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입니다! 빼빼로 데이는 놓쳤지만, 좋은 오소카라 데이(11.12)는 챙겼네요ㅎㅎ


* 이제 정말 중간 넘게 왔네요! 앞으로 6화 이어지면 완결입니다ㅎ


* 공미포 14,444자.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6







1.

 

차가운 서릿발이 서서히 가라앉아갈 무렵, 오소마츠는 유난히 파란이 많았던 해를 바쁘게 마무리하고 있었다

본성에 마련된 오소마츠의 방

책상에 무수히 쌓인 서류들을 보면 절로 커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래전, 선대 왕들이 처리했던 서류들

제왕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내준 과제로 오소마츠는 그야말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선대 왕들이 치세가 위대했던 이유를 분석해 보고하라는 교수의 과제와 더불어 왕이 하는 일을 잘 알아야 한다며 현왕 레온 3세가 내준 숙제

노랗게 바래 세월이 묻어나오는 서류를 하나씩 들춰보며 어떤 사항에 대해 회의를 열었고, 왕의 판단은 어땠으며,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 천천히 분석해 종이에 써 내려가는 오소마츠의 글씨엔 수많은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 진짜! 내가 왜 이런 머리 아픈 일을 해야 하는 거냐고~~!!”

깃펜을 홱 책상 위로 던지고 의자를 뒤로 기울여 기지개를 피며 한탄하는 오소마츠의 쵸로마츠의 못마땅한 시선이 박혔다.

펜과 함께 책상 아래로 떨어진 서류를 주워 톡톡, 가볍게 두드려 먼지를 털어낸 쵸로마츠가 미간에 짙은 주름을 만들고 오소마츠를 가만히 응시했다.


왕이 되는 게 쉬울 거로 생각했어? 이 정돈 당연히 해야지.”

“…하아~.”

쵸로마츠의 핀잔에 오소마츠의 한숨이 깊어졌다

다음 왕이 될 왕세자로 오소마츠가 결정된 날, 진심으로 기뻐하며 오소마츠를 축하하고, 나서서 오소마츠를 보좌할 것을 다짐하는 동생들에게 도저히 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오소마츠와 전장을 누비며 함께 동고동락했던 적기사단의 기사들도, 오소마츠의 최측근이자 소중한 동생인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도, 어머니 마츠요도 오소마츠의 진정한 속내를 알지 못한다

혼자 모든 것을 떠안고 있는 것에 지쳐가는 자신을 쓴웃음으로 바라본 오소마츠가 눈을 껌뻑이며 의자에 바르게 앉아 다시 서류를 들추기 시작했다.

오소마츠의 호흡에 맞춰 적당한 속도로 다음 서류를 넘기고, 처리된 서류를 정리하던 쵸로마츠가 문득 창밖에 비치는 환한 햇살에 손을 뻗었다

밝은 빛과 함께 부드럽게 피부를 감싸는 햇빛의 따뜻함을 손에 넣고자 주먹을 쥔 손이 뜨끈하게 데워졌다

커다란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포근하게 방 안의 공기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두꺼운 옷이 아닌데도 쵸로마츠는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새삼 깨닫고, 어두워진 얼굴로 오소마츠를 불렀다.


“…오소마츠 형.”

~?”

쵸로마츠의 부름에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든 오소마츠가 쵸로마츠의 굳은 얼굴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네.”

그렇네…?”

“…‘기도제’, 할 시기네.”

“….”

머뭇거리며 전한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깃펜을 놀리던 손을 멈췄다

따뜻한 햇볕과 너무나 이질적인 무겁고 차가운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조금 전까지 햇살 감싸여 따뜻했던 몸이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물에 들어간 것처럼 찼다

침을 꿀꺽 넘긴 오소마츠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럼, ‘기도제의 책임자는….”

오소마츠 형이겠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쵸로마츠가 내뱉은 말에 오소마츠가 천장을 보며 폐 속에 가득 찬 탄식을 불어 날렸다.

 

 

 

왕과 관료, 귀족이 참여한 어전회의.

왕세자 신분으로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자리에 오소마츠가 답답한 심정을 껴안고 서 있었다

하나둘씩 나랏일을 처리한 후, 회의가 끝나갈 무렵

제발….’ 하고 믿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초조하게 손을 조물거리던 오소마츠가 마침내 나온기도제라는 단어에 온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렇군. 올해기도제는 전통에 따라 왕세자인 에드윈 왕자에게 맡기겠다.”

왕의 말에 오소마츠는 마음속으로 거하게 한숨을 내리고 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왕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귀족이 다수.

노골적으로 발언하진 않아도쥬드 공작의 세력권에 속한 귀족들은 하나같이 눈썹을 찌푸리고 오소마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소마츠에게 보이는 것이 왕에게 안 보일 리 만무

귀족들의 표정에 한쪽 눈썹을 찡긋인 왕이 낮은 목소리로 회의장 안이 울리도록 크게 외쳤다.


“‘기도제의 책임자는 에드윈 왕자이다. 왕자는 형제들과 함께기도제를 성공으로 이끌라.”

.”

왕의 명령에 오소마츠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귀족들 역시 깊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왕의 명을 받아들였다.

 

 

 

 

 

2.

 

어전회의를 끝마치고 오소마츠와 쵸로마츠, 이치마츠가 별궁에 돌아왔다

쥬시마츠와 토도마츠와 함께 셋을 맞이하자마자 거실로 향한 오소마츠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몸을 날렸다

곧이어 거실에 들어온 쵸로마츠가 잔소리를 퍼부어도 오소마츠는 들은 체 만 체으응~~.” 하고 신음만 흘리며 소파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걱정되어 옆에 있는 이치마츠에게 물어도 이치마츠는 작은 한숨을 내쉴 뿐, “오소마츠 형한테 들어.” 하고 말을 마치고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소파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오소마츠를 보며어이구….” 하고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쉰 쵸로마츠가 흰 종이와 펜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리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오소마츠 형, 빨리 이리로 와. 뭐가 필요할지 리스트 정도는 짜야지!!”

쵸로마츠의 호통에 오소마츠가아으~.” 하고 신음하며 소파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친 기색이 가득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자, -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오소마츠와 눈이 맞았다

뭐가 웃긴지 픽-, 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쵸로마츠 옆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내리고 나를 손짓해 불렀다

자못 심각한 분위기에 내가 옆에 있어도 되는가 고민했지만, 오소마츠의 부름에 결국 옆에 다가가고 말았다.


! 일단, 빨리 날짜와 시간을 잡아야지. 국민들에게 발표하려면. 그리고 초대 명단도 필요하고…, 입을 예복, 중앙 홀에 걸 깃발과 장식, 성의 경비도 강화해야 하고, 근위대 배치랑 복장, 기도곡하고….”

그렇게 많아?”

귀찮단 얼굴 하지 마! -부 오소마츠 형이 할 일이라고! 그리고, 기도문도 준비해야 되는 거 알고 있지?”

쵸로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푹- 한숨과 함께 머리를 붙잡았다

말이 나온 사항을 하나씩 쵸로마츠가 하얀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뭔자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섣불리 셋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힘들어 보여 말없이 오소마츠의 옆에 있자, -, 하고 혀를 차고 고개를 돌린 오소마츠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기도제준비하는 거야.”

기도제…?”

. 연말에 하는 행사인데 말이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무사히 1년을 보낸 것에 감사하고 내년도 나쁜 일 없이 평탄하길 비는 행사야. 보통 왕이나 왕세자가 책임을 맡아서 여는데 말이지….”

, 이번기도제는 오소마츠가 맡게 되었다는 건가?”

-, 그런 거지.”

그렇군.”

간결하게 대답하는 것과 달리 오소마츠의 얼굴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서로 의논하며 착실히 준비할 목록을 채워가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를 바라보는 오소마츠의 눈빛엔 이유 모를 불편함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괜찮은 건가?” 하고 물었지만, 오소마츠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괜찮아.”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기도제 날짜가 결정되고 오소마츠는 더욱 바빠졌다

왕세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과 일, 그리고 기도제의 준비가 겹쳐 별궁에서 오소마츠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기도제 준비가 겨우 한 달이 남았을 때, 오소마츠는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기도제 준비에 집중했다

준비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오소마츠의 피곤한 얼굴을 볼 때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져도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잘 시간을 훨씬 지나, 곧 해가 뜨려는 새벽. 겨우 별궁에 돌아온 오소마츠가 침대에 누웠다

눈 아래 짙게 깔린 피로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키자, “미안, 깨웠어?” 하고 오소마츠의 다정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니다. 오늘을 일찍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 그래. 그럼 미안하지만, 아침 식사 전에 깨워줄래?”

좀 더 자는 게 좋지 않나? 아침 식사 전이라면 바로 몇 시간 후인데….”

. 괜찮아.”

“…오소마츠, 내가 도와줄 일은 없나? 많이 힘들다면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 돕겠다.”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 천천히 깜빡이던 오소마츠의 노곤한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었다

호흡조차 잊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부드러운 미소에 말을 잃자, 오소마츠가 무거운 팔을 올려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하지만 마음만 받을, ….”

졸음이 덮쳐왔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금세 평온한 숨을 내뱉으며 잠든 오소마츠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눈 밑에 자리 잡은 기미를 슬쩍 어루만지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나 내뱉었다

이렇게나 힘들어하는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슬프다

괜한 참견이라는 건 알고 있다

타국에 인질 아닌 인질로 시집온 공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괜히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하얀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눈앞에 두고 문득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붉은빛이 묻어나오는 갈색의 찻물이 꼭 오소마츠의 눈동자 색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욱신거렸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정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들었다

마츠요님과 함께 하는 다과회 자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마음껏 큰 한숨을 내쉰 것에 당황하며, 예의를 잊은 것에 사과하자 마츠요님이후후-.” 하고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미소가 역시 오소마츠와 닮았다

찬 공기에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넘긴 마츠요님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 포개진 손 위에 턱을 살포시 올렸다.


그래, 무슨 고민이니~? 이야기해주지 않으련?”

그게….”

다정한 목소리에 이끌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기도제의 준비로 오소마츠가 너무 바쁜 것 같아서 걱정됩니다. 뭔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돕고 싶은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나온 새어 나온 속마음에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입조심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무슨 말을 내뱉고 만 것인가! 무슨 말이 이어질지 조마조마한 가슴을 껴안고 천천히 눈을 들어 마츠요님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하던 마츠요님이 눈을 깜빡이며우후후~.” 하고 기쁜 미소를 피웠다.

그럼 내게 좋은 수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좋은, …?”

마츠요님의 말을 되뇌며 고개를 기울였다

한층 더 온화한 미소를 피운 마츠요님이 내게 손짓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마츠요님의 옆에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이자 귓가에 마츠요님의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그리고 이어진 마츠요님의 말에 내 심장은 크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으긋!!”

-, 하고 엄지게 깊숙이 박혀버린 바늘에 신음하며 벌건 핏방울이 맺힌 엄지를 입에 물었다

옆에서 나를 도와주던 토도마츠가그러게 왜 안 하던 일을 한다고 해서는~.” 하고 가볍게 핀잔을 주며 약 상자를 가져왔다

청결한 손수건으로 내 손가락을 감싸 눌러 지혈을 해준 쥬시마츠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토도마츠에게 손가락을 맡겼다

하얀 반창고가 상처를 가렸다. 작은 바늘이 만든 상처가 욱신거렸다

꼭 더운물에 데인 것처럼 따끔거리는 아픔을 참고 다시 골무를 손가락에 끼웠다.


정말로 할 거야? 그거.”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와 내 손에 들린 자수를 번갈아 응시하는 토도마츠에게 힘 빠진 미소를 돌려주었다.


아아-. 그래도 조금 익숙해졌다.”

그런 것 치고는 손가락이 상처투성이인데?”

아하하.”

토도마츠의 한숨 섞인 쏘임에 쓴웃음을 흘리고 다시 금실을 바늘에 끼워 넣었다.

기도제에 사용되는 의복은 전부 왕실의 사람이 준비한다고 한다

특히 기도문을 읊는 왕 혹은 왕세자의 의복은 그의 배우자가 만드는 것이 전통

나는 아직약혼자신분이기에 오소마츠가 입을 의복을 만드는 일에 제외되었지만, 마츠요님이 본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내게 양보해주셨다

재봉 따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가 의복 하나를 만드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시간 내에 맞출 수 있을 리 없기에 내게 맡은 일은 의복에 넣을 자수를 놓는 것

제법 섬세하고 꼼꼼함이 요구되는 일이기에 자수 하나만으로 한 달은 족히 잡아먹을 것이다

게다가 의복에 들어갈 자수는 금을 얇고 길게 뽑아 만든 금실로 만든다

실타래 하나가 한 달 치 식량비에 맞먹는 그런 고급 재료를 낭비할 수는 없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서투른 손놀림은 자주 손가락에 흠집을 남겼다

재봉틀이라는 자수 전용 기계로 놓는다면 시간도 단축되겠지만, 집 한 채 가격과 비슷한 재봉틀을 본성에서 이곳으로 옮기다 상처를 낼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일은 오소마츠 몰래 하는 일이기에, 부피도 크고 눈에 띄는 재봉틀을 별궁에 놓을 수는 없었다

자수를 처음 해보는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오소마츠는 분명 말릴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오소마츠를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바쁜 일정으로 별궁에 자주 들어오진 못해도 일단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오소마츠의 방이니까

재봉틀을 놓는다면 늦든 빠르든 들킬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손 자수를 놓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오소마츠를 위해 내가 직접 뭔가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것도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카라마츠 형아, 행복해 보임닷!!”

쥬시마츠의 즐거운 목소리에아아.”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은 상처투성이가 될지라도, 내가 오소마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쁨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소마츠에게 보여주는 나의 모든 것은 거짓되었을지 몰라도…,

오소마츠를 위한 이 마음만은 거짓이 아니니까.

 

 

 

 

 

3.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를 처리해 왼쪽으로 옮기고 고개를 들자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나를 반겼다

?” 하고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신음이 방 안에 퍼진다

쵸로마츠는기도제일로 귀족들을 만나러 갔고, 이치마츠는기도제때 사용할 중앙홀을 확인하러 갔다

오늘 해결해야 할 일을 다 끝냈는데도 혼자 남게 된 것은 오랜만이었다

기도제준비가 시작된 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까 이렇게 자유 시간이 생겨난 것도 놀랍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나 본궁을 빠져나와 별궁으로 향했다

정말 지독하게도 바빴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별궁에 돌아갈 수 있었고, 요 며칠 카라마츠의 잠든 얼굴밖에 보지 않았다

스스로 어이없는 한숨을 날릴 정도로, 카라 공주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부풀었다.

 

 

별궁에 도착해 곧바로 카라 공주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았다

거실, 주방, 뒤뜰, 침실. 어디에도 카라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하는 건가…. 

때가 나쁜 것에 한숨을 내쉬며 침실을 마지막으로 카라 공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보웨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외침에 계단을 내려오던 것을 멈추고 현관 앞에 펼쳐진 홀을 응시했다

굉장히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쥬시마츠가 홀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점프하고 팔을 마구 휘두르는데도 착실히 홀이 깨끗해지는 것이 신기하다

나도 모르게 계단에 앉아 쥬시마츠가 청소하는 것을 구경할 정도로 신기했다

절로 어릴 적 보았던 유랑서커스단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요기조기 잘도 뛴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도 점프 한 번으로 털어내는 모습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기교도 없이 가볍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체 능력에 감탄하던 중, 문득 쥬시마츠의 움직임을 따라 거칠게 펄럭이는 치맛자락에 눈이 갔다.

쥬시마츠는 남자지만 메이드다

카라 공주처럼 굳이 여자처럼 입을 필요가 없는데도 왜 메이드 차림을 하고 있는 걸까

치솟는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청소가 한창인 쥬시마츠를 불렀다.


쥬시마츠.”

아이!!”

끼이익- 소리가 날 정도로 날뛰던 몸을 순식간에 멈춘 쥬시마츠가 완전히 풀린 동공으로 나를 응시했다.

조금, 무섭다…. 

움찔거리는 몸을 진정하고 솔직하게 왜 메이드 복장을 하고 있는지 묻자, 눈을 더욱 크게 하고우응~.” 하고 눈을 감은 쥬시마츠가 환한 미소와 함께 눈을 팟! 하고 떴다.


카라아ㅁ-, 형아가, 아니 공주님이 외롭지 않게!!”

쥬시마츠의 힘찬 대답에 훗-,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은 많이 부족해도, 말 속에 담긴 쥬시마츠의 마음은 확실히 전해졌다

여성의 옷을 입어야만 하는 카라 공주를 위해서, 카라 공주가 외롭지 않게 자신 또한 여성의 옷을 입고 있다,

너무나 상냥한 쥬시마츠의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거웠던 몸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특한 마음이 넘쳐 계단에서 몸을 일으켜 쥬시마츠의 머리를 크게 쓰다듬었다

귀엽다. 내 동생 녀석들만큼이나 귀엽다.

꼭 동생 하나가 더 생긴 것 같은 기쁨에 즐겁게 웃으며 쥬시마츠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쥬시마츠는 상냥하네—!!”

칭찬하자, 쥬시마츠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만개했다

볼을 살며시 붉히고에헤헤~!” 하고 웃은 쥬시마츠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아닙니다요~.” 하고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귀여움을 부추겨서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오소마츠 왕자님이 더 상냥함다~!”

? 그래~?”

!! 그리고 카라마츠 형아도 상냥해!”

“…그렇네~.”

입 밖으로 미끄러진 단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쥬시마츠를 보며 다시금 웃음을 흘리고 쥬시마츠가 청소를 재개할 수 있도록 계단 위로 몸을 피했다

칭찬에 신이 났는지 청소하는 몸짓이 훨씬 더 다이나믹해졌다

홱홱 움직이며 대걸레질을 하던 쥬시마츠를쨍그랑!’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붙잡았다.


….”

