이 크게 떨어진 나는 혼날 것이 분명하기에 반쯤 체념하고 이어질 호통을 기다렸다.


“카라마츠. 성적이 왜 떨어졌지?”

“그게..., 오소마츠가 방해를 해서....”

“‘신’을 핑계로 댈 셈이냐?”

“....”

“쵸로마츠와 토도마츠, 너희는 괜찮구나. 하지만 다음 시험 때는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해라.”

“네.”

“네.”

아버지의 말에 쵸로마츠와 토도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둘을 응시하던 아버지의 시선이 일변해 날카롭게 내게 고정되었다.


“카라마츠, 너는 장자로서 앞으로 우리 가문을 이끌어갈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성적을 받으면 되겠니? 우리 가족 뿐 아니라 친척들도 모두 앞으로 네가 이끌어야 하는데, 이런 성적을 받은 사람을 누가 믿고 따라갈 수 있겠니. 게다가 ‘신’이 방해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이제 곧 수험생이라서 마음이 뒤숭숭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성적으로 이어지면 안되지. 이번 한번은 용서해주마. 다음 시험에선 작년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아라.”

“...네.”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도 나를 따라 침묵하며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휴-.” 하고 아버지가 내뱉은 한숨이 바닥에 퍼지고 곧 가죽 소파가 내지르는 비명이 귀에 걸렸다.


“그럼 나는 일하러 가볼테니까, 저녁 잘 챙겨 먹고. 카라마츠는, 더 열심히 해라.”

“...네.”

“네. 다녀오세요, 아빠.”

“다녀오세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쵸로마츠와 토도마츠의 인사를 받은 아버지가 거실을 나서자마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겨 본채를 나와 별채를 향해 뛰었다. 

쵸로마츠와 토도마츠의 동정어린 시선이 얽히는 그 자리에서 당장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거칠게 별채 문을 열고 복도에 서고 나서야 참았떤 눈물이 터져 나와 시야를 흐렸다.


사실인데. 

오소마츠가 방해를 한 것은 사실인데. 

게다가 ‘신부’다 뭐다 해서 혼례를 올리고 오소마츠와 함께 살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는데. 

오소마츠와 함께 지내면서 도저히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건데.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 앞에서 작아진 나를 변호해주지 않은 토도마츠와 쵸로마츠도 미워진다.


이 모든게 전부 오소마츠 때문이라는 생각에,


―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오소마츠가 있을 다다미방에 들어가지 않고 주방으로 직행했다. 

식탁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대로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었다. 

퉁퉁 부운 눈두덩이가 무겁다. 

빨리 차게 식혀야 내일 티가 나지 않을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왜 나한테만.’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여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아서 신부가 되고, 오소마츠와 함께 살아야하고, 싫은 일을 참아야하고, 원하지 않는 가업을 이어야한다. 

겨우 장자라는 이유 하나로. 

지금이 중세시대도 아니고 장자라고 꼭 집안을 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구식의 끝을 달리는 집안 풍습에 치가 떨리고 울분이 맺혀 참을 수가 없다. 

짜증난다. 전부, 다-. 

한번도 바란 적 없는데, 이런 꼴을 당하고 정작 원하는 것은 이룰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척 훈계하는 아버지도, 나를 신부로 만든 할머니도, 남일보듯 끼어들지 않는 형제들도, 모두 미워서, 싫다.... 

다시 뜨거운 눈물이 식탁에 툭,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흐느낌 없는 조용한 눈물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카라마츠?”

얼마나 울었을까, 심하게 퉁퉁 부은 눈을 비비고 있는 내게 모든 원흉이 된 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

“무슨 일 있었어?”

친근하게 다가와 내 옆에 선 오소마츠의 존재가 거슬린다. 

말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못 본척 지나가주었으면 마음을 한껏 담아 “별 일 없었다.” 하고 차갑게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너무 운 탓에 의자에서 일어선 순간 현기증이 일어 몸이 크게 기울었다. 

“우왓!” 하고 오소마츠가 급히 나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크게 넘어져 다쳤을 지도 모른다. 

오소마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나를 도로 의자에 앉혔다.


“오늘은 내가 저녁 할 테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

“...에?”

생각지도 못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눈덩이가 부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 눈을 끔뻑이자 오소마츠가 빙긋- 웃더니 항상 내가 맸던 푸른 앞치마를 들어 제 목에 걸었다.


“이 카리스마 레전드 신인 오소마츠님께서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내게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 보인 오소마츠가 뭐가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할머니가 사서 넣어둔 갖가지 재료들을 휘적대더니 곧 면과 고기, 양배추, 당근을 꺼냈다. 

찬장에서 야키소바 소스를 꺼내고는 “좋~아! 오랜만에 실력발휘 해볼까!” 하고 기합을 넣더니 능숙하게 채소를 씻고 다듬기 시작했다. 

다듬은 채소를 그릇에 넣고 프라이팬을 꺼내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볶기 시작했다. 

채소를 볶고 고기도 넣어 함께 볶는다. 야키소바 면은 물에 풀어 씻고 물기를 빼내어 팬에 넣고, 그 안에 소스를 부었다. 

축제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주방에 가득 찼다. 

야키소바다. 

오소마츠는 꼬리를 좌우로 크게 남실대면서 면을 볶은 후, 그릇에 옮겼다.


“카라마츠우~, 가츠오부시는 어디?”

“두번째 찬장에.”

“오! 찾았당!”

미리 갈려져 있는 가츠오부시 봉투를 꺼낸 오소마츠가 김이 모락모락나는 야키소바 위에 솔솔 뿌렸다. 

김을 따라 가츠오부시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두 사람 분의 앞접시와 야키소바가 든 커다란 그릇을 식탁에 올린 오소마츠가 “응.” 하고 젓가락을 내밀었다.


“...요리할 수 있었던 건가.”

그럼 내가 필요 없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든 생각에 자조하며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오소마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앞접시에 야키소바를 덜어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것만 할 줄 알아. 맛있어서 아키-한테 배웠거든. 다른 건 요리하기 귀찮고. 내가 한 것 보다 네가 한 게 더 맛있고-.”

달그락- 소리를 내며 앞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은 오소마츠가 멋쩍게 웃으며 귀를 쫑긋거렸다. 

아무런 의심 없이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니 오소마츠를 원망했던 것이 어쩐지 모두 부질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오소마츠는 그냥 웃어 넘길 것만 같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고 젓가락을 고쳐 잡고 야키소바를 입에 넣었다.


“...맛있다.”

“응, 많이 먹어~.”



배불리 야키소바를 먹고 목욕을 하고 툇마루에 앉았다. 

목욕으로 따끈하게 데워진 몸이 밤바람에 온기를 빼앗겼다. 

식어버린 피부를 쓱- 매만지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눈을 깜빡이며 밤하늘에 박힌 별의 수를 세고 있자, 끼익- 하고 마루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오소마츠가 서 있었다.


“카라마츄~, 오늘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없었다.”

“아니, 없었다는 얼굴 아니니까, 너. 매일 목욕하자마자 아무 걱정 없이 바로 자는 녀석이 처량하게 별이나 보고 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믿겠어?”

황당하단 얼굴로 툴툴댄 오소마츠가 “읏챠-.” 하고 몸을 기울여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를 보며 내 말을 기다리는 모습이 약간 강아지를 닮았다. 

아-, 그러고보니 여우는 개과였던가. 

