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6편 들고 왔습니다!!


*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편이었어요... 플롯 짜는데 얼마나 헤맸는지...ㄷㄷ


* 시간 상으로는 4편의 바로 전 시간대입니다ㅎ.



* 오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어수선하게 신사를 오가는 사람들과 쿵쾅거리는 소리에 슬그머니 짜증이 솟았다. 

벌써 이 시끄러운 소란이 이어진 것도 3일.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보이고 있었다. 


“오소마츠 형.”

“응~?”

토리이에 앉아 느긋하게 턱을 괴고 인간들의 행상을 관찰하는 오소마츠 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안으로는 안 끝나겠지? 저거.”

내 물음에 오소마츠 형이 고개를 돌려 인간들을 보며 대답했다.


“내일쯤 끝나지 않을까~?”

“하아~”

“어라~ 쵸로씌, 화났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 오소마츠 형을 한번 쏘아주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에 활기를 더해주는 축제가 시작되는 것은 좋으나, 그 준비로 이렇게 신사가 시끄러워서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끊기지 않고 귀청을 울려대는 쿵쾅거리는 소음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몸을 돌렸다.


“축제 준비가 끝날 때까지 난 카라마츠 영지에 가 있을래. 오소마츠 형은?”

“응~, 난 오늘 잠깐 할아범에게 갔다올 생각이라…”

“갔다와서 카라마츠 영지로 올 거야?”

“응~ 그럴게.”

손을 흔드며 배웅하는 오소마츠 형을 뒤로 하고 토리이를 내려갔다. 

하늘을 날아서 간다면 빠르게 카라마츠의 거소에 도착하겠지만, 아쉽게도 내게 그런 재주는 없었다. 

인간들이 볼 수 없도록 기색을 감추고 마을을 가로 질러갈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쵸로씌~!”

오소마츠 형이 나를 부르며 토리이에서 뛰어내려 내 앞으로 다가왔다.


“걸어갈 생각?”

“그 수 밖에 없잖아.”

“내가 데려다줄게.”

“…엥?”

말을 마친 오소마츠 형의 몸이 황금빛 털을 가진 여우로 변했다. 

보통의 여우의 배는 되어보이는 크기와 살랑이는 4개의 꼬리에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물결치듯 윤기가 흐르는 털은 굉장히 보드라워 보였다. 

떡하니 입을 벌리고 보고 있으니 오소마츠 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해? 안 타?”

“엣?! 타라고?? 등에?”

“응.”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어투로 오소마츠 형이 몸을 낮췄다. 

뭘 어째야 할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오소마츠 형이 꼬리를 흔들며 재촉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오소마츠 형이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부드러운 털에 절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오소마츠 형의 등에 조심스레 앉자 따뜻한 오소마츠 형의 체온과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 ‘이것이 바로 애니멀테라피!’ 라고 생각했다. 

오소마츠 형은 “꽉 잡아.” 하고 당부한 뒤, 땅을 차고 날아올랐다. 

하늘 높이 날아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이 기묘하고 신기했다. 

허공을 박차며 빠른 속도로 마을을 가로지른 오소마츠 형은 금새 카라마츠의 영지가 있는 청산에 도착했다. 

청산의 입구에 나를 내려주고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오소마츠 형은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갔다. 

아직 손에 남은 오소마츠 형의 감촉을 다시 떠올리며 산길을 올랐다.

카라스텐구의 영지는 청산의 꼭대기 근처에 있었다. 

인간들이 다니지 않는 산길은 매우 좁고 거칠어서 산 중턱까지 오르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카라스텐구의 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쵸로마츠 형!”

치비타의 안내를 받아 손님방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마주친 토도마츠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유키오토코(설남(雪男))인 토도마츠가 다가오자 주위 기온이 금새 내려갔다. 

차가워진 공기에 팔짱을 끼고 인사했다. 치비타는 토도마츠가 다가오자, 토도마츠에게 손님방으로의 안내를 맡기고 자리를 떴다. 

카라스텐구 일족은 모두 축제가 시작되기 전, 마을의 경계를 더 강화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어라? 오소마츠 형하고 이치마츠 형은?”

“오소마츠 형은 잠시 천상에 들린다고 했고, 이치마츠는 아침부터 없었어.”

“후응~”

내 주위를 살피며 오소마츠 형과 이치마츠를 찾는 토도마츠에게 대답하고 손님방으로 안내를 재촉했다.

아침부터 이어진 소음에 아직도 머리가 울리고 있어 빨리 조용한 방에서 쉬고 싶었다. 

내 사정을 들은 토도마츠가 “고생이네-“ 하며 영혼도 없는 위로를 하고는 앞서 걸어나갔다.







2.


왼쪽에 쌓여있던 두루마기를 전부 확인하고 오른편에 쌓아올린 카라마츠가 마지막 두루마기를 읽어내려갔다. 

여우골이라는 커다란 마을을 영역으로 삼고 있는 카라스텐구의 수장(首長)인만큼 카라마츠가 처리해야 할 일은 많았다. 

오늘도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 마지막 두루마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손에 펼쳐 들은 두루마기를 다 읽어내려간 카라마츠가 앞에 앉은 젊은 텐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고개를 깊게 숙이고 대답한 젊은 텐구들이 방을 떠났다. 


“후우-“

한숨을 푹 내쉬며 카라마츠가 등받이에 기대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았다. 

축제가 가까워지며 마을을 들어오려는 요괴의 수가 늘었다. 

축제는 인간들의 활력이 가장 넘치는 시기이면서, 넘쳐나는 인간의 생기를 노리고 흘러들어오는 요괴가 늘어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마을의 경계를 강화해야 했고, 필연적으로 카라마츠가 처리해야 할 일도 늘어나 축제 준비가 시작된 이후로는 오소마츠가 있는 신사에 들리지도 못했다. 

다행히 오늘은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일이 끝났다. 

등에 접고 있던 날개를 살며시 팔락이며 지금이라도 오소마츠의 신사에 찾아갈까, 고민을 하고 있는 카라마츠의 귀에 장지문 너머 치비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대답하자 치비타가 들어와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했다. 

이 시기에 카라스텐구의 영지에 찾아올 손님은 드물었기에 누구냐고 묻자, 치비타가 시큰둥하게 쵸로마츠라고 대답했다. 

치비타의 말에 카라마츠가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선 카라마츠는 곧바로 쵸로마츠가 머물고 있을 손님방으로 향했다.




“쵸로마츠!”

“아, 카라마츠. 잠시 신세 좀 질게.”

손님방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보인 마당에 쵸로마츠와 토도마츠가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간 카라마츠가 기쁘게 웃었다.


“훗, 내 형제라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아, 그래.”

그럼 그렇지하는 얼굴로 대충 카라마츠의 말을 넘긴 쵸로마츠를 보며 카라마츠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쵸로마츠의 주변을 살피는 카라마츠의 행동에 쵸로마츠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오소마츠 형은 여기 없어.”

“엩? 아, 그럼 어디에?”

“천상에 일이 있어서 잠시 갔다온대.”

“아, 그런가…”

“일 마치면 이쪽으로 온다고 했으니까.”

“그런가!”

오소마츠가 없다는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아쉬워하던 얼굴을 금새 지우고 싱글벙글 웃는 카라마츠를 보며 쵸로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카라마츠가 쵸로마츠의 한숨에 당황하며 어디가 불편한지를 묻자 쵸로마츠가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토도마츠가 동정하는 눈빛으로 쵸로마츠의 어깨를 토닥였다.





가을이 한창인 높고 푸른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갔다. 

여름보다 짧아진 낮시간을 따라 온 마을을 비추고 있던 노란 해는 서서히 청산의 뒤로 얼굴을 숨기며, 작별의 인사를 건네듯 하늘에 붉은 물감을 풀었다. 

타오르듯 벌겋게 피어오른 빨강을 한쪽에서 천천히 잡아먹어가는 검은 하늘을 카라마츠가 걱정어린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문득문득 접은 날개를 펼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카라마츠를 치비타가 한숨을 내쉬며 불렀다. 

바쁘게 음식을 나르는 젊은 텐구들과 식솔들의 움직임을 뒤로하고 카라마츠가 쵸로마츠와 토도마츠가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들어왔는지 흙투성이의 쥬시마츠와 나른한 표정의 이치마츠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눈 앞에 놓인 일인용 밥상에 올려진 진수성찬에 감탄하는 쵸로마츠를 뒤로하고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부재에 눈썹을 구겼다. 

묵묵히 예의바른 젓가락질로 김이 모락모락나는 흰 쌀밥을 입으로 옮기는 쵸로마츠를 카라마츠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왜?”

“오소마츠가 돌아오는 것이 늦지 않나?”

카라마츠의 말에 쵸로마츠가 깜빡였다. 

눈 앞에 앉아있는 카라마츠의 얼굴을 보며 쵸로마츠는 ‘이 녀석 진심인가…’ 하고 한탄했다. 

요괴들 사이에서 상대할 자가 없다 칭송받으며 대(大)텐구라 불리는 카라마츠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신’의 영역에 속해 있는 오소마츠는 강했다. 

섣불리 공격을 당해도 쉽게 이길 수 있는 힘이 오소마츠에겐 있었다. 

애초에 쉽게 습격을 받을 오소마츠도 아니었지만… 

게다가 오늘은 오소마츠가 오랜 시절 알아온 대국주를 만나러 천상에 올라간 터였다. 

추억을 털어놓으며 회포를 풀다보면 예정보다 늦어지는 것은 응당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소마츠는 본래 성격이 느긋하고 풀어져 있다. 

아직 초저녁인 지금 돌아오지 않는 것은 쵸로마츠 입장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신’인 오소마츠의 안위를 걱정하는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은 카라마츠 뿐이라고 생각하며 쵸로마츠가 한숨지었다.


“천상에 간 거잖아? 조금 늦어질 수도 있겠지. 옆집에 놀러간 것도 아니고..”

식탁에 놓인 구운 생선의 가시를 능숙한 젓가락질로 발라내며 쵸로마츠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쵸로마츠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밥그릇을 들고 카라마츠가 “아무리 그래도…” 하고 중얼거렸다. 

카라마츠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쵸로마츠가 작게 “쯧!” 하고 혀를 찼다. 

오소마츠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인 오소마츠를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카라마츠를 이해할 수 없는 쵸로마츠는 매번 카라마츠의 이런 면을 볼 때마다 묘하게 화가 치밀었다.


“카라마츠님~, 그 생선은 소녀가 구운 것입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아아…”

귀에 거스릴 정도로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에 쵸로마츠가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얼굴로 기계적으로 밥과 반찬을 입으로 나르고 있는 카라마츠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한 여성형 요괴하나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어필하며 웃고 있었다. 

옆에서 봐주기 힘들 정도로 아양을 떨고 있는 요괴의 모습에 헛웃음을 뱉으며 쵸로마츠가 옆에 앉은 토도마츠에게 물었다.


“뭐야? 저거?”

카라마츠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토도마츠가 조용히 말했다.


“얼마 전에 들어온 바케네코*야. 카라마츠 형의 부인자리를 노리고 들어왔는지 작정하고 달라붙더라고.”

*바케네코 : 둔갑 고양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출처-위키백과]

“..헤에…”

기모노의 옷깃도 느슨하게 해,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며 교태를 부리는 바케네코가 불쌍해 보일 정도로 카라마츠는 옆에 앉은 요괴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분명 저 한심한 녀석은 오소마츠의 걱정이나 하고 있겠지. ‘

한숨을 쉬며 쵸로마츠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카라마츠 형은 그렇다쳐도, 딸딸마츠 형은 저렇게 여자가 붙으면 코피 뿜는거 아냐?”

젓가락을 든 손을 입가에 가져가 후훗- 하고 비웃으며 토도마츠가 말했다. 

쵸로마츠가 싫어하는 별명을 들먹이는 토도마츠를 노려보며 쵸로마츠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호오~? 그러는 ‘톳티-’야말로, 저렇게 여자가 먼저 다가오는 일은 없잖아? 동정이니까!”

“자기도 동정이면서?! 자폭 그만둬줄래?!”

밥을 먹으면서도 서로를 노려보는 토도마츠와 쵸로마츠를 뒤로한채, 즐겁게 웃고 떠들며 서로 반찬을 챙겨주는 이치마츠와 쥬시마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한숨을 푹- 내쉰 카라마츠가 망연히 “오소마츠…” 하고 중얼거렸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평소라면 이미 잠자리에 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도 카라마츠는 홀로 마당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인간 마을의 불도 전부 꺼진 새벽,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오소마츠를 기다리며 카라마츠가 어깨에 걸친 쪽색의 하오리*를 끌어올렸다. 

*하오리(羽織) : 기모노 위에 입는 것으로서 양복에서 말하는 가디건이나 재킷 같은 것

얼마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가을에 들어서고 부쩍 기온이 내려간 공기는 금새 카라마츠의 체온을 빼앗아갔다. 

차가워진 손끝에 씁쓸하게 웃으며 카라마츠가 방 안으로 돌아가려 몸을 돌린 순간, 저 멀리서 오소마츠의 기운이 느껴졌다. 

찌푸리고 있던 눈썹은 금새 풀리고 밝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 카라마츠의 앞에 여우불에 감싸인 황금색의 여우가 우아하게 마당에 발을 내렸다. 


“얼레? 카라마츠, 아직도 안자고 뭐하고 있었어?”

여우에서 평소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소마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빙긋 웃으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하오리를 오소마츠의 어깨에 걸쳐주며 “오소마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고 카라마츠가 대답했다. 

카라마츠의 체온이 남은 하오리와 대조적으로 차갑게 식은 카라마츠의 손가락을 오소마츠가 붙잡아 두 손으로 감쌌다.


“추운데, 안 기다려도 괜찮았는데…”

“..늦게 돌아온 오소마츠가 나쁘다.”

“하하, 미안.”

생글생글 웃으며 솔직하게 사과하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오소마츠가 붙잡은 카라마츠의 손에 다시 온기가 돌아오자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놓았다. 

떠나가는 오소마츠의 온기에 아쉬움을 느끼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쵸로마츠가 묵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3.


카라스텐구의 영지에서 맞이하는 아침 식사 시간, 언제 돌아왔는지 알 수 없는 오소마츠가 잠버릇이 남은 머리로 반쯤 졸아가며 아침을 먹고 있는 모습을 쵸로마츠가 한심하단 눈길로 바라보았다. 

후드득 오소마츠의 젓가락에서 떨어진 밥풀을 쵸로마츠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치우며 오소마츠에게 외쳤다.