사색이 되어 천천히 뒤를 돈 쥬시마츠 뒤에는 장식되어 있던 동쪽 나라의 항아리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신나 휘젓던 대걸레로 툭 쳐버린 것을 깨달은 쥬시마츠가 새파래진 얼굴로오우오우오우….” 하고 덜덜 떨며 나를 응시했다.


-시마츠.”

, 아이!!”

빨리 치우자, 이거.”

, 괜찮슴깟!?”

눈에 띄게 놀란 얼굴로 묻는 쥬시마츠에게 씩- 웃어주고, 쓰레받기에 날카로운 항아리 파편들을 집어 담았다

멍청히 내 뒤에 서 있던 쥬시마츠도 빗자루를 가져와 자잘한 파편들을 쓸어모았다

항아리 조각이 다 모이자 그것을 한데 모아 버리는 천으로 감싸 별궁 뒤쪽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쓰레기통은 성안의 시종들이 매일 비우는 것이니 내일이 되면 항아리 조각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깨진 항아리를 치우는 내 모습에 적잖이 놀랐는지, 쥬시마츠는 내내 아무 말 없이 나를 도왔다.


나도, 어릴 때 많이 깨 먹었거든. 그러니까 이건 둘만의 비밀로.”

아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쥬시마츠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대고-!” 하고 비밀이라는 몸짓을 하자 쥬시마츠도 다시 활짝 웃으며-!!” 하고 입을 꿰매는 시늉을 했다.


역시 오소마츠 왕자님이 더 상냥함닷!!”

후핫, 그래. 칭찬 고마워~.”

그러니까-,”

?”

카라 형아도 오소마츠 왕자님을 돕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

…?”

갑자기 나온 말에 고개를 기울이고 쥬시마츠를 응시했다

에헷-!” 하고 배시시 웃은 쥬시마츠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케-, 이러케-! 카라 형아도 힘내고 있슴닷!”

으응~?”

위아래로 손을 반복해 움직이며 뭔가를 보여주는 쥬시마츠의 몸짓에 눈썹을 찌푸렸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

언제까지고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자 쥬시마츠도 답답했는지 손짓을 멈추고 나를 보며 물었다.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슴까아~?”

준비? , 혹시 기도제.”

아이!”

, -. 잘 굴러가고 있긴 한데….”

갑자기 나온 기도제 이야기에 어리둥절해하며 대답하자, 쥬시마츠가 히쭉 웃으며 다시 손짓을 시작했다.


카라 형아도! 하고 있슴닷! 준비!!”

…?”

쥬시마츠의 손짓을 가만히 응시했다


준비? 기도제의

카라 공주가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부유하면서 멀어졌다

카라 공주에게 맡긴 일은 없다

준비의 모든 과정은 내가 총괄하고 있으니까, 쵸로마츠나 이치마츠가 카라 공주에게 일을 맡겼을 리 없다

그런데 무슨 준비

미간에 주름을 세우고 골똘히 생각하며 쥬시마츠의 손짓을 다시금 살폈다

뭔가를 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그 사이를 왔다 갔다…. 

꼭 어릴 때 엄마가 하시던 자수 같다…. 


잠깐만

? 자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쥬시마츠를 응시하자, 해사하게 웃은 쥬시마츠가 그것이 정답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수!! 

기도제 의복에 들어갈 자수인가!! 


정답을 알아냄과 동시에 잠든 카라마츠의 손에 수많은 반창고가 붙어 있던 것을 떠올렸다

주방에 자주 드나드는 녀석이니 분명 새로운 요리라도 하다가 다친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바늘을 다루다 생긴 상처인 것 같았다


그런가…. 

자수를 하고 있었나

그건, 나를 위해서

나를 돕기 위해서 손에 상처까지 내 가면서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해도, 자만해도 되는 거지…? 


입가에 넘실대는 미소를 손으로 가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기쁘다

카라 공주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있다는 것이. 걱정 끼치는 것이 싫어서, 또 부담되지 않을까 싶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모든 일을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다고, 멋진 모습 하나 정돈 보여줄까 해서 도움도 마다했는데….

나를 위해서, 몰래 자수를…. 

감동과 기쁨이 동시에 몰려와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오소마츠 왕자님!”

“…?”

둘만의 비밀!”

-, 그래. 비밀.”

쥬시마츠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부드럽게 나를 바라보던 쥬시마츠가 조금 전 내가 했던 그대로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 하고 속삭였다.

자신이 말해줬다는 것도, 카라마츠가 나를 위해 자수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둘만의 비밀

쥬시마츠가 말하는 것을 이번엔 단번에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얼굴 위로 떠 오르는 행복한 미소를 어떻게든 숨기고 본성에 돌아오자, 쵸로마츠가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서류와 함께 어제 완성한 기도문을 한 번 더 검토하던 쵸로마츠가 나를 보더니 눈썹을 팩 찌푸렸다.


무슨 일 있었어?”

~? 무슨 일?”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별로오~?”

쵸로마츠의 물음에 대답을 늘리며 책상에 가 앉았다

그새 쵸로마츠가 가져온 서류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아도 들뜬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깃펜을 들어 하나씩 서류를 살펴보는 나를, 쵸로마츠가 기이한 생물을 보는 눈으로 한참을 응시했다.

 

 

 

 

 

4.

 

기도제. 왕실과 선별된 고위 귀족들만이 참여하는 자리.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인 만큼 그 중요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매해 왕이나 왕세자가 읊은 기도문은 전국에 발표되어 귀족들과 국민들의 입에 회자된다

역사서에도 기록되는 기도문은 전적으로 기도제를 총괄하는 자가 쓰는 것

몇 밤을 지새우며 쓴 기도문이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기도제가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10분 남짓

태연한 얼굴을 만들어도 발광하는 심장이 계속 귓속에서 울린다

-, 하고 큰 숨을 내쉬며 하얀 예복의 어깨에 걸쳐진 망토를 손에 쥐었다

팔까지 가릴 정도로 길게 내려오는 망토엔 카라 공주가 새긴 자수가 들어가 있다

금실로 정성스럽게 놓인 자수는 자세히 살피면 군데군데 엉성함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랑스러워서, 망토의 자수에 입술을 내리고 두근대는 심장은 달랬다.


오소마츠 형, 곧 시작이야.”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치마츠의 말에 몸을 돌려 중앙홀로 향했다.

 

 

태양이 하늘에 가장 높이 떴을 때, 중앙홀을 가득 채우는 햇살을 어깨에 두르고 초청받은 귀족들을 가로질러 단상으로 걸어갔다

아름다운 빛을 자랑하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색색의 빛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양편에 서 있는 왕실 가족을 한 번 둘러보고 기도제의 시작을 알렸다

붉은 왕국 제일의 합창단이 경건하게 청아한 목소리를 합쳐 기도곡을 부르고, 귀족들과 왕실 모두 몸을 낮추어 신에게 기도한다

왕실과 귀족의 대표가 되어 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기도문을 읊었다.



 

『신이여, 이 땅과 높은 산, 그리고 그 아래 당신의 혈족들에게 부어준 축복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내려준 은혜로 우리는 또 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냉혹한 폭풍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신이여, 당신이 깃든 이 땅에 검을 발을 들인 무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당신과 그 아들인 우리를 우롱하는 무지한 저들에게 당신의 힘을 보이소서.

 

나의 이 손에 그 어떤 것도 벨 수 있는 권능의 검을 쥐여주소서.

그리하면 저 어리석은 자들의 목을 베겠나이다.

당신의 군대를 이끌고 악의 무리를 물리쳐, 당신과 당신의 자식과 이 땅을 지키겠나이다.

 

신이여, 나와 함께하소서.

강인한 당신의 힘을 부어주소서.

당신을 위해, 이 땅의 자식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적을 섬멸하겠나이다.

 

 

 


오소마츠의 기도가 끝나고, 귀족을 대표해 쥬드 공작의 기도가 이어졌다

다가올 해의 축복을 비는 기도를 끝으로 기도제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자리를 이동해 기도제의 성공을 축하하는 왕의 칭찬에도 오소마츠는 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어딘가 정신이 다른 곳에 날아가 있는 것 같은 오소마츠의 모습에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눈썹을 찌푸렸다.

 

 

환한 햇살 아래, 하얀 기도제 의복을 내려다본 오소마츠가 망토에 놓인 자수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빨리-, 카라마츠가 보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며 살포시 눈썹을 찌푸리는 오소마츠의 마음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5.

 

침실에 뚫린 발코니에 의자를 가져가 앉아 멍청히 본성을 바라본다

한창 기도제가 열리고 있을 본성은 환한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약혼자신분

게다가 아직 푸른 왕국의 공주가남자라는 것을 귀족들 앞에 드러낼 수 없기에 나는 별궁에 남았다

이 한 달간 오소마츠가 기도제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기도제가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빌며 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빨리 기도제가 끝나서 저 문을 열고 오소마츠가 달려와 그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지 않을까, 그렇게 바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겨우 완성한 자수는 무사히 마츠요님의 손으로 넘겨졌다

오소마츠가 걸칠 망토에 들어갈 자수는 자세히 살피면 군데군데 수가 빠진 엉성한 것이었다

내가 했다는 것을 모르는 오소마츠가 보면 분명 픽- 웃을 정도의 허술한 자수겠지만, 지금은 그 자수가 오소마츠에게 실소를 주어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

하얀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손을 겹쳐 신에게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벌컥! 침실의 문이 열렸다.


“…오소마츠?!”

기도제가 벌써 끝났는지, 아직 하얀 예복을 입은 오소마츠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다

어깨에 걸친 하얀 망토가 자수와 함께 펄럭였다

발코니까지 나와 의자에 앉은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오소마츠가 쭉 바라고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활짝 피웠다.


놀러 가자!”

!?”

뜬금없는 말에 바람 빠진 신음으로 되묻자, 오소마츠가 내 손을 잡아끌고 옷장으로 걸어갔다

이전에 성 아래에 있는 마을로 미행을 나갈 때 입었던 허름한 평복을 순식간에 갈아입은 오소마츠가 내게도 푸른 정장을 안겨주고 파티션 뒤로 냅다 밀어 넣었다.


빨리 갈아입어!”

.”

영문도 모르는 채, 오소마츠의 재촉에 못 이겨 드레스를 벗었다

오늘은 다행히 혼자서 쉽게 벗을 수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 오랜 시간을 쏟지 않고 남성용 정장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정장의 리본형 넥타이를 반듯하게 피며 파티션을 나오자 오소마츠가 다시 내 손을 잡아 뛰쳐나가듯이 별궁을 나왔다.

 

 

 

전처럼 성의 뒷문을 통해 마을로 내려오자, 완전히 달라진 마을의 분위기에 턱을 떨어뜨렸다

시장도, 가정집도 전체적으로 검게 장식되어 해골이나 무시무시한 얼굴을 가진 호박등이 울타리 곳곳에 놓여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도 어딘가 기묘하고 무시무시한 장식들로 가득했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역시 귀신이나 해골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건, 대체….”

뭐가 뭔지 몰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중얼거리자 오소마츠가 힛-, 하고 웃으며 코 밑을 가볍게 문질렀다.


오늘은 축제거든!”

, …?”

“‘기도제가 끝나면 평민들의 축제가 시작돼. , 가자!”

, , 잠깐!!”

오소마츠에게 이끌려 시장을 돌아다니고 노점상에서 군것질거리를 사 먹는 동안, 겨울의 짧아진 해가 서쪽으로 얼굴을 감췄다

새까만 어둠이 마을을 덮쳤는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반기는 것처럼 더 활기차게 축제를 만끽했다

호박등이 주황빛으로 반짝이고, 광장은 즐거운 민속 음악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벌써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야 할 어린아이들도 어른들 사이를 바삐 누비며 귀신 분장을 하고 즐겁게 웃고 있었다

광장 한쪽에 놓인 분수대에 앉아 오소마츠가 사 온 간식을 먹으며 신기하단 눈으로 마을 사람들을 눈으로 쫓자, 오소마츠의 들뜬 목소리가 옆에 다가왔다.


신기하지? 겨울의 축제는 특히 신난다구~.”

, 아아….”

힘들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내년이 오면서 신의 축복이 들어오는 것을 축하하는 거야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악귀들을 무서운 분장으로 하고 몰아내는 거지.”

그렇군….”

줄곧 기도제 준비로 지친 얼굴만 보여주었던 오소마츠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에 안도하며, 오소마츠의 눈을 따라 흥겹게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팔짱을 끼고 좌우로 팔짝이며 원을 돌고 파트너 체인지

여성들은 치마가 펄럭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너무나 행복하게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무서운 분장도 잊을 정도로 정말 즐겁게 춤을 추는 모습이 어쩐지 부러웠다

아무런 근심도 없이, 걱정도 없이, 즐겁게

혹시 저것이 오소마츠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잔잔한 미소로 마을 사람들을 응시하는 오소마츠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도 출까?”

!?”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깨끗이 먹어치운 오소마츠가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오소마츠가 나를 끌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서로 마주 보고 가볍게 인사를 하고 팔짱을 낀다

그리 어려운 춤이 아니기에 나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다

음악에 맞춰 오소마츠와 함께 광장을 돌고 손을 맞잡았다

파트너를 바꾸면 모두가 웃는 얼굴로 나와 함께 춤을 춘다

즐겁다

정말로 오랜만에 무거운 생각을 날려버리고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밤이 깊을수록 무르익어가는 축제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성 뒤에 있는 산에 올랐다

이전 오소마츠가 데려와 주었던 산 중턱, 동물들이 있는 장소

그곳에 앉자 성과 함께 축제로 밝게 빛나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오소마츠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동물들이 하나둘 오소마츠 곁에 다가와 앉았다

노점에서 산 무서운 가면을 머리 위에 올리고 제 품에 안기는 동물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오소마츠가 나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잔잔히 울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 녀석들 말이야-. 원래 다른 왕자들이 키우던 녀석들이야. 잠깐 키우고 금방 질려서 버려진 녀석들을 내가 주웠거든. 내가 완전히 키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가 오면 반겨주는 기특한 놈들이야.”

-, 그렇군.”

오소마츠의 손길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눈을 지그시 감은 토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오소마츠 주변에 모인 동물들은 오소마츠를 굉장히 아끼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자기도 만져달라고 불쑥 얼굴을 내민 회색 늑대의 목덜미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2 왕비라는 건, 입장이 참 곤란해서 말이야. 특히 엄마는, 대단한 가문의 사람도 아니고…. 타국의 귀족이었으니까, 여러모로 힘들었어. 툭하면 귀족들이나 1 왕비의 눈치를 봐야 했고…. 쥬드 공작 일당은 엄마를 무시하지~, 쥬드 공작의 독재에 불만인 귀족들은 멋대로 엄마한테 기대하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거든. 게다가 어느새 우리한테도 그런 문제가 옮겨와서…. 1 왕비의 왕자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쥬드 공작 일당은 시시때때로 음모를 꾸미고…, 부상 입기도 하고….”

“….”

그래서, 전부 다싫어졌을 때, 여기에 왔었어.”

“….”

이 녀석들의 위로를 받으면 조금은, 나아져서…. 때때로 힘들 때마다 여길 왔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난 별로이 되고 싶지 않거든. 바라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아. 나는 그냥 쵸로마츠랑 이치마츠랑 엄마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만 있으면 만족해. 결혼도, 아이도 필요 없어. 누구든 간에 함께 행복해질 자신 없고, 형편없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리도 없고…. 그런데 덜컥 왕세자가 되고, 교육이다, 기도제다, 뭐다, 쏟아지는 일에 치여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어서 지쳐있었거든…. 그러니까—….”

마을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돌린 오소마츠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푸른 달빛에 비친 오소마츠의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가늘게 휘었다.


“…도와줘서, 굉장히-, 기뻤어.”

, 하고 울리는 소리에 겨우 오소마츠가 내 손에 입 맞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투성이에 거친 투박한 손을 붙잡고 소중히 입맞춤을 내린 오소마츠의 미소에 단번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밤의 그림자 속으로 고개를 내려 숨겼다.


많이 지쳐 보였으니까…. 도와주고 싶었다. 오소마츠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친구로서 돕고 싶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투르게 전한 진심에 내 손을 잡고 있던 오소마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뼈가 삐걱거릴 정도로 강하게 내 손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힘을 푼 오소마츠가그래…. 고마워.” 하고 대답을 흘렸다

목소리가 어쩐지 기운이 없다

고개를 들자 산 아래로 눈을 돌린 오소마츠의 얼굴에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문득, 오소마츠의 표정에, 감정에 일희일비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사 나는, 오소마츠와 함께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오소마츠를 생각했다

오소마츠의 표정에, 작은 손짓 하나에, 걱정하거나 기뻐했다

지금도 오소마츠의 얼굴이 묘하게 슬퍼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심장이 아팠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오소마츠의 슬픔을 달래주고 싶었다.

 

이것은 정말로, 단순한 친구의 마음인 건가…?

 

 

자신의 마음인데도 시원한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오소마츠의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렸다.


이제 내려갈까?”

아아….”

손을 내밀어준 오소마츠에게 끄덕이고 손을 마주 잡았다

어두운 산길은 자신의 발조차 보이지 않아서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오소마츠는 익숙한지 휙휙 돌부리나 길을 막는 나무가 없는 쪽으로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나를 인도했다

성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겨우 산길에 닿았을 무렵, 오소마츠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나를 응시했다.


오소마츠?”

“…겨울이, 끝나가. 공주님.”

…, 그렇군.”

왜 지금 새삼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기울이고 대답했다

예상했다는 듯이 쓴웃음을 흘린 오소마츠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다시, 전쟁이 시작될 거야.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해 왔던 호흡을 잊을 정도로 오소마츠의 말에 담긴 의미가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오소마츠가 다시, 전장에 나간다


겨우내 함께 있는 것이 당연했던 오소마츠가, 한 침대에서 체온을 나누며 잠들었던 오소마츠가….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어버린 나를 오소마츠가 옅은 미소로 쓰다듬고 다시 손을 잡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산길을 밝히는 불빛은 점점 밝아오는데, 내 마음에 내려앉은 어둠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6.