쓸데없는 지식이 떠올라 시선을 내리고 오소마츠와 눈을 맞췄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면 좋다. 

모처럼 얻은 기회니, 한껏 불평불만을 털어놔 주지.

이상한 오기가 생긴 것을 자각하면서 오소마츠를 노려보고 입을 열었다.


“오늘 오소마츠 덕분에 성적이 떨어져 아버지에게 혼났다. 그동안 오소마츠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칭얼대서 그거 맞춰주고, 시험 기간에도 공부하고 있으면 놀아달라고 방해한 덕분에! 남자인데도, 오소마츠의 ‘신부’가 된 것도 싫은데, 오소마츠 때문에 성적이 떨어져 혼났다! 기분이 좋을 리 없잖아!! 가문을 이어야 하는 녀석의 성적이 이게 뭐냐고 들었다고!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가문을 위해서가 아닌데!! 그리고 공부를 못한 이유가 오소마츠 탓인 것도 사실인데! 전혀 믿어주지 않고! 내가 한 노력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투로 말하는 게 얼마나 열 받는지 알아!? 참고 있다고, 힘든데도! 장남이니까! 장자니까 참으라는 어른들을 위해서 참고 있는 거라고! 누가 이딴, 이딴 집이나 이으려고 지금까지 참고 노력했는줄 아나!!”

한번 트인 물꼬가 멈추지 않듯이 줄줄 말이 흘러나왔다. 

한껏 쏟아내고 나니, 중간부터 오소마츠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탈한 웃음이 텅 빈 입가를 메웠다. 

대체 난 누구한테 이렇게 화내고 있는 걸까. 

한심하고 허무해서 또 눈물이 나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라마츠, 미안. 네 공부 방해해서 미안해. 그렇게 중요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앞으론 공부할 때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오소마츠의 다정한 공기가 찬 밤공기를 가르고 나를 감쌌다. 

단순한 소리에 지나지 않을 음성이 꼭 온기를 가진 것처럼 부드럽게 나를 껴안고 토닥이는 것 같았다. 

왈칵 쏟아진 눈물에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미안해-.”

핫-, 하고 슬프게 웃은 오소마츠가 기모소 소매로 내 눈가를 닦았다. 

그대로 손을 올려 내 머리에 올린 오소마츠가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꼭 어머니가 아버지께 크게 혼난 우리를 다정하게 안고 쓰다듬어 주었던 것처럼, 다정할 리 없는데 너무나 다정하게 느껴지는 오소마츠의 손길에 심장이 아팠다. 

당장 쳐내고 싶은데, 이대로 있고 싶어 흔들리는 마음에 눈을 감았다.


“카라마츠.”

내 머리를 떠난 오소마츠의 손을 따라 눈을 뜨자, 씩-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피운 오소마츠가 마당을 가리켰다.


“저거 봐.”

오소마츠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마당에 푸른 불꽃이 둥둥 떠 있었다.


“부, 불 났!?”

“불 난거 아냐, 불 난거 아냐. 여우불.”

“여, 우불...?”

“응.”

샐쭉 웃은 오소마츠가 손짓하자 하나만 있던 푸른 불꽃이 여러 개로 갈라졌다. 

밤하늘에 깔린 별처럼 어두운 마당에 퍼진 푸른 불꽃이 흔들리더니 곧 울렁울렁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꼭 공이 튀는 것처럼 마당에서 통통 튀던 불꽃이 대열을 맞춰 움직이더니 제멋대로 합쳐지고 나눠지며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

“예이~! 오소마츠 님이 보여주는 여우불 쑈-!! 매일매일 볼 수 있는게 아니에용~!”

멍청히 여우불을 보고 있자, 또 뭐에 신이 난건지 “캬하-!” 하고 웃은 오소마츠가 여우불을 더 늘였다. 

공중으로 튀어올라 불꽃처럼 사방으로 나뉘어지고, 열을 맞춰 일렁이며 춤을 추는 것처럼 리듬을 타고 마당을 돈 여우불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읏!”

“괜찮아. 안 뜨거우니까, 만져도 돼!”

오소마츠의 말에 내 무릎치로 올라온 여우불에 손을 넣었다. 

놀랍게도 오소마츠의 말대로 여우불은 전혀 뜨겁지 않았다. 

사람의 체온 정도로 따뜻한 여우불이 내 손 위에 올라와 작게 돌며 통통 튀었다. 

꼭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 신기해 나도 모르게 빤히 열중해 보자, 오소마츠의 키들거리는 웃음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어이, 그만 웃어라.”

“아니-,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으니까아~.”

“신기하잖아. 처음 보는 거라고.”

“그것도 그렇네.”

픽- 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마당을 가득 채웠던 여우불이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검은 마당에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찌르르 울려 퍼졌다.


“이제 잘까?”

“...아.”

툭,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린 오소마츠가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름의 위로인가, 하고 이불로 들어가는 오소마츠를 보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고’ 로군. 

피식-,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웃음을 밤하늘에 던지고 툇마루 문을 닫았다. 

어쩐지 굉장히 타인의 온기가 느끼고 싶어졌다.






6.


“카라마츠 형~, 집에 가자.”

교실 문을 들어오는 토도마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 자리까지 다가온 토도마츠가 내 손에 들린 대본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연습?”

“아-, 이번 축제에서 할 연극의.”

“주인공 맡았다고 했나?”

“아.”

“...부활동 하는 거에 뭐라 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카라마츠 형. 아마 화낼 거야? 할머니랑 아버지가.”

“알고 있다. 화내라지.”

“...어휴~.”

토도마츠의 말에 딱딱하게 내뱉자, 푹- 아래로 내쉰 한숨이 내게 닿았다. 

토도마츠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럼 나 먼저 갈게.” 하고 교실을 빠져 나갔다. 

창문 밖으로 교문을 빠져나가는 토도마츠의 등을 배웅하고 대본을 읽어내려갔다. 


중학교 시절, 우연히 가족과 함께 본 연극에 나는 내 영혼을 뺏기고 말았다. 

커다란 무대,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관객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연극이라는 것에. 

세상에서 제일 멋진 것은 TV에 나오는 슈퍼 히어로일 것이라 굳게 믿었던 내 생각을 열정적인 연기를 펼치는 배우 한 사람이 무참하게 깨부수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형제들과 함께 했던 히어로 놀이도 그만두고 ‘연극’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극, 연기, 배우.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나도 그 멋진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는 연극부가 없었다. 

이 학교에 연극부가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나는 연극부 부실로 달려가 입부 신청서를 냈다. 

선배들과 동년배들 사이에서 연기를 배워가는 것은 즐거웠다. 

내가 ‘카라마츠’가 아닌 무대 위의 누군가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만들어냈다. 

겉모습은 ‘카라마츠’ 그대로 변하지 않았지만, 무대 위에 있는 순간 만큼은 ‘카라마츠’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연기를 하는 자가 가지게 되는 숙명적인 이중성이 내 마음을 강하게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수없이 연습하고 같은 장면을 반복해 등장인물들과 합을 맞추는 것은 힘들었지만, 한 순간 합이 맞았을 때 느끼는 환희가 마약처럼 나를 연기에 붙잡아 놓고 있었다. 


스스로가 잘 했다고 생각한 연기가 나왔을 때, 

내 연기에 압도되어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버린 선배들을 보고 있을 때, 

그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타인의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즐거웠다. 