“오소마츠 형! 좀 제대로 먹어!!”

“응~”

허공을 향한 오소마츠의 시선에 쵸로마츠가 푹 한숨을 쉬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소마츠는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찌어찌 반찬을 흘리지 않고 먹고 있는 오소마츠에게서 시선을 돌려, 서로 반찬을 나눠먹고 있는 토도마츠와 쥬시마츠에게 카라마츠의 행방을 물었다.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곤 하나, 쵸로마츠와 오소마츠, 이치마츠는 이곳의 손님이었다. 

집의 주인인 카라마츠가 자리에 없는 것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오늘도 맛있게 구워진 생선을 발라먹으며 토도마츠가 말했다.


“요즘 카라마츠 형 바쁘니까, 좀 늦게 먹지 않을까?”

“읏!! 기다렸나, 형제들이여!!!!”

토도마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이 활짝 열리며 숨을 헐떡이는 카라마츠가 나타났다. 

숨이 찬 모습에 쵸로마츠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카라마츠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일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숨을 고르며 오소마츠의 맞은편에 카라마츠가 앉자 바로 밥상을 들고 어제의 바케네코가 들어왔다.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카라마츠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볼수록 왠지 밥맛이 떨어져 쵸로마츠가 밥그릇을 반도 비우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카라마츠는 옆에 있는 바케네코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어딘가 멍한 얼굴의 오소마츠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평소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평온한 분위기가 아닌 어딘가 경직된 느낌에 이치마츠와 토도마츠가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며 식사를 마쳤다. 

일이 바쁜건지 카라마츠는 식사를 마치고 오소마츠에게 말을 건 시간도 없이 치비타에게 끌려갔다.


남은 잔반을 정리하는 카라스텐구의 가솔들을 바라보던 오소마츠가 몸을 일으켰다. 

쵸로마츠가 오소마츠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고 어디를 가냐고 묻자 오소마츠가 싱긋 웃으며 “잠깐 산책~” 하고 대답했다. 

밝은 미소였지만,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표정에 오소마츠가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헤아린 쵸로마츠가 “조심히 다녀와.” 하고 마중했다. 

잔잔히 미소지으며 쵸로마츠의 머리를 크게 쓰다듬고 방을 나선 오소마츠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 쵸로마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쵸로마츠 형, 언제까지 여기서 머물거야?”

“축제가 시작되면 신사로 돌아가야지.”

식사를 마치고 묵고 있는 손님방을 향하는 복도에서 토도마츠의 물음에 쵸로마츠가 대답했다. 

축제가 시작하는 날은 내일. 신사의 준비도 오늘 내로 끝날 예정이었다. 

쵸로마츠의 대답에 토도마츠가 뾰루퉁하게 입을 내밀고 “뭐야~ 그렇게 빨리 돌아가?” 하고 투덜댔다. 


“이치마츠랑 쥬시마츠는?”

“식사 끝나자 마자 두 사람 다 나갔어.”

쵸로마츠의 물음에 토도마츠가 중얼거렸다. 

쵸로마츠에게 동생과 다름없는 세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았지만, 묘하게도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는 굉장히 가깝게 지냈다. 

종족이 다른 요괴가 친하게 지내는 일이 거의 없는 세상이다. 

토도마츠도 종족이 다른 쵸로마츠를 잘 따랐던 것을 떠올리며 쵸로마츠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것보다! 아까 카라마츠 형하고 오소마츠 형의 분위기는 대체 뭐야? 부부싸움이라도 한건가??”

묵묵히 복도를 걷고 있는 쵸로마츠를 향해 토도마츠가 드디어 신경쓰였던 질문을 던졌다. 

항상 옆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달콤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이 방근 전엔 굉장히 서먹한 공기를 자아내고 있던 것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토도마츠였다.


“교제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부부싸움을 할 리가 없잖아.”

한심하단 얼굴로 토도마츠를 향해 대답한 쵸로마츠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평소와 다른 분위기였다는 것은 쵸로마츠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카라마츠가 아닌 오소마츠에게 있다는 것을 쵸로마츠는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 그 바케네코가 그렇게 달라붙는데 왜 카라마츠 형은 놔두는지 이해가 안 돼! 오소마츠 형을 좋아하면서!”

영문을 모르는 어린 토도마츠는 쵸로마츠에게 붙어 화를 내며 말했다. 

토도마츠가 생각하기에 모든 잘못은, 노골적으로 카라마츠에게 치대는 바케네코를 방치한데다가, 그 모습을 오소마츠에게 보란듯이 보여준 카라마츠에게 있었다. 

쵸로마츠는 토도마츠의 불평에 가만히 곁눈질하더니 몸을 돌려 걸어왔던 복도로 다시 되돌아갔다. 


“잠깐 카라마츠 방으로 안내해줘.”

쵸로마츠의 말에 토도마츠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 형!!!!!”

문도 두드리지 않고 벌컥 집무실로 사용되는 방문을 열어젖힌 토도마츠를 보며 쵸로마츠가 당황했다. 

아무리 가족 같은 사이라지만, 카라마츠는 엄연한 이 집의 주인이자 카라스텐구의 수장이다. 

격식도 차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깜찍한 막내의 행동에 쵸로마츠는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활짝 열어젖힌 토도마츠에게 카라마츠를 비롯해 방 안에 앉아있던 젊은 텐구들의 이목이 집중했다.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토도마츠가 슬슬 뒷걸음질쳐 쵸로마츠의 뒤에 몸을 숨기고 얼굴만 빼꼼 내밀어 카라마츠에게 말했다.


“쵸, 쵸로마츠 형이 할 말이 있대.”

잘못은 제가 저질러 놓고 몸을 숨기며 쵸로마츠를 내미는 토도마츠의 영악함에 쵸로마츠는 어이가 없었다. 

황당하단 얼굴로 한숨을 내쉰 쵸로마츠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말을 나눌 수 있을까요?”

젊은 텐구들의 적의에 가득찬 눈길이 쵸로마츠에게 꽂혔다.

마음만 같아서는 뭘 노려보냐며 밟고 싶은 심정을 꾹꾹 누르고 쵸로마츠가 미소를 지었다. 

카라마츠는 동생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젊은 텐구들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 명했다. 

명을 받은 젊은 텐구들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떠났다. 

카라마츠, 쵸로마츠, 토도마츠, 세 사람만이 방에 남았다.


“카라마츠 형!! 대체 뭐야?! 그건!!”

세 사람만 남자마자 기세좋게 쵸로마츠의 뒤에서 튀어나온 토도마츠가 카라마츠의 앞에 앉아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며 카라마츠가 간신히 “뭐, 뭐가 말인가?” 하고 물었다. 

씩씩대는 토도마츠의 어깨를 두드려 진정시킨 쵸로마츠가 방석에 앉으며 물었다.


“그 바케네코, 왜 놔두는 거야? 어디로보나 너를 노리고 있고, 그 모습을 오소마츠 형한테 보이는 것도 좋지 않다고 보는데…”

“바케네코…?”

쵸로마츠의 말에 카라마츠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어진 카라마츠의 물음에 쵸로마츠와 토도마츠 두 사람이 머리를 붙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녀석이 있었나..?”

“안중에도 없었어!!!!”

“진짜냐..”

토도마츠의 경악과 함께 쵸로마츠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옆에 달라붙는데 전혀 깨닫지 못한 카라마츠의 둔함에 탄식함과 함께, 바케네코를 향한 일말의 동정심이 일었다. 


“그럼 대체 아침 때 그 분위기는 뭐야? 나는 당연히 두 사람이 싸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토도마츠의 말에 카라마츠가 다시 멀뚱히 눈을 깜빡이며 “싸운 적은 없다고?” 하고 대답했다. 

“그럼 대체 뭐야~~~” 하고 중얼거리는 토도마츠를 뒤로 하고 카라마츠가 쵸로마츠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소마츠는?”

“식사 마치자마자 나갔어.”

“나갔다? 어디로?”

“글쎄?”

“엩?!”

쵸로마츠의 대답에 카라마츠가 눈을 크게 뜨고 벌떡 일어났다. 

황당하단 눈빛으로 쵸로마츠를 바라보며 카라마츠가 외쳤다.


“위험하지 않은가!!”

“아? 아니, 오소마츠 형 일단 ‘토지신’이고, 여우골은 오소마츠 형의 토지니까 괜찮잖아? 어차피 이 마을 안에 있을거고.”

“…만에 하나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방을 나가 젊은 텐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 카라마츠를 보며 쵸로마츠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얼마나 과보호인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4.


온 마을을 한바퀴 돌았음에도 꼬리 하나 보이지 않음에 초조함이 더해졌다. 

축제가 가까워짐에 따라 마을 주변의 악귀나 요괴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혹시나라도 오소마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쯧! 하고 혀를 차고 다시 한 번 마을을 돌았지만 여전히 오소마츠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영지로 돌아간 것일까, 청산으로 방향을 돌렸다. 

산을 돌아 살피는 중에 노란 옷을 입은 동생이 보여 날개를 접고 산으로 내려갔다.


“쥬시마츠!”

“아! 카라마츠 형아!!”

흙투성이 손을 흔들며 반기는 귀여운 동생에게 웃어준 후, 오소마츠의 행방을 물었다.


“응~, 오소마츠 형아~? 잘 모르겠는데~”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굴리는 쥬시마츠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직 청산에는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알겠다고 대답한 후, 다시 하늘을 날아오르려 날개를 펼친 순간, 쥬시마츠의 손에 들린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쥬시마츠, 그건?”

“아! 이거!! ‘그 아이’에게 줄거야~!!”

행복하단 미소를 지으며 밝게 말하는 쥬시마츠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얼마 전, 영지에 일손으로 들어온 요스즈메*와 부쩍 친해진 쥬시마츠는 매일 그녀를 위한 꽃을 꺾으려 온 산을 돌아다녔다. 

*요스즈메 : 일본 고치 현과 에히메 현에 전해내려오는 새 요괴. ‘밤참새’라고도 한다 [출처:나무위키]

“카라마츠 형아!”

“응? 뭔가? 쥬시마츠.”

“있잖아~”

싱긋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꽃을 바라보는 쥬시마츠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형제인 우리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상냥한 얼굴에 분명 그녀를 떠올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뭘까?”

“응?”

“그 아이 앞에 서면 뭔~가 가슴이 막 두근두근대고, 얼굴을 보고 있는데도 더~ 보고 싶고, 또 멀리서 있어도 한눈에 그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그 아이를 보면 볼수록 뭔가 가슴이 꾹- 하고 아파오는데 이게 뭘까?”

나를 향한 쥬시마츠의 눈빛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제 막 새싹같이 여리고 순수한 사랑을 시작한 쥬시마츠의 모습에, 오래 전 이 마을에 막 도달했을 때의 쥬시마츠를 떠올렸다. 

아직 어리고 세상을 잘 몰랐던 순수한 아이가 어느새 성장해 사랑을 할 정도로 늠름해졌다. 

마냥 어린 아이인 줄만 알았던 동생의 성장에 흐뭇하게 웃으며 쥬시마츠의 물음에 정성껏 대답했다.


“쥬시마츠, 그건 ‘사랑’이구나!”

사랑~?”

“그래. 곁에 있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그 누구보다 ‘특별’한 상대가 되고 싶은 마음은 모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그렇구나!!!”

태양이 질투할 정도로 밝게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쥬시마츠가 나를 향해 굉장히 자상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 형아도 오소마츠 형아를 보면 그렇게 되는거야?”

“…응?”

마치 오소마츠가 이치마츠를 바라보는 곰살궃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쥬시마츠의 말에 절로 목이 울렸다. 

쥬시마츠가 하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다시 물으려는데 쥬시마츠는 빙긋 웃더니 내게 인사를 하고 다시 꽃을 꺾으러 산 속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나는 쥬시마츠의 말을 다시 되씹으며 날개를 펼쳤다.




하늘에서 바라본 마을은 축제 준비로 활기가 넘쳤다. 

아직도 축제 준비로 공사가 한창인 여우 신사는 여전히 사람이 득실거렸다. 

신사를 한번 살펴보았으나 오소마츠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를 간 것인가…


오소마츠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초조함은 한계에 다다랐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지는 않을까, 최악의 상황이 자꾸 머리속에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했다. 

신사 근처의 인가를 지나며 아래를 살피고 있는데, 시야 한구석에 고양이 모습을 한 이치마츠가 들어왔다.


“이치마츠!!”

“아?! 뭐야, 개똥마츠!”

마을의 떠돌이 고양이들과 함께 모여있는 이치마츠에게 다가가 오소마츠의 행방을 물자 이치마츠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아마, 청산 아래로 갔을거야. 아침에 그쪽으로 가는 걸 봤거든.”

“정말인가?! 고맙다!! 이치마츠!!”

겨우 잡은 지푸라기 같은 흔적에 감사하며 재빨리 청산을 향해 날았다. 

아무리 청산을 보아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청산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인간 마을에 인접한 청산의 아래를 샅샅이 살폈다. 



“오소마츠!!”

청산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인간 마을과 연결된 인간들의 묘지에서 오소마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바람을 가르고 강하하여 오소마츠의 곁으로 날아갔다.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어? 카라마츠?”

“오소마츠!! 걱정했다. 대체…”

“아, 잠깐만. 카라마츠 일단 모습 좀 바꿔.”

“에..?”

“인간으로 둔갑해. 빨리-“

오소마츠의 말에 겨우 오소마츠의 모습이 평소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항상 입고 있었던 붉은 기모노 대신에 오소마츠는 토도마츠가 자주 입는 인간의 옷을 입고 있었다. 

오소마츠의 기모노와 같은 색의 인간의 옷을 입은 오소마츠는 귀도, 꼬리도 감추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런 모습을 한 것인지 묻는 나를 재촉하는 오소마츠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나도 모습을 바꾸었다. 

인간의 옷은 잘 알지 못해 일단 오소마츠가 입고 있는 옷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꾸고 오소마츠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인간이 자주 드나드니까, 인간 모습을 하고 있는게 좋아-"

“그, 그런가... 그런데 오소마츠, 여기는 왜…”

“응?”

인간의 묘지에는 줄을 맞춰 세워져있는 비석이 가득 서 있었다.

그 중, 묘지의 중심에 서 있는, ‘마츠노’ 라고 쓰여진 검고 커다란 비석 앞에 오소마츠가 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비석을 쓸어내리는 오소마츠의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웠다. 

한번도 보지 못한 오소마츠의 표정에 호흡도 잊고 망연히 오소마츠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저런, 오소마츠의 안타까운 얼굴을 나는 한번도 본 적 없었다.