 

오소마츠의 출정일이 결정되고 곧 세 왕자는 바빠졌다

기사단의 재편입, 무기 보강, 보급 준비 등등…. 

전쟁을 준비하는 움직임은 착실히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혹독한 겨울바람에 깡깡 얼었던 땅이 녹아갔다

카라마츠는 자수를 놓으며 익숙해진 바느질 솜씨를 십분 발휘해 작은 부적을 만들었다.

다시 전장에 나가는 오소마츠를 위해, 뭔가 해 줄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카라마츠에게 마츠요가 제안한 것이었다

오소마츠를 지켜줄 부적. 붉은 주머니에 한 땀 한 땀, 마음을 담아 오소마츠가 다시 무사히 별궁에 돌아올 수 있기를 빌었다.

 

 

그리고 마침내 출정일이 다가왔다. 성문 앞에 집결된 기사들과 병사들

그 옆에 보급품을 잔뜩 실은 마차를 세워두고 별궁으로 돌아온 세 왕자가 마츠요와 카라마츠, 쥬시마츠, 토도마츠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피가 튀기고, 죽음이 바로 코앞에서 흔들리는 전장에 세 아들을 보내는 마츠요는 눈물을 숨기지 못하고 하나하나 아들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 손에 자신이 만든 부적을 쥐여주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당부하는 마츠요의 바람에 세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쵸로마츠의 손에 녹색 부적을, 이치마츠의 손에 자색 부적을 쥐여준 마츠요가 오소마츠를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는 이제 어미한테 받으면 안 되지.”

마츠요의 말에 어리둥절해 있는 오소마츠의 앞에 카라마츠가 다가와 붉은 부적을 내밀었다

서투른 자수가 박힌 부적을 본 오소마츠가 눈을 크게 떴다

카라마츠의 손에 올려진 부적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오소마츠가 손을 들어 부적을 건네받아 소중히 감싸 쥐었다.


고마워.”

“…무사히 돌아와라, 오소마츠.”

. 꼭 돌아올게.”

떨리는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말에 오르고 마츠요의 배웅을 뒤로하고 성문을 향해 달렸다

동생들을 따라 말에 오르려 말고삐를 손에 쥔 오소마츠가 다시 카라마츠에게 다가갔다.


잊은 게 있었어.”

“…?”

눈을 깜빡이는 카라마츠의 허리에 팔을 감아 강하게 끌어당긴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

수호의 키스

따뜻하고 조금 마른 오소마츠의 입술이 닿은 순간,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장으로 떠나야 했던 오소마츠와 나누었던수호의 키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키스는 어째선지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 하는 낯뜨거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 카라마츠의 부드러운 귓불을 슬쩍 매만진 오소마츠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다녀올게.” 하고 인사를 던지고 말에 올랐다

이랴-!” 하고 오소마츠의 외침에 맞춰 말이 성문을 향해 힘차게 뛰었다

멀어지는 오소마츠를 배웅하며 카라마츠가 뜨거워지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부디, 부디무사히 돌아와 줘.

 

카라마츠의 바람이 오소마츠를 뒤따르는 바람에 실려 그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 마을의 축제는 할로윈을 살짝 변형시켰습니다ㅎ 눈치채셨는지 모르겠네요.


* 이제 좀 꽁냥대나 싶었는데 다시 오소마츠가 떠나고 말았습니다만, 괜찮을 거에요, 아마...ㅎ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비상금전쟁에 새로 나온 가챠의 서점 오소마츠와 꽃집 카라마츠에 꽂혀 쓰고 말았습니다.


* 요즘 글이 잘 안써지네요...ㅠㅠ


* 공미포 8,861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세요~^^






1.

 

아카츠카 구 상점가에 위치한 두 가게

아카츠카 서점과 아카츠카 꽃집은 큰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책과 꽃, 전혀 다른 두 가지 물품을 다루는 두 가게를 찾는 손님들 사이에서 두 가게에 대한 이야기는 끊기지 않았다

묘하게 비슷한 얼굴, 명찰에 쓰인 이름은 똑같았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성격. 아카츠카 서점과 아카츠카 꽃집의 주인은 어느새 마을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마츠노 점장님~.”

밝은 미소와 함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책에서 눈을 뗐다

한창 재미있는 부분에서 흐름이 끊긴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점원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번주 신작 들어왔어요.”

-, 땡큐~.”

신작이란 단어에 눈을 빛내며 목록을 받아든 오소마츠가 찬찬히 목록을 읽어내려갔다

오늘은 유명한 순정만화 신권이 들어오는 날이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서점 안은 신권을 사러 온 손님들도 붐볐다

미리 준비해둔 코너에 책을 진열하자마자 손님들이 몰려들어 금새 계산대 앞에는 긴 줄이 생겨났다.


합계 만 오천엔입니다.”

마지막 손님에게 금액을 말해주며 북커버를 씌운 책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책을 받아든 손님은 계산대를 떠나지 않고 몸을 기울여 오소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점장님~, 혹시 건너편 꽃집에 가 보셨어요?”

~? 아니~?”

평소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서점을 찾아주는 단골 손님이기에 오소마츠는 영업 미소를 지우고 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건너편에 있는 아카츠카 꽃집

묘하게 자신의 서점을 찾는 손님들 사이에서 그 꽃집이 유명하다는 것은 오소마츠도 알고 있었다

살짝 내려앉은 빨간 테의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린 오소마츠를 보며 단골 손님이 씩- 미소를 피웠다.


있죠~, 그 꽃집의 점장님도마츠노에요.”

—.”

그리고 같이 이야기하다보면 엄~~청 웃겨요! 점장님도 한 번 가보세요.”

뭐가 어떻게 웃긴데?”

그게~.”

고개를 기울이고 의아한 얼굴로 묻는 오소마츠에게 단골 손님이걸렸들었다!’ 하는 얼굴로 음흉한 속웃음을 흘리며 오소마츠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손님의 설명에 오소마츠는 아주 약간 건너편 꽃집에게 흥미가 생겼다.

 

 

 

 

 

2.

 

마침 가게에 놓을 화분이 필요했으니까. 이건 절~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온 거 아니니까.

스스로 되뇌며 응응,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사방이 책 밖에 없는 가게 안이 은근히 살풍경하다는 단골 손님들의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여기에 화분을 사러 온 거니까

가게 밖까지 화려한 꽃들이 늘어져 있는 꽃가게 앞에서 스스로를 타이르기를 수 분

겨우 각오를 굳히고 안이 전부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유리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실례합니다.”

딸랑-, 하고 울리는 벨소리를 따라서 나보다 낮은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퍼졌다

목소리 좋네-. 나만큼

어젯밤에 본 심야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그 성우와 목소리가 비슷할지도

그런 쓸데없는 잡생각을 흘리며 꽃들을 헤치고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좌우로 나란히 줄을 맞춰 서 있는 화분과 꽃들을 구경하며 계산대 앞에 서자, 꽃을 정리하고 있던 남자가 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

“…?”

, 아아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요상한 신음을 흘린 남자가 휙휙 고개를 흔들고 생긋-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적당히 인사를 받아주는 와중에 남자는 시선을 내게 고정하고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말이야~. 

머리를 긁적이며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로 단골 손님의 말대로 얼굴이 나와 닮았다

나랑 같은 성에, 꽤 재미있는 점장이 있는 꽃가게, 라고 설명을 듣자마자 호기심이 들었는데, 설마 정말로 이렇게 내 얼굴과 닮았을 줄은 몰랐다

남자는 한참이나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더니, 침묵을 참지 못하고 내가 내뱉은 헛기침에.” 하고 정신을 차렸다

얼굴 가득히 영업 미소를 피우고 짙은 눈썹을 주욱 늘어뜨린 얼굴이 어쩐지 대하기 편하다

무엇을 찾느냐는 물음에가게에 놓을 화분이 필요해서요.” 하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화분을 찾는 모습에선 손님들이 말했던안쓰러운 성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재미있을 것 같아 일부러 찾아왔는데, 은근한 실망감이 가슴을 감쌌다

-, 기대했는데 말이야

옆에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고 가게 뒤쪽으로 들어가 꽃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웅크린 등을 가만히 응시했다

뭘 그렇게 찾는지 뒤적거리던 등이 곧 멈추고 커다란 화분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 일본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뷰티- 선플라워를!”

, 푸하하하하하하!!!”

어떠냐-, 하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들고 나온 해바라기를 본 순간, 배를 잡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바라기 주제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 꽃은, 꽃집 주인과 완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잘났는지하앙~?” 하고 거만을 떠는 게 직빵으로 내 웃음보를 터뜨렸다.


, 뭐야 그 해바라기?! 어떻게 된 원리!?!?”

웃는 와중에 태클을 걸며 배를 감싸쥐자, 꽃집 주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너무 웃었다

땡겨오는 뱃가죽에 신음하며 눈물을 닦아내고 꽃집 주인이 들고 있는 화분을 받아들었다.


.”

이걸로 할게. 엄청 웃기고.”

…, ! 그렇군! 그럼 포장을….”

가게, 바로 요 앞이고 필요 없어~. 얼마야?”

….”

얼마냔 물음에 꽃집 주인이 앞치마에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계산서를 꺼냈다.

손으로 일일이 금액을 쓰는 아날로그적 종이 계산서를 쓰는 모습이 썩 새로웠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펜을 함께 꺼내 금액을 끄덕이던 꽃집 주인의 손이 뜻모를 신음과 함께 멈췄다.


왜 그래?”

, 혹시 이 앞에 있는 서점에 놓을 건가?”

. 그렇지.”

그럼, 돈은 받지 않겠다.”

?! ?”

이웃이고, 인사 겸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지 않겠나?”

공짜로 준다면 나야 좋지만…. 정말 괜찮아?”

물론! 선플라워도 그대 같은 큐트한 오너의 손에 길러지는 것을 기뻐할 거다!”

푸흐흐, , 알겠어. 고마워~.”

쓸데없이 영어를 섞어쓰는 꽃집 주인의 말투에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꽃집을 나왔다

가게 밖으로 나와 햇빛은 받은 해바라기는 기분이 들떴는지 의미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흔들어대고 있다.

그 모습에 한 번 더 뿜으며 길을 건너 가게로 향했다.

 

 

 

 

 

3.

 

계산대 옆에 놓아둔 해바라기는 어느새 우리 서점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었다

손재주 있는 직원들이 화분 주변에 파란 리본으로 장식을 하더니, 곧 손으로 직접 만든 해바라기 배지를 앞치마에 붙이고 다녔다

책을 계산하는 단골 손님들도 해바라기를 보며 미소를 짓고 인사하며 간혹 사진을 찍어가기도 했다

해바라기도 적극적으로 손님이나 점원들의 호의에 반응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짝 피었다.


점장님이 옆에 가면 그러네요.”

함께 계산대를 맡은 점원이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선글라스를 쓰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해바라기를 보며 말했다

거만한 미소를 피우고 내가 반응해주길 기다리는 모습이 요즘들어 귀엽게 느껴져 가볍게 해바라기를 쓰다듬으며그러네—.” 하고 대답했다

여느 미인 손님이나 점원들에게도 잘난척 하는 모습은 곧잘 보여주지만, 내가 옆에 있으면 그 시선은 완전히 나를 향해 있다

내가 무슨 태양이라도 되는 양, 마냥 쳐다보고 있는 게 의외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내 손길에 바로 환한 미소를 피우고 들썩이는 해바라기를 보며 내 입가도 즐거운 미소가 넘실댔다.


솔직히 점장님이 금방 질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우리 일이 되겠구나~, 했는데….”

매일 아침 가게를 열기 전 해바라기에게 물을 주고 영양제도 꽂아주는 나를 본 점원들의 놀란 얼굴을 떠올리며 가볍게뭐야?!” 하고 화를 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놀랐다

무엇이든 쉽게 질리는 내가 식물을 키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집이 아닌 가게에 가져다 놓은 것도 내가 돌보지 않게 되면 점원들에게 넘길려고 했던 건데…. 

—, 이런 얼굴로 바라봐지면 돌보지 않을 수 없지만

매일 아침 제일 먼저 가게에 나와 청소를 하고, 책을 진열하고 있으면 꼭 계산대에서 뜨거운 시선이 박힌다

뒤돌면 어김없이 해바라기가 나를 그윽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뜨거운 눈빛이 꼭 빨리 밥을 달라고 보채는 것 같아서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도 꽃이나 키워볼까…?”

계산대로 오는 손님들을 상대하고 잠깐 틈이 났을 때, 해바라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도 않는 내 목소리를 어떻게 잡아냈는지 책을 정리하던 점원 하나가 얼굴을 확 밝히며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이참에 새 취미를 가지시는 게 어때요? 점장님 맨날 책만 읽잖아요.”

나도 취미 정도는 있어!?”

뭔데요?”

경마랑 파칭코.”

그런 불건전한 취미 말구요!”

-.”

나름 즐기는 취미 생활을불건전한 취미라고 딱 잘라 말하는 점원에게 야유 섞은 한숨을 흐리자, 계산대에 선 점원도 거들어 나를 보챘다.


맞아요. 꽃 가꾸기! 얼마나 건전해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꽃 사나 사가시면 어때요?”

에에—.”

““귀찮단 표정 하지 말구요!!””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점원 둘이 나를 보며 손을 허리에 올리고 일제히 외쳤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핀잔에 눈썹을 늘어뜨리고알겠어….” 하고 대답하며,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었다

슬렁슬렁, 위로 든 손을 흔들자, 두 점원이 만족스럽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제 할 일로 돌아갔다.

 

 

 

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설마 내 인생에 두 번째로 꽃집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여친에게 줄 것도 아니고 자기가 키울 꽃을 사러 온다는 건, 은근히 처량하다

독신 성인 남성 혼자서 꽃을 키운다

아냐아냐아냐. 그만두자

점원들의 성화에 꽃집 앞까지 왔지만, 역시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발을 돌리려는 찰나, ‘딸랑-’ 하고 울리는 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

, 뭔가 용건이 있어서 온 거 아닌가?”

—, …. , 일단은?”

그럼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 ….”

젠장, 튈 타이밍을 놓쳤다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지, 똥이라도 마려운 얼굴로 급히 문을 열고 나온 꽃집 주인의 친절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꽃집 안으로 들어갔다.


특별히 찾는 것이라도 있나?”

친절히 물어오는 꽃집 주인의 말에 눈을 굴렸다

딱히 뭘 키울지 정한 것은 없어, 답을 흐리며 바닥에 늘어져있는 꽃들을 응시했다

향긋한 허브, 찔리면 큰일날 것 같은 선인장, 색색의 화려한 꽃들, 그리고 푸른 잎을 자랑하는 여러 풀들까지

종류가 너무 많아 절로 머리를 긁적이게 만들었다. 가만히 서서 내 대답을 기다리던 꽃집 주인이 고개를 기울이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 특별히 찾는 건 없는데. 집에서 쉽게 키울 수 있는 녀석 없을까? 물만 주면 되는 걸루!”

, 아아-. 그럼….”

꽃집 주인은 망설이지 않고 금방 푸른 화분 하나를 들었다.

조금 단단하게 생긴 초록색 잎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받아드니 제법 묵직하다

내 손에 들린 화분을 보며 씩- 미소를 피운 꽃집 주인이 앞치마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너도냐!!-쓰고.” 하고 웃음을 흘렸다

뚜두둑,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산세베리아. 여름엔 보름에 한 번, 겨울엔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면 된다.”

-, 편하넹.”

무엇보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쉽게 키울 수 있다는 말에 손에 든 초록색 잎파리가 어쩐지 귀엽게 보였다

이번에도 포장은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지갑에서 현금을 꺼냈다.


그대의 선플라워는 잘 지내고 있나?”

영수증을 써주며 묻는 꽃집 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고 있어~. 보러 오면 어때?”

, 그래도 괜찮은가!?”

? …. 서점이니까…, 책 사러 오는 김에 와도 되고 아니면 꽃만 보러 와도 괜찮구….”

알겠다!”

뭐에 흥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콧김을 흥~, 하고 강하게 내뱉으며 빨개진 얼굴로 미소지은 꽃집 주인이 영수증을 건네 주었다.


, 그러고보니 통성명이 아직이었네. 나는 마츠노 오소마츠! 건너편 서점 점장을 하고 있습니다~.”

가벼운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자, 꽃집 주인의 얼굴이 더 빨개지면서 멍청이 눈을 깜빡였다

설마 악수를 모르는 건 아니지? 멍청히 서 있는 꽃집 주인을 보며 내민 손을 흔들었다.


저기~?”

! , , 마츠노 카라마츠다!”

-, 진짜 같은마츠노.”

손님들이 하도 떠들어대서 같은 성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한자까지 같은 자()를 쓰는 것 같았다.


같은 성이니까 그냥오소마츠라구 불러줘. 나도카라마츠라고 불러도 될까?”

, 물론!”

함박웃음으로 대답하는 카라마츠가 두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쩐지 친해지면 재미있을 것 같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이웃과 친해지는 것은 좋은 것이다

콘크리트 정글, 서로 인사도 하지 않는 개인주의 세상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웃을 수 있는 이웃이라는 것은 정말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만….

 

 

또냣!!!”

점원의 손짓에 벌컥 화를 내며 서점 앞으로 뛰어나갔다

멋대로 설치한 전시대에 잔뜩 펼쳐진 사진집.

주인공은 바로, 카라마츠다

그 후로 가게에 전시해 놓을 꽃이나 집에서 키울 화분을 몇 개 사가면서 친해진 카라마츠는 이해못할 괴상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우리 가게 앞에서 커다란 자기 사진의 등신대를 세워놓지를 않나, 기타를 들고 버스킹을 하지를 않나…. 