연기를 하며 겪는 어려움조차 즐거울 정도로 ‘연기’라는 것은 이제 내게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고등학교 들어가 내가 연극부에 들어갔다는 것을 들은 아버지는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내심 내가 자신과 같이 학생회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나와 형제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고 내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의 리더가 되기를 아버지는 바라고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 내 천직은 ‘연기’ 외엔 없다. 

아직 학생이니까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서도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는 아버지가 나왔던 대학에 들어가, 아버지처럼 경영학부에 다니게 되겠지.... 

피할 곳이 없는 정해진 길이 잔인하게 내 의지를 짓밟는 착각이 일었다. 

말없이 읽고 있던 대본을 내리고 창밖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은 서서히 붉게 변하며 설명할 수 없는 향수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돌아갈까.”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는 혼잣말을 던지고 대본을 가방에 넣었다.




“오늘도 연습?”

저녁 식사를 마치 ㄴ오소마츠가 내 손에 들린 대본을 보며 물었다.


“아, 축제가 가까워졌으니까.”

“무슨 연극인데?”

“정통 비극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흠-.”

대본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여주자 오소마츠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떴다. 

어딜 가냐고 묻자, “한 대 피우고 올게.” 하고 손을 흔들며 주방을 나섰다. 

성적이 떨어져 아버지에게 혼나고 오소마츠에게 그 울분을 털어놓은 날 이후로, 오소마츠는 날 배려하기 시작했다. 

시험 공부를 하고 있으면 절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훌쩍-, 방에서 사라져 내가 잠들 때에나 나타나 이불에 누웠다. 

그렇게 피워대던 담배도 내가 있으면 방 밖으로 나가 피게 되었다. 

아직 방을 어지럽히거나, 공부할 때가 아니면 여전히 귀찮게 달라붙지만 이 정도도 정말 놀라운 발전의 결과이다. 

싫은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나도 오소마츠에게 맞춰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해 가고 있었다. 

벌써 오소마츠와 함께 지낸지 9개월이 지났다.


오소마츠가 떠난 주방에서 대본을 피고 읽어내려간다. 목을 다듬고 연기를 연습하며 지금 이 자리가 무대 위인 것처럼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즐겁게 웃으며, 슬프게 울부짖으며,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며, ‘로미오’가 되어 ‘줄리엣’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뭘 하고 있는거냐!”

주방에 크게 울리는 호통에 재빨리 대본을 접었다. 

넓게 펼쳐져 있던 무대는 할머니의 호통 한마디에 유리처럼 산산이 깨져 바닥에 깔렸다. 

깨진 유리가 쏟아져 온몸에 박혀 욱신거리는 아픔이 태어났다. 

쿵쿵, 마루를 울리며 다가오는 할머니에게 시선을 돌리고 대본을 뒤로 숨겼다.


“할머니.”

“내, 학교에서 무엇을 하던 상관하지 않겠다 했지만! ‘신’이 머무는 이 신성한 곳에서도 그런 되도않는 걸 하고 있던 거냐!!”

“....”

“너는 장차 이 가문을 이끌어야 하거늘!! 저번에 좀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벌써 마음이 풀어졌느냐! 아버지에게 해이해졌다고 혼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

“학생인 지금은 온전히 오소마츠님을 모시는 것과 공부하는 것에 집중해야 할 녀석이, 이딴 것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어쩌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사과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정신을 차려야지! 정신을!!”

쾅, 하고 할머니가 내리친 식탁이 크게 울렸다. 

씩씩, 성난 숨을 내뱉은 할머니가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거 이리로 내라.”

“...어, 쩌시려구요.”

“찢어버려야지! 그딴 것!!”

“....”

싫다, 고 말하고 싶은데 입술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는 나를 더욱 매섭게 쏘아보며 거칠게 손을 흔들었다.


“빨리 내래도!!”


“아———, 정말 시-끄럽네!!!


할머니의 호통 못지 않은 커다란 목소리가 주방을 뒤흔들었다. 

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날카로운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도 사색이 된 얼굴로 천천히 뒤돌았다. 

주방 입구에, 오소마츠가 서 있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차갑게 우리를 응시하며, 거칠게 머리를 긁적인 오소마츠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적당히 풀어진 기모노에 팔을 꽂고 터벅터벅 주방으로 걸어 들어온 오소마츠가 할머니를 내려다보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할멈-, 할멈이야말로 여기서 그렇게 큰 소리 내도 괜찮아~? 모처럼 기분 좋게 낮잠 자려고 했는데, 할멈 덕분에 완—죤히 잠기운이 날아가 버렸는데에—.”

“죗, 죄송합니다. 오소마츠 님.”

평소와 같은 말투가 차가운 목소리와 시너지를 이루어 사납게 듣는 이의 목을 옥죄었다. 

오소마츠의 짜증에 깊이 허리를 숙인 할머니는 몇 번이고 오소마츠에게 사과했다. 

“하-, 이제 됐어.” 하고 오소마츠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할머니는 다시 깊이 허리를 숙이곤 서둘러 별채를 떠났다.


“미안, 오소마츠.... 시, 끄러웠나.”

“응-? 아니, 별로. 시끄러웠던 건 할멈이지 네가 아냐.”

그렇게나 차가운 목소리를 냈으면서, 오소마츠는 금방 가볍게 웃으며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에 손이 얹어진 채로 시선을 위로 들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오소마츠의 팔 너머에 얇게 휘어져 부드럽게 나를 응시하는 오소마츠의 눈빛이 닿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이젠 아무도 찾지 않게 된 공터에 들렀다. 

곧 무슨 건물이 세워진다는 공터엔 허울 뿐인 울타리와 함께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가볍게 낮은 울타리를 넘어 공터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 놓았다. 

오소마츠는 괜찮다고 했지만, 계속 집 안에서 연기 연습을 하면 분명 시끄럽겠지. 

가족에게 들키지 않고, 오소마츠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저녁 식사 시간 아슬아슬할 때까지 이 공터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것이 정기적인 일과가 되었다. 

할머니는 늦게 귀가하는 내게 잔소리를 했지만,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하다 왔다고 하면 할머니도 더는 혼을 낼 수 없었다. 

오늘도 도서실에서 공부하다 늦어졌다는 변명을 하기 위해 도서실에서 책도 한 권 빌려놓았다. 

가방에 들어있는 도서실 스티커가 붙은 책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대본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선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다. 

겨우 방 하나 정도의 크기인 공터가 마치 드넓은 바다처럼 느껴져 가슴이 뻥- 뚫렸다. 

심호흡하고 자신을 담아 미소 지으며 대본을 펼쳤다.



연기 연습에 이어 발성 연습까지 한 것은 좀 오바였나.... 

따끔거리는 목을 붙잡고 대본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오늘따라 연기가 잘 풀려 너무 집중한 탓에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서둘러 가방을 들쳐 메고 공터를 빠져나오자마자 편의점 봉투를 쥔 이치마츠와 토도마츠와 마주쳤다.


“어? 카라마츠 형? 왜 거기서 나와?”

“아, 잠시 들릴 곳이 있어서.”

“거긴 공터 밖에 없는데.... 고양이들이 잘 모이는 장소라서 알아.”

“아....”

토도마츠의 질문에 적당히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치마츠가 나를 응시하며 내뱉은 말에 쓴웃음을 삼켰다. 

토도마츠가 이치마츠를 보며 “그래?” 하고 묻자, 이치마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 확실해.” 하고 대답했다.


“그럼 카라마츠 형은 공터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이 시간까지.”

“그게....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또!?”