“오소마츠…”

“..응?”

“그 비석의 주인을 아는 건가?”

“응~, 뭐… 그렇지…”

말을 흐리며 다시 비석을 쓰다듬는 오소마츠의 손길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소마츠가 그 비석을 만지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왜 내게도 주지 않았던 부드러운 손길과 그런 애끓는 표정을 죽은 자의 비석에 보이는 것인가, 가슴이 답답했다. 


“혹시, 그 비석의 주인이.. 오소마츠가 과거 사랑했던 아이인가..?”

“…어?”

놀란 얼굴의 오소마츠가 나를 바라보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오소마츠의 표정으로 보아 대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따끔따끔하니 아파오는 가슴에 고개를 숙이고 애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그 비석의 주인이…”

“에,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오소마츠가 말해줬다.”

“내가? 언제?”

“이 마을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 그런가… 나 그런 것도 말했었나…”

슬프게 웃으며 다시 비석으로 시선을 돌린 오소마츠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고 오소마츠를 바라보았다.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소마츠는 여전히 비석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비석을 보는 눈을 내게만 주기 바라는 마음에 비석을 쓰다듬는 오소마츠의 손을 붙잡았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오소마츠의 눈빛에 작은 만족감을 느끼며 오소마츠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왜, 그런 얼굴 하고 있어-“

베시시 웃으며 내 얼굴을 쓰다듬는 오소마츠의 손길에 가슴이 아렸다. 

오소마츠의 맑은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겨우 쥬시마츠의 말을 이해했다. 


오소마츠의 곁에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오소마츠의 눈길이 오직 내게만 향하기를 바라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소마츠의 기운을 느낄 수 있고, 

이렇게 애타게 가슴이 아프고, 

오소마츠를 지키고 싶고, 

그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 있고 싶은... 


이 마음은 전부,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오소마츠의 ‘특별’한 상대가 되고 싶다는 것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뜨거워지는 눈가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물었다. 

오소마츠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인내심을 동원해 눈물을 참고 있으니, 귓가에 오소마츠의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카라마츠, 이제 돌아가자.”

“아아.”

고개를 들어 평소와 같이 웃었지만, 제대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나를 바라본 오소마츠가 은은한 미소를 띠고 먼저 하늘로 날아올랐다. 

공중에 떠서 나를 기다리는 오소마츠에게 다가가며 부디, 눈물이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5.


축제가 무르익으며 어두운 밤을 축제의 불이 밝히고 장식했다. 

카라스텐구의 영지에 선 쵸로마츠가 발을 동동 구르는 토도마츠를 바라보았다.


“아, 정말~!! 빨리 가자니까~? 축제 다 끝나겠다!”

“좀, 진정해. 토도마츠.”

이미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이치마츠를 재촉하는 토도마츠를 쵸로마츠가 달랬다

쥬시마츠는 이미 마음에 드는 아이와 함께 축제가 한창인 인간 마을로 내려간듯 했다. 


오늘 아침, 인간으로 변해 축제를 즐기자는 토도마츠의 제안을 오소마츠가 흔쾌히 승낙했다. 

이제 절정에 다다른 축제를 빨리 즐기고 싶은지 토도마츠는 아직도 미적대며 준비를 하고 있는 이치마츠를 계속 독촉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어슬렁 어슬렁 나타난 이치마츠의 손을 잡고 토도마츠가 재빨리 산을 내려갔다. 

한숨을 쉬며 산을 내려가는 두 동생의 뒷모습을 보는 쵸로마츠의 곁에 오소마츠가 다가왔다.


“쵸로씌는 안 가~?”

“오소마츠 형은?”

“나는 신사를 지켜야지~”

오소마츠의 대답에 쵸로마츠가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갔다 돌아온 오소마츠는 부쩍 기운을 잃고, 어딘가 정신을 딴 곳에 놓고 온 것 같았다. 

그것은 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얼이 빠진 모습의 카라마츠는 돌아온 후, 뭔가에 홀린듯 일에 매달렸다. 

오늘도 축제 당일이니 더 경계를 세워야한다며 젊은 텐구들과 아침 일찍 영지를 떠나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고요히 마을을 내려다보는 오소마츠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은하게 ‘거절’을 내비치고 있는 오소마츠를 보며 다시금 한숨을 내쉰 쵸로마츠가 인간의 모습으로 차림을 바꾸었다.


“그럼 나도 가 볼게. 이따 신사에서 봐.”

“응~, 재미있게 즐기고 와~~”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오소마츠를 뒤로 하고 쵸로마츠가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홀로 남은 오소마츠가 쓸쓸히 웃고는 하늘로 날아올라 자신의 신사로 향했다.




여름에 시작하는 다른 마을의 축제와 달리 가을에 들어서야 시작하는 여우골의 축제는 다른 마을의 사람들도 많이 참여하는 행사였다. 

평소보다 늘어난 인간들의 수에 빙긋 웃으며 붉은 토리이에 올라 앉은 오소마츠가 턱을 괴고 인간 마을을 바라보았다. 

축제의 막바지, 불꽃놀이를 하는 다른 축제와 달리, 여우골의 축제는 옛 아카츠카 마을이 잠들어있는 ‘아카츠카 호수’에 등불을 띄우는 것으로 축제를 마무리했다. 


인간들의 온갖 소망을 담은 작은 불빛이 커다란 호수를 가득 채웠다. 

검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호수에 떠오른 수많은 불빛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작은 등불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미소 지은 오소마츠의 곁에 바람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카라마츠가 다가왔다.


카라마츠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쉰 오소마츠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따각따각 나막신을 울리며 오소마츠의 바로 옆에 다가온 카라마츠가 낮은 목소리로 오소마츠를 불렀다. 


“오소마츠.”

“응~?”

찬찬히 고개를 든 오소마츠의 앞에 선 카라마츠가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오소마츠에게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오소마츠의 뺨을 카라마츠의 거친 손이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카라마츠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소마츠.. 사랑한다.”

고백과 함께 찬란하게 카라마츠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6.


토리이에 올라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지난 날, 신사 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청소니, 요리니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카라마츠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커다란 목재기둥을 들고 나르는 인간을 보며 카라마츠도 제법 힘이 셌던 것을 기억하고, 카라마츠의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린 순간 숨이 멎었다. 


‘어라? 카라마츠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를 향했던 카라마츠의 미소도,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앳된 얼굴도, 

나를 향해 짓던 눈웃음도 막연하게 떠오를 뿐,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설마… 잊어가고 있는 건가?’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기억의 상실을 깨닫고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은, 카라마츠를 잊고 싶지 않았다.




쵸로마츠를 청산에 데려다 준 후, 하늘로 날아올랐다. 

카라마츠의 마지막을 알고 있을 인물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할아범이 외출했다는 신하의 말에 먼저 방에 들어가 기다리겠다 말한 뒤, 익숙하게 방으로 향했다. 

준비된 방석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두려워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을 듣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두려웠다. 카라마츠의 마지막을 듣는 것이. 

내가 카라마츠와 함께 한 시간은 겨우 1년 남짓. 

그 이후의 카라마츠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나는 보지 않았다. 

내가 곁에 없는 카라마츠를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카라마츠를 잊고 싶지는 않았다. 

카라마츠를 완전히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각오를 다지고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기다렸느냐?”

반갑게 웃으며 자리에 앉는 할아범에게 인사도 생략하고 카라마츠에 대해 물었다. 

내게 카라마츠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고 있는 할아범은 나 몰래 인간계를 보는 거울로 카라마츠의 모든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느냐.”

“할아범, 나는 그 녀석을 잊고 싶지 않아…”

부드러운 할아범의 목소리에 결국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소매로 눈물을 닦는 나를 가만히 바라본 할아범이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느냐?”

“응. 이제 돌아가야지. 녀석들도 걱정하고 있을거야.”

꼬리를 흔들며 할아범에게 작별인사를 하자, 할아범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내려왔다. 

온화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할아범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피식, 안심한 얼굴로 나를 배웅하는 할아범에게 인사한 후, 발길을 돌려 청산을 향했다.





“오소마츠 형! 좀 제대로 먹어!!”

쵸로마츠의 잔소리를 대충 흘러 넘기며, 눈 앞에 앉아 밥을 먹는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옆에 앉은 여성이 정성스레 카라마츠의 식탁에 올라와있는 구운 생선의 뼈를 발라주고 있었다. 


만약 카라마츠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런 아름다운 신부를 얻어 토끼 같은 자식을 슬하에 두고 잘 살았겠지… 


할아범에게 카라마츠의 마지막을 들은 이후로, 카라마츠가 머리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내가 사라져도 형제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라고 낙관했던 나의 안일함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나를 위해, 이 땅을 일구고 다시 마을을 세워준, 사랑스러운 카라마츠… 

아직도 흐릿하게 떠오르는 카라마츠의 얼굴에, 너무나도 카라마츠가 보고 싶어졌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쵸로마츠에게 산책을 갔다 온다 말한 후, 할아범에게 들은 카라마츠의 묘지로 향했다. 

‘마츠노’라고 쓰여진 커다란 비석에 손을 올리자 땅의 차가운 기운이 그대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 카라마츠 너는…’

결코 길지 않은 네 평생을, 오직 나를 위해 이 마을에 바치고 이 차가운 땅에 잠들었다. 


비석을 쓰다듬는 손이 뿌옇게 흐려지며 눈물이 떨어졌다. 

카라마츠를 보고 싶다는 그리움과, 서서히 그를 잊어가고 있다는 죄책감이 뒤섞여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왜 지금 이 자리에, 내 곁에, 카라마츠가 없는 것인지 하늘을 원망했다.

‘신’이면서도 하늘을 원망한다니,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조하며, 차가운 비석을 카라마츠에게 했던 것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소마츠!!”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고개를 돌렸다. 

제발 내 눈가에 남은 눈물자국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온 카라마츠에게 미소지었다. 



“혹시, 그 비석의 주인이.. 오소마츠가 과거 사랑했던 아이인가..?”

카라마츠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놀라 숨을 삼켰다. 

묵묵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카라마츠가 한숨을 내쉬며 쓰게 웃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카라마츠는 이미 내 대답을 알고 있었다. 

처연히 서서 나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눈빛에 가슴이 찔려, 고개를 돌려 카라마츠의 눈길을 피했다.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같은 영혼을 지녔어도, 텐구 카라마츠는 나의 카라마츠는 결코 아니었다. 


스스로 그것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확인하고, 인지해 온 사실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그어 놓은 카라마츠와 텐구 카라마츠 사이의 경계선이 세월의 풍파에 깎여 희미해지고 말았다. 

희미해진 경계를 넘어 들어온, 텐구 카라마츠와 카라마츠를 향한 마음이 뒤섞였다. 

경계가 사라지고 한데 어우러진 감정에 제대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먹물 마냥, 서서히 물에 섞여 희미해지는 카라마츠를 향한 마음은 나를 옭매고 혼란으로 이끌었다. 


미안해, 카라마츠.

너를 잊어가고 있는 나를, 부디 용서해 줘. 

네가 너무나 보고싶어…


그리움을 담아 카라마츠의 비석을 쓸어올리는 손이 별안간 강한 힘으로 붙잡혔다.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꼭 쥐고 나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눈빛에 담긴 열기에 눈도 피할 수 없었다. 

강한 눈빛에 담긴 애정과 질투가 여실히 드러났다. 

슬픔을 참아내는 애틋한 얼굴에 눈가가 풀어졌다. 손을 뻗어 온기를 간직한 따뜻한 카라마츠의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왜, 그런 얼굴 하고 있어-“

달래주려 한 말에 카라마츠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에 돌아가자고 말을 꺼냈다. 

억지로 미소를 만들며 대답한 카라마츠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청산을 향해 날아가는 길에 보이는 인간 마을의 불빛에 묘하게 슬퍼졌다.





“오소마츠.. 사랑한다.”

담담히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카라마츠의 말에 가슴이 울렁였다. 

지금까지 카라마츠와 함께 지내온 세월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벌써 백년이 넘는 긴 시간을 함께 해 왔다. 

백년이 넘는 긴 시간은, 일 년 남짓했던 카라마츠와의 시간을 덮는데 충분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새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카라마츠가 서서히 카라마츠의 기억을 지우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이 어린 카라스텐구를 사랑해버리고 말았다. 

심호흡을 하고 잔잔히 나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와 눈을 맞추었다. 

눈물 맺힌 눈이 반짝이며 나를 비추고 있었다. 

우는 얼굴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져, 새삼 자신에게 당황하면서 손을 뻗어 카라마츠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빙긋 웃으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나도 사랑해..”





* 7편은 월요일 전에 올릴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ㅎ


* 이제야 드디어! 연인이 된 카라마츠와 오소마츠 이야기였습니다ㅎㅎ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계획은 적어도 오늘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여우골이야기 6편을 올리려고 했습니다만...


생각치 못한 복병이 나오고 말았습니다...ㅠㅠ



여우골이야기는 완결까지 대략적인 플롯을 잡아놓고 한편을 쓸 때마다 세세한 플롯을 잡아서

써왔는데.. 6편에서 플롯이 안잡히는 대참사가...

줄거리는 결정이 되었는데, 세세한 플롯 짜기와 감정 묘사에서 막히고 말았습니다...ㅎㅎ


다행히 주말과 월요일, 화요일 동안 플롯은 다듬었지만, 이제 쓰기 시작해서 주중으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서 이번주 주말에 여우골 이야기 6편, 7편을 올릴 예정입니다...

혹여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계실까 생각되어 공지? 비슷하게 변명을 올리게 되었네요..ㅎ

6편이 올라오고 나면 이 글은 삭제하겠습니다ㅎ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살짝 누설하자면ㅎ

12월입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죠. 

연말에는 휴가를 받아놔서 크리스마스라는 테마로 매일 단편을 하나씩 올릴 예정입니다.

제대로 예정에 맞출 수 있게 힘내겠습니다... 아직 플롯도 안 짰지만...