등신대는 바로 치우면 그만이고, 버스킹은 센스가 이상한 노래라도 멋드러진 목소리로 부르니 손님들 반응이 좋아 놔두었지만…, 멋대로 사진집을 전시하는 건 곤란하다

그것도 누드 사진집을!! 게다가 오늘은 안쓰러운 가죽 자켓까지 갖춰 입었다.


얀마! 카라마츠!!! 이런 거 전시하지 말랬지!!”

전시대를 뒤집을 기세로 성을 내도 카라마츠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게 더 약올라 손가락질을 해도 카라마츠는 들은척 만척

왜 먹히지 않는건가….” 하고 이상한 말만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서점 안으로 들어오려는 손님들과 길거리 손님들은 우리 둘을 보며 쿡쿡 웃는다

이 요상한 싸움이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법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나와 카라마츠의 싸움을 보려고 우리 서점을 일부러 찾는 손님까지 있을 정도다

손님이 늘어나는 것은 좋지만, 멋대로 누드 사진집을 전시하는 건 곤란하다구!! 어린 손님도 오는데

아무튼 오늘로 이런 싸움을 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이쯤되면 슬슬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요상한 이유겠지만

내가 엎어버린 전시대를 주섬주섬 정리하는 카라마츠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 카라마츠에 맞춰 몸을 낮췄다.

자신과 눈을 맞추는 나를 보며 사진집을 집던 손을 멈춘 카라마츠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오소마츠?” 하고 물어와, 가만히 그 얼굴을 응시했다.


카라마츠.”

!?”

뭘 긴장하는 거야, 이 녀석?


오늘 나랑 마시러 갈래?”

“….”

싫어?”

물론!! 기꺼이 가겠다! 큐티 하니-!!”

누가 네하니-’

여전히 쓸데없는 영어 단어를 섞어 말하는 카라마츠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본 후, 함께 사진집과 전시대를 정리했다.

 

 

 

 

 

5.

 

즐겨 찾는 선술집. 적당히 안주와 맥주를 시켜놓고 카라마츠와 마주 앉았다

술을 따라주자, 양손으로 얌전히 받으면서도 몸을 들썩이는게 어디 불편한 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술을 위장에 부어 넣으며 적당히 근황을 물어보았다

나보다 술이 약한지 카라마츠는 맥주 한 잔에 벌써 얼굴이 빨갰다.


있지-, 카라마츠.”

~? 뭔가?”

너는 어쩌다 꽃집을 열게 된 거야?”

카라마츠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요 며칠 지켜본 카라마츠의 성격으론 연예인이나 배우를 했으면 했지, 꽃집을 할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묘하게 자신만만하고, 항상 과장된 몸짓에 그 안쓰러운 대사, 게다가 자기 누드 사진집까지 만들 정도로 자기애가 넘쳐나는 녀석이 온실 속 꽃을 가꾸는 일을 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또 가끔 꽃집에 놀러가면 정말 열심히 꽃을 가꾸고 있단 말이지…. 

건너편이니까, 우리 가게에서 보면 카라마츠는 매일 아침 꽃들을 내놓아 햇빛을 쬐어주고, 물도 주고…. 

다른 꽃집보다 월등히 카라마츠네 꽃이나 화분이 싱싱하다는 것은 식물을 잘 모르는 나도 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정성으로 꽃을 가꾸는 건 인정하지만, 카라마츠 개인을 두고 보면 도저히 꽃집을 할 것 같지 않다

카라마츠는 내 질문에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고등학교 때  벌을 받아서 말이야. 겨우 학교 벽에 이 멋진 나의 대형 브로마이드를 좀 걸었다고 선생님들께 혼나서, 학생주임 선생님이 벌로 방학 동안 학교 화단을 가꾸라고 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즐거워져서…. 꽃은 내가 정성과 애정과 시간을 쏟은 만큼, 아니 그 배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준다. 이 두손으로 그런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깨닫은 후엔 이미 꽃집을 차리고 싶어졌어.”

—.”

의외로 제대로 된 이유라서 조금 놀랐다

벌을 받게 된 이유는 과연 갈비뼈에 왔지만….

잔에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쭉 들이킨 카라마츠가 술기운이 묻어나오는 한숨을 내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소마츠야말로, 어쩌다 서점을? 오소마츠는 안경을 빼면 전-혀 책을 읽을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갑자기 디스하냐?! 안경은 왜 빼는데!! 내가 눈 나빠진 거에 보태준 거 있어!!”

없지만.”

나 참-! 나도 고등학교 때 영향이야. 가장 친한 친구가 도서관 죽돌이였거든. 같이 어울리면서 책도 추천받고, 같이 읽어보고 하다보니까 책이라는 게 재미있어져서. 그리고 원래 만화책 보는 거 좋아했고. 만화책으로 둘러싸인 데서 일하면 좋겠네~, 하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서점이라도 해보라고 해서….”

그럼 오소마츠가 서점 점장이 된 건 그 친구 영향이로군.”

-, 그렇지.”

“…오소마츠와 같은 학교였다면 좋았을 걸….”

? 카라마츠는 어디였는데?”

().”

~, 난 동()고였어….”

내 쌍둥이 동생도 동고였다.”

? 그래?”

-.”

헤에~.”

학교가 다른게 어지간히 아쉬웠는지 카라마츠가 잔에 새로 맥주를 따라 입 안에 털어넣었다

고등학교 때 카라마츠를 만났다면, 아마 지금처럼 좋은 친구가 됐을 것 같다

쵸로마츠뿐 아니라 카라마츠도 함께 어울려 노는 광경을 상상하며 픽-, 웃음을 흘리고 건오징어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카라마츠는 대단한 것 같아.”

? 뭐가 말인가?”

꽃이나 화분 가꾸는 거 말야. 나도 화분 몇 개 사서 집에서 기르고 있지만, 쉽게 키울 수 있다는 식물도 나한텐 버겁단 말이지. 물 주는 날짜라던가, 햇빛을 쬐준다던가, 그런 거. 그러니까 카라마츠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게 되더라구~.”

그렇게 비행기 태워줘도 아무 것도 안 나온다.”

얼굴 빨간뎅~?”

샤랍.”

짙은 눈썹을 찌푸리고 부끄러운 듯이 작게 내뱉으며 찬물을 마시는 모습이 굉장히 순진해서 일순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을 잊어버릴 뻔 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내일 출근해야한다는 말이 나온 순간, 겨우 내가 쭉 하려고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

“…짝이야…. 뭔가?”
카라마츠, 너 왜 맨날 우리 가게 앞에서 이상한 짓 하는 거야! 진심으로 그만 둬!?”

이상한 짓?”

그래!! 네 등신대를 세워놓는다던가, 버스킹이나, 오늘처럼 사진집을 전시한다던가 그런거! ~~~말 곤란하니까!!”

“…그 건에 관해서 나도 오소마츠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 뭔데?”

왜 내게 반하지 않는 건가?”

“…?”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묻는 카라마츠에게 존댓말로 대답해버렸다

술기운이 몽글몽글 피어나던 머릿속이 해일이라고 쓸고 지나간 것처럼 새하얘졌다

아니, 이 자식 지금 무슨 말 하는 거?


내가 이렇게나 대시를 했는데! 매일 이 카라마츠의 가장 멋진 모습을 담은 등신대나 사진집을 보여주고 있다고!? 기타로 사랑의 세레나데까지 연주했다!! 그런데 대체 왜?!”

-, 그 이상한 노래가 세레나데였어? 그렇구나…, 가 아니라!!! 하아?!!? !? , 하아!?!?”

처음 본 순간부터 오소마츠는 내 마음 속에 있었다. 내가 만든 쿨-한 선플라워를 받아준 순간, 오소마츠의 미소에 내 하트는 큐피트의 화살에 뚫리고 말았는데…!!”
, ? ??”

오소마츠!! 사랑한다!!”

헤에….”

아니, 그렇게 내 양손을 꽉 움켜쥐고 고백해도 말이지…. 

일단 카라마츠 너, 술냄새 엄청 나니까…. 

그리고 그게 나한테 대시하는 거였어!? 전혀 몰랐습니다만!? 

아니, 그걸 대시라고 보는 사람 없으니까!! 

그냥 남의 가게에 이상한 거 늘어놓는 이상한 사람이니까!!! 

상상도 못했던 진실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서 황당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 지금 이거 꿈 아니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현실도피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카라마츠는 소중하게 감싸 쥔 내 손을 놔주지 않았다.


오소마츠!!”

간절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다시 내렸다

웃와—, 얼굴 엉망진창….

술 때문인지, 지금 상황 때문인지 카라마츠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갰다

눈은 눈물로 그렁그렁하고…, 얼씨구 콧물로 흘러내리려고하네

이거, 내일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패턴이다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은 카라마츠의 눈을 보면서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 충격이란 말이지-.

카라마츠가 그간 했던 기행이 전부 나를 꼬시려고 했던 것도, 카라마츠의 고백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것도

, 평범하게 여자를 좋아했는데 말이야…. 

어젯밤 신세를 졌던 야동 속 거유 누님을 떠올리며, 어쩌다 이렇게 틀어져 버렸는지 한탄하고 카라마츠를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카라마츠. 일단, 친구부터 시작할까?”

? 받아주는 건가.”

-. 일단은 말이야.”

으읏~~~!! 물론!! 프렌드부터 시작하자, 마이 스위티 하니-!!!”

아직 허니 아니니까.”

오케-, 마이 스위티 프랜드!!”

아야야야야, 갈비뼈가….”

와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던 표정은 어디로 갖다 버렸는지, 특유의 거만하고 안쓰러운 얼굴로 활짝 웃는 카라마츠의 모습에 갈비뼈가 참을 수 없이 욱신거렸다.

 

 

 

다행히 숙취도 없이 출근해 새로 들어온 신작을 세팅하고 있던 이른 아침, 막 출근한 점원이 새파란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점장님, , 밖에….”

? ?”

점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슥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알러뷰-!! 오소마츠!!”

 

백 송이는 족히 넘어가는 커다란 장미 꽃다발과 지금까지 카라마츠가 멋대로 전시했던 수많은 사진집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백보 양보해서 꽃은 그렇다쳐도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냐-!!!”

있는 힘껏 배에 힘을 주고 외치며 사진집들을 내던졌다

꽃은, 얌전히 바닥에 놔뒀지만….


, 그런가. 오소마츠는 이 정도론 만족하지 않는 길티- 보이로군.”

!? 누가!!”

걱정마라, 오소마츠!! 더 정진하지! 내일을 기대해줘!! 씨 유 투마로-!”

하아!? , !! 내일도 이딴 짓 할 생각이야아~~!?”

내 외침을 듣는둥 마는둥 카라마츠는 잽싸게 길을 건너 꽃집으로 들어갔다

씩씩, 숨을 몰아쉬는 내 발치엔 카라마츠가 가져온 장미와 사진집들….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고 사진집은 한 데 모아 쓰레기통에, 꽃은 전에 가져다 놓은 커다란 화분에 꽂아 계산대 옆에 놔두었다

나와 카라마츠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점원들은 그제야 슬금슬금 내 옆에 다가와 꽃을 구경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이 주변에서 유명한 서점 점장과 꽃집의 싸움은 당분간 끝날 것 같지 않다. 어휴~.





* 요즘 2기 덕분에 월요일이 기다려집니다.

  2기에서 장형을 은근히 밀어주더라구요?

  카라마츠도 대사 늘었고. 오소마츠랑 같이 있는 장면도 많고ㅎ

  특히 이번 6화는 최고였습니다^^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6편입니다! 이제 이야기의 중반정도 왔네요ㅎ

 요번 주말에 할일이 많아서 50제는 주중에 올리겠습니다ㅠ


* 체스나 장기라는 놀이가 나옵니다만, 명칭만 같을 뿐 전혀 다른 놀이라고 생각해주세요ㅎ


* 아주 잠깐, 살짝 잔인한 표현이 있습니다.


* 공미포 10,946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붉은 왕국의 겨울 중 가장 추운 시기를 휴양지에서 보내고 다시 레드 버로우로 돌아온 우리

별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마츠요 왕비님이 밝은 미소와 함께 우리를 맞이해주셨다

고향의 색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글리아 지방에서 산 특산물을 마츠요님에게 드렸더니, 그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를 피우며 선물을 받았다

푸른 왕국의 음식과 장식품, 그것들을 응시하는 마츠요님의 눈빛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내 팔짱을 끼고 별궁 안으로 끌어들이며 글리아 지방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달라는 마츠요님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마츠요님이 우리를 따라 거실로 들어오려는 오소마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오소마츠.”

?”

폐하가 찾으셔.”

…. .”

마츠요님의 말에 귀찮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인 오소마츠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혀를 차고 거실을 나섰다

마차에서 짐을 내려 옮기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에게 본궁에 다녀오겠단 말 한 마디를 던지고 오소마츠가 본궁을 향해 걸어갔다.


한 나라의 왕이라곤 하나 오소마츠에겐 아버지. 하지만 지금까지 오소마츠를 지켜본 바로는 오소마츠와 현왕 레온 3세는 그리 친한 것 같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노골적으로 왕과 함께하는 자리를 피하고, 왕이 자신을 부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왕과 왕자, 그 자리는 단순한 부자 사이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고향에 있을 아버지를 떠올리고 잠시 뭉클 조여오는 심장에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향에 혼자 남아 계신 아버지는 우리는 걱정하고 계시겠지…. 

우리가 없는데도, 잘 생활하고 계실까…. 

인자하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미소를 그리며 오소마츠가 향한 본궁이 보이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리아 지방에서는 잠도 편하게 자도, 일을 하고 있어도 줄곧 편안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는데…. 

왕이 부른다는 소리에 단숨에 오소마츠의 얼굴이 굳어졌다

얼굴에 슬며시 드리운 그늘이 마음에 걸려, 마츠요님의 부름도 듣지 못하고 내내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2.

 

시녀도, 하인도 없이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 하얀 문을 노크한다

똑똑 소리에 이어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씨익-, 의미 모를 미소를 피운 중년 남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모시던 하녀도, 시종도 모두 물리친 방 안에, 화려한 주홍색 드레스를 입고 온갖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한 제 1왕비, 그레이스가 중년 남성을 맞이했다.


준비는 어떻게 되었나요, 아버님.”

그레이스의 물음에 귀족의 우두머리, 왕을 제외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 쥬드 공작이 미소와 함께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착착 진행되고 있지요. 왕비님, 당신이 할 일은 잘~ 숙지하고 계시겠지요?”

나라 최고의 귀족이자 제 1왕비의 아버지라고 하나 그는 한낱 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1왕비로서, 왕가의 일원이 된 자신의 딸에게조차 함부로 말을 놓을 수 없는 것이 나라의 법도, 왕실의 규칙이었다

그레이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활짝 피우고 우아하게 핀 부채를 손에 쥐었다.


잘 알고 있지요, 허나 아버님. 이번 일은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당연합니다. 반드시 성공시킬 터이니 큰 걱정 마시길…. 이대로 그 검은 머리의 망나니가 왕이 되는 것은 왕국의 수치니까요.”

엘린만, 엘린만 죽지 않았다면….”

쥬드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레이스가 눈물을 글썽였다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미의 눈물 속엔 자신의 야심을 이루지 못하게 된 분노와 아쉬움도 함께 섞여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가지런히 접혀있던 손수건을 정중히 내민 쥬드 공작이 그레이스의 손에 입맞춤을 내렸다.


부디 근심 마시길….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분명 엘린 왕자님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 그래야죠. 반드시!”

그레이스의 눈에 서린 증오와 분노에 음흉한 미소를 피운 쥬드 공작이 수긍했다

어릴 적부터 남의 것을 탐냈던 쥬드 공작은 주변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야심가였다

자신의 것은 물론 남의 것도 원한다면 반드시 손에 넣고서야 마는 탐욕자

쥬드 공작은 귀족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왕국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아무리 위세가 좋은 귀족이라도 단숨에 목을 칠 수 있는’. 

쥬드 공작은 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웅왕 시절 쌓아올려진 절대 왕권

그것이 쥬드 공작은 참을 수 없이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왕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이 절대 왕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히 언어도단

그렇기에 쥬드 공작은 자신의 딸을 제 1왕비로 세웠다

딸의 아들, 자신의 손자가 왕이 된다면, 그 절대 왕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올 것이란 계산 하에.

 

왕비의 방을 나서며 쥬드 공작은 한 번 더 차분히 계획을 머리속에 그렸다

고르고 골라 뽑은 실행자들, 날짜, 시간, 만약에 있을 변수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시금 계획을 곱씹고 수정하며 쥬드 공작은 손을 겹쳐 신께 빌었다

부디, 부디 이번 일이 성사되기를 간절히 빌며.

 

 

 

 

 

3.

 

왕의 집무실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왕의 목소리에 문을 열자, 서류 더미 속에서 안경을 낀 왕궁 호위대 대장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옆에 앉아 서류를 훑던 왕이 나를 불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감과 동시에 호위대 대장이 방을 떠났다.


그래, 글리아는 어땠나. 왕국 유일한 자치령이라 배울 것이 많았을텐데….”

묘하게 심문하는 듯한 어조에 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과연, 너무 순순히 수업을 보류하고 글리아 지방에 가는 것을 허락한다 싶었더니…. 

글리아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지방의 대소사를 확인하고 오라는 명령의 뜻이 이거였나

덕분에 휴양지에서 지낸 시간의 절반은 그곳의 일을 처리하는데 쓰고 말았다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억누르고, 헛기침을 빙자해 한숨을 내쉬었다.


. 잘 보고 왔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먼 길을 여행한 노고를 풀 시간도 없이 너를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매사냥때문이다.”