이건 숨길 수 없겠다 싶어 솔직히 털어놓자 토도마츠가 경악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치마츠도 토도마츠를 따라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혼이 나고도 용케 하는 구나, 카라마츠 형은....”

“왜 굳이 그런 걸 하는 거야, 개똥마츠.”

어색한 미소로 중얼거리는 토도마츠에 이어 이치마츠가 혀를 차며 툭, 말을 던지고 집을 향해 앞서 걸어갔다. 

‘굳이’ 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이치마츠의 한 마디에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마츠 형, 빨리 집 가자. 벌써 8시 다되가.”

“아, 응.”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버린 내 팔을 토도마츠가 잡아 끌었다. 

생긋- 귀엽게 웃는 토도마츠를 따라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땅에서 들어올렸다.




축제날이 되었다. 색색으로 꾸며진 복도와 학교 벽을 보며 마지막으로 대사들을 숙지하고 강당으로 향했다. 

연극부의 연극은 축제가 한창 무르익을 오후 4시에 시작한다. 

형제들에게 연극 시간을 알려주었지만, 모두 바쁜 것 같았으니 와주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겠지. 

무대에서 보이는 관객석을 쭉 둘러보고 옅은 미소와 함께 들췄던 막을 내려놓았다. 

괜찮아. 지금 나는 ‘카라마츠’가 아니라 ‘로미오’다. 

자기암시를 하며 몇 번이고 스스로가 ‘로미오’라 되새기며 선배의 콜 사인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생애 최고의 연기라고 자찬할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낸 연극은 박수갈채 속에 막을 내렸다. 

땀에 흥전히 젖은 이마를 닦아내고 무대에서 내려온 내게 선배들이 달려들어 최고였다며 칭찬해주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선배들의 표정을 내가 만들어냈다는 것이 기뻤지만 동시에 허무하기도 했다. 

내가 정말로 바랐던 것이 이것이었나...? 

축제가 끝나고 부원끼리 뒤풀이 가자며 내 등을 치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어 운동장으로 나왔다. 

연극엔 와주지 않았지만, 다른 형제들의 반엔 가봐야 겠지. 

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운 이치마츠의 반으로 뛰어가려던 참에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이 멈추고 말았다.


“카라마츄~!”

“...오, 오소마츠?!”

환하게 웃으며 거세게 손을 흔드는 남자는 분명 오소마츠였다. 

항상 입던 붉은 기모노가 아닌 붉은 츄리닝 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평범한 청년이 내게 다가왔다. 

항상 이리저리 너울대던 꼬리도, 실쭉샐쭉 움직이던 귀도 보이지 않는다.


“어, 떻게 여길....”

“아니, 오늘 축제라고 그랬잖아? 재미 있을 것 같아서 보러 왔찡~!”

어린아이처럼 웃는 오소마츠 뒤로 뒷짐을 진 할머니가 걸어왔다.


“할머니..., 도 오신 건가요?”

“그래, 하지만 이제 나는 돌아가봐야 하니.... 카라마츠, 네가 오소마츠 님을 잘 돌봐드려라.”

“...엑.”

내 대답도 듣지 않고 할머니는 몸을 돌려 교문 밖으로 사라지셨다. 

남겨진 오소마츠는 눈을 빛내며 운동장을 크게 훑어보고 있었다. 


“오소마츠, 부탁이니 얌전히 있어라.”

“아! 야키소바닷!!”

“잠, 오소마~츠!?”

설마했던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꼬리가 튀어나오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흥분해있던 오소마츠가 야키소바를 파는 노점을 보자마자 그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3살 짜리 애도 아니고! 

얌전히 있으란 말이 끝나자마자 튀어나가는 건가!? 오소뫄츠으으으!!! 


쵸로마츠만큼이나 발이 빠른지 순식간에 오소마츠는 운동장 저편으로 멀어졌다.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 오소마츠 뒤를 쫓았다. 

일렬로 늘어선 다양한 노점의 끝에 있는 야키소바 노점에서 1인분을 주문한 오소마츠가 행복한 얼굴로 야키소바를 쭉 빨아들였다.


“아, 카라마츠. 계산!”

나를 발견한 오소마츠가 손짓하며 노점에 서 있던 학생을 가리켰다. 

역시, 오소마츠에겐 돈이 없었다. 

다시 큰 한숨을 내쉬고 지갑을 꺼냈다. 

야키소바 값을 치르고 뒤돌자마자, 바로 앞에서 야키소바를 먹던 오소마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으응~?!?!?!”

만화도 아니고, 연기처럼 사라진 오소마츠를 찾아 또 운동장을 이잡듯이 뒤져야 했다. 

얼마나 뾸뾸 돌아다닌 건지, 오코노미야키, 교자, 야키토리, 솜사탕까지 사먹고는 전부 내가 계산하게 만들고, 1시간이나 운동장을 헤맨 후에야 오소마츠를 붙잡을 수 있었다.


“부탁이니까!! 제발! 얌전히 있어라! 오소마츠!!”

“알겠엉, 알겠엉~.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너 때문이다!”

짜증을 뒤섞어 거칠게 내뱉고 오소마츠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 둘이 팔을 붙잡고 걷는 모양이 이상하게 보일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잡아두지 않으면 오소마츠는 또 어딘가로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넓은 운동장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오소마츠를 끌고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가는 중이야? 우리.”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의 클래스다.”

“쵸로마츠, 하고 이치마츠? ...아-, 셋째랑 넷째?”

“아.”

오소마츠의 중얼거림에 문득,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오소마츠를 만난 적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첫만남인가. 

홱 고개를 돌려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응?” 하고 내 시선에 고개를 기울이는 오소마츠는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다. 

‘신’과의 첫만남인데 이런 모습으로 만나도 되는 것인가 하는 불안이 괜히 일어났지만, 평소에도 그닥 ‘신’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괜찮겠지-, 하고 끄덕이며 오소마츠를 끌고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고양이, 카페...?”

“아-, 그런 것 같군.”

창문에 붙여진 홍보 포스터를 보고 오소마츠가 한쪽 눈썹을 찡긋거렸다. 

혹시 고양이 카페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닐까 싶어 물어보자, 오소마츠는 시원스럽게 정답을 말했다.


“TV에 나왔었다고!”

“그런가. 그럼 들어가자.”

“오우-!”

씩- 웃으며 가슴을 내밀고 자랑하는 오소마츠에게 적당히 맞춰주고 클래스 안으로 들어갔다. 

분주히 움직이는 점원들 사이에 고양이 탈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 카페는,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 탈을 쓴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아니, 진짜 고양이는 학교에 데리고 올 수 없으니까 이렇게 한 것 같다만....”

오소마츠의 질문에 대답하며 앞치마를 두른 학생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았다. 

건네준 메뉴엔 평범한 카폐 메뉴가 적혀 있었다.

물론 학교에서 커피를 팔 수는 없으니 음료만 가득했다. 

가장 무난한 오렌지 주스 2잔을 시키고 오소마츠에게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에서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교실 안을 돌아다니는 고양이들-고양이 탈을 쓴 학생들-을 따라 시선을 이리저리 옮긴 오소마츠가 홱-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밝게 웃었다.


“웃기네-.”

“아, 아아....”

갑자기 이쪽을 향한 미소에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에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 정도로 좋아할 줄 알았다면 정식으로 축제에 와 달라고 말할 걸 그랬나.... 