일단 생각하고 있는 예정은

크리스마스(25일)-카라오소, 26일-쵸로오소, 27일-이치오소, 28일-이치오소, 29일-토도오소, 30일-오소른

이렇게 단편을 하나씩 올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올라올 카라오소는 아마도 비밀글이 되지 않을까....ㅎㅎㅎㅎ


제 글을 좋아해주시고 제 블로그에 찾아와주시는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리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ㅠ 여우골 이야기 6편을 들고 곧 다시 돌아오겠습니다ㅎ

  티스토리 비밀번호 오류 문제로 이 글은 포스타입으로 옮겼습니다.


   https://whitepinetree.postype.com/post/5055252 

'오소마츠상 > 카라오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라오소/파카마츠] 공범자  (13) 2017.02.12
[카라마츠] 식욕  (8) 2017.01.29
[카라오소] 갈망 -중-  (0) 2016.12.04
[카라오소] 갈망 -상-  (2) 2016.12.04
[카라오소] 키스의 너머에 있는 것은  (8) 2016.10.23

* 중편입니다ㅎ


*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1.


텅 빈, 가치 없는, 쓸모 없는, 소용 없는. 


그 모든 수식어가 내가 나 ‘자신’을 정의하고 있는 단어들이었다. 

나는 대체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그런 고민조차 나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겐 지나친 사치와 같았다. 

그렇기에 아무 생각 없이 취미로 쓴 소설이 정식으로 출판되고 작가상을 수상했을 때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특별하지 않은 대학 노트에 적어간 별 볼일 없는 내 소설을 신인작가 응모전에 투고할 생각도 없었던 나는, 동생이 알려오는 수상 소식에 턱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었다. 

우연히 내 소설을 발견하고 내 동의도 없이 응모전에 투고했다는 동생의 사과에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수상식에 참여하고, 유명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또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나는 많은 수상 경력을 가진 유명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보잘것없는 내 글로 충분히 밥을 벌어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불만은 없다. 

하지만 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독자의 편지나, 내 작품에 얼마나 심오한 주제가 숨겨져 있는지 감탄하는 평론가의 글을 읽다 보면 세상에 이런 희극이 또 있을까 싶었다. 


심오한 주제? 

작품 세계? 

그런 것이 내게 있을 리 없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내가 과연 그렇게 무게 있고 값어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 

나는 다만 남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썼을 뿐이다. 

인간은 그 개체 하나하나가 바라는 가치가 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의미를 남길지를 바라고 기대한다. 

나는 그런 기대들을 모아 글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런 글들을 칭찬하는 자들은 대체로 내 글에서 자신의 기대와 이상을 본 어리석은 자들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카츠카 출판사의 마츠노 오소마츠라고 합니다. 이번에…”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앳된 목소리에 도로 문을 닫았다. 

단단한 쇠문에 걸려있는 삼중의 걸쇠를 모두 제거하고 다시 문을 열자 보란 듯이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남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성인 남자가 되어서,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미성숙함에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말도 안 듣고 내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일단 집 안으로 들였다. 

주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와 거실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남자는 아니나 다를까 내 질문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상관은 없다.


내 글을 읽던 말던.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내 글을 읽는다고 뭔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슬슬 글을 쓰는 것에 질려가던 차에 또 다른 출판사와 계약해 책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낸 책들로 번 돈은 계획적으로만 쓴다면 앞으로 일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넘쳐났다. 

나는 이대로 내가 직접 만든 이 성 안에 머물며 그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찾아온 어린 편집자를 새까맣게 잊었다.




3주 후, 다시 들려오는 벨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지금은 그 어떤 출판사와도 계약하지 않았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도 눌린 벨에 호기심이 생겨, 문을 열지 않고 경비 시스템의 버튼을 눌러 문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에 겨우 저번에 찾아온 편집자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문을 열었다. 

졸린 듯한 얼굴로 내 책을 다 읽었다는 편집자에게 약간 흥미가 생겨 집 안으로 들였다. 

소파에 앉아 내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물으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착실히 정답을 말하는 편집자는 멍청히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소파에 앉으라고 손을 들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소파에 앉은 편집자의 얼굴이 작은 한숨과 함께 이완했다. 

편안하게 소파에 몸을 묻은 편집자는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다. 

무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의 태도에 대체 언제 깨달을까 싶어 가만히 쳐다보니,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정중하게 두 손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 쓰인 성씨가 나와 같은 것에 작게 놀라며 별 생각 없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을 물었다. 

계약을 하지 않을 변명을 적당히 생각하고 있는 내게 편집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해」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떨어뜨릴 뻔 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아직도 잠에 취한 멍청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작게, 혼잣말과 같은 음량으로 “왜 그 책이…?” 하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곧 입을 열어 대답했다. 


“뭔가, 가장 선생님답다고 생각해서요.”

대체 이 대답에 내가 뭐라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일까. 

「심해」는 내가 쓴 책 중에서 가장 최악의 평을 들은 책이었다. 

의미도 주제도 없는 책이라는 평론가들의 악평과 더불어 매출도 가장 적었던 책. 

내 책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내가 썼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가장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책이기도 했다. 

단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는 글이 아닌, 나 ‘자신’을 드러내는 솔직한 글을 쓰면 어떻게 될지를. 공허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나’를 드러내면 나를 찬양하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처참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판매량과 악평들. 

당연히 나와 계약하고 그 책을 낸 출판사는 큰 손해를 보아야 했고, 나는 그 보상으로 한 권을 더 계약해 많이 팔릴 수 있는 글을 써주어야 했다. 


그런 책이다, 「심해」는. 


출판사에 속해있는 편집자 입장에서는 가장 피해야 하는 책. 

그런데 눈 앞에 멍청한 얼굴로 앉아있는 이 자는 내 질문에 “「심해」”라고 대답했다. 

그 책이 가장 ‘나 답다’고 말했다. 

아주 미미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던 흥미가 순식간에 성장해 그 존재를 과시했다.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를 더 알고 싶었고, 더 ‘나’를 드러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와 계약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그가, 조금은 내게 즐거움을 주지 않을까 기대와 함께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2.


‘마츠노 오소마츠’라는 남자를 지켜보며 알게 된 사실은 많다. 

첫째로, 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어리다. 

말투도, 행동도, 반응도 전부 마치 어린애와 같은 순수함과 어리석음이 있었다. 


소설의 컨셉을 잡기 위한 회의에서도 몇 번이고 말실수를 하며, 

실례임이 분명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지를 않나, 

내 질문에 멍청히 “헤?” 하고 대답하지를 않나. 

20살은 넘은 성인이 할 법한 언행은 절대 아니었다. 


둘째로, 그는 굉장히 자신의 동생들을 예뻐했다. 

회의 도중, 동생들에게서 문자나 전화가 걸려오면 그는 바로 회의를 중단하고 동생들의 연락에 답했다. 

전화를 하는 내내 부드러운 목소리와 상냥한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생과 연락을 할 때는, 그의 어린아이 같은 면도 사라지고 한 명의 ‘형’으로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한 번, 그의 동생에 대해 물으니 싱글벙글 웃으며 동생이 두 명 있으며 그 중 한 명은 마을에서 유명한 사립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동생들이 그 자리에 없는데도, 동생을 떠올리고 있는 그의 눈빛은 지극히 다정했다. 

그는 항상 저런 눈빛으로 동생들을 바라보는 것일까, 의문과 함께 그 눈빛을 받는 동생들이 조금은 부러웠다. 


그런 그의 상반된 면들이 재미있었다. 

순수하고 솔직한 그의 어린아이 같은 면도, 동생들을 향한 ‘형’의 일면도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소설의 주제와 컨셉을 결정하고, 글만 쓰면 되는 작업으로 들어갔을 때, 더 이상 그를 자주 볼 수 없다는 실망감에 매주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말도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잔심부름을 시켰다. 

초인종을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표정은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화가 난다고는 하나, ‘일’인데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드러내는 그가 재미있었다. 

우연히 그가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잔심부름 가운데 반드시 단 음식을 사오도록 했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그가 사온 케이크나 아이스크림 같은 단 음식을 내놓으면 행복한 얼굴로 맛을 음미하는 그의 모습이 굉장히 웃겼다. 

편안하게 얼굴을 이완하고 단 음식을 먹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내 예상보다 더 즐거웠다. 


“아, 이 책.”

재판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타 출판사에서 보내온 내 책을 보며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커피테이블에 놓인 두꺼운 책을 노려보는 그에게 “그 책이 왜?” 하고 묻자, 그는 푹- 한숨을 쉬며 이 책이 제일 비쌌다며, 책 주제에 뭐 그리 비싼 건지 모르겠다는 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책을 쓴 당사자 앞이라는 것도 잊고 솔직하게 불만을 늘어놓는 그가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책 때문에 돈이 더 들었는데…”

책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며 입을 비죽 내민 그에게 대체 언제 책을 샀는지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 그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라고 대답했다. 

내가 내 책을 읽고 오라는 말을 한 탓에, 10권이 넘는 내 책을 전부 사야 했다는 그의 말에 출판사에 구비되어 있지 않았나 물었다.


“저희 출판사가 아니고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있을 리가요.”

그의 말에 놀라 타자를 두드리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10권이 넘는 책이라면 분명 2만엔(약 20만원) 가까이 들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분명 부담되는 금액이었을 거란 생각에 그 때 그렇게 내치지 말고 내 서재에 있는 내 책을 내주면 좋았을 것이라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리고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자신의 사비를 들여가며 내 책을 사서 3주에 걸쳐 읽고 온 것이 기뻤다. 

노트북의 화면을 바라보는 눈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귀엽다. 

다시 책을 커피테이블에 내려놓고 눈 앞에 놓인 케이크에 집중하고 있는 그를 모니터 너머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저는, ‘그런 건’ 무리입니다.”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곤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괴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짜내어 말을 마친 그는 바로 몸을 돌려 집을 나갔다. 

줄곧 나 혼자 살아왔던 집이 이상하리만치 쓸쓸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공허한 마음 속 텅 빈 공간에 바람이 불었다. 

커다란 빈 방에 울린 바람은 벽에 부딪히고 쪼개어져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다. 

이 감각은 익숙하다. 

이미 몇 번이고 겪고, 아파했던 감각은 이젠 내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욱신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왔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전부 나보다 나은 자들의 것이었거나, 내가 가지기엔 너무나 가치 있는 것들뿐이었다. 

내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면 시원하게 포기해왔다. 

내가 가져서 ‘그것’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저 멀리 떨어져서 ‘그것’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항상 그렇게 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올 예정이었다. 

이변 따위는 없었다.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나 간단하게 ‘그’는, ‘오소마츠’는 내가 세운 내 규칙을 모두 내던지도록 만들었다. 


허무하고 비어있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내가, ‘오소마츠’를 원하게 만들었다. 

수줍게 웃는 얼굴도, 어린아이 같은 행동도, 솔직한 말투도,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가지고 싶었다. 

곁에 두고 싶었다. 

이번만큼은 멀리서가 아닌 바로 옆에서, 제로(0)에 가까운 거리에서 그와 있고 싶었다. 

손에 넣고 싶었다. 원한다. 그가 나를 거부해도, 나를 이 마음을 멈출 수 없다. 

그를 향한 갈망이 멈추지 않는다. 포기할 수 없는 마음에, 그저 눈물이 흘러 내렸다.








3.


마음이 무겁다. 

이제 더 이상 그 집엔 갈 수 없다. 

담당도 물론 할 수 없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이상, 그 앞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설 자신이 없다.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앉자마자 그대로 엎드렸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냉기가 볼을 타고 스며들어왔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지금처럼 우울했던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어찌 보면 사사로운 나의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회사의 돈줄과 다름없는 작가와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잘려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잘리면 당장 다음달부터 식비는 어찌할 것이며, 동생들의 학비도 어떻게 지원을 해야 할지 눈 앞이 막막하다. 

알바라도 해야 하나. 

지금처럼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있나… 

후회에 후회를 거듭해도 이미 일어난 일, 되돌릴 수는 없다. 

회사에서 잘린 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짝! 소리를 내며 등짝스매시가 내려왔다.


“아팟!!!!”

“이 자식이, 출근하자마자 농땡이야!?”

고개를 드니 이시이씨가 눈썹을 올리고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여자가 이렇게 손이 매운지.. 

맞은 등을 슬슬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이시이씨…”

“뭐야, 뭔가 불안한 어조인데… 또 사고 쳤어?”

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절대 풀 수 없는 미스터리 중엔 반드시 이시이씨의 ‘감’도 들어가 있을 것이다. 

얼굴을 찌푸리고 취조를 하는 형사와 같은 눈빛이 따갑게 박혔다. 

고개를 돌려 눈을 피하고 망설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그, 저…”

“뭔데.”

“담당 바꿔주시면 안될까요..?”

“어. 안 돼.”

“너무 빨리 대답하시는 거 아니에요!?”

“안 되니까. 왜, 진짜 사고 쳤어?”

“으…”

“아이고!! 이 화상아~!!!!”

대답을 망설이자 바로 ‘퍽, 퍽’ 소리와 함께 등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시이씨의 용서 없는 스매싱은 멈추지 않았다. 

등과 손바닥이 마주쳐 이루는 찰진 소리에 사무실 동료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고 나서야 이시이씨의 손이 멈췄다. 

얼얼함을 넘어 감각이 사라진 등에 울상을 지으며 이시이씨를 올려다보자 조금 미안한 얼굴로 이시이씨가 들고 있던 커피를 홀짝였다.


“암튼, 담당은 못 바꿔줘.”

“왜요!!”

강하게 항의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시이씨가 동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나한테 ‘’ 있잖아, 너.” 하고 냉정하게 말하는 이시이씨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또다시 과거가 아프게 가슴을 쑤셨다. 

가라앉은 기분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뱉자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에 닿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사과해.”

“왜 꼭 나여야 해요? 그렇게 유명한 작가면 나 말로 더 유능한 사람이 담당인 게 좋잖아요.”

이시이씨를 올려다보며 묻자 이시이씨는 눈을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해주기 위해 말을 고르는 이시이씨를 기다렸다. 

이시이씨의 미간에 생진 주름이 더 짙게 패였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한참을 묵언수행하고 나서야 이시이씨가 대답했다.


“왠지 너랑 그 선생님은 닮았어. 어디가 닮았냐고 하면 콕 집어서 말은 못해줘. 여자의 ‘감’이거든.”

납득할 수 없으면서도 납득할 수 밖에 없는 강압이 들어간 말에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털퍽 책상에 얼굴을 묻은 나를 이시이씨가 토닥이며 “힘내-“ 하고 무책임한 응원을 보내고 떠났다. 





아-, 들어가고 싶지 않다.

닫힌 쇠문을 앞에 두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원망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왜 이런 일이?! 

전화도 껄끄러워 문자로 연락을 하고 찾아왔지만 도저히 초인종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신사적인 사람이니, 갑자기 덮쳐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아~, 진짜 우째~~”

푹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숨 밖에 안 나온다. 