“….”
매년 겨울, 왕실 모두가 참여하는 매사냥

사냥감을 얼마나 잡는지에 따라 다음해의 운을 점치고, 왕실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구실을 가진 행사이다

초대왕이 즐겨했던 사냥의 왕실의 행사로 만든 것은 영웅왕이었다

영웅왕은 영토를 넓힌 그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형제와 왕비, 그리고 자식들과도 굉장히 돈독했다는 점으로도 유명했다

항상 왕좌에 오르기 위한 싸움이 빈번한 왕실에서 지위에 상관없이 왕실이 모두 원만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시라는 이유로 작년엔 하지 않았지만, 올해는 그럴 수 없지.”

“….”

왕실이 전쟁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간소하게나마 매사냥을 실시할 생각이다.”

.”

해서, 트루디와 제 1왕비에게도 매사냥 개최를 알려주었더니, 1왕비가, 네 약혼자도 함께 가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해왔다.”

“…?”

왕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멍청히 되물었다

내 약혼자라니, 카라 공주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카라 공주는 아직약혼자’.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지 않은 자다.

약혼자이지만 아직 정식으로 왕실에 들어온 것은 아니니까, 변명만 잘 둘러댄다면 카라 공주를 이번 행사에서 빼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게다가 제안을 해 온 것이 제 1왕비라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왕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약혼자라곤 하나, 슬슬 정식으로 혼례를 올려도 이상할 것이 없지. 왕실의 일원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푸른 왕국의 공주를 참석시키는 제안 자체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다음주, 매사냥을 나갈 예정이니 준비해라.”

반문을 허락치 않는 근엄한 목소리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왕의 단호한 음성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입술을 꽉 물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

사냥 중엔 반드시 내 옆에 있어라.”

“….”

왕의 말에 머리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사냥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팀으로 나뉘어 동물을 몰아 잡는 팀웍이다

보통은 왕과 왕자가 나뉘어 왕자가 동물을 몰고 왕이 그 동물을 잡는 것이 전례

그런데반드시라는 말을 붙여가며 옆에 있으라고 하는 왕의 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며 무슨 말이냐 물으려는 나를 가로막은 왕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리며나가보거라.” 하고 말했다

.” 하고 대답하고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방을 나섰다.


사냥 중 왕의 옆에 붙어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카라 공주를 대동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일이 꾸며지고 있는지 안개 속에 숨겨진 제 1왕비의 속내가 신경을 끈다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무슨 일이 있더라고 잘 처신할 것을 다짐하며 별궁으로 발을 돌렸다.

 

 

 

오소마츠가 떠난 방에 남겨진 왕이 신경질 적으로 깃펜을 내던졌다.

, 하고 서류에 떨어진 깃펜에서 잉크 한 방울이 떨어져 종이에 번진다.

하아….” 하고 근심어린 한숨을 내쉰 왕이 목을 젖히고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1왕비의 제안과 쥬드 공작.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매사냥이라는 것은 소수의 왕실만 참여하는 것이고, 그 사냥터는 당일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으니 무슨 수략을 부릴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 숙인 왕이 오소마츠가 떠난 문을 바라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혹여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들, 에드윈 왕자를 걱정하며 내쉰 왕의 깊은 한숨을 오소마츠는 듣지 못했다.

 

 

 

 

 

4.

 

별궁 거실에 도착하자 함께 체스를 두고 있던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두 녀석의 얼빠진 얼굴을 보자마자 진이 빠짐과 동시에 몰려오는 피로감에 소파에 그대로 뒹굴었다

팔을 올려 눈 위에 얹고 깊은 한숨을 내쉬자마자, 녀석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런 한숨을 내쉬어?”

쵸로마츠의 목소리에 팔을 내리고 슬쩍 쵸로마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다문 세모꼴의 입술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 왕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다음주에 매사냥이 있을 것도, 그리고 카라 공주가 함께 참가해야 하는 것도

당연히 두 녀석은 내 말에 경악하며 턱을 떨어뜨렸다.


하아!? 카라 공주도 참가한다고!?”

…. 진짜로…?”

과장되게 경악하는 쵸로마츠에 이어 이치마츠도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되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녀석의 깊은 함숨이 거실에 퍼졌다.


카라 공주는?”

왕에게 가기 전, 어머니와 거실에 들어갔던 녀석이 보이지 않아 묻자, 쵸로마츠가 윗층을 눈짓했다.


침실에 들어갔어. 어머니가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끌고 들어갔지.”

그래…. 그 녀석, 말은 탈 수 있겠지?”

아마도…? 아니면 어머니 옆에 있으면 되겠지. 그것보다, 카라 공주는 공주이지만남자인데, 왕실 행사에 참여해도 괜찮은 거야?”

쵸로마츠의 질문에 이치마츠가 수긍하며 고양이를 꽉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해지는 머리에 골을 잡고 다시 소파에 몸을 내던지며 대답했다.


그 녀석, 원래 엘린의 약혼자였고. 1왕비쪽 사람들 모두 그 녀석이 남자인 거 알고 있겠지. 이번엔 규모를 줄여서 왕과 왕비, 왕자만 참여한다고 했으니까.”

그럼 문제는 없겠지만….”

암튼, 다음주 출발이니까 준비 부탁해, 쵸로마츠.”

….”

내 말에 쵸로마츠가 내키지 않는단 얼굴로 대답을 흐렸다

옆에서 쭉 나와 쵸로마츠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치마츠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오소마츠 형은, 괜찮겠어?”

조심스럽게 묻는 동생의 귀여움에 씩- 웃고, 이치마츠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으악.” 하고 작게 신음하면서도 내 손을 피하지 않는 이치마츠를 실컷 쓰다듬어 준 후, 활짝 웃어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 카리스마 레전드 횽아 앝보지 말라고~?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

그럼 다행이지만.”

뭐야! 쵸로마츠!! 정말 괜찮을 거라구!”

, 네네.”

쵸로마츠의 적당적당인 대답에 입을 삐죽 내밀고 항의하자, 거실에 들어온 두 개의 구두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 무슨 이야길 하고 있니?”

다음주에 매사냥이 있대요.”

엄마의 물음에 쵸로마츠가 대답했다

그래.” 하고 웃는 엄마의 옆에서 나를 응시하며 다가온 카라 공주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내게 물었다.


오소마츠, 무슨 일 있나?”

아니…. 공주님은, 말 탈 줄 알아?”

, …, . 일단은.”

그래.”

? 그건 왜 물어보니?”

대뜸 묻는 내 질문에 엄마가 의아하단 얼굴로 물었다

머리를 긁적이고 카라 공주도 매사냥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리자 엄마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어머, 그러니! 그럼 내 옆에 있으면 되겠다!”

손뼉을 가볍게 치고 카라 공주를 보며 웃은 엄마가 시종의 알림에 본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럼 엄마는 가볼게. 잘 자렴, 아들들~.”

싱긋-, 상냥한 미소와 함께 우리 얼굴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준 엄마가 별궁을 떠나고, 여전히 잘 모르겠단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카라 공주에게 매사냥에 대해 설명했다.


정해진 사냥터에서 왕실이 다 같이 사냥을 하는 거야. 미리 잡아놓은 동물을 풀어놓고, 쫓아서 잡는…, 일종의 스포츠야.”

그렇군.”

왕실이 다 참여하는 게 전통이라서, 원래 약혼자 신분인 너는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이번엔 너도 참여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 알겠다.”

시원스럽게 알겠다고 대답하는 모습에 정말 잘 알고 있는 건지 의심이 갔다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이러는 건지

1왕비도 온다면, 분명 시비를 걸어올 것이 분명한데…. 

그 무엇하나 신경쓰지 않는단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얼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소마츠.”

.”

정말로 괜찮은 건가? , 매사냥이라는 것이 부담되는 일인가?”

“….”

제 일이나 걱정할 것이지, 짙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내 걱정을 하는 게 참을 수 없이 바보같아서 공주의 이마에 딱콩을 날렸다.


, 무슨 짓인가!!”

당연히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며 항의하는 공주를 보며 슥-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고별로.” 하고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질퍽하게 바닥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공주는 걱정하던 표정을 지우고 내 미소에 의문을 가지며 눈썹을 찌푸리고 팩 고개를 돌렸다.


“…저건, 뭐지?”

거실 가운데를 보며 고개를 기울이는 공주의 혼잣말에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공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잠깐 중단했던 체스를 다시 이어서 하고 있었다.


체스잖아?”

체스…?”

종류가 다른 말을 가지고 하는, 머리 싸움이랄까. 규칙이 실제로 이용되는 군사 전략과 비슷해.”

헤에….”

, 나는 머리 쓰는 일은 질색이니까 잘 안하지만.”

푸른 왕국에도 비슷한 놀이가 있다.”

—, 어떤?”

장기라고 해서, 그것도 전법과 비슷하다고 들었다.”

안 해봤어?”

“…나는, 별로 해보지 않아서…, 잘 몰라.”

그래.”
말을 흐린 공주가 체스에 집중해 공주의 말을 듣지 못하는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를 가만히 응시했다

체스말을 움직이는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딱 봐도 하고 싶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응챠-.” 하고 몸을 일으켜잠깐 기다려.” 하고 공주에게 말한 후, 창고로 향했다

여전히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짐들 사이에서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어린이용 체스판을 꺼냈다

어른이 쓰는 체스판보다 작고, 체스말도 가볍다

규칙도 어린이가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하게 수정되어 있어서 왕실의 어린 왕자나 귀족의 자제가 많이 가지고 논다

어린이용 체스판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거실에 도착하자 아직도 승부가 나지 않았는지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머리를 뜯고 있었다.


, 이거.”

이게, 뭔가?”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녀석.”

….”

멍청히 눈을 깜빡이는 공주를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체스판을 폈다

작은 체스말을 자리에 세팅하고, 체스말의 이동 방법, 규칙을 하나씩 설명했다

어린이용이라고 해도 복잡하게 느껴지는 규칙에 공주는 잠시 골머리를 앓았지만 이내 서툴게나마 체스를 둘 수 있게 되었다

체스 하나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우리가 없는 별궁에 혼자 남은 공주는 꽤 심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찾아와 수다를 떨어도 그건 매일 있는 일이 아니다

하루의 태반을 별궁에서 지내는 이 녀석은, 무슨 일을 하면서 지내는 걸까.

궁금하면서도, 심심하겠구나-, 하는 걱정이 들어서, 혼자서 놀 수 있을 장난감을 들여놓는 것이 좋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5.

 

매사냥이 이뤄질 넓은 벌판. 그 가운데 솟은 작은 언덕에 임시 막사가 세워졌다

보호구를 갖추고 말 위에 탄 왕과 오소마츠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도 함께 말에 올라 벌판으로 내려갔다

왕의 신호에 맞춰 시종들과 쵸로마츠, 이치마츠가 미리 풀어놓은 동물들을 몰기 시작했다

왕과 오소마츠가 길들인 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푸른 하늘에 힘찬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다다닥-, 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말 발굽소리가 평원에 울렸다

동물 울음소리, 매의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동물의 신음소리가 퍼졌다.

 

 

왕과 왕자들이 동물을 쫓는 동안, 언덕 위에 세워진 막사에는 왕비들이 남았다

막사 가운데 피워진 모닥불에서 몸을 녹이며 왕과 왕자들이 잡은 동물을 들고 올 때를 기다리는 그녀들은 조용히 따뜻하게 데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벌판에서 쫓기는 동물과 그 뒤를 쫓는 말. 근질대는 몸을 꾹 참고 마츠요의 옆에 자리잡은 카라마츠가 향긋한 차 속에 한숨을 녹였다.


후후후, 대단하지?”

, .”

벌판을 빤히 응시하는 카라마츠를 보며 마츠요가 웃음을 흘렸다.


영웅왕 시절엔 왕실의 여성들도 함께 말을 타고 사냥했다고 하더구나.”

헤에….”

너도 원한다면 말에 올라도 상관 없단다.”

마츠요의 배려에 카라마츠가 욕망을 상자에 담아 봉했다

마음같아선 지금 당장 말에 올라 저 넓은 평원을 뛰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푸른 왕국이 아닌 붉은 왕국

자신은공주로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젓고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괜찮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닥불을 응시하며 제 옆을 떠날 생각이 없어보이는 카라마츠의 모습에 마츠요가 슬며시 자상한 미소를 넘겼다.

 

 

 

저 멀리 울리는 매 소리가 들판에 가라앉았다

드넓은 하늘을 활공하던 매가 급격히 하강한다

하얗고 풍성한 털을 자랑하는 눈토끼가끼익-!” 하고 단발마를 끝으로 날카로운 매의 발톱 아래에 뭉개졌다

토끼의 숨통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말발굽 소리가 닿았다

토끼를 쫓던 왕과 오소마츠가 말에서 내려 이미 숨이 끊긴 토끼를 확인하고 높이 들어올렸다

말 안장에 걸린 줄에 사냥 전리품을 자랑스럽게 매단 왕과 오소마츠가 막사로 뛰었다

토끼를 잡은 것에 축하를 건네는 그레이스와 마츠요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왕이 오소마츠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번엔 여우를 잡아야지.”

.”

먼저 말을 돌려 다시 평원으로 내려가는 왕을 본 오소마츠가 힐끗, 모닥불 옆에 앉은 카라마츠와 마츠요를 응시했다

오소마츠의 눈빛에 서린 걱정에 마츠요가 빙그레- 웃으며 카라마츠를 눈짓했다

카라마츠가 옆에 있으니 괜찮다.’는 마츠요의 눈빛에 오소마츠가 쓴웃음을 흘리고 마지못해 왕의 뒤를 따랐다

곧 여우 하나를 발견해 말을 거세게 몰았다.

매가 다시 하늘 높이 뜨고, 왕과 오소마츠가 여우를 뒤쫓는 와중에 시종하나가 뛰어왔다

말발굽에 치일까 급히 말을 세운 왕이 성난 음성으로 시종에게 호통쳤다.


이 무슨 짓인가!!”

, 1왕비님께서 급히 전할 말이 있다 하시어….”

왕의 노성에 벌벌 떨며 말을 전하는 시종이 몸을 움츠렸다

, 하고 혀를 찬 왕이 오소마츠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속 쫓거라.”

여우를 놓칠까, 왕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오소마츠가 다시 말을 달렸다

왕은 말을 돌려 시종과 함께 언덕을 올라 막사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린 왕이 언짢은 기분을 감추지 않고 제 1왕비에게 다가가자, 한껏 요사스런 미소를 피운 왕비가 제 어린 아들을 앞세웠다.


폐하, 기특하게도 오닐 왕자가 겨울이 끝난 후, 출정을 자처했습니다.”

1왕비의 말에 왕이 인상을 찌푸렸다. 1왕비의 두번째 아들인 오닐 왕자는 아직 어렸다

오소마츠보다 5살 어린 그는 아직 성인식도 치루지 않았고, 군사 훈련조차 제대로 받은 적 없었다

야들야들한 피부와 부드럽지 짝이 없는 여린 손

긴장한 얼굴로 제 아비인 왕을 올려다보는 오늘 왕자를 가만히 내려다본 왕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성인식도 치루지 않은 어린 왕자를 전쟁터에 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왕자를 함부러 전쟁터에 내보냈다가 병사들을 개죽음 만들 가능성이 다분했다

병사를 지휘해본 적도, 전술을 짜 본적도 없는 왕자를 전쟁터에 보낼 어리석은 왕이 아니었다

1왕비의 말을 듣고 있던 마츠요가 머릿속을 스치는 의심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왜 굳이 그런 말을 지금 한 것일까

왕이 오닐 왕자를 전쟁터에 보낼 리 없다는 것은 제 1왕비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단순히 왕의 점수를 따귀 위해서 한 말이라고 친다면 때와 장소가 너무나 나빴다

의심은 곧 불안으로 변모했고, 마츠요가 흔들리는 눈으로 여우를 쫓고 있는 오소마츠를 급히 찾았다.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 “!!” 하고 우는 여우

마츠요의 눈에 휘청거리는 말과 그 위에서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오소마츠가 비쳤다.

벌판에 파인 홈, 그 위에 눈이 덮혀 보이지 않던 함정에 말의 발이 걸리고, 중심을 잡으려 어지럽게 땅을 박차는 말발굽에 치인 여우가 비명을 지르며 말의 다리를 물었다.

놀라 흥분한 말이 제 등에 타고 있는 이물질을 떼내려 발버둥쳤다

오소마츠는 힘겹게 말의 목덜미를 잡고 날뛰는 말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낙마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에 마츠요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저렇게 날뛰는 말에서 떨어진다면 말발굽에 급소를 치여 즉사할 수도 있었다

운좋게 발굽을 피한다고 해도 말에서 떨어지는 높이와 중심을 잡지 못해 머리부터 떨어진다면 중상을 피할 수 없다

말에서 떨어져 며칠을 앓다 죽는 이들을 마츠요는 많이 봤다

왕도,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도 사색이 된 얼굴로 재빨리 말에 올랐다

오소마츠를 도우려 말의 고삐를 쳐내기도 전에, 푸른 드레스를 펄럭이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향해 뛰어갔다.

 


카라마츠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오소마츠가 탄 말이 휘청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마자 카라마츠는 대기되어 있던 말의 고삐를 풀고, 단숨에 안장에 올랐다

등자를 힘껏 차 말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드레스가 바람에 펄럭이며 맨다리가 드러나도 카라마츠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오소마츠를 눈에 담고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오소마츠의 코앞까지 뛰어간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소마츠!!”

!”

카라마츠가 내민 손을 오소마츠가 강하게 쥐어 잡았다

그대로 오소마츠를 끌어당겨 자신의 뒤에 앉힌 카라마츠가 날뛰는 말을 피해 고삐를 돌려 잡았다

날뛰던 오소마츠의 말은 또 다른 함정에 발이 빠져 다리가 부러졌고, 그대로 눈밭에 쓰러지고 말았다

말에서 멀리 떨어져 멈춘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보며 다급히 물었다.


오소마츠, 괜찮은건가!!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

이리저리 오소마츠의 몸을 더듬으며 무사한 것을 확인하는 카라마츠를 보며 쓴웃음을 지은 오소마츠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직접 제 손으로 만져 오소마츠의 팔다리, , 머리가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한 카라마츠가 힘빠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 다행이다….”