한참을 두리번거리는 오소마츠를 보며 다음번엔 축제에 오라고 먼저 말하자 다짐했다. 


주문했던 오렌지 주스를 기다리는 동안 오소마츠를 따라 교실 안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고양이 탈을 쓰고 있는 학생들 속에 있는 건가? 

혹시 그럴까, 싶어 오렌지 주스를 들고 온 학생에게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의 행방을 묻자, 휴식시간이 되어 교실 밖으로 나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소마츠를 소개해주려 했는데, 타이밍이 나빴던 모양이다.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는 이 교실에 없는 것 같다.”

“흐응-, 그래?”

컵에 꽂힌 빨대로 오렌지 주스를 한번에 빨아들인 오소마츠가 “어쩔 수 없네.” 하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이후, 토도마츠의 반과 쥬시마츠의 반에도 들렀지만, 무슨 조화인지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오소마츠가 기지개를 폈다. 

운동장에 세워져있던 노점들도 하나둘씩 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카라마츠, 나는 알아서 돌아갈게.”

서로 협력해 테이블과 천막을 옮기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 오소마츠의 잔잔한 목소리가 나를 감쌌다. 

고개를 돌려 “괜찮겠나?” 하고 묻자, “당근!” 하고 오소마츠가 장난기 가득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친구들하고 놀다 와-!”

손을 흔든 오소마츠가 운동장을 걸어 나갔다. 

노을을 앞에 두고 붉게 물든 하늘이 오소마츠 너머로 멀리 뻗어나왔다.

푸른 하늘을 몰아내고 하루의 끝을 선언하듯이 널리 퍼진 빨강을 들여다보고 발을 돌려 연극부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그래! 월요일에 보자!”

허리 굽혀 인사하자, 부장 선배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주역인 내가 뒤풀이에 빠져선 안 되지만, 친척이 왔다는 핑계를 부장 선배는 용인해 주었다.

다른 부원들에게도 미안하단 사과를 건네고 부실을 나와 오소마츠가 사라진 낙조를 향해 뛰었다.


“오소마츠!!”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겨우 따라잡은 오소마츠가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전력으로 뛰어 심장이 귓가에 쿵광거리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기침까지 토해가며 호흡을 진정시키는 나를 본 오소마츠가 망연히 서서 말했다.


“혼자 가도 된다고 했는데....”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오소마츠 혼자 보낸 걸 알면 또 혼날테니까.”

“뭐야~, 내가 걱정되서 온 건가 했더니, 자기 몸보신하려고 한 거냐!”

“당연하지! 내가 오소마츠 걱정을 왜 하나!!”

“쳇-! 괜히 기대했어어~!”

부루퉁한 얼굴로 볼을 부풀린 오소마츠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노을 속으로 멀어지는 오소마츠의 뒷모습을 본 순간, 그대로 홀로 보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눈을 맞추고 씩- 웃는 오소마츠의 미소에 안도하며 오소마츠의 곁에 서서 함께 집을 향해 걸었다.



“아, 참.”

“응? 뭔가?”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오소마츠가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이 가볍게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혹시 학교에 두고 온 것이라도 있나 싶어 묻자, 오소마츠의 입가에 처음 보는 잔잔한 미소가 어렴풋이 피어났다.


“연극, 잘 봤어.”

“엣.”

단순히 축제를 즐기러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오소마츠가 연극을 봤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가볍게 내 머리를 툭툭 토닥인 오소마츠가 “제법 잘 하던데?” 하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 기쁘다. 

처음으로 연극부원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족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이고, 칭찬 받은 것에 마음이 둥실둥실 하늘 위로 떠올랐다. 

괜히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숨기고 고개를 홱 돌려 멋쩍게 입맛을 다시고 대답했다.


“나 정도 되면 그정도 연기는 식은 죽 먹기다!”

“아-, 그러십니까아~.”

뒤통수 너머에서 오소마츠의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한발짝 먼저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 오소마츠는 빙글 몸을 돌려 나를 향해 손짓했다.


“자-, 얼른 가자고. 신부님~.”

“...아.”




집에 도착하자 아무도 없는 적막함이 우리를 반겼다. 

아직 축제를 즐기고 있을 동생들은 훨씬 더 늦게 돌아올 것이다. 

부모님은 항상 바쁘니 늦게 들어오실 것이고, 오늘은 할머니도 볼 일이 있으신 것 같았으니 늦게 돌아오실 것이다. 

성큼성큼 별채로 걸어가는 오소마츠를 뒤따라 본채에 들리지 않고 바로 별채로 발을 옮겼다.


“카라마츠.”

“뭔가?”

별채에 도착해 현관에 들어가기 직전, 오소마츠가 발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머리를 긁으며 요리조리 눈을 굴린 오소마츠가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

“뭐를?”

“이거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옆에 서 있던 오소마츠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새벽 안개처럼 서늘한 연기를 남기고 사라진 오소마츠의 모습에 당황해 “하!?” 하고 비명을 지른 순간, 드륵- 하고 별채 현관문이 열렸다.


“여-! 카라마츠, 어서 와!”

“에!? 오소마츠? 왜 별채 안에서 나오는 거야...?”

방금 전까지 내 옆에 있었던 오소마츠가 사라지고, 별채 안에서 오소마츠가 나와 나를 반기는 것에 놀라 생각이 꼬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꼭 눈앞이 뱅뱅 도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어버버거리면서 내 앞에 서 있는 오소마츠와 방금 전 사라진 오소마츠가 있던 자리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놀라지 말라고 했잖아-.”

귀찮다는 투로 고개를 잘게 저으며 한숨을 내쉰 오소마츠가 내 팔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별채 안에 들어가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오소마츠의 말에 눈썹을 찌푸리고 오소마츠의 말을 끊었다.


“아니! 방금 전 그건 대체 뭔가! 날 놀래려고 그런 짓을 한 건가!?”

“아니거든요~? 나 그렇게 한가하지 않고! 그건 식신이었어.”

“식, 신...?”

“저기 땅 바닥에 봐봐.”

오소마츠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틀었다. 

열린 현관문 너머, 흙바닥에 흰 종이 하나가 떨어져있었다. 

여우 모양으로 잘린 종이는 곧 바람에 휩쓸려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식신....”

“나는 이 집에서 나갈 수 없으니까,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식신을 부리는 거라고. 집에 도착했으니까 식신이 필요 없어져서 없앤 것 뿐.”

“...하아....”

오소마츠의 설명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마츠는 내 표정을 빤히 보더니 “이해 못했구만.” 하고 작게 한탄하며 몸을 틀어 방으로 향했다. 

오소마츠의 말대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단 한가지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오소마츠는 이 집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만은 이상하게 단단히 기억에 박혀, 이유 모를 꺼림칙한 마음을 한구석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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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의 중편! 오랜만의 오소카라입니다ㅎ


* 천호 오소마츠 x 학생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아프지 않아요(카라마츠 말투 은근히 쓰기 힘들어요ㅠ)


* 오소마츠 제외 오둥이입니다.

 오둥이 부모님이 마츠조와 마츠요가 아닙니다.


* 공미포 8,375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친척들 사이에서 카라마츠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분만실 문을 노려보았다. 

딱, 딱, 손톱을 물어 뜯고 있는 고모부만큼이나 카라마츠도 안절부절 못했다. 

아기가 태어남과 동시에 카라마츠의 미래도 결정된다. 

카라마츠는 묵묵히 근엄한 얼굴로 분만실을 응시하는 가문의 최고 어른, 카나코에게 눈을 돌렸다.