돌아갈까 말까 맹렬히 고민하고 있는 사이 묵중한 소리를 내며 쇠문이 열렸다.


“으힉?!”

놀라 비명을 지르며 한 발자국 물러나자, 카라마츠의 얼굴이 나타났다.


“…? 누구?”

“…헤?”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묻는 카라마츠의 말에 ‘이 녀석이 드디어 정신을 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이 빠져 정말로 처음 본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미쳤나? 아님, 어제의 일을 없던 일로 하기 위해서 기억상실이라도 연기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추측을 쏟아내고 있자,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려 집 안을 향해 외쳤다.


“카라마츠, 손님 왔어.”

“…헤?”

..정신분열증? 

이쯤 되면 진심으로 도망쳐야 할지 구급차를 불러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사태를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집 안에서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오소마츠?”

“…아…”

문을 연 카라마츠의 뒤로 또 다른 카라마츠가 보였다. 

에? 뭐야? 그림자 분신술??


“아, 이 분이 말했던 담당인가. 안녕하세요. 카라마츠의 쌍둥이 동생 쵸로마츠라고 합니다.”

“안, 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쵸로마츠라 소개한 남자는 나를 지나쳐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럼 갈게.” 하고 인사를 건네는 쵸로마츠에게 카라마츠가 “아아.” 하고 웃으며 인사했다. 

같은 얼굴을 가진 두 남자 사이에 끼여 오도가도 못한 채 나는 가만히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시는 안 올 거라 생각했다.”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돌렸다. 

내 앞에 선 카라마츠는 항상 당당했던 모습을 잃고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그제야 왜 자신이 이곳에 그렇게 오고 싶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아무리 동생들에게 ‘기적의 바보’라고 듣는다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그걸 잊고 있다니 바보 중의 바보인가 하는 조소가 흘러 나왔다.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카라마츠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실은 나도 안 오고 싶었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담당도 바뀌지 않는다. 

일은 계속 해야 하고, 싫어도 나는 계속 이 집에 드나들며 카라마츠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푹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철저하게 ‘일’과 관련된 연락만 받겠습니다. 어제의 ‘그 일’과 ‘일’은 별개니까요. 연락은 계속 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집에도 찾아오겠습니다만, 그것뿐입니다. 명심해 주세요.”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딱딱하고 건조한 어조로 말을 했다. 

카라마츠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알았다.” 하고 싱겁게 대답했다. 


뭐야, 뭐 그렇게 쉽게 납득해. 

나를 원한다면서 좀 더 억지를 부리고, 졸라보라고. 

갑과 을 중에서 당연히 네 입장이 ‘갑’의 입장이잖아. 

이용해보라고 유리한 입장을… 


고개를 드는 불합리한 불평에 재빨리 발을 돌렸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고 바로 집을 나왔다. 

카라마츠의 맨션에서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조금만 더 그 자리에 있었다가는 카라마츠의 멱살을 붙잡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냐고 화를 낼 것만 같았다. 

만약 카라마츠가 좀 더 강하게 나왔다면, 나는 분명 그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가 ‘갑’의 입장을 이용해 나를 협박하지 않아도, 시간을 들인다면 나는 그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싫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 그를 향한, 희미하게 남아있는 ‘호감’이 증명해준다. 


처음으로, 20여 년을 살아온 나의 인생에 처음으로 ‘나’를 원해준 사람이다. 

좀 더, 나를 원해주기를 바래, 오로지 나를 향한 그 팔에 안기면 얼마나 행복할까. 

슬며시 카라마츠와 함께 누릴 수 있는 미래를 그리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올 리가 없는 미래 따위 그려봤자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4.


“요즘은 어때?”

짐을 챙기고 돌아갈 채비를 마친 쵸로마츠가 물었다. 

꼬박꼬박 이런 형편없는 형의 안부를 물어오는 동생이 기특해 미소를 지으며 “항상 같다. 잘 지내고 있어.” 하고 대답했다. 

내 대답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쵸로마츠에게 쥬시마츠의 근황을 물었다. 

얼마 전, 직접 재배한 채소와 과일을 보내준 것으로 보아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쵸로마츠는 쥬시마츠와 자주 연락을 주고 받고 있으니 더 정확한 근황을 알고 있을 터였다.


“뭐, 잘 지내. 내년엔 벼농사에도 도전할 생각이라고 하더라고.”

“그런가.”

“우리 중에선 그 녀석이 가장 건전하게 살고 있으니까. 정상적으로.”

쓸쓸한 얼굴로 눈을 바닥으로 돌리는 쵸로마츠를 보며 쓰게 웃었다. 

이미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내쫓긴 나와, 스스로 그 울타리를 나와 자립한 쥬시마츠와 달리 쵸로마츠는 아직도 그 좁은 영역 안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손을 뻗어 가볍게 쵸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는 바라보던 쵸로마츠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너야 말로.” 하고 말했다.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걸어가는 쵸로마츠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소파에 앉았다.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인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옆에 놓았던 노트북을 들어 무릎에 올려놓았다.

 

“…? 누구?”

현관문을 나가 떠났어야 할 쵸로마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현관문을 반쯤 연 채, 쵸로마츠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마츠, 손님 왔어.”

비켜서며 나를 부르는 쵸로마츠의 목소리에 현관을 바라보았다. 

어제 그대로 헤어진 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얼굴이 그 앞에 있었다.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무릎에 있던 노트북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소마츠?”

설마 하는 생각으로 현관으로 다가갔다. 

쵸로마츠의 앞에, 내 눈 앞에 오소마츠가 서 있었다. 


“아, 이 분이 말했던 담당인가. 안녕하세요. 카라마츠의 쌍둥이 동생 쵸로마츠라고 합니다.”

나와 오소마츠를 번갈아 쳐다보던 쵸로마츠가 깨달았다는 듯, 오소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안, 녕하세요… 카라마츠 선생님의 담당편집인 마츠노 오소마츠라고 합니다.”

쵸로마츠의 인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리며 오소마츠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고 쵸로마츠에게 인사했다.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쵸로마츠는 나를 향해 “그럼 갈게.” 하고 인사했다. “아아.” 하고 대답하니, 슬쩍 오소마츠의 얼굴을 살피며 쵸로마츠가 오소마츠를 스쳐 지나가 밖으로 나갔다. 

닫힌 현관에는 나와 오소마츠만이 남았다. 


“다시는 안 올 거라 생각했다.”

무심코 새어 나온 속마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는 내 실언에 더 낮게 내려앉았다. 

줄곧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 오소마츠의 얼굴에 절망이 발목을 잡고 내 귓가에 ‘거 봐.’ 하고 속삭였다. 

어색하게나마 쵸로마츠에게 지어주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굳은 얼굴로 오소마츠는 기계적이고 업무적인 태도를 취했다. 

다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던 것도 잠시, 오소마츠의 말에 나는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 순간의 어리석은 한마디로 나는 오소마츠의 얼굴도 자유롭게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오소마츠는 이제 그렇게 풍부하고 시시각각 변했던 표정들은 더 이상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실수에 가슴 깊이 한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이상 욕심을 부린다면 오소마츠의 얼굴도 보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오소마츠가 떠난 현관에 서서 이 욕망을 억누를 것을 다짐했다. 

오소마츠가 잠시라도 남아있었다는 흔적은 방 안의 차가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오소마츠의 체온이 남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문자도 전화도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줄었다. 

이젠 내게 전화하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운지 오소마츠는 대부분의 연락을 문자로 보내왔다. 

얼굴을 보는 빈도도 크게 줄어, 정기적인 스토리 회의 말고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주 2, 3회 내 집에 얼굴을 비추던 것이, 2, 3주에 한번으로 줄었다. 

포커페이스를 만들고 딱딱한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오소마츠를 볼 때마다, 그 가녀린 몸을 품에 안고 그의 체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강하게 껴안아 그의 몸 전부를 알고 싶었다.

그 부드러워 보이는 살갗에 닿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그의 손이 내 몸에 닿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다가올 결과는 물 보듯 뻔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그에게 연락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건조한 어조임에도 감미롭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을 생각하며 주먹을 굳게 쥐고 떠오르는 욕망을 억눌렀다.





나는 항상 내 모든 것들을 통제해왔다. 

나의 행동, 생각, 내 주변의 환경까지. 

필사적으로 아버지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제한하며 조용히 살아왔다. 

20여 년을 넘게 그렇게 살아오면 싫어도 몸에 완전히 베어 버리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오소마츠를 향한 내 욕망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일하고 낙관적이었는지 통탄한다. 

오소마츠를 향한 충동을 억누르기로 한지 벌써 한 달하고도 2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내가 오소마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겨우 3번. 

그 3번 동안 오소마츠를 향한 내 끝이 없는 욕심은 더욱 박차를 가해, 결국 내 통제를 벗어나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다. 


오소마츠가 보고 싶다.

만지고 싶다. 

글을 쓰면서도 머리 속은 온통 오소마츠로 넘쳐나고 있었다. 


자신이 제대로 글을 쓰고 있긴 한 건지 확신도 들지 않아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추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었다. 

지금 내 눈 앞에 오소마츠가 서 있기를 바랬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하찮은 나란 존재를 무시하기에 바빴다. 

허탈하게 비소를 머금고 몸을 일으켰다.


“삐리리-“

몸을 일으킨 순간, 현관에서 들려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얼굴을 돌렸다. 

자동으로 잠기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이 맨션의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나 아니면 쵸로마츠뿐이다.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예상했던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쵸로마츠.”

“어, 오랜만.”

“무슨 일이야?”

주방에 들어가 찬장에서 커피통을 꺼내며 물었다. 

커피통을 들어 흔들며 무언으로 묻자, 쵸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분의 커피를 내려 머그잔에 담아 내밀었다. 뜨거운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들고 소파에 앉은 쵸로마츠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거래처가 말이 안 통하는 꼰대들이라, 화딱지 나서 못 있겠어.”

“고생이 많네.”

후룩 뜨거운 커피를 마셔가며 불평하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을 감고 내 손길을 받아들인 쵸로마츠가 다시 푹 한숨을 쉬었다. 

인상을 쓰고 회사 일이 어떻고, 아버지는 어떻고 하는 불평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중간중간 울 것 같은 얼굴로 괴로워하는 쵸로마츠의 얼굴에 가슴이 조여왔다. 

자신이 제대로 ‘형’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아 쵸로마츠가 더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뭐가?” 하고 돌려주는 동생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불평 들어줘서 고마워. 잠깐 점심시간에 짬 내서 온 거라, 이제 돌아갈게.”

말을 마치고 머그잔에 남은 식은 커피를 입에 들이부은 쵸로마츠가 몸을 일으켰다.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머그잔을 씻어놓고 가겠다고 주장한 쵸로마츠가 주방에 섰다. 

소파에 앉아 쵸로마츠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으니, 초인종이 눌리는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컵을 다 씻고 손을 털며 주방에서 나온 쵸로마츠가 “누구 올 사람 있어?” 하고 물었다. 

현관으로 향하며 고개를 젖고 무거운 쇠문을 열었다.


“아, 저기…”

멋쩍은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던 오소마츠가 한 발작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죄송합니다!! 부탁이 있어서 미리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허리를 깊게 숙여 거의 직각이 되도록 몸을 굽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오소마츠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아,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알고 싶었다. 

일단 아직도 내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오소마츠를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허공에 떠 있는 손을 쓰게 웃으며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그럴 마음이 없었다고 해도, 지금 오소마츠에게 닿는다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단 일어나. 들어와서 듣지.”

말을 마치고 거실로 들어가자 나를 따라 들어온 오소마츠를 본 쵸로마츠가 “일 이야기인 것 같으니, 갈게.” 하고 가방을 챙겼다. 

간단하게 대답을 한 나를 스쳐 지나가는 쵸로마츠가 오소마츠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오소마츠씨.”

“아, 쵸로마츠씨. 안녕하세요.”

굳어 있던 오소마츠가 쵸로마츠의 인사에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내가 그를 원한다고 했던 그 날 이후, 나는 볼 수 없었던 오소마츠의 미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게는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째서 쵸로마츠에게 그렇게 환한 미소를..?


“저번에 봤던 영화 정말 재미있었어요.”

“재미있게 봤다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또 생기면 연락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쵸로마츠씨.”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너무나 부드럽게, 편안하게 쵸로마츠와 대화하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어떻게 오소마츠와 쵸로마츠가 서로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함께 만난 적이 있는 건지 끝없이 의문이 떠올라 맴돌았다. 

내 앞에선 잔뜩 경계하고 결코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한치의 틈도 내주지 않으면서, 쵸로마츠에겐 그렇게나 즐거운듯한 얼굴로 대화하는 건가. 

손까지 흔들어가며 쵸로마츠를 배웅한 오소마츠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힘을 주어 쥔 주먹 때문에 손이 아렸다. 

소파에 몸을 묻고 오소마츠의 시선을 피해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묻자 오소마츠가 다시 허리를 숙이며 간절히 요청했다.


“그, 이번에 저희 출판사에서 내는 문학 잡지에 실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단편이 펑크가 나서..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잡지에 실릴 단편 하나를 써주실 수 있으신가요…”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오소마츠가 나를 찾는 이유는 ‘일’ 때문이다. 


“쵸로마츠와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스스로 놀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 오소마츠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얼마 전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항상 나를 어려워하며 나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쵸로마츠와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던 것이 다시 떠올라 마른 침을 삼켰다. 

나는 내 마음을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이제는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할 수 없는데, 거리킴 없이 오소마츠에게 다가간 쵸로마츠에게 오소마츠를 뺏길 거라는 불안이 온 몸을 지배했다.


“쵸로마츠가, 좋은 건가..?”

“…예?”

내 물음에 얼굴을 찌푸리고 되물어오는 오소마츠의 모습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움직여 오소마츠의 팔을 붙잡았다.

“아팟!!” 하고 오소마츠의 신음이 들렸지만, 그 신음은 내 귀에 도달하지 못한 채, 공중으로 흩어졌다. 

작은 머리를 안고 그대로 맛있어 보이는 붉은 입술에 입맞추었다. 

놀라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오소마츠의 얼굴을 무시하고 오소마츠의 머리를 더 강하게 끌어당겨 더 깊게 키스했다. 

말랑말랑한 입술의 감촉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야수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렸다.

당황한 오소마츠가 입을 연 순간에 맞추어 혀를 집어 넣어 오소마츠의 입 안을 탐했다. 

질척이는 물소리와 함께 뜨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오소마츠츠의 체온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욱…!”

일순 명치에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정신 없이 요구하던 입술이 떨어졌다. 