안도하며 눈물짓는 카라마츠의 모습에 오소마츠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카라마츠에게 손을 뻗은 순간, 왕과 쵸로마츠와 이치마츠가 뛰어왔다.


에드윈! 다친 곳은?!”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야.”

왕의 물음에 대답한 오소마츠가 뒤이어 다가온 마츠요에게도 같은 대답을 건넸다

평원 곳곳에 빠인 함정에 이글거리는 눈을 빛내며 대노한 왕은 시종을 불러 당장 함정을 판 범인을 찾으라 명했고, 매사냥은 그대로 끝이 났다.

 

 

혹시 모를 부상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본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말 위에 타지 않고 카라마츠와 함께 마차에 오른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정말로 괜찮아.”

아직도 저를 걱정하는 카라마츠의 얼굴에 오소마츠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카라마츠는 더욱 눈썹을 찌푸리고 눈물이 맺힌 눈을 쓱 닦으며 코를 훌쩍였다

-, 하고 숨을 내뱉은 오소마츠가 붉게 부어오른 카라마츠의 눈가에 손을 뻗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닦아주며,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달랬다

뜨거운 눈물이 맺힌 눈을 가만히 응시하며 픽-, 웃음을 흘리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사납게 노려보며 뭐가 웃기냐, 쏘아붙였다

그 툴툴거림도 오소마츠는 그저 웃긴지 본궁으로 향하는 내내 입가에 넘실대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6.

 

왕실 전담 의사의 진료를 받고, 큰 상처가 없다는 확진을 받은 오소마츠에게 쵸로마츠가 다가왔다.


폐하가 꼭 범인을 잡겠다고 벼르고 계셔.”

—.”

쵸로마츠의 말에 시큰둥하게 대답한 오소마츠에게 쵸로마츠가 말을 이었다.


암튼 오늘은 쉬어. 엄마도 조금 전에 본궁으로 돌아가셨고.”

웬일로 쉬라는 말을 해~? 잔소리꾼 쵸로마츠 씨가.”

지금은 그런 말에 대꾸해줄 기운 없으니까 잔말말고 쉬어!”

.”

쵸로마츠의 핀잔에 오소마츠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그대로 카라마츠에게 이끌려 침실에 들어간 오소마츠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었다

카라마츠와 쵸로마츠, 이치마츠 뿐만 아니라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도 오소마츠가 누운 침대 곁에 다가와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오소마츠가 눈을 감았다

푹신한 이불의 감촉이 곧 오소마츠를 꿈 속으로 이끌었다.

 

 

 

눈을 뜨자 주변이 깜깜했다. 창 밖으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에 간신히 물건의 실루엣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흔들리고 곧으음….” 하고 잠꼬대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색색- 곤히 잠든 카라 공주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베개에 흩어진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쓸어올렸다

훤히 드러난 이마와 짙은 눈썹에 픽- 웃고, 손을 내려 부드러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픈지—.” 하고 신음하며 눈썹을 찌푸리는 모습이 썩 재미있다

입을 우물거리며 자세를 바꾸어 발 하나를 이불 밖으로 꺼내고 천장을 보고 누운 공주를 가만히 응시했다.

깊이도 잠들었는지 그 후로 볼을 꾹꾹 눌러대도 깨어나지 않는다.


“…—, 한심해….”

자조하며 내뱉고 무릎을 세워 끌어앉았다

말이 놀라 날뛰던 순간, 전장의 모습이 눈앞에 비쳤다

적군의 칼을 맞고 휘청대는 말, 그 위에 탄 기사는 곧 적군의 칼에 목이 날아갔다.

흩뿌려진 붉은 피와 땅에 쓰러진 말

필사적으로 말에 매달려 고개를 들자, 흔들리는 말 갈기 사이로 적군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내 차례라는 것처럼 한껏 입꼬리를 치켜들고 비웃으며 내게 서슬퍼런 칼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날뛰는 말에서 다치지 않도록 뛰어내리는 훈련은 몇 번이고 했는데, 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내가 전장에 있는 것인지, 사냥터에 있는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공주가 없었다면, 어쩌면 나는 정말로….

 

다시 곤히 잠든 공주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를 향해 드레스를 흩날리면서 뛰어오는 그 모습은 정말로 늠름했다

짙은 눈썹을 한껏 찌푸리고 나를 향해 뻗은 그 손은, 마치 구원 같았다

손에 닿은 온기와 말을 멈추고 내 몸을 더듬으며 나를 걱정해 울먹이는 얼굴

그 모든 것이 가슴 아플 정도로 멋있었다

회상하며 뜨거워지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숨기고, 터져 나오는 미소를 삼켰다


기뻤다

나를 위해서 그런 얼굴을 하고 뛰어오는 것이. 만사를 젖히고 내게 달려오는 모습이, 진심으로 멋있고 또 기뻤다

달아오른 얼굴을 밤공기로 식히며 다시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 모르고 잠든 얼굴이 귀엽다

공주가 있어서, 밤에도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잠들 수 있게 되었다

휴양지에서 들려준 자장가에 푹 잘 수 있었다

공주 덕분에 오늘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전부, 공주 덕분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작게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이럴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될 예정따위 세우지 않았다

내가 다음 왕이 되는 것도, 그리고….

 

이 바보에, 울보에, 귀엽고 상냥한, 고릴라 공주를 사랑하게 된 것도.

 

평생왕자라는 지위에 안위하며 탱자탱자, ‘의 자리따위 탐내지 않고 편지 지내려던 내 인생 계획이 전부 먼지가 되어 버렸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틀어진 걸까. 나는 언제부터, 이 고릴라 공주를 사랑하게 되버린 걸까

자신의 마음이, 생각이 낯설다

그렇게나 왕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공주가 옆에 있어준다면이라는 자리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섭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네게 이렇게 빠져버리고 만 것일까…. 

물어도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어둠을 가르는 평온한 숨소리만이 귀에 닿았다.

 

부드러운 머리를 어루만지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내일부턴 또 일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분명 공주가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 인사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주면 좋을까, 홀로 그리며 행복한 미소를 피우고 나를 유혹하는 잠의 저편으로 몸을 던졌다.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 원래 카라오소를 쓰려고 했는데, 왜인지 약한 장남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 1기 24화 소재입니다.


* 오소마츠가 살짝쿵 약합니다.


* 올캐러지만 오소른 느낌도...?


* 초단편입니다. 공미포 2,224자.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거 이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엄마, 아빠의 웃는 얼굴.

축하한다며 선물을 건네주는 녀석들.

수줍게 웃으며 선물에 태클을 거는 쵸로마츠.

 

그날이구나….

쵸로마츠를 시작으로 하나둘 집을 떠난 너희들.

선발로 다시 모였지만, ‘그날의 조각은 아직 남아있다.

너무나 작아 보이지 않지만, 거슬리는 느낌은 확실히 있는 그런 조각이.

다시 여섯이 함께 백수 생활을 이어가도 너희는 조금씩 변했다.

 

쵸로마츠가 취직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던가,

카라마츠가 덜 아프다던가,

이치마츠가 말이 많아졌다던가,

쥬시마츠와 토도마츠가 좀 더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됐다던가….

 

아주아주 조금, 너희는 변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지금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아무것도 못 했던 내가.

상 위엔 거대한 초밥 그릇, 모두 웃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다.

나 혼자, 아무 말 없이 초밥을 집어 먹고 있어.

쥬시마츠가 뛰어다니며 내 등을 치고, 결국 초밥을 떨어뜨려서….

쥬시마츠한테 화풀이하고, 카라마츠한테 얻어맞아서….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들었다.

있지-, 이게 꿈이라면….

나는 참지 않아도 될까.

그렇게 너희를 보낸 걸 계속 후회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꿈에서만이라도 재도전해도 될까.

 

“…쵸로마츠.”

목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낮게 가라앉아서, 절로 모두의 들뜬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불안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엄마와 아빠.

카라마츠가 꿀꺽, 긴장한 얼굴로 나직이 침을 삼키는 것이 보인다.

이치마츠도, 쥬시마츠도, 토도마츠도 침묵.

쵸로마츠가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면서.” 하고 대답했다.

뭐야, 너도 목소리 엄청 가라앉았다구~.

 

“…, 축하해…. 근데, 근데 말이야….”

오소마츠, ?”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지금 이런 이야기 해도 될까?

말하면 이 분위기를 완전히 깨버리는 걸 알고 있지만….

하지만, -

말하고 싶어.

꿈에서라도, .

말하고 싶었던 말을.

진심을

 

근데, 싫어-. 너네가 모두 나가버리면…!! -, 외톨이가 되어버리는 거, 싫어!!”

—, 울어버렸다.

참았는데, 눈물이 한 방울 뚝, 손등에 닿은 순간 눈물이 멈추지 않게 되어버렸어.

엉망으로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고, 코를 훌쩍이면서, 터져 나온 흐느낌을 삼키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계속 같이 있었다구.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너희가 옆에 없는 거, 상상조차 한 적 없는데-.

계속 이대로 쭉—— 같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

의심조차 하지 않았어.

그래서, 너희가 가버리는 게 싫어.

혼자 남겨지는 거 싫어.

너희가 없는 방에서 밥을 먹고, 너희가 없는 이불에서 자는 거 싫어.

그래도, 너희는 변하려고 했으니까.

그걸 막을 수 없어서, 슬퍼.

으로서 제대로 멋있게 보내줄 수 없었던 게, 분해. 짜증나.

혼자 남겨지는 건, 무서워.

역시 너희랑 같이 있는 게 좋아.

근데 이제 그럴 수 없잖아.

쵸로마츠, 가버리잖아.

그래서, 슬퍼.

울고 싶어.

막고 싶은데, 취직 따위 하지 말라고-.

안 되잖아, 그러면.

그래서 견딜 수 없이 슬퍼.

싫어.

——, 젠장.

 

 

바보처럼 머릿속에 떠오른 말들을 전부 울음에 섞어 내보내고, 벌개진 눈을 들어서 쵸로마츠를 봤다.

무슨 얼굴인지 모르겠어, 쵸로마츠.

슬픈 건지, 화난 건지, 황당한 건지.

이젠 네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어.

, 하고 숨을 삼키고 소매로 눈을 벅벅 문지르자, “, 바보!” 하고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누군가의 손에 소매를 끌어내려져서, 코를 들이마시자 쵸로마츠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쵸로마츠…?”

, 이 바보가!!”

크게 외치는 목소리는 화난 것 같은데,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처럼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

쵸로마츠 뿐만 아니라 카라마츠도, 이치마츠, 쥬시마츠, 토도마츠도 똑같은 얼굴.

우리, 육둥이구나-.

같은 얼굴이 되어버렸어.

왠지 웃겨서 킥-, 웃음이 나왔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쵸로마츠가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자주 올 테니까!! 주말마다 올게! 연락도 매일 할게!! 오소마츠 형도 시간 나면 놀러 와도 괜찮으니까!!”

“….”

쵸로마츠도, 울고 있다.

나보다 더 커다란 눈물이 뚝뚝.

카라마츠는 웬일로 울음을 참고 선글라스를 걸친다.

아니, 너 다 들켰으니까.

이치마츠도 슬쩍 코를 훌쩍이고, 쥬시마츠는 미친듯이 웃고 있다.

근데 쥬시마츠…, 눈은 울고 있는데 그렇게 웃으면 말야—.

평범하게 무서워.

톳티-도 스마트폰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인다.

스마트폰으로 얼굴 가려질 정도로 네 얼굴 작지 않아-, 톳티-.

엄마랑 아빠는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흐뭇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다.

내가 자초한 거지만, 뭐야 이 분위기.

겁나 적응 안 되는데요.

쵸로마츠….”

지금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얀마!”

아빠 체면상 무리니까. 그러니까, 엄청 자주 들를게. 적응되면 이직 신청할게. 집에서 다닐게.”

오소마츠, 이 카라마츠는 집에서 나갈 생각따위 없다! 안심해라, 브라더-.”

나 같은 쓰레기 세상에 나가면 즉사니까….”

응응!! 친가 거주 최고-!!”

알바는 여기서도 할 수 있구.”

뭔가 엄청 나를 위해주는데.

고맙지만, 너네 그 반짝이는 얼굴 엄청 웃겨-.

후핫-, 하고 새어 나온 웃음에 녀석들의 얼굴이 안도한 것처럼 늘어졌다.

쥬시마츠가 헐렁한 소매로 내 눈가를 닦아준다.

카라마츠가 내민 티슈로 코를 흥- 풀고, 티슈는 카라마츠 손에 돌려주었다.

이치마츠는 터벅터벅 내 옆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톳티는바보네-, 정말~.” 하고 작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 이렇게 말하면 됐었구나.

참지 말고.

제대로 말하면 됐었어.

, 알겠어.

이 카리스마 레전드 횽아 이해했다구.

다음에, 이날이 오면.

그땐 횽아 잘 해낼 자신 있으니까.

 

 

 

제대로 횽아 달래줘.

-, 같이 있어줘.

* 5화입니다!

 이제 슬슬 오소마츠와 카라마츠 사이가 진전되고 있네요ㅎㅎ


* 중간에 조금 잔인한 표현이 나옵니다.


* 푸른 왕국은 동양(일본), 붉은 왕국은 서양(프랑스?)로 설정한 나라입니다.


* 공미포 14,379자.  오탈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귀족들과 관료들 전원이 모인 커다란 홀

귀족과 관료들의 의견을 모아 왕과 함께 회의하는 어전회의

왕의 부름에 어전회의에 참석한 오소마츠가 말없이 왕의 옆에 섰다

엄숙한 분위기와 함께 그 위엄을 한껏 내뿜으며 왕좌에 앉은 레온 3세는 날카롭고 또렷한 눈으로 귀족과 관료들을 내려다보았다

왕의 무거운 침묵에 홀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마른침을 삼켰을 무렵, 굳게 닫혀있던 왕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경들을 모이게 한 것은 오늘 왕세자를 알리기 위함이오.”

왕의 말에 귀족들은 아연실색하고 관료들은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모두가설마하는 얼굴로 왕을 올려다보았고, 오소마츠 역시 사전에 듣지 못한 왕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수근거리며 동요하는 귀족들을 향해 소리없는 비웃음을 날린 왕이 말을 이었다.


왕세자는, 에드윈 왕자를 세우지.”

충격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왕의 말에 모두가 숨을 들어삼켰다

대대로 붉은 왕국의 왕좌에는 제 1왕비에서 난 왕자가 앉았다

1왕비와 제 2왕비 간에 신분의 높낮이는 없다해도 일반적으로 제 1왕비의 가문이 더 신분이 높았으며, 1왕비가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나 연례를 맡았다

지금의 제 1왕비 그레이스 또한 왕비로서 나가야 할 일에 활발히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1왕비가 아닌 제 2왕비의 왕자, 게다가 푸른 왕국의 피가 섞인 혼혈

지금까지의 선례를 완전히 깨부수는 파격적인 왕세자 책봉에 귀족들은 물론 관료들도 놀라 감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 폐하! 한 번 더 고려하여 주시옵소서! , 쥬드 공작이 감히 청하옵니다.”

“…뭐지?”

귀족들의 침묵을 깨고 나선 쥬드 공작이 앞으로 나오며 힐끗 오소마츠를 차갑게 응시했다.


나도 싫거든…?’

1왕비 그레이스의 아버지 쥬드 공작에게 있어서 오소마츠가 왕세자가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터

일순간이었지만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쥬드 공작에게 가벼게 콧웃음을 내친 오소마츠가 시선을 돌렸다.


휴전이라곤 하나 왕국은 아직 전쟁 중에 있습니다. 전장은 물론 왕국 곳곳이 미처 안정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왕세자를 결정하는 것은 이르다 생각합니다. 또한 제 1왕비의 왕자들이 어리니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심이 어떠신지요.”

전쟁 중이니 그만큼 빨리 왕세자를 결정하는 것이 옳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또한 왕국의 곳곳이 불안한 바로 지금! 빨리 왕세자를 정해 교육을 마치고 왕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다른 왕자들은 어리고 지혜롭지 않으나, 에드윈 왕자는 이미 성인의 나이가 되었을 뿐아니라 전장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렇기에 짐은 에드윈 왕자가 왕세자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쥬드 공작, 짐의 말이 틀린가?”

, 그것이….”

허면 짐의 판단이 못 미덥다는 것인가?

, 그럴 리 있겠습니까! 폐하의 현안에 그저 감탄했을 뿐입니다!”

왕의 싸늘한 음성과 날카롭게 꽂히는 눈빛에 쥬드 공작은 곧장 꼬리를 내렸다

영웅왕 시절부터 이어진 절대 왕권. 그 정점에 서 있는 레온 3세의 말을 거역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귀족들의 리더이자 제 1왕비의 아버지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쥬드 공작일지라도 왕의 말에 공개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었다

알아서 물러나는 쥬드 공작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피운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펼쳐, 커다란 홀이 울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에드윈 왕자를 왕세자로 임명하겠다!”

-, 폐하!”

왕의 명령에 귀족과 관료가 일제히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왕좌 뒤에 있는 커다란 햇빛이 마치 후광처럼 왕과 오소마츠를 비추고 있었다.

밝은 빛에 비친 귀족들과 관료들을 보며 오소마츠는 원치 않는왕세자라는 직명에 작게 혀를 찼다.

 

 

 

 

 

2.