8시간이나 이어진 난산 끝에 아기 울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모두 환해진 얼굴로 카라마츠 옆에 앉아있던 고모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기를 안고 분만실을 나온 의사에게 벌떡 일어나 달려간 고모부가 아기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태어나 처음 자리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에 카라마츠도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기가 귀엽다, 누굴 닮았다 담소를 나누는 친척들을 헤치고 아기에게 다가간 카나코가 의사에게 물었다.


“아기는 여자 아이인가요?”

“아뇨, 건강한 남아입니다.”

의사의 말에 친척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모두 카라마츠를 향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친척들 가운데 카나코가 다가와 카라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구나…. 이번 대(代)의 신부는 너다.


카나코의 발언에 카라마츠는 발 아래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2.


달그락- 식기가 맑은 소리를 울리자 어김없이 할머니의 매서운 호통이 귀청을 울렸다.


“떽!! 몇 번을 말해야 알겠냐! 식기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 놓아야 한다고!”

하도 들은 호통 소리에 이젠 겁도 나지 않았다. 푹- 한숨을 내쉬며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자 또 “한숨 쉬지 말고!” 하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신부 선언을 듣고 3년.

매일 신부 수업이라는 명목 하에 할머니에게 가정 교육과 잔소리를 받게 되었다. 

요리는 물론이고 청소, 빨래, 바느질, 인사법까지. 

청소를 할 때는 절대 청소기를 쓸 수 없고, 세탁소라는 편한 가게를 놔두고 일일이 내가 바느질하고, 손빨래까지 해야 했다. 

조신한 아내에 어울리는 인사와 말투까지. 

3년이나 그 고생을 하고 나니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 참을 수 없다.


“좋은 아침, 카라마츠 형.”

“아-, 좋은 아침.”

밥그릇에 밥을 푸고 있자 제일 먼저 일어난 쵸로마츠가 주방으로 들어와 인사했다. 

식탁엔 이미 8명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물론 요리한 건 나. 

마지막으로 푸른색의 밥그릇에 밥을 퍼 식탁에 올려놓자, 등교•출근 준비를 마친 가족들이 우르르 주방으로 몰려와 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생일 축하해~, 아들들~.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바쁘게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던 엄마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형제들은 모두 눈을 굴리며 고민하더니 쵸로마츠가 나서서 엄마의 질문에 대답했다.


“용돈 주시면 알아서 쓸게요.”

자칫 쌀쌀맞은 대답일 수 있겠지만, 우리집에선 이게 보통이었다. 

눈을 슬쩍 돌려 아빠를 보면 아빠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신문에만 집중해 있었다. 

그 앞에서 할머니가 “밥상 앞에서 신문 읽지 말거라!” 하고 핀잔을 주자 그제야 신문을 아래로 내렸다. 

시위원인 아빠는 어지간히도 바쁜지 항상 우리에게 무관심했다. 

아빠의 보좌인 엄마도 바쁜 건 마찬가지. 두 분 다 우리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쵸로마츠의 대답에 모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아쉬운 듯이 쓴웃음을 짓고는 “그래…. 그럼 너희 계좌에 용돈 보내놓을게.” 하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번째 생일. 하지만 생일 케이크도 따뜻한 포옹도 없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 내 만든 미역국을 후루룩 들이키며 주방을 떠나는 부모님을 배웅했다.



고등학교 교복으로 지정된 검은 가쿠란을 입고 집은 나오자, 토도마츠가 총총 걸음을 서둘러 내 옆에 섰다.


“카라마츠 형, 오늘 할머니한테 이야기할 거야?”

“당연하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으니까.”

내 대답에 토도마츠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잘 되면 좋겠네.” 하고 어깨를 툭 치며 응원했다. 

앞서 걷던 쵸로마츠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뭐, 힘내.” 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아.” 하고 대답하면서도 쵸로마츠와 토도마츠의 가망 없을 거라는 얼굴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얼굴을 들이댔다. 

이 날이 평생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등교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동아리를 마치고 최대한 어기적 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늦췄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이어질 할머니의 호통과 싸워야 한다. 

어수선해 질 집 안 분위기를 떠올리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들은 이미 오늘은 귀가가 늦어진다고 했고, 부모님도 야근할 것이 분명하다. 

즉, 집에 돌아가면 나와 할머니뿐. 가까워지는 커다란 집의 지붕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 각오를 다졌다.



“몇 번이고 이야기 했잖니!”

역시나, 할머니의 호통에 고개를 푹 숙였다. 

커다란 방에 할머니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정좌한 다리가 슬슬 저리다. 

“어휴~.” 하고 내쉬는 숨소리에 고개를 들어 다시 말했다.


“싫어요. 신부 따위.”

“아키코는 이제 아기를 낳을 수 없어! 이번 세대(世代)엔 여자 아이가 없으니 장자(長子)인 네가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하느냐? 이건 우리 마츠노 가문의 전통이자 의무! 잔소리 말고 내일 혼인식 올릴 준비나 하거라!!”

탕!, 하고 바닥을 내리치며 할머니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여기서 반론을 떨쳐봤자 할머니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아카츠카 구에서 유명한 명가, 마츠노 가문. 

집안 어른들은 모두 정치, 사회, 경제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아카츠카 구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마츠노 가문을 알고 있을 정도. 

소문난 명가에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매 세대, 가장 먼저 태어난 여자 아기를 가문을 수호해 주는 신에게 신부로 바친다. 


그것이 마츠노 가에 길게 이어진 전통이었다. 

마츠노 가문이 시작했던 순간부터 이어진 전통은 스마트폰이 생기고, 비행기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전 세계가 작은 마을처럼 가까워진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아키코 고모가 난산 끝에 낳은 아기는 남자 아이. 

결과, 우리 세대에 신부로 보낼 여자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평소 몸이 약했던 아키코 고모는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고, 친척들은 오랜 회의를 거쳐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는 결정을 내렸다. 


맏딸 대신에 맏아들을 신부로 바치자.


지금 생각해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외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내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당한 채, 나는 ‘신부 후보’가 되었다. 

처음부터 내 의견 따위는 중요치 않았던 거겠지. 

친척들에게, 할머니에게 중요한 것은 웃기지도 않는 이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방으로 오르는 발이 무겁다. 

이불에 지친 몸을 묻고 한숨을 내쉬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베개에 얼굴을 박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울다 지쳐 졸음이 눈꺼풀에 앉자 차라리 이대로 평생 깨어나지 않았으면, 아니 오늘 잠들면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하고 자신을 저주하며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신부복을 눈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 

내게 하얀 시로무쿠(일본 전통 결혼식의 신부용 하얀 기모노)를 입혀주는 엄마와 할머니의 손길에 저항하지 못하고 옷 위에 하얀 비단이 자리잡았다. 

당장 찢어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친척들이 기다리고 있는 혼인식장으로 향했다. 

오면서 지나친 형제들도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멍청히 창밖을 응시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 

정말 싫다.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식이 시작될 시간인가, 하고 시계를 확인했지만 아직 30분이나 여유가 있었다. 

고개를 기울이고 “네-.” 하고 대답하자, 아키코 고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모….”

“오-! 제법 잘 어울리잖아~.”

“….”

“그렇게 삐지지 마~. 착잡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신부가 그런 얼굴 하면 복 날아간다?”

“하아~.”