배를 감싸고 절로 숙여진 상체에 고개를 들어 오소마츠를 바라보자, 소매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나를 향해 외치는 오소마츠의 얼굴은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당신, 진짜 최-악이야!!!!”

단말마의 비명과 같은 절규에 오소마츠에게 손을 뻗었지만, 내 손은 무참히 오소마츠를 놓치고 허공에 멈추고 말았다. 

바로 등을 돌려 집을 나서는 오소마츠의 뒷모습에, 사무치도록 가슴을 아려오는 외로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5.


제대로 호흡할 수 없어 발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몰려드는 괴로운 기억에 눈 앞이 뿌옇게 흐렸다. 

뚝뚝 흘러 넘치는 눈물은 그대로 빗방울처럼 땅을 적시며 떨어졌다. 

내 의지 따위 고려하지 않고 뻗어오는 손, 커다란 손이 온 몸을 훑어 내려가는 감각에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 기억인데도 바로 지금 눈 앞에 닥친 것처럼 생생한 감각에 다시 호흡이 거칠어졌다. 


싫어, 떠올리고 싶지 않아. 

그 고통도, 죄악감도, 절망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무서워… 생각하지 마. 안 돼…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치마츠와 토도마츠가 나를 부르며 울상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형아 안 죽어. 

실없는 농담을 섞어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자 그제야 안심한 얼굴을 한 이치마츠와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린 토도마츠가 동시에 안겨왔다. 

이젠 제법 나와 비슷한 덩치까지 성장한 동생들을 가득 품에 안고 눈물 젖은 숨을 내쉬었다. 


그 날로 이시이씨에게 전화를 걸어 역시 카라마츠의 담당은 할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3일 정도의 휴가를 받아냈다. 받아냈다기보다는 선언했다는 것에 가깝지만, 지금은 카라마츠의 얼굴도, 나를 카라마츠에게 보낸 이시이씨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휴가 첫날은 전날의 내 상태를 걱정한 동생들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항상 친구들이니, 여자애들이니 놀러 나가 늦게 들어오던 토도마츠도 일찍 들어와 내 곁에 붙어 학교가 어떻고, 친구가 어떻고,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내가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학교에서 기죽지 않고 잘 어울리는 것이 대견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잔뜩 칭찬해 주었더니 기쁘게 웃는 토도마츠의 얼굴에 아직 어린 시절의 얼굴이 남아 있어 웃었다. 


휴가 둘째 날, 어제 그렇게 붙어 있었던 것이 거짓말같이 토도마츠는 내가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바로 친구들과 논다며 연락을 해왔다. 

이 드라이몬스터 자식. 형아 아직 외롭다고~? 

툴툴거리며 거실에 늘어져 있으니, 귀가부인 이치마츠가 돌아왔다. 

손을 흔들며 반기자 슬며시 다가온 이치마츠가 내 옆에 앉았다. 


“형, 괜찮아…?”

쓸데없는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조심스레 물어오는 동생의 걱정에 다시 시야가 흐려졌다. 

너희는 내가 지난 과거에 저질렀던 일들을 알게 되어도 나를 용서해 줄까..? 

어느새 듬직해진 동생의 어깨에 기대어 조금 울어버렸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들썩이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동생의 성장이 한층 더 확실하게 다가와 울다 웃어버렸다.






“전골~ 전골~ 오늘은 전~골~”

출처가 불분명한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자 옆에서 나와 같이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든 이치마츠가 다가왔다.


“오소마츠 형.”

“응~?”

“어제 보니까 전화 엄청 울리던데… 괜찮아?”

어젯밤 확인한 핸트폰의 착신이력을 떠올리며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이시이씨에게서는 그 이후 단 한번의 연락이 왔을 뿐이다. 

이치마츠가 걱정하는 전화는 전부 카라마츠나 쵸로마츠에게 온 것이었다. 

물론 그 전화들은 전부 무시했다. 

아예 핸드폰을 꺼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혹시나 동생들에게 급한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실행되지는 않았다. 

멋대로 담당을 그만두고 3일 쉬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짤릴지도 모른다. 

그거 하나가 유일한 걱정이었다.

내 옆에서 수상하단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동생의 시선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일단 내일 출근하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향해 걷던 발걸음이 무심코 멈추고 말았다.


“…왜…”

“형? 저 사람 누구?”

“읏! 오, 오소마츠!!”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우리 아파트 앞에서 서성거리다 나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왜 온거야. 아니, 애초에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혼란과 함께 막연한 두려움에 발이 묶였다. 

도망쳐야 하는데, 숨이 차오르며 발이 납이라도 달린 것 마냥 무겁게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내 말을 들어줘…”

하? 웃기지마. 그렇게 내뱉고 싶었지만, 입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딱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이 남자에게서 멀어지고 싶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옆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는 이치마츠를 바라보았다. 

이치마츠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마츄~!! 역시 너밖에 없다!!! 

속으로 감격하고 있는데, 이치마츠는 내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자신의 손으로 옮겨 들고는 내 어깨를 툭 쳤다.


“잘 말하고 와. 먼저 돌아가 있을게.”

“…응??”


잠, 잠깐… 이치마츠으으으으으으?!!?!?!?

내 소리 없는 절규를 듣긴 한 건지 이치마츠는 척척 앞서 걸어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형아, 분명히 도와달라고 했지?! 왜 무시?! 경악한 얼굴로 이치마츠의 등을 보고 있다가 겨우 눈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존재를 깨달았다. 


“오소마츠, 제발 부탁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줘…”

괴로워 보이는 얼굴로 필사적으로 내게 부탁하는 카라마츠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언제든 내 앞에서 거만하고 고자세를 취했던 주제에 왜 이렇게 비참할 정도로 저자세로 부탁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야, 당신…


“부탁이다. 오소마츠…”

“..알겠어.”

“그럼..!”

“저기, 카페에 가자.”

“아아,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오소마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카라마츠를 끌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적당한 창가 자리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카라마츠의 얼굴을 살폈다. 

며칠 잠을 자지 앉았는지, 다크써클이 짙게 가라앉은 눈가가 조금 애처로워 보였다. 

그리고 내게 그런 일을 하고도 뻔뻔하게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 괘씸했다.


“설마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또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은 아니죠?”

불과 3일도 되지 않은 그 날을 떠올리며 비죽이 웃는 얼굴로 비꼬았다. 

원망이 담긴 목소리에 카라마츠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그건 정말로 미안하다.” 하고 사과했다. 

사과한다고 쉽게 잊혀질 일은 아니지만, 이제와 뭔가를 한다고 해서 내가 카라마츠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장 괴로운 기억을 불러 일으킨 그 일을, 그런 일을 한 사람을 내가 용서할 리가 없다. 

몇 번이고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모습이 아주 조~금은 불쌍해 보였으니까,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할 말은 다 하신 것 같으니 가보겠습니다.”

“잠깐..!!”

일어서려는 내 팔을 붙잡은 카라마츠가 외쳤다. 

잡힌 팔이 아플 정도로 강하게 쥐고 나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무슨 얼굴을 하는 거야, 너-. 팔이 아팠기에 순순히 다시 의자에 앉았다. 

팔을 흔들자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카라마츠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사과를 위해 온 것이 아니야…”

“..하?”

뭐라는 거야, 이 또라이. 

그런 짓을 해놓고 사과를 하러 온 게 아냐?! 

장난하나?!


다시 일어서려는 내 몸짓에 카라마츠가 다시 얼굴을 구기고 나를 붙잡았다. 

“부탁이야. 제발, 내 말을 들어줘…” 하고 애원하는 통에 카페 안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값싸고 맛있는 커피를 팔아 자주 찾았던 카페였는데, 이제 다시는 못 오겠네… 

하아~ 하고 한숨을 내뱉고 한번 들어 줄 테니 말해보라고 말하자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6.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 속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제법 풍족하게 살아왔다. 

세 쌍둥이인 우리와 상냥한 어머니와 자상한 아버지. 

마치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그런 화목한 가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우리 가정을 신이 질투한 것인지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여름 날, 장마를 맞이해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렇게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써도 온 몸이 젖을 것은 분명했다. 

단순히 비에 젖는 것이 싫다는 그런 하찮은 이유로,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일하러 나갔지만, 어머니는 항상 집에 남아 계셨다. 

내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지극히 상냥한 목소리로 학교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학교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지막이었다. 쏟아지는 비, 비에 젖은 아스팔트 도로에 미끄러진 한 트럭이 그대로 어머니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덮쳤고, 어머니는 차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차와 함께 불에 타올랐다. 

겨우 수습한 어머니의 유해는 새까만 재가 되어 있었다. 

관에 놓인 어머니와 그 앞에서 울부짖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보며 자신을 저주했다. 

겨우 그딴 하찮은 이유로 어머니를 불러내어 죽음에 이르게 한 내가 용서할 수 없었다. 


“네 놈 따위를 마중 나가서…!!!!!”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는 나와 같이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나를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매일 폭언과 폭력이 내게 행해졌다. 

나는 그것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나에게 내려지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안심했다. 

나 같은 버러지에게도 제대로 벌이 내려지는 것에 안심했다. 

만약 아버지의 폭력이 없었다면,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괴로워하다가 그대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나는 집에서 키우는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상관없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으니까. 

다만, 나를 향했던 아버지의 기대는 그대로 차남 쵸로마츠에게 이어져 나보다 더한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쵸로마츠가 고생을 한 것은 미안했다. 

쵸로마츠에게 무거운 부담을 씌우고, 사랑스런 동생들과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은 나는 이 세상에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녀석이었다. 


무가치한 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바래서는 안되었고, 그것을 원해서도 안되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가질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원해도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것이 스스로도 납득한 삶의 방식이었다.


―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너, 만큼은. 

마츠노 오소마츠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포기하려고 했다. 

몇 번이고 내가 가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내 손에 놓이게 된다면 너를 빛나게 만드는 그 많은 장점들이 빛을 바래고 죽어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너를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신을 통제하려고 했다. 몇 번이고… 

그런데 그게 되지 않았다.


미치도록 너를 원했다. 네가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랬다.


미안해. 너를 포기하지 못해서…

이런 하찮은 존재인 내가 너를 원해서 미안해.

제발, 부탁이다. 오소마츠.

내게서 멀어지지 말아줘.

나를 떠나지 말아줘.

동정이라도 좋다. 제발 내 곁에 있어줘…








7.


충격적인 말들을 고백하며 흐느끼는 카라마츠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시이씨의 말을 떠올렸다. 


“왠지 너랑 그 선생님은 닮았어.”


우와- 무섭다. 여자의, 아니 이시이씨의 ‘감’.

이시이씨의 말대로 나랑 카라마츠는 닮았다. 사무치도록 닮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가슴에 남은 공허에 고통스러워하고, 미치도록 ‘사랑’을 갈망한다는 점이, 슬프도록 닮았다. 

내가 카라마츠를 완벽하게 내치지 못했던 이유도, 그와 같았다. ‘나’를 원해주는 것이 기뻤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마츠노 오소마츠를 바란다는 것이 눈물 나도록 기뻤다. 


더 원해주길 바랬다. 

더 사랑해주길 바랬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에 괴로워하고 아파했다. 자책했다.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서야 눈 앞에서 흐느끼는 카라마츠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없을 거라 포기하고 있었던 사람을 찾아냈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이 남자 뿐이다. 

부드럽게 이완되는 눈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주먹을 쥐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다.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담아 웃었다. 

결국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 일단 중편이지만 본편이 이야기는 이걸로 완결입니다. 하편은 번외격인 이야기 입니다.


* '하'편은 내용상 부득이하게 비밀글로 올려야 될 것 같습니다...

 비밀번호는 공지를 확인해 주세요^^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우골 이야기 쓰다가 막혔을 때, 떠오른 이야기입니다..ㅎ 설마 중편이 될 줄은 몰랐어요..


* 유명한 작가(소설가) 카라마츠 X 담당편집자 오소마츠  이야기 입니다.


* 보류죠가 세 쌍둥이, 합격조가 세 형제입니다.


* 소설가나 출판업계에 관한 부분은 그저 제 생각대로 썼습니다. 전부 망상입니다ㅎ..



* 부족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딩동”

맑은 벨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싸구려 정장을 입고 초인종을 누른 마츠노 오소마츠는 아카츠카 출판사에 입사한지 겨우 3년이 지난 신출내기 편집자였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드디어 신진 작가가 아닌 프로 작가의 담당이 되어, 오늘은 담당할 작가를 만나는 첫날이었다. 

책을 내는 족족 베스트 셀러에 국내외 여러 작가상을 휩쓸고 있는 유명한 대(大)작가. 

젊은 나이에 저명한 작가가 된 그를 만나는 것은 낙천주의가인 오소마츠라 할 지라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작가와 계약을 성사시키고 오라는 상사의 명령을 떠올리며 푹- 한숨을 쉰 오소마츠가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오소마츠가 사는 낡은 아파트의 조잡한 초인종 소리와 달리 우아한 클래식이 빈 복도에 울렸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은 벨소리 도중, 갑자기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오소마츠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웠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카츠카 출판사의 마츠노 오소마츠라고 합니다. 이번에…”


-쾅!-

커다란 굉음을 내며 쇠문은 살짝 벌렸던 입을 도로 닫았다. 눈 앞에서 닫힌 문에 보기 좋게 무시당한 오소마츠의 어깨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굳게 닫힌 쇠문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오소마츠가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순간, 끼익- 하고 문이 도로 열렸다. 

문이 열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무표정을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인사법인가?”

오소마츠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아름답게 솟아나 있는 오소마츠의 가운데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비꼬았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오소마츠가 천천히 손가락을 접고 새 명함을 꺼내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카츠카 출판사의..”

“그건 아까 들었다. 들어와.”

또 다시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남자에게 이를 갈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고 오소마츠가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오소마츠가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의 5배는 되어 보이는 넓은 집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저리 집 안을 둘러보는 오소마츠를 남자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저기…”

넓은 거실에 들어서자 그 깔끔함에 압도된 오소마츠가 말을 더듬었다. 

커다란 창 너머로 환한 햇빛이 비추고 있는 넓은 거실은 모던 테마로 꾸며져 먼지 한 톨 떨어져 있지 않았다. 

거실 중앙에 놓인 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가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앉으라 말도 하지 않는 남자 덕분에 오소마츠는 뻘쭘하니 거실 입구에 선 채, 남자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래서?”