 

오소마츠가 왕세자가 된 이후로 별궁에서 오소마츠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기사들과의 훈련도 주 1회로 줄어들었고, 매일 별궁과 본궁을 오가며 온갖 교육과 일을 떠맡은 오소마츠는 별궁에 올 때마다 굉장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세자라는 것이 그만큼 무거운 직책이라는 것을, 오소마츠를 보며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침실에서도 책상에 올려진 많은 서류들은 지방 영주의 보고서나 혹은 국민들이 올린 항소문들이 태반. 머리를 싸매고 서류를 하나씩 해결해가는 오소마츠의 눈밑에는 짙은 그늘이 떠날 날이 없었다

남은 서류를 모두 처리하거나 본궁에서 늦은 시간까지 교육을 받고 오는 오소마츠는 내가 잠든 뒤에나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오소마츠를 기다리다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면 한밤중 침대가 흔들리는 감각에 깊은 잠에서 빠져나왔다

얕은 잠에서 유영하며 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온몸의 감각의 옆자리에 집중했다

침대가 출렁이며 끼익-, 하고 매트리스를 지지하고 있는 나무가 비명을 지른다

사각사각, 뻗뻗하고 두꺼운 이불이 들리는 소리와 함께 곧 지친 오소마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살며시 눈을 뜨고 오소마츠에게서 등 돌리고 있던 몸을 똑바로 돌렸다.


“…고생했다. 오소마츠.”

-, 고마워. 잘 자.”

잘 자, 오소마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돌아온 오소마츠에게 짧은 위로 한마디를 던지는 것 뿐

지쳤을텐데도 오소마츠는 내 인삿말에 항상 미소로 답해주었다

이불에 지친 몸을 파묻고 금새 잠든 오소마츠를 보며 적잖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려간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주고 다시 꿈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내 일상이 되었다.

 

 

몇 날이 지나도 오소마츠는 여전히 바빴다

하루에 딱 두 번, 잠 잘 때와 일어날 때를 제외하면 오소마츠를 별궁에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기사들과의 훈련도 임시 중단.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도 오소마츠를 도와 별궁과 본궁을 오가느라 바빠진 것은 마찬가지였고, 별궁엔 하루의 대부분 우리들만 있게 되었다.


카라마츠 형. 좋은 아침.”

나를 흔들어 깨우는 토도마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저절로 눈이 향한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하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왕자?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일이 있다고 먼저 나갔어.”

, 런가….”

아침, 잘 잤냐는 인사를 해주지 못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옆자리에 손을 뻗어도 차가운 아침 공기에 닿은 이불은 체온 하나 없이 식어있었다

어젯밤은 유난히 추워서 이불 속에서도 몸을 떨었던 기억이 있다

잘게 떠는 내게 오소마츠가 이불을 하나 더 덮어주고 가까이 붙어 체온을 나누어 주었던 것을 잠결에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오늘 아침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하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망연히 빈자리를 보고 있다가 나를 응시하는 토도마츠의 눈길에 고개를 돌렸다.


“…토도마츠.”

? 뭐야?”

우린, …이대로 괜찮은 건가…?

“….”

이렇게 모든 것을 숨기고 있어도 돼는 건가…?”

카라마츠 형.”

오소마츠가 왕이 된다면, …나는, 우리는…?”

카라마츠 형, 아직 왕자가 왕이 된 건 아니잖아.”

하지만 오소마츠는 왕세자가 되었다. 오소마츠는 왕이 되는 거야….”

불안함에, 두려움에, 형인데도 불구하고 한심하게 매달리는 듯이 토도마츠를 응시했다


왕이, 왕이 되는 것이다

오소마츠는…. 

한 나라의 왕이

대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붉은 왕국의 왕

귀족들과 국민들에게 절대 권력으로서 군림하는 절대 군주


새삼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동생들까지 끌고 온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지 깨달았다

모래 위에 세워진 다리처럼 강한 파도가 한 번 휩쓸고 가면 무너져버릴 우리의 처지가, 코앞에 사신이 낫을 들고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나 하나 뿐이라면 괜찮겠지만, 내겐 토도마츠와 쥬시마츠가 있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되는 건가

시미치 뚝 떼고 지금처럼만

그러다 만약, 만약 오소마츠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물론이고 토도마츠와 쥬시마츠까지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만이라도 푸른 왕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토도마츠.”

카라마츠 형. 우리는 카라마츠 형 옆에서 안 떠날 꺼니까.”

하지만!”

진정해. 아직, 왕자가 왕이 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같이 생각해보자. 어떻게 할지.”

“…….”

설마 왕자가 그렇게 모질게 굴겠어? 같이 살았던 사람들인데 말이야.”

“…, 럴지도 모르지만….”

, -. 일단 일어나자. 언제까지 침대 속에 있을 거야? 빨리 씻고 옷 갈아입어. 오늘 제 2왕비님이 들린다고 하셨으니까.”

, 아아-….”

토도마츠의 재촉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쥬시마츠가 준비된 드레스를 가지고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불안한 마음은 여전히 소용돌이치고, 금방이라도 진실을 고백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렸다


숨길 수 밖에 없다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에 오소마츠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내게 실망하게 된다면…. 


항상 내게 보여주었던 장난스러운 표정, 상냥한 얼굴이 아닌, 사람을 지독히도 경멸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제대로 호흡할 수 있을까…. 

나를 증오하게 된 오소마츠에게 토도마츠와 쥬시마츠 만큼은 용서해달라는 내 말이 닿을 수 있을까…. 


끔찍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는 파도처럼 나를 수없이 덮쳤다.

 

 

 

 

 

3.

 

처리하고 처리해도 도저히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서류의 산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먼저 끝낸 서류 더미를 들고 방을 나간 쵸로마츠가 돌아오기까지 앞으로 10.

이 서류들을 끝내고 나면 바로 제왕학과 역사학 수업이 시작된다

끝없이 몰아치는 수업과 서류들, 어전회의에는 반드시 참석해야하고, 앞으로 왕실에 있을 행사들도 내가 맡아야 한다

바라지도 않았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직책과 일에 스트레스가 쌓인다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계의 분침이 틱-, 소리를 내며 앞으로 한 칸 전진했다.


좋아-. 도망치자.

수업? 서류? 알게 뭐야. 원하지 않았다구.

쵸로마츠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바로 찬스!


발소리를 죽이고 본성을 나오자마자 냅다 달려 별궁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분명 들킬테니까 주방과 통한 쪽문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1층 구석에 있는 창고로 기어 들어갔다

아주 작은 창문 하나로 들어오는 햇빛에 어렴풋이 물건의 실루엣이 보였다

잔뜩 쌓여있는 상자들 사이로 기어 들어가 쭈그려 앉았다

적당히 어둡고 아무도 없는 이 공간은 묘하게 안정감을 준다

계속 목을 조르고 있던 넥타이를 벗어던진 듯한 해방감에 겨우 편히 숨을 내쉬고 멍청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이나 옷, 일기 같은 것들이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곳에 놓인 목검을 집어 들었다

어릴 적 유모가 들려준 영웅왕 전설에 푹 빠진 내가 직접 만들어 한동안 휘두르고 다녔던 것이다


수많은 기사들과 보병들을 이끌고 넓은 영토를 정복해 붉은 왕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영웅왕

어린 내게 영웅왕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고, 나도 영웅왕처럼 되고 싶다는 헛된 꿈을 꾸게 만들었다

영웅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택도 없는 바람이었지만…. 

내게 그런 자격도 없고, 생각도 없다. 영웅왕처럼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겠다는 야욕도, 애국심도 없다

그냥 이대로왕자로서 살다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나는왕세자따위가 되어 버렸는지…. 

완전히 세상의 무서움을 알아버린 지금과 달리 이 목검을 가지고 놀았던 그 시절엔 나름 순수했었는데…. 

그리움에 잠겨 목검은 손으로 쓸어 올렸다.


“…?”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목검에는 먼지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내가 다칠 것을 걱정해 엄마가 다듬어 준 그 모양 그대로

손에 걸리는 먼지조차 없다

내심 놀라 다시 한 번 목검을 매만져도 먼지는 없다

혹시, 하고 주변에 쌓인 상자나 장난감들을 만져보아도 먼지는 없었다

바닥도 티끌 하나 쌓이지 않은 채 깔끔하다

시녀들도 이 창고까지 청소를 하진 않는다

애초에 시녀들이 눈에 띄지 않게 하도록 말했기 때문에 이 별궁에서 시녀들이나 하인들의 손이 닿는 곳은 많지 않다

대체 누가 이 창고까지 이렇게 꼼꼼하게 청소한 것일까…, 자문하자 떠오른 얼굴은 단 하나였다.


어이! 망할 장남! 어디 갔어, 이 자식!!”

문 너머에서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순 숨을 삼키고 창고 깊숙이 몸을 숨겼다

창고 앞에서 멈춘 발소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저 멀리로 사라졌다

아무리 나라도 먼지가 가득할 창고에는 숨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안, 쵸로마츠. 창고에 숨었어. 먼지는 없지만…. 

앞으로도 한동안 나를 열심히 찾아다닐 쵸로마츠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상자들 사이에서 기어나와 조심히 창고문을 열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복도로 나와 끼이익-, 하고 삐걱거리는 창고문을 닫았다.


어머, 여기 있었니?”

-!!”

후후후, 쵸로마츠가 계속 찾았단다.”

, 엄마….”

문을 닫자마자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라 엉성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놀란 나를 보고 즐겁게 웃은 엄마가 내 뒤에 있는 창고를 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피웠다.


창고, 깨끗하지?”

…? , 응.

매일매일 카라 공주랑 토도마츠랑 쥬시마츠가 열심히 청소하고 있어서 그래.”

….”

그 아이들에게 꼭 고맙다고 인사하렴.”

.”

그리고 도망치는 것도 적당히 하고.”

아하하하….”

손가락을 세워 살포시 인상을 쓰고 말하는 엄마에게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 하고 웃은 엄마는 한차례 내 머리를 쓰다듬곤 별궁을 떠났다

쵸로마츠를 부르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슬쩍 창고를 다시 살폈다

역시 먼지 하나 없다

매일 청소라…. 

창고뿐 아니라 바닥도 번쩍번쩍 광이 나고 있고, 복도에 전시된 도자기도 먼지 없이 깔끔하다

지금보다 시녀들이 더 많이 있을 때도 이렇게까지 깨끗했던 적은 없었는데…. 

대리석 바닥은 왁스라도 발랐는지 매끄럽고, 카펫은 빨았는지 화려한 무늬와 색이 선명하다

그동안 전장에 있었던데다가 왕세자가 되고 별궁에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이렇게 완벽하게 별궁을 관리해준 것인가…. 

조용히 감탄하고 있을 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 오소마츠? 지금은 본궁에 있을 시간 아닌가?”

짙은 푸른색의 드레스를 살짝 들어올리고 계단을 내려온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 근래 낮엔 항상 별궁에 없었으니까, 내가 이 시간에 있는 것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적당히 얼버무리며 별일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또 하나의 발소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탁탁탁 빠른 속도로 울리는 게 딱 쵸로마츠다. 틀키면 적어도 1시간은 잔소리를 퍼부울 게 분명했다.


이쪽으로!”

, !?”

나도 모르게 공주 손을 잡고 서둘러 별궁을 나왔다

주방 쪽문을 통과해 성문 밖에 있는 커다란 산 아래로 향했다

뛰는 도중에 구두를 신은 공주가 휘청거리며 넘어지려고 해, 중간 부터는 내가 안아서 옮기는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 , ….”

, 미안하다!! 괜찮나!?”

, 대체 몸무게 얼마나 되는 거야…. 다 근육이지, 이거!? 이 고릴라 공주!”

갑자기 안고 뛴 건 오소마츠다!!”

너가 넘어지려고 하니까 그렇지!”

애초에 왜 이렇게 뛴 건가!!”

그야…!”

? 잠깐

나 왜 이 녀석 데리고 나온 거야

신묘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녀석에게 적당히그냥?” 하고 대답하고 산등성이를 따라 올랐다

뒤에서 타박타박 울리는 발소리로 녀석도 뒤따라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에서 조금 올라오면 있는 작은 평지

무성한 숲 앞으로 풀이 솟아난 좁은 평지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뒤따라 올라오는 녀석들 기다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구두 신고 있다구!”

, 그랬지.”

눈썹을 팍 찌푸리고 항의하는 녀석을 뒤로하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렀다

곧이어 숲 속에서 녀석들이 나왔다

순록, 토끼, 여우, 비버랑 다람쥐에 회색늑대와 올빼미

오랜만에 올라와 녀석들도 반가운지 내게 뛰어와 얼굴을 비벼댄다.

나도 적당히 녀석들을 쓰다듬어 주고, 어깨에 앉은 올빼미 녀석도 어루만져주자 내 곁으로 다가온 공주가 놀란 얼굴을 했다.


, 동물들은…?”

-, 내 애완동물…, 비슷한 거?”

비슷한 거?”

내가 따로 밥을 챙겨주진 않지만, 가끔 이렇게 상태 보러 오거든.”

, 헤에-….”

녀석들은 공주가 신기한지 금새 공주를 둘러싸고 킁킁 거리기 시작했다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공주도 움찔대긴 해도 가만히 녀석들이 냄새를 맡도록 기다렸다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순록을 보며 조심조심 손을 뻗어 긴 목을 어루만진 공주의 얼굴이 단숨에 활짝 밝아졌다

녀석들에게 맞춰 몸을 낮춘 공주의 무릎에 토끼가 올라가고 여우와 늑대도 공주의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냄새를 맡고 손에 얼굴을 비벼대며 꼬리를 흔드는 녀석들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훗-, 하고 웃는 공주의 옆에 앉았다.


“…이 녀석들도 잘 부탁해.”

?”

별궁, 엄청 잘 관리해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 녀석들도, 내가 바빠서 올라오지 못할 때 가끔 상태보러 와 줘.”

아아, 알겠다.”

땡큐.”

….”

말을 흐리며 슬쩍 내 눈을 피해 시선을 돌린 공주가 무릎에 앉은 토끼를 쓰다듬었다

내 옆에 앉은 올빼미와 순록을 쓰다듬으며 갑갑했던 숨을 돌렸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별궁으로 도착하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쵸로마츠에게 귀를 잡혔다.


, 잠깐잠깐잠깐! 아팟!! 쵸로링~!!”

누가 쵸로링이냐!! 수업도 땡땡이 치고, 여태 어디 있다 기어나왔어!!”

잠깐 산책한 것 뿐이라구~! 뒷산에 갔다 왔어~.”

뒷산…?”

….”

내 대답에 놀란 쵸로마츠의 손에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귀를 빼냈다

얼얼한 귀를 문지르고 있자 쵸로마츠가 공주에게 눈짓하며 물었다.


카라 공주랑 같이?”

….”

…?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묻는 쵸로마츠가 공주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쵸로마츠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쵸로마츠를 질질 끌고-, 그럼 땡땡이 친 보충하러 가자~.” 하며 본궁으로 향했다

공주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했다.

 

 

 

 

 

4.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고 하얀 눈이 폭풍과 함께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에 휘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 거실 소파에 기대 앉자마자에췻!” 하고 전형적인 기침 소리가 거실 안에 울렸다.


그렇게 추워?”

와들와들 떨며 담요를 두르고 벽난로에 딱 달라붙어 있는 공주와 토도마츠, 쥬시마츠에게 물었다

쵸로마츠가 타준 따뜻한 차를 손에 쥐고 후륵 마시면서도 달달 떨리는 몸을 멈출 수 없는 것 같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나랑 쵸로마츠, 이치마츠는 멀쩡한데 말이지….


푸른 왕국은 남쪽 지방에 있다구요! 거긴 겨울이 이렇게까지 춥지 않습니다! 왕자님!!”

공주와 함께 담요를 돌돌 말고 있는 토도마츠가 찌릿-,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 확실히 붉은 왕국의 겨울이 춥긴 하지만 말이지…. 

우린 그렇게 춥지 않은데 말이야

벽난로에 몸을 녹이며 코를 훌쩍이는 공주를 보며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거기갈까?”

…, 그거 좋네.”

작게 중얼거린 내 말에 쵸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한 10일 정도는 더 추울 예정이다

매섭고 혹독한 붉은 왕국의 겨울을, 벌써부터 이 모양이면 제대로 견딜 수 없겠지

이치마츠도 눈을 빛내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이네.”

앞으로 일주일 정도는 너무 추워서 왕세자 교육도, 일도 동결될테니까

이 틈을 타서 다녀오지 않으면 영영 시간 없고 말이지

내 말에 수긍하는 쵸로마츠에게 여행 준비를 부탁하고, 본궁으로 가기 전 붉은 코트를 걸쳤다.

 

 

 

본궁에 있는 엄마에게그곳에 가지 않겠냐는 말을 꺼내자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머? 웬일로 네가 거기 가자는 말을 하니?”

공주 일행이 꽤 추운 것 같아서요.”

어머나-, 그렇겠구나…. 푸른 왕국은 이렇게 춥지 않으니까. 나도 처음에 왔을 때는 고생했어~. 후후,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그래, 다녀오렴. 어미는 안 가도 괜찮으니까.”

-.”

, 오소마츠?”

꾸벅 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는 나를 엄마가 불러 세웠다

뒤돌자 엄마가 방긋- 웃으며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제대로 폐하께도 인사드리고 다녀오렴~.”

“….”

 

 

솔직히 일 외엔 왕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왕세자가 된 이상은 자신의 일거일동을 왕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래도 이번엔 가는 곳이그곳인만큼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한테 보고하면 끝나는 문제이고.


하아~.”

한숨을 푹- 내쉬고 왕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하고 문 너머에서 울리는 중후한 음색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별일이구나. 네가 나를 찾다니. 무슨 일이지?”

잠시글리아지방에 다녀올까 합니다.”

-? 트루디는 그런 말 없었다만.”

왕은 서류에 싸인을 하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나를 응시했다

트루디라고 엄마를 지칭한 왕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글리아지방은 붉은 왕국의 겨울을 힘겨워하던 어머니를 위해 왕이 특별히 개발한 지방

왕국의 서남쪽에 위치해 다양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온천수가 나오는 지방이었다.


오늘 막 결정된 일이고, 어머니는 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트루디가 가지 않는데, 왜 가려고 하는게냐.”

푸른 왕국의 공주에게 앞으로 더 추워질 겨울은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요.”