“…카라마츠, 미안해. 내가 여자 아이를 낳았다면,”

“아니, 이건 고모 잘못도 아니고, 괜찮아요. 저는….”

내 대답에 머쓱하게 웃은 아키코 고모가 내 옆에 와 앉았다. 

한창 식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창밖을 보더니 홱-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있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걸?”

“네?”

나도 모르게 그게 할말이냐는 투로 되묻자, 아키코 고모가 쿡쿡 웃음을 흘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꽤 즐거울걸?”

“…하?”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키코 고모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키들대며 “두고 봐.” 하고 말하곤 방을 나섰다. 

대기실에 홀로 남겨져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 없잖아. 

난 남자인데, 신부로 가는 이 상황의 어디가 즐겁다는 거야?

다리를 덜덜 떨며 불평을 툭툭 흘리고 있을 때, 할머니가 대기실로 들어오셨다.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엉덩이를 들었다.


오늘, 나는 남편 없는 결혼식을 올린다. 


남편은 부재, 신부는 남자.


최고네-, 하고 자조하며 식장으로 발을 옮겼다.






3.


식이 끝나고 하나 둘씩 식장을 떠나는 친척들을 뒤로 하고 할머니와 함께 마당에 세워진 별채로 향했다. 

별채 앞에서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할머니에게 떠밀려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할머니와 엄마, 형제들은 별채 밖에서 “잘 해.” 하고 짧은 응원의 말을 던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하얀 신부복을 벗어 던졌다. 

청바지와 하늘색 티셔츠 차림으로 별채 안을 돌아다녔다. 

어릴 적 마당에서 뛰어 놀다 별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가면 할머니가 호되게 혼냈던 기억이 있다. 

우리집에 있는데도 한 번도 들어와본 적 없는 별채의 모습에 조금 호기심이 일었다.

복도를 어슬렁거리다 안방으로 보이는 큰 방 앞에 섰다. 

망설임 없이 스륵- 문을 열자, 붉은 기모노를 입은 남자가 다다미에 누워 담배를 물고 있었다.


“응-? 네가 이번 신부~?”

“…허?”

남자의 머리 위에서 쫑긋거리는 황금색 귀와 등 뒤에서 너울거리는 4개의 꼬리에 멍청히 신음을 흘렸다.


“으응~?”

남자는 자신을 보고 얼어버린 내 앞으로 다가와 이리저리 살피며 눈썹을 찌푸렸다.


“너, 사내 아냐?”

“…아, 아아….”

“하아!?”

내 대답에 남자가 크게 외쳤다. 

머리 위에 달린 귀가 곤두서고 부드럽게 살랑거리던 꼬리고 바짝 털을 세웠다. 

남자의 큰 목소리에 놀라 움찔거리자 남자가 황당하단 얼굴로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무슨 ‘신부’로 사내놈을 보내~? 카나 할멈, 날 속였구나? 사내놈은 안을 맛도 없다고~! 아――! 정말 오랜만에 맞이한 신부인데 사내놈라니, 최―악!!”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진심으로 싫다는 듯이 내뱉는 말에 까득- 이를 갈았다. 

그만 닥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노려보자 남자도 나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왜 사내놈인 네가 신부로 온 거야?”

툭 던진 남자의 마지막 한 마디에 눈앞이 새빨개졌다.


“나도-, 신부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냐!! 여자애가 태어나지 않는데 어떡하라는 거야!! 내가 좋아서 신부 수업 받은 거 아니라고!! 나도 이 빌어먹을 전통 따위 지키고 싶지 않았어!!! 나는 남자라고!! 신부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고!! 누군 입이 없어서 다물고 있는 줄 아나?!!!”

씩-, 씩-,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울분을 쏟아내고 거친 숨을 골랐다. 

정신 없이 외친 탓에 산소가 부족해진 머리가 지끈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푹-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라. 난 받아들였다. 쿨- 하게.”

“…풋, 푸, 크하하하하핫!!!”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가 배를 잡고 굴렀다. 

바닥의 먼지를 제 옷으로 닦아낼 생각인지 이리저리 구르며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한참 후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등 뒤로 솟은 꼬리가 좌우로 크게 한들거렸다.


“그렇게 잔뜩 쏟아내고 받아들였다니…, 완-전 거짓말이잖아~! 아―,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며 씩- 웃고 몸을 일으킨 남자가 귀를 쫑긋거리며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코가 닿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좋아, 너 재미있으니까. 그럼 듬뿍- 사랑해주지, 신부여.”

얄궂게 웃으며 말을 마친 남자가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애를 대하는 손길에 짜증이 치솟아 툭- 손을 내치고 몸을 돌렸다.


“그거 고맙군. 그럼….”

“응? 어디 가게?”

“하? 이제 집에 가서 잘 시간….”

“무슨 소리야? ‘첫날밤’ 보내야지.”

“첫…,”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하? 

첫날밤? 

하? 

누가? 누구랑? 

하?


생각을 거부한 머리 속이 새하얘졌다. 

남자는 내 얼굴을 보고 또 큭- 짧은 웃음을 흘리고 손을 흔들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이상한 상상하지 마, 야한 꼬맹아. 나한테 시집 온 거잖아? 앞으로 나랑 여기서 살아야 돼. 첫날밤도 그냥 나란히 옆에서 자는 것뿐이고.”

“하…?”

“카나 할멈이 설명 안 해줬어?”

“…안, 해줬다.”

“그 망할 할멈….”

남자는 멍청히 대답한 나를 보며 작게 혀를 차고 머리를 긁적였다. 

“귀찮네….” 하고 중얼거린 남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딱 치자 아무것도 없던 다다미 바닥에 커다란 이불이 나타났다.


“일단 오늘은 씻고 잠이나 자자고. 자세한 설명은 내일 할멈한테 듣고.”

“…하아….”

“욕실은 저쪽이다.”

어디서 꺼냈는지 연하늘색의 기모노를 내게 건넨 남자가 손가락으로 복도 저편을 가리켰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피식- 웃음을 흘린 남자가 또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오-, 말 잘 듣네~.”

“난 어린애가 아니닷!”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쳐내고 남자가 알려준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겨우 방 하나 있을만한 크기의 별채인데도 욕실은 굉장히 넓었다. 

남자가 있는 다다미방도 별채를 전부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컸는데, 아무래도 무슨 조화인지 겉으로 보는 것과 실제 안의 크기는 다른 것 같았다. 

일반적인 상식을 농락하는 현 상황에 큰 한숨을 내쉬고 욕실로 들어갔다. 

대체 언제 준비한 건지 욕조에는 이미 따끈한 물이 받아져 있었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오늘 하루에 대한 생각은 최대한 하지 않으면서 몸을 씻고 기모노로 갈아입어 남자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

첫날밤이란 소리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고 긴장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미닫이문을 열자, 그 앞에 보이는 모습에 할말을 잃었다. 

커다란 이불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대자로 누워 코를 골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짜증이 치솟아 칫, 하고 혀를 찼다. 

목욕으로 데워진 몸이 적당한 피로를 불러와 화를 낼 기운도 없다. 

이불로 다가가 음냐-, 하고 입맛을 다시는 남자를 발로 밀어 한켠으로 치우고 이불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한숨과 함께 혀끝에 매달린 한탄을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내일, 할머니에게 모든 것을 꼬치꼬치 캐묻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지친 하루를 마감했다.




무슨 놈의 잠버릇이!! 

혈압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이마에 솟아난 핏줄을 지그시 누르고 몸을 일으켰다. 