거만한 태도로 남자가 눈썹을 올리고 물었다. 남자의 태도에 속으로 실컷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오소마츠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이번에 저희 출판사에서 책을 내주실 수 있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흐음-“

흥미 없다는 덤덤한 어조로 한숨과 같은 탄성을 내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대로 된 대답도 돌려주지 않은 채, 남자는 오소마츠에게서 눈을 돌리고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침묵을 참지 못한 오소마츠가 먼저 입을 연 순간, 남자가 손으로 머리를 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내 책을 읽어보긴 했어?”

“..네?”

남자의 질문에 오소마츠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되물었다.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 남자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죽 소파가 내는 까득거리는 소리에 오소마츠가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담당하는 작가의 책도 읽어보지 않는 편집자와는 일하고 싶은 마음 없어.”

“아, 저, 저기…”

“꺼져주겠어?”

무표정으로 낮게 읊조리는 남자의 압력에 오소마츠는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커다란 집에서 쫓겨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언제 열렸냐는 듯 굳게 닫힌 쇠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오소마츠가 얼굴을 구겼다.


“뭐야, 저 또라이는?”

황당하단 얼굴로 내뱉은 오소마츠가 씩씩 거리며 발을 옮겨 고급 맨션을 나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솟은 맨션을 나와 위를 올려다보며 오소마츠는 혀를 내밀어 메롱-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다른 이가 봤다면 양복도 갖춰 입은 성인 남성의 어린애 같은 행동에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다른 이가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직장으로 향하는 오소마츠의 발걸음은 심히 무거웠다. 

선생님의 발을 핥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계약을 받아오라는 편집장의 호통이 오소마츠의 머리 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직장으로 돌아간 오소마츠는 바로 직속 상사인 편집장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계약 따오라고 보냈더니, 바보 취급 당하고 돌아오면 어쩌냐?! 이 바보야!!!”

“누가 바보에요!!! 그런 편집장이야말로 뭐 저런 또라이하고 일을 하려고 합니까?!!!!”

책상을 내리치며 화를 내는 상사에게 질세라 오소마츠도 언성을 높였다. 온 사무실이 떠내려가라 쩌렁쩌렁 울리는 두 사람의 노성에 동료들은 커피를 홀짝이며 웃었다. 자유분방하고 상사나 후배 같은 상하관계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오소마츠와 그런 오소마츠를 아끼는 편집장의 언쟁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젠 아예 두 사람의 언쟁이 없으면 하루가 시작한 것 같지 않다는 동료도 나오는 지경이었다. 결국 편집장이 오소마츠의 등을 퍽퍽 때리며 “다시 선생님께 가서 계약 받아와!!!!” 하는 큰 외침으로 언쟁은 어찌어찌 마무리되었다.



“우씨~ 아파 죽겠네.”

편집장에서 얻어 맞은 등을 쓸며 오소마츠는 집으로 향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전철역에서 나와 집을 향하는 길목, 마을에서 제일 큰 서점 앞을 지나던 오소마츠가 잠시 망설이더니 얼굴을 잔뜩 구기고 혀를 차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소라쇼우(空松)’

오늘 오소마츠가 찾아간 남자의 필명이었다. 책을 정리하고 있던 서점 직원에게 다가간 오소마츠는 ‘소라쇼우’의 책을 모두 찾아달라고 했다. 올해 초, 유명한 작가상을 수상한 ‘소라쇼우’는 그 명성에 걸맞게 서점의 한 코너를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지금까지 발간된 ‘소라쇼우’의 책 10권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갔다. 합계 금액을 말하는 아르바이트 여성의 말에 눈물을 삼키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다. 당분간 담배는 물론이고 식후의 반주도 금지해야 할 금액에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는 책을 들고 서점을 나온 오소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수 kg은 나갈 것 같은 책의 무게에 오소마츠는 한숨을 내쉬며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겨 낡은 아파트로 향했다. 








2.


“어서 와- 오소마츠 형.”

집에 들어서자 바닥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막내 동생, 토도마츠가 오소마츠를 반겼다.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들어서자 작은방 문이 열리고 얼굴을 드러낸 동생,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에게 다가왔다.


“뭐야? 그거.”

오소마츠가 들고 있는 서점 문구가 찍힌 종이 가방을 가리키며 묻는 이치마츠에게 오소마츠가 “책.” 하고 대답했다.

오소마츠의 대답에 이치마츠가 입을 벌리고 “거짓말… 오소마츠 형이 책을 읽는다고?” 하고 중얼거렸다. 

낑낑대며 책을 거실로 옮긴 오소마츠가 발끈하며 “나도 책 정도는 읽어!!” 하고 외치자, 토도마츠와 이치마츠가 동시에 ““아니,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하고 말했다. 

동생들의 태도에 오소마츠가 “우씨..” 하고 숨을 내쉬며 종이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가만히 책을 내려다보던 이치마츠가 물었다.


“왜 ‘소라쇼우’ 책만 사 왔어?”

“이번에 담당하게 돼서.”

“..정말로??”

“어? 어.. 왜?”

갑자기 눈을 빛내며 다가온 이치마츠에게 놀라 어깨를 움찔하며 오소마츠가 묻자 뒤에서 TV에 시선을 고정한 토도마츠가 “이치마츠형, 그 작가 좋아하지-“ 하고 이치마츠를 대신해 대답했다. 

오소마츠가 놀라 “그래?” 하고 묻자, 거세게 고개를 끄덕인 이치마츠가 오소마츠를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마을 내에서 내로라하는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치마츠의 방 안은 책으로 가득했다. 

책이 꽉꽉 들어찬 책장을 가리키며 이치마츠가 흥분에 차 거센 숨을 내쉬었다.


“이거 전부 ‘소라쇼우’ 책.”

“엑-!! 이렇게 많아?!!”

책장 2칸은 채우고 있는 책의 양에 오소마츠가 절망했다. 

게다가 책장엔 방금 전, 오소마츠가 서점에서 산 책들도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괜한 돈 낭비를 했다는 사실에 오소마츠가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으며 “빨리 말하라고~” 하고 울먹였다. 

오소마츠의 절망은 신경도 안 쓰는 이치마츠는 책장에서 5권 정도의 책을 꺼내 오소마츠 앞에 내밀었다.


“뭐야?”

“소라쇼우 책이야. 좀 덜 유명한 것들.”

“하- 이것도 읽어야 되는 거냐…”

한탄하며 이치마츠가 내민 책을 받아 든 오소마츠는 마치 방학을 앞두고 숙제를 잔뜩 부여 받은 초등학생 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내, 형.” 하고 응원했지만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오소마츠를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장장 3주라는 시간을 소요하고 나서야 겨우 ‘소라쇼우’의 책을 독파한 오소마츠가 다크 서클을 매달고 출근했다. 

오소마츠의 얼굴이 심각해 보이긴 하는지, 출근하며 만나는 동료들마다 괜찮냐며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편집장의 자리로 간 오소마츠가 분주하게 이번에 연재될 소설을 확인하고 있는 편집장을 불렀다.


“이시이씨…”

오소마츠의 부름에 쓰고 있던 검은 뿔테 안경을 벗은 편집장, 이시이가 오소마츠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뭐, 뭐야.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며칠째 잠 줄여가며 책 읽어서요.”

“뭐어?!”

“암튼, 오늘 다시 그 또라이한테 갔다 오겠습니다.”

“유명한 선생님께 ‘또라이’가 뭐냐, 또라이가…”

황당하단 어조로 눈썹을 찡그린 이시이가 오소마츠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치며 “잘 다녀와- 꼭 계약 따오고~” 하고 배웅했다. 

은근한 상사의 압박에 한숨을 쉬며 오소마츠가 졸린 눈을 비비며 회사를 나왔다.





“또 올 줄은 몰랐군.”

초인종을 누르자 이번엔 순순히 모습을 드러낸 ‘소라쇼우’가 의외라는 얼굴로 문가에 기댔다. 

이번엔 들어오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 눈 앞의 남자에게 어퍼컷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오소마츠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읽었습니다. ‘소라쇼우’의 책.”

“호오- 그래? 그럼 한번 말을 들어주지.”

피식- 거만하게 웃음을 흘리며 남자가 문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비켜서 앞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며 오소마츠는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에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3주 전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거실에는 먼지 하나 앉아있지 않았다. 

밝게 방 안을 비추는 햇빛 때문인지, 잠이 부족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밝은 빛의 향연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남자는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오소마츠를 위 아래로 훑어보며 평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한 번 정말로 다 읽었는지 확인해볼까?”

“..네, 얼마든지요.”

체념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대답한 오소마츠를 보며 남자가 얄밉게 한쪽 입가를 올리고 질문을 던졌다.


“주인공이 30대에 싱글맘, 그리고 형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건?”

“..「탈출」”

“편지 형식으로 서술되었던 책은?”

“..「마지막 인사」, 단편 「너에게」.”

“총을 맞은 주인공이 결국 죽게 되는 책은?”

“..「연쇄」. 그리고 주인공은 멀쩡히 살아나게 됩니다만..”

“호오- 정말로 다 읽었나 보네?”

눈을 크게 뜨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하는 남자를 보며, 처음으로 무표정이 아닌 얼굴을 봤다고 오소마츠가 멍청히 생각했다.  

남자의 말에 꾸벅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한 오소마츠를 향해 남자가 손을 뻗어 자신이 앉아있는 맞은편의 긴 소파를 가리키며 “앉아.” 하고 말했다. 

다시 꾸벅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소파에 앉자 놀라울 정도로 몸을 감싸오는 편안함에 절로 감탄 섞인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바로 잠에 골아 떨어질 것만 같은 몽롱한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오소마츠가 남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아카츠카 출판사의 마츠노 오소마츠라고 합니다.”

순순히 오소마츠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든 남자가 가만히 명함을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어?”

“..선생님의 책 중에서요?”

“그래.”

“..「심해」요.”

오소마츠의 대답에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소파의 등받이게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숨을 삼키며 “왜 그 책이..?” 하고 묻는 남자의 태도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어 대답했다.


“뭔가, 가장 선생님답다고 생각해서요.”

오소마츠의 대답에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빤히 오소마츠를 응시했다. 

오소마츠는 자신이 잘못 답한 것인가 하는 불안에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남자의 침묵과 날카로운 눈빛이 오소마츠를 향한지 벌써 수 분이 지났다. 

남자의 눈길을 피하지도 못하는 오소마츠는 그저 죽을 맛이었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나고 집에 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오소마츠의 머리 속을 지배했다. 


“..마츠노 카라마츠다.”

“..네?”

남자의 낮은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멍청히 되묻자 남자가 빙긋- 웃었다.


“함께 일을 하려면 이름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잖아? ‘소라쇼우’는 필명일 뿐이지. 본명은 마츠노 카라마츠다.”

“어… 그러면..”

“아아, 계약 하지.”

남자, 아니 카라마츠의 말에 오소마츠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라마츠에게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손을 들어 말리고는 작업실로 보이는 방에 들어갔다가 펜을 들고 나왔다.


“계약서는?”

“아, 여, 여기요!!”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서 계약서를 꺼내 소파 앞 커피테이블에 올려놓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멋지게 휘갈겨 싸인을 한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카라마츠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오소마츠가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겨우 맘 놓고 회사에 돌아가 보고를 하고 푹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오소마츠는 그저 기쁠 뿐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을 알지 못하는 오소마츠는 그저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사실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3.


씩씩 거리며 맨션을 복도를 걷는 오소마츠의 양 팔에는 여러 개의 종이 봉투가 걸려 있었다. 

겨우 계약을 성사해, 유명한 작가의 책을 출판할 수 있게 되어 좋아했던 것을 오소마츠는 마음 깊이 후회했다. 

출판사에 입사한지 3년. 그 동안 신입 작가들을 맡아왔던 오소마츠는 글을 쓰는 ‘작가’라는 인종들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글을 통해 세계를 만들어내는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가 있었고, 아무리 담당 편집자나 출판사의 편집장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작품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것이 가끔은 히스테리나 편집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는 것을 오소마츠는 동료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고, 몇몇 신진 작가들을 통해 그것을 피부로 경험해왔다. 

하지만, 오소마츠가 겪은 작가들 중에서도 이번 또라이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또라이라고 오소마츠는 단언할 수 있었다. 

오소마츠가 중간 상황을 확인할 때마다, 슬럼프니 글이 안 써진다니 하면서 오소마츠를 불러 잡일에 부려먹었다. 

엄연히 편집자의 영역을 벗어난 잡일에 동원되는 것에 열 받아 편집장에게 하소연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 쪽에서 원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줘!!” 하는 이시이의 호통뿐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사 오라는 각종 간식과 세탁소에서 찾아오라고 한 옷을 옆구리에 끼고 카라마츠의 맨션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청량한 벨소리가 복도에 울리는 것을 들으며 오소마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개의 종이 가방을 들고 있는 팔이 아팠다. 간식들 사이 근처 서점에서 사오라는 책까지 들고 있어 오소마츠의 팔은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들어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카라마츠가 말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고 온 종이 가방을 거실에 내려놓자, 카라마츠가 책이 든 가방만 들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가방을 계속 들고 있어 저려오는 팔을 주무르며 오소마츠가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다. 

벌써 이 집에 온지도 10번은 넘었다. 계약하겠다는 말을 듣고 한달, 오소마츠는 거의 일주일에 2번 꼴로 이 집에 드나들고 있었다.


“아직 마무리할 부분이 남았으니, 이거 먹고 있어.”

서재로 보이는 방에서 나온 카라마츠가 오소마츠가 사온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작은 포크와 함께 내주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오소마츠는 내심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인사했다.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오소마츠의 맞은편에 앉아 타자를 치기 시작한 카라마츠를 흘끔 쳐다본 후, 오소마츠가 포크를 들었다.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쇼트 케이크. 굉장히 먹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먹을 수 없었던 유명 베이커리의 케이크였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은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생크림과 빵이 조화를 이루며 오소마츠를 행복의 세계로 이끌었다. 

저도 모르게 “음~” 하고 감탄사를 내며 얼굴을 풀고 맛을 음미하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노트북 너머로 응시하고 있는 것을 오소마츠는 눈치채지 못했다.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핥아 다시 입으로 가져가며 오소마츠가 포크로 케이크 한 조각을 더 집었다. 

아예 두 눈을 감고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케이크의 맛을 감상하는 오소마츠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카라마츠가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 일단 읽어봐.”

완성된 초안을 프린트해 건네며 카라마츠가 말했다. 완전히 케이크에 정신을 팔고 있던 오소마츠가 허겁지겁 입가를 닦고 초안을 받아 들었다. 

100쪽 정도로 묵직한 초안을 든 오소마츠가 바로 차근차근 초안을 읽어 내려갔다. 