아아-, 그렇군. 공주가…. 좋다. 그 동안 수업과 처리해야 할 일은 보류해주지.”

감사합니다.”

-, 에드윈.”

.”

네가 글리아에 다녀온 후에 있을 연례 행사는 잊지 않았겠지.”

“….”

그래, 알겠다.”

그럼.”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잊지는 않았지만, 잊고 싶었던 그 행사에 이제 나도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짜증난다

-, 하고 혀를 차고 거칠게 목을 옥죄고 있는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래도 일단 일주일 정도는 자유인가…. 

그 후에 있을 행사와 쏟아질 일들은 잠시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마음 편히 쉬다 오자, 스스로 다짐하며 본성을 나왔다.

 

 

 

내일 출발하니까.”

…? 휴양…?”

잠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 앉아 내일 휴양지로 출발한다는 말에 공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 앞으로 더 추워질 거고.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면 앞으로 이어질 겨울은 더 힘들 거 아냐. 그러니까 휴양.”

, 헤에….”

서남쪽에 있는 지방인데, 온천이 있어.”

온천!”

단번에 눈을 빛낸 공주가 잔웃음을 흘렸다.


원래 붉은 왕국엔 사우나가 전부인데, 엄마가 오면서 개발한 곳이야. 나도 온천은 오랜만이네.”

그런가. 나도, 온천은 푸른 왕국에 있을 때조차 자주 가보지 못했다.”

그래. 그럼 빨리 자두는 게 어때? 내일 일찍 출발할거야.”

-! 알겠다!!”

거세게 고개를 끄덕인 공주가 침대가 출렁거릴 정도로 재빨리 이불 속에 몸을 묻었다

기대로 빛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잘 자, 오소마츠.” 하고 인삿말을 끝내자마자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든 공주의 모습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5.

 

수도 레드버로우에서 남서쪽으로 꼬박 이틀을 달려 도착한글리아지방

온천으로 유명해 수도나 다른 지방의 귀족들도 종종 찾는 대표적인 휴양지이다

마차에서 내린 카라마츠는 눈앞에 펼쳐진 그리운 광경에 놀라 미소가 넘실대는 얼굴로 좌우를 살폈다.

마츠요를 위해 개발된 글리아 지방은 전체적으로 푸른 왕국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건축 양식부터 사람들의 복장까지 거의 모두가 푸른 왕국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글리아 지방의 모습은 붉은 왕국의 추위를 힘겨워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츠요를 위한 왕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푸른 왕국과 닮은 풍경에 카라마츠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린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도 눈을 커다랗게 뜨고 감탄사를 흘렸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에 카라마츠는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소마츠의 뒤를 따라 숙소에 도착해서도 카라마츠와 토도마츠, 쥬시마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밖에서 보이는 모양 뿐만 아니라 속소 안도 역시 푸른 왕국과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 오소마츠 일행을 방으로 안내한 종업원이 떠나자마자 오소마츠가 커다란 가방에서 정장 한 벌을 꺼냈다.


.”

?”

당연하다는 듯이 카라마츠에게 내민 정장에 눈을 고정하자, 오소마츠가 옷을 흔들어 재촉했다.


뭐해? 갈아입어. 여기선 굳이 드레스 입을 필요 없고. 계속 그렇게 입고 있으면 불편하잖아.”

. 아아….”

여기선 괜찮아. 모처럼 왔으니까, 몸도 마음도 편히 있다 가야지 손해 안 보지!”

오소마츠의 설명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띄우고고맙다….” 하고 인사한 카라마츠가 오소마츠가 건넨 정장을 받아들었다

마츠요에게 선물받은 정장과 달리 디자인보다는 보온에 신경을 쓴 옷 같았다

그럼 갈아입고 오겠다.” 하고 말하곤 방을 떠난 카라마츠를 기다리며 오소마츠가 제 옆에 서 있던 토도마츠가 불렀다.


저기 말야-.”

?”

오소마츠의 부름에 토도마츠가 고개를 들었다

갸웃거리는 토도마츠에게 오소마츠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뭐 부족한 거나 불편한 거 있어?”

“…왕자님 덕분에 딱히 없습니다.”

그런 빈말하지 말고 말야. 정말로 없어?”

오소마츠의 질문에 토도마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오소마츠의 얼굴엔 일말의 가식도 묻어있지 않았다

토도마츠는 눈을 굴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생각하다 결국 한숨과 함께 솔직한 대답을 내뱉었다.


현재로선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나중에라도 뭐가 있으면 말해줘. 그리고 또,”

“…?”

별궁, 관리 고마워.”

, , 아뇨….”

솔직하게고맙다는 발언과 함께 눈을 가늘게 뜨고 부드러운 미소를 피운 오소마츠를 보며 토도마츠가 적잖이 놀라 말을 더듬었다

푸른 왕국에서도 붉은 왕국에서도 귀족이나 왕족이라는 치들은 콧대가 높고 쓸데없이 자만심이 높은 인종이 태반이었다

잘못이 있다고 해도 남에게 돌리기 일쑤였으며 시종에게 고마움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런 뻔뻔한 녀석들이라고, 토도마츠는 내심 생각해왔다

그것이 편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오소마츠와 쵸로마츠, 이치마츠 또한 그런 일면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소마츠는 너무나 솔직하게 토도마츠에게고맙다는 인사를 던졌다

앞으로 일국의 왕이 될 왕세자가, 가직도 빈말도 아닌 진실된 감사를 건네온 것에 토도마츠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정말 왕족 같지 않아….’

종종 느꼈지만, 오소마츠는왕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왕족이 가지는 위엄은 일체 보이지 않는 그런 왕자였다

겨우 일개 시종에 불과한 토도마츠에게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토도마츠는 솔직한 오소마츠의 태도에 무례한 것을 알면서도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 저희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나요?”

? 뭐가?”

, ….”

“…이게 보통 아냐? 엄마, 가 아니라 어머니가 남의 호의엔 꼭 보답하라고 하셨고.”

마마보이냐!’

토도마츠는 오소마츠의 말에 저도 모르게 속으로 태클을 걸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오소마츠는 배시시-, 어색한 미소를 보내곤 코 밑을 검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난 카라 공주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친구의 편의를 봐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오소마츠의 말에 토도마츠는 잠시 얼이 빠졌다. 그리고 곧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 이 사람은….’

오소마츠의 미소에 토도마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토도마츠가 보아왔던 자들은 대체 어땠나

모두 귀족이다 평민이다 신분으로 사람을 나누고, 그 자의 심연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보고 있는 자가 치를 떨 정도로 편협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넘쳐났던 푸른 왕국

토도마츠는 어쩌면 붉은 왕국이 푸른 왕국보다 강국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와 함께 자신들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여겨주고 있었다.

카라마츠를 너무나 당연하게친구라 부르고, 토도마츠와 쥬시마츠의 것도 제대로 봐주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끓어오르듯 치솟는 뜨거운 숨을 후-, 내쉬며 마음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 하나를 깨뜨린 토도마츠가 눈을 들어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빙그레-, 온화한 미소를 피우고, 한 사람의 인간인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6.

 

서남쪽에 있다는글리아지방은 확실히 수도보다는 추위가 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쪽 출신인 우리가 견디기엔 매서운 추위인 것은 매한가지였고, 토도마츠와 쥬시마츠와 함께 여러 효능이 있다는 다양한 온천을 일주하기에 바빴다

차가운 공기를 위에 두고 따끈한 온천에 몸을 푹 담그면 그동안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까지 저 멀리 날아가는 것 같았다

별궁에 있으면서 줄곧 내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던 고민들도 온천수에 녹아 흐물흐물해져서 완전히 사라질 것 처럼 느껴졌다

다양한 온천과 더불어 길가에 세워진 노점들은 푸른 왕국의 음식을 팔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즐길 수 있는 놀거리도 모두 푸른 왕국에서 넘어온 것들

그리운 것들에 들뜬 기분은 온천에 들어가도 가라앉지 않았고, 오소마츠가 건네준 돈으로 토도마츠와 쥬시마츠가 먹고 싶어하는 것들을 잔뜩 사주었다.

신나게 돌아다닌 우리와 달리 오소마츠는 수도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잔업이 남아있다며 방에 남았고, 잔업을 다 마친 후에도 이상하게 매번 우리와 엇갈리고 말았다

오소마츠도 나름 온천을 즐기는 것 같았지만, 온천에서 오소마츠나 쵸로마츠, 이치마츠와 마주치진 못했다.

 


온유로 풀어진 몸을 끌고 숙소에 도착해-.” 하고 편안해진 숨을 내뱉었다

토도마츠와 쥬시마츠는 푸른 왕국에 있을 때도 겪어보지 못한 온천에 완전히 신이 나서 좀 더 온천을 즐기고 오겠다며 뛰쳐나갔고, 숙소에 돌아온 것은 나 혼자

프릴과 리본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 벗고 편안한 남성용 정장을 입어 가벼워진 몸에 경계심과 긴장도 함께 느슨해졌다

겨울에 들어서 짧아진 해가 서쪽으로 얼굴을 숨기고 녹녹한 어둠이 고즈넉이 내려앉은 방 안에 들어가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침대에서 울려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로 다가가자 이불에 파묻힌 오소마츠가 색색 잠들어 있었다

방에 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아무도 없을 것이로 생각했는데 오소마츠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것에 내심 놀라며, 오소마츠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조심 침대에서 떨어져 창가로 발을 옮겼다.

 

조용한 침묵이 드리운 방 안에 오소마츠의 숨소리가 퍼졌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숨소리에 조금 안도했다


오소마츠는, 요 근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처음 전장의 소음이 들리지 않아 깊이 잘 수 없다고 고백했던 그날밤 이후로도, 오소마츠는 악몽으로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내가 곁에서 자도, 사람의 체온이 있어도 오소마츠는 쉽게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도 혼자 잘 때보다는 기분 좋게 잘 수 있었다고, 악몽도 덜 꾼다고 말했었지만, 계속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요 며칠 계속 이어진 것을 나도, 쵸로마츠도, 그리고 이치마츠도 알고 있다

아침에 종종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잠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였고, 눈밑에 깔린 검은 기미에 쵸로마츠도 걱정하는 눈치였다

왕세자가 되어서 할 일이 많아져 스트레스가 부쩍 늘어난 탓인지 최근에 악몽을 꾸는 횟수도 증가했다

지금 여기에서만큼은 편히 푹 잘 수 있기를 바라며 오소마츠의 방해가 되지 않게 방을 떠나야하나 고민했다

지금 여기서 섯불리 움직였다가 또 소리를 내서 오소마츠가 깨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계속 이 방에 있는 것보다는 빨리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 혼자 고심하고 있을 때, 밤하늘에 높이 떠다니던 구름이 해를 따라 떠나고 환한 달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커다란 보름달과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

너무나 아름다운 밤하늘에 오소마츠에 대한 것도 잊어버리고 고향에서 배웠던 민요를 흥얼거렸다

오래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잠자리에서 불러주셨던 자장가

푸른 왕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리운 민요(자장가), 가사 한 마디, 단어 하나를 음미하며 천천히 작게 달빛에 맞춰 속삭였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자상한 목소리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닿아 단번에 노래를 멈추고 숨을 집어삼켰다.

 

 

 

 

 

7.

 

참수된 시체, 화살을 맞은 말의 울음소리

피눈물을 흘리며, 목에서 뿜어내는 피를 뒤집어쓴 적군의 시체들이 서서히 다가온다

기괴하게 꺾인 발을 질질 끌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서슬퍼런 칼을 들고 나를 둘러싸고 외친다.


죽어, 죽어, 죽어!!”


부패해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와 끈적거리는 타액과 피, 핏기 없는 검은 피부의 시체들이 내 팔을 움켜쥐고 뜯어낼 것처럼 강하게 당긴다

칼도, 갑옷도 없는 나는 속수무책으로 시체들의 손에 이리저리 놀리며 손가락이 끊어지고, 팔이 부러지고, 다리는 으스러져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그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듣고 달려와줄 이는 없다

아파서, 두려워서, 비명을 지르다가 문득-, 온몸을 어루만져주는 은은한 노랫소리에 눈을 떴다.


-.”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소매로 닦으며 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핥았다

참을 수 없이 갈증이 일었지만, 물 먹은 스펀지처럼 푹 젖은 몸은 팔 하나 움직일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또 악몽인가…. 

한심한 자신에게 자조하며 눈을 꿈뻑이다가, 악몽에서 나를 구한 노랫소리가 들려 창가로 눈을 돌렸다

환한 달빛을 그대로 머금고 밝게 빛나는 피부

내가 준 푸른 정장을 적당히 느슨하게 풀어 편히 창가에 앉아있는 공주는 눈을 살포시 감고, 오랜만에 듣는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푸른 왕국에서 전해지는 민요, 자장가

우리가 어릴 적 엄마가 종종 불러주셨던 그 노래.

엄마와는 다른 낮고 부드러운 음색이 고요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처음엔 연민밖에 없었다

붉은 왕국과 푸른 왕국의 동맹을 위해 남자인데도 공주로서 붉은 왕국에 온 불쌍한 아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엘린과 약혼했지만,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버려진 탑에서 생활했던 불쌍한 녀석

당연히공주따위 하고 싶지 않을 텐데도, 어쩔 수 없이공주라는 자신의 신분을 받아들인 그 녀석이, 나와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인데도 공주로 살아야하는와 왕자로 태어났지만왕자이고 싶지 않은’. 

왕자라는 이유 하나로 다른 이들에게 멋대로 기대를 받고, 책임감을 강요당하고, 1왕비와 그 아들들에게 모함을 받고, 그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나

그리고 동맹을 위해 왕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여장을 하고 공주로서 타국에 시집 온 저 녀석


처음 보자마자-, 이 녀석. 나랑 같은 처지구나.’ 하고 생각했고, 그래서 잘해주고 싶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같이 생활해보니 지나칠 정도로 녀석은 상냥했고, 순수했다

바보같을 정도로…. 

이런 좋은 녀석이 우리 나라에 볼모로 와 있는 것이 더 안타까워서,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좋은 친구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한 친구가….

 

그런데, , 점점….

 

자신의 마음 속에서 녀석이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쵸로마츠와 이치마츠, 엄마였는데…. 

가족 외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는데, 어느순간 가족보다 저 녀석을 우선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녀석이 차지하는 공간이 커지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도, 잘 부르는 것이 아닌 저 노래를, 언제까지고 영원히 듣고 싶은 마음이 들어버린다

저 녀석이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잠들면 악몽도 꾸지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어버리고 만다.

왜 그럴 수 없을까, 심장이 아프다

적군의 칼에 베이는 것보다 왜, 저 녀석을 보고 있을 때 느끼는 고통이 더 큰지, 나는 알 수 없다

마치 가시나무 줄기로 심장을 꽁꽁 둘러싸고 꽉 눌러 짓이기는 느낌이다

이 고통도, 내가 저 녀석에게 가지고 있는 이 수수께끼의 감정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말 중에서, 이 마음에 꼭 맞는 말이 있을까

표현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답답하다


심장이 아프다


침대에서 멀리 떨어진, 저런 창가에 앉아있지 말고 내 옆에서, 바로 옆에서 불러주었으면 좋겠는데….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도 모르게 녀석 쪽으로 뻗은 손이 닿지 못하고 이불 위로 추락하면서, 이불이 뭉개지며 비명을 질렀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녀석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굉장히 기뻐서, 퍽퍽하게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8.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침대에서 난 것을 깨닫고 놀라 숨을 삼켰다

달빛이 닿지 않는 침대 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 미안하다. 내가 깨워서.”

곤히 잘 자고 있던 오소마츠를 깨우고 말았다는 것에 얕은 자괴감을 느끼며 창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잘 수 있도록 빨리 이 방을 나가주자

그렇게 생각해 발을 옮기려는 순간, 잠에서 막 깬 탓인지 낮게 갈라진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왜 멈춰…? 더 들려줘, 네 노래.”

“….”

놀라 말을 잃었다

오소마츠가 침대에 누운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무말도 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오소마츠가 내 노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불렀던 자장가와 잔잔한 민요,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 주셨던 자장가들을 몇 곡이고…. 

오소마츠가 멈추라는 말을 할 때까지 불렀다

얼마나 불렀을까, 밤이 더욱 깊어지고 달빛조차 어스름하게 세상을 잠재울 때, 오소마츠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며시 침대로 다가가자, 안온히 잠든 오소마츠의 얼굴이 보였다

악몽을 꾸는 기색도 없이, 세상모르고 깊이 잠든 오소마츠의 앳된 얼굴에 심장이 일순 강하게 조여들었다.

항상 쵸로마츠와 이치마츠를 이끌었던의 얼굴이 아닌, 장난을 좋아하는 개구쟁이 아이같은 얼굴

본래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얼굴이, 오소마츠의 진짜 얼굴처럼 느껴져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만약 오소마츠가 왕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렇게 편안히,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장난을 치며 마냥 즐겁게 살지 않았을까…. 

오소마츠를 깨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을 뻗어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천천히 상냥하게 쓰다듬고, 가만히 오소마츠의 잠든 얼굴을 응시했다


—, 정말로 편히 잠들었다


별궁에서는 항상 새벽에 악몽으로 괴로워하며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었던 오소마츠가

자신의 노래로 이렇게 깊이 잠든 것이 아닐까, 내심 자만하면서, 부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오소마츠가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빌었다.





* 조금씩 두 사람의 감정선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ㅎㅎ


* 오소마츠가 전장에서 돌아온 뒤로 마냥 잘 지내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잘 드러났는지 모르겠네요.

 중세에도, 현재도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습니다.

 이라크 전쟁 이후에도 집에 돌아온 군인들이 이 PTSD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소마츠도 (물론 쵸로마츠, 이치마츠도 함께)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ㅎ

 결론은, 전쟁은 나쁩니다. 여러분.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 주말에 6화 들고 올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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