대자로 누워 주먹과 발을 날려대는 탓에 이불 구석에서 몸을 한껏 쪼그리고 잤던 덕분에 온몸이 뻐근하다. 

삐걱대는 팔다리를 억지로 늘여 기지개를 피고 이불에 누운 남자를 내려보았다. 

붉은 기모노는 간신히 몸을 가리고 있을 정도로 풀어졌고, 이불에 이리저리 널린 황금색 꼬리는 이불과 한데 얽혀 엉망으로 꼬여있다. 

세모난 귀는 베개에 파묻혀 있고…. 

절로 ‘이게 신?’ 하고 의문을 가질법한 모습이다. 


이불에서 뒤척이느라 비틀린 기모노를 고치고 별장을 나왔다. 

하늘을 보니 아직 해가 산 위에 걸려있다.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밝아오는 것이 아직 이른 아침임을 속삭이고 있었다. 

하품을 하고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으며 별장을 떠나 본채로 들어갔다. 

습관이 되어버린 발은 방이 아니라 주방으로 먼저 나를 이끌었다. 

텅 빈 밥솥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고 혼잣말하며 쌀을 씻기 시작했다.


“카라마츠 형…?”

밥을 짓는 동안 계란말이나 햄 구이 같이 간단한 반찬을 만드는 사이, 토도마츠가 빼꼼 주방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좋은 아침이다! 토도마츠.”

“어, 어…. 어? 왜 여기 있어? 할머니가 형은 이제 별채에서 지낼 거라고 그랬는데…?”

“별로, 상관없잖아? 여기 있어도.”

“아, 응…. 그렇네!”

의아하단 얼굴로 묻는 토도마츠의 질문에 괜히 욱해 차가운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분위기를 잘 살피는 토도마츠는 단번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토도마츠 뒤를 이어서 이치마츠와 쥬시마츠, 쵸로마츠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식탁에 앉아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형제들 사이에 앉아 어제와 똑같은 밥을 먹으며 제발 이대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빌어먹은 신은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는 잔인한 녀석이었다.



“예서 뭐하고 있냐!!”

할머니의 호통에 움찔 놀라며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따각- 하고 소리를 울리며 식탁에 떨어진 젓가락이 튀었다. 

잔뜩 성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다가온 할머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아얏!!”

“남편을 혼자 놔두고 친정에서 밥을 먹는 신부가 어디 있느냐!”

신부가 다 뭐라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의 시대착오적인 호통에 절로 이가 갈렸다. 

남자인데, 신부라고 불리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할머니의 호통은 그칠 줄을 몰랐다.


“얼른 별채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가야한다는 내 말은 할머니의 귀에 닿지 안았다. 

내 팔을 꽉 붙잡고 별채를 향하는 할머니에게 끌려 주방을 떠났다.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는 할머니에게 끌려가는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토도마츠는 스마트폰에만 집중하고 있다. 

쥬시마츠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조금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에 푹-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할머니에게 끌려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을 시간도 없이 남자가 자고 있는 다다미방으로 향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오소마츠님.” 하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다다미방문을 열었다. 

마치 여관방에서 여주인이 손님을 대하듯 예의를 차리는 할머니의 모습에 빈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그렇게 격식을 차릴 정도의 ‘신’인가? 그 남자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남자는 아직도 이불에 누워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었다. 

아침보다 더 흐트러진 기모노 사이로 아예 배가 나와있다.

“쿠음….” 하고 몸을 돌리며 제 배를 벅벅 긁는 모습이 한없이 한심하다.


“오소마츠님.”

이불 앞에 조심스럽게 정좌한 할머니의 사나운 눈빛에 못이며 나도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할머니의 목소리는 넓은 다다미방에 가득 울려 퍼질 정도로 작지 않은 것이었지만, 남자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무시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할머니의 목소리에 남자의 머리 위에 솟은 귀가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소마츠 님!!”

할머니의 씩씩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울리자 세모꼴의 귀가 귀찮다는 듯이 빠르게 흔들렸다.


“카나코입니다. 이제 슬슬 일어나주시죠.”

묘하게 강압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남자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뭔데…. 망할 할멈.”

“누가 할멈입니까!? 누가!!”

이불에 앉아 훤히 드러난 배를 벅벅 긁는 남자의 모습에 할머니가 눈살을 찌푸리고 “허흠!” 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이번 대의 신부는 마음에 드셨나요?”

“…. 할-멈. 저기 말이지~, 아무리 내가 신부로 누굴 고르든 신경 안 쓴다고 해도 말이야~. 보통 사내놈을 신부로 보내!?”

“이번 대엔 여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카라마츠가 무사한 걸 보니 오소마츠 님 마음에 들었다고 판단됩니다만….”

“뭐―, 이녀석 재미있으니까 마음에 들었지만,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도 설명 안 해줬다며?”

“…어머나, 이런. 제가 깜빡 실수를 했군요.”

“거-짓-말―. 신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생각~? 자세히 설명하면 이녀석이 안 한다고 할까 봐 그런 거지?”

“….”

남자는 배를 긁던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가만히 할머니를 응시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콕 집어서 할머니에게 툭툭 내던지는 사내의 모습에 놀랐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던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어찌되었든, 카라마츠를 신부로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중으로 카라마츠의 짐은 전부 이쪽으로 옮겨놓겠습니다.”

“엣?!”

이 무슨 청천벽력!?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할머니의 발언에 놀라 홱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응시했지만, 할머니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남자에게 인사를 마친 후 나를 끌고 별채를 나왔다.


“자, 그럼. 너는 학교 갈 준비 해야지.”

“할머니!?”

“짐은 네가 학교 가 있는 동안 옮겨 놓으마.”

“에에!?”

“앞으로 별채에서 지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본채로 들어오너라.”

“….”

아무리 항의의 뜻을 내비쳐도 깔끔하게 무시하고 할 말을 착착 이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에 고개를 푹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랬다. 

신부로 선택될 때도, 내 의견 따위는 아무도 물어보지도, 신경 써주지도 않았으니까. 

꼭 불상에 대고 외치는 것 같은 허무함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먼저 본채로 들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겹다, 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당황하며 눈가를 훔치자마자, 태연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신부님.”

“…. 카라마츠다.”

“카라마츠, 이리로 잠깐 와봐.”

활짝 열린 별채 현관에 선 남자가 내게 손짓했다. 

여전히 기모노는 일어난 상태 그대로 흐트러져있고, 잠버릇이 걸린 뒷머리는 성대하게 솟아나있다. 

멍청한 얼굴로 크게 하품을 늘인 남자에게 다가가자 남자가 가볍게 쥔 주먹을 들어올렸다.


“뭔가?”

“손 내밀어 봐.”

“…이건?”

“부적. 항상 가지고 다녀. 내 ‘신부’가 되었다는 증표니까.”

“….”

“싫어?”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남자의 목소리에 숨을 삼켰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내 기분을 이 남자는 너무나 태연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오는 것이 놀라워 눈을 깜빡였다. 

문득, 남자의 질문이 끝난 뒤로 꽤 오래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별로 그런 건…. 고맙다, 오소마츠 ‘님’.”

“‘오소마츠’로 괜찮으니까.”

“아아….”

손바닥 위에 처연히 놓인 붉은 자수의 부적주머니. 

힐끔 눈을 들어올리면 싱긋- 웃는 오소마츠의 미소가 보였다.


“그럼, 학교 다녀오겠다.”

“오-, 다녀오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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