거실 한 켠에 마련된 오픈형 주방에서 커피를 타 가지고 온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천천히 초안을 보고 있는 오소마츠를 기다렸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하는 나르시스트’. 그것이 이번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처음 스토리와 주인공에 관한 의논을 할 때, 카라마츠가 내세운 주인공의 설정을 들은 오소마츠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않는 나르시스트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성질을 가진 주인공이라니. 

그런 사람이 존재하긴 할까? 하는 의문 속에서 오소마츠는 초안을 읽었다. 


아직 제대로 틀이 잡히지 않은 초안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흡입력이 있는 글에 오소마츠는 금새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상반된 성질을 가진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그 모순점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에 당황하고 휩쓸리고 매료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주인공의 행보에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다음 챕터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해 읽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애초에 독서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오소마츠가 이 정도라면 분명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강하게 먹힐 수 있는 글이었다. 

초안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 내려간 오소마츠가 가만히 종이 가득 빼곡하게 적힌 글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야기의 주인공은 매력적이었다.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모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일상 생활에서 겪을 수도 있는 사건들에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 읽으면 읽을 수록 궁금하고 사람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글이었다.


 하지만…



“팔릴 수 있는 글을 쓰도록 유도해.”



편집장 이시이의 말을 떠올리며 오소마츠가 초안을 어루만졌다. 

분명 매력적인 글이다. 매력적이지만…


“이거 팔릴려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흠칫 놀란 오소마츠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오소마츠를 응시하고 있는 카라마츠의 날카로운 눈빛에 오소마츠가 말을 잃었다. 

글을 쓴 작가의 앞에서 실언을 했다는 것에 사색이 된 오소마츠가 손을 들어 거세게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 제가 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아… 뭔가 「심해」랑 느낌이 비슷해서!!”

“별로 그렇게 변명할 필요 없어. 나도 이 글은 상업성이 없다고 생각했고.”

오소마츠의 필사적인 몸짓에 카라마츠가 미소 지은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당연히 자신이 저지른 결례에 폭언을 듣거나, 자칫하면 계약을 날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오소마츠가 멍청히 행동을 멈추고 카라마츠를 쳐다보았다. 카라마츠는 자신의 옆에 놓아두었던 두 번째 초안을 내밀었다.


“이것도 읽어봐.”

오소마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 초안을 받아 들었다. 

두 번째 초안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주인공이 겪는 연애이야기. 

가볍고 경쾌한 글과 스토리는 확실히 쉽게 읽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 광고하기도 쉬워 보였다. 


“그걸로 진행할까?”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고개를 들었다. 

커피를 마시며 오소마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카라마츠를 보며 오소마츠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 저희 입장에서는 이 두 번째 이야기가…”

“아아, 알겠다. 그럼 그걸로 진행하지.”

머뭇거리며 말한 오소마츠의 말을 시원스레 받아들인 카라마츠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소마츠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럼 앞으로 책이 완성될 때까지 잘 부탁하지, 담당자님.”

카라마츠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눈치챈 오소마츠가 팍 인상을 구겼다. 


‘앞으로도 부려먹겠다 이거지?’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오소마츠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이마에 힘줄을 세우고도 억지로 미소를 짓는 오소마츠를 카라마츠가 즐거운 듯 바라보았다.








4.


시끄러운 술집 가운데 자리잡은 동료들은 서로 제멋대로 떠들며 마시기 시작했다. 

회식이 시작한지 벌써 1시간이 지났다. 

이시이를 비롯한 동료들 모두 오래간만에 유명한 작가와 계약을 따낸 오소마츠를 칭찬하며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위에서 칭찬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 당사자인 오소마츠는 어두운 얼굴로 술을 홀짝였다. 

초안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를 의논한 후로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호출하는 일이 더 늘어났다. 

이젠 거의 매일 카라마츠의 집에 출입하고 있는 오소마츠로서는 빨리 이 일이 끝나기를 빌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성가신 작가일 줄이야…’

이치마츠와 말한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며 오소마츠가 술잔을 기울였다. 

이전부터 카라마츠, 아니 작가 ‘소라쇼우’의 팬이었던 이치마츠는 오소마츠가 그의 담당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매일 ‘소라쇼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작가로서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그의 작품세계가 얼마나 깊고 심오한지, 무슨 상을 수상했는지 묻지도 않은 정보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이치마츠 덕분에 오소마츠는 싫어도 작가 ‘소라쇼우’에 대해 전부 꿰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어려운 집안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공부해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자랑스러운 동생이 존경하는 작가님이지만, 직접 겪어보니 절대 타인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오소마츠는 난감했다. 

집에 돌아가면 이치마츠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카라마츠에 대해 물어보는데 실상을 그대로 이야기해서 동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오소마츠는 땀을 흘려가며 카라마츠의 좋은 점을 날조하기에 바빴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원인을 떠올리자 술 맛도 맛없게 느껴져 오소마츠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 이게 누구야~?”

오소마츠의 등쪽에서 들려오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오소마츠를 비롯한 동료들이 고개를 돌렸다. 

몇 번 일로 얼굴을 맞댄 적이 있는 타 출판사의 직원들이었다. 

이시이와 한때 같은 대학을 다녔던 동기라는 타 출판사 편집장은 바로 이시이와 합심해 옛추억을 떠들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오소마츠의 동료들과 타 출판사의 직원들은 합석해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소마츠의 옆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넨 타 출판사 직원에게 오소마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오소마츠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자신은 술이 약하다며 멋쩍게 웃고는 앞에 놓인 술잔에 음료수를 따랐다. 

음료수가 담긴 잔을 든 남자가 오소마츠에게 내밀자 오소마츠도 피식 웃으며 자신의 술잔을 들어 가볍게 남자의 술잔과 부딪쳤다.

짠-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잔과 잔이 떨어졌다. 술잔을 비우고 입맛을 다신 오소마츠를 보며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나카무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요.”

“아, ‘마츠노’입니다.”

“마츠노 씨는 무슨 작가 담당이세요?”

“아, 저는 ‘소라쇼우’…요.”

자신을 나카무라라 소개한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이내 반갑게 웃었다.


“저도 맡았던 적 있어요!! ‘소라쇼우’ 작가님.”

“아, 정말요?”

나카무라의 말에 오소마츠가 얼굴을 피고 물었다. 

오소마츠가 카라마츠 때문에 꿀꿀했던 기분을 함께 험담이나 하며 조금이나마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담아 나카무라를 바라보았다.


“그 작가님, 담당하기 편하죠?”

“…네?”

카라마츠에 대한 욕을 퍼부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오소마츠가 뜻 밖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약간 집에 틀어박히는 경향이 있는데다, 대인기피증? 비슷한 것도 있어서 자주 얼굴을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도 글은 멋지게 써주고.. 가만히 놔둬도 되니까 편하죠?”

“…네에…”

나카무라의 말에 오소마츠가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들려오는 나카무라의 잡담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도 오소마츠의 머리 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숙취로 신음하고 있는 동료들 사이에서 오소마츠가 어두운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핸드폰의 주소록에서 카라마츠의 연락처를 찾아내어 심호흡을 한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 끝에 카라마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쪽에서 먼저 연락하는 건 처음인데?』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오소마츠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빌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 뵙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아아, 상관없어. 』

“그럼 항상 찾아 뵀던 시간에 가겠습니다.”

『알겠다.』

통화를 끝낸 오소마츠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에 쌓인 일을 처리하면서도 오소마츠의 마음은 뒤숭숭했다. 

밀려있던 일을 처리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침은 4에 가까워져 있었다. 

항상 카라마츠를 찾아가던 시간이 된 것이 좋을 리 없는 오소마츠가 옷을 챙기고 외근 후 바로 퇴근하겠다고 보고한 뒤, 회사를 나왔다. 




쇠문을 눈 앞에 두고 오소마츠는 초인종을 누르려는 손을 망설였다. 

손을 들었다 내렸다는 수십 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연달아 내쉬는 오소마츠가 겨우 결심을 굳히고 초인종을 눌렀다. 

딱닥한 플라스틱의 버튼이 똑딱 소리를 내며 눌리고, 이내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울렸다. 


“들어와.”

덜컹 하고 문이 열리고, 카라마츠가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오소마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오소마츠를 향해 앉으라고 말하는 카라마츠의 목소리에도 오소마츠는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의아하단 눈길로 오소마츠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카라마츠가 몸을 일으켜 오소마츠에게 다가갔다.


“이봐?”

“…저기.”

카라마츠가 뻗은 손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겨우 고개를 든 오소마츠의 눈을 마주하며 카라마츠가 도로 손을 내렸다. 

천천히 카라마츠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쫓아 눈을 내린 오소마츠가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어제 다른 출판사와 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담당했던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굳이 편집자를 집으로 들이지 않고 전화나 메일로만 소통하신다고 들었습니다.”

“…”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똑바로 카라마츠를 마주한 오소마츠가 말을 이었다.


“제게 뭘 원하시나요?”

오소마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카라마츠가 작게 대답했다.


“‘마츠노 오소마츠’를 원해.”

카라마츠의 대답에 오소마츠가 숨을 들이마셨다. 

주먹을 꽉 쥐고 다시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게이’이신가요?”

“…그럴지도.”

민감한 질문인데도 솔직히 대답한 카라마츠를 바라보며 오소마츠가 슬프게 웃었다. 

팔과 다리를 좀먹고 들어오는 기시감에 심장이 따끔하니 아팠다. 

무표정으로 조용히 오소마츠를 바라보는 카라마츠의 눈빛이 아팠다. 

한 걸음, 카라마츠에게서 거리를 두고 오소마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런 건’ 무리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집을 나가는 오소마츠의 뒷모습을 카라마츠는 가만히 서서 응시했다.








5.


지독하다.


그렇게 읊조리며 발을 옮겼다. 

오늘은 외근 후 바로 퇴근한다고 했으니 이대로 집에 가 이치마츠가 차린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그대로 뽀송뽀송한 이불에 누우면 된다. 

그러면 이 뭣 같은 하루도 끝이 나는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걸음을 멈추었다.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기어코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떨어졌다. 


아, 허무해.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원한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려 다시 눈을 감았다. 


원한다? 

나를? 

내가 어떤 인간인 줄 알고?


어이없이 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웃음을 공기 중에 흘려 보냈다. 

소라쇼우’, 마츠노 카라마츠. 현재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진 대 작가. 

그런 남자가 나를 원한다고 했다. 

‘마츠노 오소마츠’를 원한다고 했다. 


꿈인가? 

꿈이기를 빌며 볼을 잡아당기자 잔인한 현실임을 알리는 아픔이 신경을 타고 올라 뇌를 자극했다. 

내뱉는 숨과 함께 눈물이 다시 흘러 내려 소매로 눈을 가리고 주저앉았다. 


지독하다. 

지독하고 악랄하고 끔찍하다.


‘나’를 원한다고 말한 그가, 밉다.


아니길 바랬는데, 나카무라의 이야기를 듣고 뒤통수를 때리며 들어오는 기시감에 제발 내 예상이 빗나가기를 빌었는데…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과 감정에 몸이 떨렸다. 싫다. 싫어.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 기억, 그런 더러운 과거.


잘도 이런 ‘나’를 원한다고 말해왔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속으로 실컷 비웃으며 몸을 일으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집에 가서 모든 걸 잊고 자고 싶다. 빨리, 지금 당장.



빠르게 걷던 다리는 이내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전철역으로 향해 뛰어가며 차오르는 숨과 함께 눈물을 삼켰다.





집에 도착해 거실로 들어서자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이치마츠가 나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평소와 같이 웃으며 “아니?” 하고 대답하니 이치마츠가 푹 인상을 쓰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를 잘 살피는 섬세한 내 동생은 내가 감추려고 하는 부분까지 어느새 눈치채고 있었다.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은 채, 이치마츠는 곧 저녁이 준비되니 옷 갈아입고 나오라고 말하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상냥한 동생의 배려에 속 깊이 감사하며 큰 방으로 향했다. 넥타이를 풀고 옷걸이에 양복을 걸며 머리 속을 비웠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헛소리를 지껄인 그 남자나, 숨기고 싶은 과거 따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생각을 날리려고 해도, 마치 귀 속에서 벌레가 속삭이는 것 마냥 그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바닥에 앉았다. 

온 몸을 타고 올라온 소름에 팔을 쓸었다. 오돌토돌한 살갗이 과거의 기억을 더 강하게 불러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필사적으로 잊어온 기억이다. 

동생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언급도 하고 싶지 않은 기억.


하- 하고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공허한 마음과 허탈함이 몸을 침식하고 눌러 자근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방에 들어오자마자 거칠게 벗어 던진 크로스백이 열려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놓고 있었다. 

혀를 차며 가방을 들고 바닥에 널려진 서류와 필기구를 가방 안으로 쑤셔 넣다가, 얼마 전 받은 초안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을 한 켠에 세워놓고 초안을 들어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팔락거리는 종이가 스치는 소리를 내며 초안은 금새 마지막 페이지를 보였다. 

두 손으로 초안을 붙잡고 처음 이 글을 읽었던 때를 떠올렸다. 

첫 번째 초안도 그렇고 두 번째 초안도 그렇고, 나는 감히 꿈도 못 꿀 정도로 수준이 높은 문장력과 흡입력에 압도되었던 것을 떠올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과연 이치마츠가 칭찬할만한 수준. ‘대작가’라는 명칭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글이었다. 

그 인간 자체가 어떤 사람이건, 그가 쓰는 글이 훌륭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성격이 더럽고, 까칠하고, 재수없기는 해도 이런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나 같은 놈은 그의 발톱에 묻은 때만도 못한 가치를 가진 보잘것없는 인간이다. 

그런 그가 나를 원한다고 했다. 그럼 나는? 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의 고백이 싫지 않았던 걸까? 

모르겠다. 

그의 고백에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안 되는 거다. 

나 같은 놈이 그 같은 자를 좋아하면.


쓰레기는 쓰레기답게, 제 분수를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왕족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나는 그저 제 처지를 잘 알고, 이리저리 사람들의 발에 치이며 땅바닥을 굴러다니면 되는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초안을 다시 가방에 밀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마침 이치마츠의 저녁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기에 적당히 대답을 던지고 방을 나섰다.






* 과거의 경험으로 저는 중편을 쓰던 단편을 쓰던 놔두면 안된다는 생각에 다 완성하고 올리기로 했습니다.


* 그러므로 중편, 하편을 연이어 올리겠습니다ㅎㅎ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cent posts